감상의 심리학

저자 오성주

북하우스

2025-03-05

인문학 > 교양 심리학

예술 > 대중문화의 이해 > 미학





예술에 대한 객관적 이해가 반드시 옳은 것은 아니고, 이것이 예술을 이해하는 유일한 길도 아니다. 왜냐하면 예술은 매우 주관적인 경험이며, 예술의 역사는 과학의 역사처럼 논리적인 단계를 거친 진보라기보다는 작가와 그를 둘러싼 환경이 우발적으로 만들어낸 창발 현상들의 나열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예술에 대한 객관적인 이해는 예술가가 아닌 감상자들이 예술을 이해하는 데 많은 통찰을 줄 수 있고, 예술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게 해준다고 믿어진다.



그림 감상에 대해서 살펴보기 전에 우리가 눈을 통해서 세상을 보는 과정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림 감상은 실세계를 볼 때 쓰는 눈을 빌려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실세계에서 보기의 목적은 대체로 눈에 맺힌 이미지가 무엇인지 알아보고 올바른 동작을 취하는 데 있다. 가령 길을 걷다가 아는 사람을 만나면 다가가 반갑게 인사하고, 모퉁이를 돌다가 만나는 자동차는 재빨리 피한다. 대상이 무엇이고 얼마나 멀리 있는지, 움직이고 있다면 얼마나 빠른지를 탐지하고, 그 대상이 혹시 위험한 것은 아닌지 어떤 성질을 가지고 있는지 등 기억을 되살려 예측해야 한다. 대상이 무엇인지 알아보는 데에는 형태, 색 크기, 깊이, 움직임 등 다양한 정보들이 동원되지만, 형태가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하며 다른 정보들을 부차적이다.



우리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눈으로 많은 학습을 한다. 대상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대상까지의 거리에 따라 눈에 상이 얼마나 크게 맺히는지에 대해서, 어떤 물체가 빠르게 움직이는지에 대해서, 조명에 따라 대상의 표면 밝기와 색이 어떻게 달라지는지에 대해서, 물체의 물리적 성질에 대해서, 어떤 얼굴이 기분 좋은 상태인지에 대해서 배운다. 그뿐만 아니라 주의를 활용하는 방식을 배운다.



미술의 역사는 프랑스와 스페인의 동굴 벽화를 근거로 적어도 기원전 3만 년 전부터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긴 시간 동안 미술은 발전을 거듭했다. 미술의 발전은 연필, 붓, 물감, 종이, 캔버스와 같은 재료의 발전, 원근법과 명암법 같은 그림 기법의 발전, 예술가들의 혁신적 사고, 미술에 대한 대중의 관심 증가, 예술과 종교·정치·사상 등의 상호 작용이 함께 만들어낸 결과이다.



실세계는 물리 법칙이 지배하는 세계이다. 예를 들어 모든 물체는 중력의 영향을 받아 땅에 붙어 있다. 또한 실세계는 시각 법칙의 지배를 받는다. 관찰자로부터 물체가 멀어질수록 눈에는 작게 맺히고, 앞에 있는 물체는 뒤에 있는 물체를 가린다. 그런데 그림 세계는 이런 물리 법칙과 시각 법칙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는 공간이다. 20세기 들어 화가들은 시각적 속성을 해체하기 시작했다. 물체들의 거리, 크기, 색, 형태, 방향, 위치 등을 자유롭게 해체했다. 이에 따라 그림들은 점점 알아보기 어렵게 변했다.



그림을 처음 마주했을 때 머릿속에서는 어떤 일들이 벌어질까? 아주 짧은 시간 동안 일어나는 첫인상은 어떤 내용일까? 심리학자들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연구 참여자들에게 그림을 아주 짧은 시간 동안 보여주고 소감을 물었다. 그림을 보여준 시간은 0.1초부터 수초까지 다양했다. 흥미롭게도 0.1초만 그림을 보고서도 사람들은 상당히 많은 특징을 본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한국의 옛 그림에서도 점묘법을 찾아볼 수 있다. 겸재 정선은 금강산을 그리면서 점을 찍어 숲의 농도를 달리했다. 그림에서 산 능선은 진한 점을 찍고 그 사이에서는 점진적으로 점을 줄여나갔다. 또한 왼쪽 작은 산은 훨씬 밝은 점들로 숲의 무성함을 표현하여 원근감을 높이고 있다. 점으로 숲의 농도와 깊이를 표현한 기법은 그림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데, 그의 실험 정신이 얼마나 투철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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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지향성 - 성공한 사람들이 지키는 12가지 원칙
존 R. 마일스 지음, 임지연 옮김 / 오픈도어북스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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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지향성

저자 존 R. 마일스

오픈도어북스

2025-02-14

자기계발 > 성공 > 성공학





- 성공을 이끄는 최고의 전략

- 명사들의 마인드셋을 넘어 성장의 원리까지 총망라한 책





우리는 살면서 스스로를 한계 짓곤 합니다.

더 나아갈 수 있는 가능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외부적 요인 등의 이유를 들며 망설이곤 하죠.

그렇다면 외부적 요인이 나 자신을 한계 짓는 원인인  것일까요?

혹시 나의 가능성을 나 스스로 가둬버린 것은 아닐까요?

오늘은 이러한 고정관념을 깨고 성장하는 삶을 살아가는 법을 알려주는 책 한 권을 소개할까 합니다.



마음속으로 가장 원대한 인생 목표 한두 가지를 떠올려 봅니다.

그런 다음 언젠가 현실로 이룰 수 있는 순간을 생각해보며 마음 한편에 자리잡고 있는 꿈이나 갈망, 지향성, 목표를 생각합니다.

다 생각해보셨나요?

그럼 아래 질문에 대한 답을 해보세요.



- 그 꿈의 실현을 가로막는 가장 큰 두려움은 무엇인가?

- 자신의 꿈을 추구하는 사람이 드문 이유는 무엇인가

- 우리는 왜 진정으로 열망하는 목표를 향한 노력을 주저하는가?

- 직업과 상관없이 많은 사람이 현실에 안주하려는 이유는 무엇인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목표를 지향하는 삶에 수반되는 끊임없는 노력을 행하기보단 현실에 빠르게 안주하곤 합니다.

안정된 삶의 루트를 걷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한다는 것이지요.

저 또한 이것이 당연하다 생각할 정도로 갇혀 있었습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기쁨의 반대가 불행이 아니었습니다.

기쁨의 반대는 지향성이 부재한 삶이며, 이는 만성적인 절망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결국 무의미함은 곧 허무주의와 연결되니, 즉 삶의 모든 영역에서 목적과 의미가 서서히 결여됨을 의미합니다.


만약 당신이 성공하고 싶다면, 목표 달성에만 초점을 맞추지 말고 보다 거대한 비전과 연결시켜야만 합니다.

단순한 성과가 아닌 삶 전체를 아우르는 성장의 과정 속에서 성공을 바라봐야 하죠.

우리도 성장 지향성이 이끄는 삶을 살 자격이 있습니다.

지향성이 리더의 관심 밖이 아닙니다.

오히려 리더는 자신의 일에 집요하게 매달립니다.

즉, 이러한 유형의 사람은 해결하려는 문제에 더더욱 신경을 씁니다.


책에서도 강조하듯이, 지향성을 거창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스티브 잡스, 오프라 윈프리와 같은 유명인이 되어야 할 필요도 없고 무엇보다 지향성의 참된 의미는 아니니깐요.

다만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내일의 성장을 추구하며 자유를 키워가는 사람이 되고 싶다면 성공의 로드맵을 활용해보면 됩니다.





"무관심은 성장의 적이다"


우리는 스크린에서 빛을 발하는 기업가, 스포츠 스타 등의 인물들을 찬양하며 성공을 꿈꿉니다.

하지만 그들과 우리는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저 다른 일을 할 용기를 발휘했을 뿐, 목표를 찾고 성장을 추구하며 각자의 비전을 현실로 이루었으니깐요.

그들도 우리와 같이 성장지향성으로 가득 찬 삶을 갈망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실패와 미지의 세계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고 또다른 성장의 여정에 발을 내딛기도 합니다.

즉, 일터가 아닌 일터 밖의 영역에서도 성장 지향성을 불어넣을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관점의 변화는 다른 삶을 설계하는 힘을 불어넣어 주는데, 이는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습니다.

인생의 모든 면에서 목표를 탐색하겠다는 생각만 자리 잡게 되면 목적의식과 의미 있는 영향력으로 가득한 삶을 계속해서 누릴 수 있는 것이지요.



- 다르게 행동하는 힘

- 생각을 실현하는 목적의식

- 미지를 헤치는 과감함

- 무리에서 벗어나라

- 행동을 만드는 동기

- '멘탈 게임'에서 승리하라



성공을 위한 목표 설정은 명확해야 하며 단순히 개인의 성취를 넘어 공동체와의 연결 속에서도 이루어져야 합니다.

목표를 세우고 실행하는 과정에서 실패는 필연적이지만 그 실패 속에서도 분명 배울 점은 존재합니다.





성공은 타인의 기준이 아닌 나만의 가치와 의미를 담아야 합니다.

사회적 기준에 휩쓸리지 않고 자신만의 방향을 정하는 것이 중요하죠.

이렇듯 성장지향적인 사고방식은 우리의 삶을 크게 변화시켜줍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지금의 나는 완성형이 아니라 성장하는 과정 속에 있다는 믿음입니다.

실패가 끝이 아닌 배움의 기회가 될 수 있고, 한계라고 느꼈던 순간이 오히려 도약의 발판이 될 수 있습니다.

성장지향성은 단순히 개인의 발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조직과 사회 전체에까지 긍정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성장하는 팀과 기업, 성장하는 인간관계는 결국 '더 나은 나' 나아가, '더 나은 우리'를 만들어 주죠.

즉, 성장지향적인 태도는 개인의 성공뿐 아니라 우리가 속한 공동체의 발전에도 필수 요소인 것입니다.


근래 새로운 환경에서의 시작을 위해 새로운 것을 배우는 중인데 마음이 혼돈의 카오스 그 자체입니다.

스트레스 지수가 극에 달하니 몸도 계속 아팠는데 역시 복잡한 생각을 정리해 주는 데에는 책만 한 게 없는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제 삶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나는 어떤 태도로 살아가고 있을까?

혹시 정체되어 있는 건 아닐까?

더 나은 내가 되기 위해, 그리고 더 넓은 세상을 만나기 위해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

사실 책에는 해답이 없습니다.

다만 스스로 답을 찾아 나아갈 수 있도록 용기를 주었지요.

성장은 끝이 없는 길입니다. 그 길을 묵묵하게 걷는 것이 나다운 삶이기도 합니다.


책에서는 다양한 사례와 연구를 통해 성공과 성장을 위한 실천적 태도를 제시하며, 단순한 목표 달성이 아니라 장기적인 성장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지금보다 더 나아지고 싶은 사람들에게, 현재의 나에 머물러 있지 않고 더 성장하고 싶은 사람에게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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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령의 말

저자 이어령

세계사

2025-02-26

에세이 > 한국에세이

자기계발 > 성공

인문학 > 교양 인문학





사람들은 어린애들처럼 기쁜 일이 생기면 안전한 곳으로 도망치려고들 한다. 재물이나 사랑을 얻은 자리에서는 빨리 도망쳐야 한다고 믿고 있다. 훔친 물건은 그 현장에서 멀리 떠나야만 완전한 자기 소유가 된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대체로 뜻밖의 기쁜 일이 닥쳐왔을 때는 그것을 훔친 물건이나 혹은 다시 빼앗기고 말 물건처럼 여긴다.

우리는 그만큼 기쁨에 익숙해 있지 않다. 그러나 슬픔은 대개가 다 자기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당연히 자기가 가지고 있어야 할 것으로 믿는다.



어느 곳에 돈이 떨어져 있다면 길이 멀어도 주우러 가면서, 제 발밑에 있는 일거리는 발길로 차버리고 지나치는 사람이 있다. 눈을 뜨라! 행복의 열쇠는 어디에나 떨어져 있다.

…… '행복'이란 말은 '모험'의 뜻을 상실했고 '동경'의 뜻을 상실했고 '영원'의 뜻을 상실했다. 사람들은 가까운 곳의 행복만 찾아다니다가 행복이란 말까지 상실해버린 것 같다.



아담을 파멸시킨 이브의 손, 삼손의 머리를 깎은 델릴라의 칼, 유왕을 망친 '포사'의 웃음, 최고의 사랑은 최악의 파멸이다.



감사하는 마음, 그것은 자기 아닌 다른 사람에게 보내는 감정이 아니라 실은 자기 자신의 평화를 위해서이다. 감사하는 행위, 그것은 벽에다 던지는 공처럼 언제나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온다.



만용이 비겁보다 못한 것은 타인에게 보이기 위한 쇼이기 때문이다. 비겁한 자 가운데는 자기 자신에게 성실한 사람이 섞여 있지만, 만용을 부리는 자는 예외 없이 자신에게 불성실한 자이다.



'한'은 '뉘우칠 한'이라고도 있듯이 오히려 자기 자신에게 향한 마음이며, 자기 내부에 쌓여가는 정감입니다.



늙어갈수록 감수성이 무디어진다. 감수성은 젊음만이 지닐 수 있는 월계관이다. 그래서 감수성에는 미숙한 떫은맛이 있다.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나 다 손바닥에 찍힌 못 자국을 가지고 있다. 옆구리에 창 자국을 가지고 있다. 비록 예수의 것보다 작고 희미할망정, 누군가를 절실히 사랑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그 고통의 상흔이 있게 마련이다. 그것이 없으면 사랑이 아니다. 사랑을 선택한 사람은 누구나 마구간에 태어나서 십자가에서 죽는 것 같은 괴로운 삶을 선택한 사람인 것이다. 만약 당신이 편안한 삶, 살쪄가는 삶, 부유한 삶을 원한다면 누구도 사랑해서는 안 될 것이다.



생의 추위를 느껴보지 못한 사람은 사랑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은 평생 동안 한 번도 앓아본 적 없는 사람일 것이다.



너희들을 키우기 위해서 아빠는 외치고 싶은 것이 있어도 제대로 외치지 못했다. 욕망이 있어 뛰고 싶어도 뛰지를 못했다.

너희들이 잠들어 있는 얼굴을 보면 아들이여, 다만 나는 너희들이 바람을 막아주는 병풍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 탓이다.

울타리를 지키다가, 부엌에서 끓는 찌개 냄비를 지키다가, 해마다 자라나는 너희들 바지를 장만하려다가 넓은 그 세계와 꿈도 이상도 진실도 조금씩 잃어버리고 말았다.

책상에 앉아 책장만을 넘기며 그 긴 세월을 넘겨왔을 뿐이다.

아들이여, 아버지의 검은 머리에, 하나둘씩 새치가 생겨나는 것을 보았느냐. 잠시 분노하다가 비굴하게 웃어버리는 아버지의 그 입술을 본 적이 있느냐. 주먹을 쥐다가도 바둑알을 잡듯 그렇게 힘없이 펴지는 손가락을 보았느냐.



나의 서재에는 수천수만 권의 책이 꽂혀 있다. 그러나 언제나 나에게 있어 진짜 책은 딱 한 권이다. 이 한 권의 책, 원형의 책, 영원히 다 읽지 못하는 책, 그것이 나의 어머니다.

그것은 비유로서의 책이 아니다. 실제로 활자가 찍히고 손에 들어 펴볼 수도 있고 읽고 나면 책꽂이에 꽂아둘 수도 있는 그런 책이다.

빈약할망정 내가 매일 퍼내 쓸 수 있는 상상력의 우물을 가지고 있다면, 그리고 내가 자음과 모음을 갈라내 그 무게와 빛을 식별할 줄 아는 언어의 저울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오로지 어머니의 목소리로서의 책에서 비롯된 것이다.

어머니는 내 환상의 도서관이었으며, 최초의 시요, 드라마였으며, 끝나지 않는 길고 긴 이야기책이었다.



평생을 두고 빌고 빌어도 다 이루지 못할 소망, 비록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라 해도 그런 마음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은 복된 사람이다.



'스스로' 속에 진짜 '나'가 있다는 것은 아무도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사람은 스스로 숨을 쉰다. 잠을 잘 때에도 눈과 귀는 감기고 닫히지만 코만은 멈추지 않고 숨을 쉰다. 늘 깨어 있는 것이 코이다. 숨통을 막으면 자기는 없어진다.



눈물을 흘리는 동안에만 인간은 순수할 수 있다. 그런데도 그 순수성에 대해서 사람들은 모두 쑥스럽게 여기고 있다.



이름을 부른다는 것, 그것은 잠든 것을 일깨운다는 것이며 멀리 있는 것을 가까이에 다가서도록 하는 것이며 침묵하는 것을 말하게 하는 것입니다.



순수한 모험 저인이 하나의 신개지를 열면 다음엔 군대의 정복자들이 그 새로운 땅을 길들이고 마지막엔 상인들이 황금을 긁어 온다. 서양은 이런 공식으로 세계 앞에 군림해왔다. 신대륙 발견이란 어디까지나 서양 사람 중심으로 생각한 말이지 미 대륙에서 살고 있던 아메리칸인디언들에겐 '발견'이 아니라 '침입'이었다. 결코 물속에 파묻혀 있던 대륙을 끌어내온 것은 아니었으니 말이다.



왜 아침은 이렇게도 아름다운가. 아직 그 빛 속에 어둠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저녁노을은 왜 이렇게도 아름다운가. 다가오는 어둠 속에 아직 빛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빛과 어둠이 엇비슷하게 존재하는 아름다운 세상. 그것이 한국인이 오랫동안 참고 기다렸던 그 공간이다. 디지털과 아날로그가 만나는 기분 좋은 시간, 한국인의 시간이다.



물과 불은 분명히 상극한다. 물은 차갑고 불은 뜨겁다. 물은 하강하고 불은 거꾸로 상승한다.

그런데 물의 영혼은 반대로 김이 되어 하늘로 승천하고 불의 영혼은 재가 되어 거꾸로 땅속에 묻힌다. 그런데 이렇게 대립하고 갈등하던 물불이 조왕님이 계신 부엌에 들어오면 놀라운 조화의 힘으로 밥을 짓고 국과 찌개를 끓인다.

프로메테우스에 대한 일방적인 믿음은 지구온난화라는 재앙을 일으켰지만, 불과 물이 같이 있으면 이와는 다른 현상이 벌어진다.

상극은 상생으로 변해 날것도 아니요, 탄 것도 아닌 맛있는 문명의 밥상이 차려진다.



온 국민이 다 같이 정보를 공유하고 사는 것. 그것이 바로 민주주의다. 군주제로부터 시작해서 나치, 공산주의 등 망해버린 나라의 공통 특징은 국민의 눈을 멀게 한 데 있다. 개방의 시대는 시장의 개방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개방은 개안으로 모든 사람이 눈을 뜨고 밝은 세상을 보는 데 있다.



구르지 않고 손에 잡기도 편한 것이라면 원과 사각형의 중간, 여섯 모난 연필이 가장 좋습니다. 그래서 옛날이나 지금이나 여섯 모로 된 연필이 제일 많습니다. 둥글게 살면 원만하다고 하지만 자기주장이 없고 자기주장만 하면 모가 나서 세상을 살아가기 힘듭니다. 네모난 연필도 아닙니다. 둥근 연필도 아닙니다. 여섯 모난 연필로 나의 인생을 써가십시오.



여러분들은 물이냐 불이냐가 아니라, 물과 불 사이에 둔 솥처럼 상극하는 두 가치를 하나의 인터페이스로서 아름답게 갈등과 대립을 막아주는, 조화하는, 솥과 같은 존재. 인터페이스로서의 ‘나’가 되어야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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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예술로 여행하기

저자 함혜리

파람북

2025-02-14

여행 > 프랑스여행 > 프랑스여행 가이드북

여행 > 테마여행 > 미술관/박물관/예술기행





예술의 나라, 하면 떠오르는 나라가 프랑스다. 프랑스의 수도 파리는 그 핵심이다. 코로나가 잠잠해지고 여행길이 자유로워지면서 오랜만에 찾은 파리에서 그걸 제대로 실감했다. 오랜 세월 공들여 가꾼 도시 파리는 아름답다. 잘 정비된 도로변으로 아름다운 건물들이 줄지어 있고, 그 모든 길이 만나고 헤어지며 만들어지는 지점에는 광장이나 분수, 조각 같은 역사적 기념물이 있다. 겉만 조형적으로 아름답다고 하면 파리가 아니다. 파리에 있는 수많은 미술관이 소장한 다양한 미술품은 인류가 지금까지 이뤄놓은 문화와 정신의 빛나는 결정체들이다. 세계의 문화수도라는 자부심 또한 무리가 아니다.



진귀한 보석을 품은 광산과도 같은 미술관은 아름다움이 무엇인지를 배우기에 가장 좋은 장소다. 미술관과 박물관 등 문화자산이 빼곡한 파리는 아름다움을 찾는 사람들이 최고로 치는 도시다. 가볼 곳이 너무 많아서 어디부터 가야 할지 모르겠다면 가장 핵심부터 공략하는 것이 방법이다. 파리에서 가장 중요한 미술관과 박물관 세 곳을 꼽아보자면 루브르 박물관, 오르세 미술관 그리고 퐁피두 센터다.



세계 최고의 박물관인 만큼 소장 작품과 해외 유수의 박물관과 연계한 기획전도 볼 만하다. 지난 2022년 가을에 갔을 때 ‘세상의 사물들’이라는 주제로 정물화 특별전을 했다. 고대 메소포타미아에서 현대까지 물건을 표현하는 인간의 심리와 기법을 다 모아놓았던 전시였다. 세상의 모든 물건을 한자리에 모아놓은 진풍경이었다.

루브르 박물관은 브랜드화에 앞장서 프랑스 국내와 해외로 확장하고 있다.



오르세 미술관은 원래 철도역이었다. 국제박람회에 맞춰 철도역의 기능은 물론 박람회 참관인들이 묵을 호텔 테르미누스까지 갖춘 도심형 역으로 지어졌다. 건축가 빅토르 랄루는 거대한 기관차 홀의 쇠 박공을 비롯해 모든 구조와 장식이 주변의 우아한 건물들과 조화를 이루도록 세심하게 설계했다. 2년 만에 세워진 건물의 홀은 유리로 덮이고 측창은 아치 형태를 이뤘으며 여행자들의 신메르퀴르(머큐리, 그리스 신화의 헤르메스)가 기관차 홀의 쇠 박공 꼭대기를 장식했다. 하지만 자동차가 보급되면서 철도역은 곧 운영난을 맞았고, 장거리 노선은 1939년 중단됐다. 1945년에는 포로로 잡혔다가 귀향하는 군인들을 위한 임시 숙소로 쓰이기도 했으며, 1962년에는 오슨 웰스의 영화 <심판>의 배경이 되기도 했으나 결국은 철거를 고려하게 된다.



오르세 미술관에는 서구의 근대가 시작된 19세기 후반부터 낭만주의, 사실주의를 거쳐 인상주의와 20세기 초 후기 인상주의, 즉 큐비즘 직전까지 회화와 조각 작품이 소장되어 있다.



좀 더 학구적인 산책을 원한다면 프랑스 국립도서관(BNF, Biblio-theque nationale de France)을 방문해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문화의 나라답게 도서관도 정말 멋지다. 파리에는 현대식 건물인 미테랑 도서관과 우아하고 고풍스러운 리슐리외 도서관 등 2곳의 국립도서관이 있다. 미테랑 도서관은 미테랑 대통령의 대업인 ‘그랑 프로제(Grands Projets)’ 중 하나로 건립되어 1995년 개관했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 인쇄본 ‘직지심체요절’이 보관되어 있는 곳이다. 국제적인 설계 공모에서 우승한 도미니크 페로(Dominique Perrault)의 설계로 지어진 거대하고, 미니멀한 건축물은 현대의 프랑스를 대표하는 건축물로 꼽힌다.



루이뷔통 재단 미술관은 계획이 발표됐을 당시 많은 논란이 있었다. ‘명품기업에 파리의 귀중한 공간을 내준다.’, ‘영혼을 팔았다.’ 등 반론도 있었지만 이제 그런 비난을 하는 이는 아무도 없다. 개관 이후 상설 컬렉션 전과 함께 훌륭한 기획전을 선보이면서 트렌드를 선도하는

파리의 문화명소, 나아가 건축이 아름다운 세계적 미술관으로 자리잡았기 때문이다. 현대 예술의 창조를 촉진하고 지지하기 위한 열망으로 만들어진 이 미술관이 성공하면서 ‘문화기업’이라는 LVMH의 이미지는 더욱 강화됐다. 이런 멋진 미술관을 파리에 세움으로써 루이뷔통이 얻게 된 무형의 가치는 수치로는 환산할 수 없을 것이다.



가론 강변을 끼고 우아하고 고전적인 파사드가 길게 늘어서 있는 길이 매력적이다. 건물의 1층은 대부분 카페와 레스토랑이어서 테라스에서 차 마시고, 식사하는 사람들을 보며 길을 따라 걷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진다. 보르도의 상징과도 같은 피에르 다리 역시 우아하고 아름답다. 특히 해 질 녘 노을빛이 가로등에 비칠 때의 다리는 꿈속에서 본 듯한 환상적인 풍경을 만들어낸다. 와인 향을 품은 부드러운 바람이 코끝을 스치고 바로크 양식의 아름다운 도시에 가스등 불이 켜질 때의 순간을 잊을 수 없다.



미술관을 돌아보면서 강하게 다가온 것은 위대한 모성의 힘이었다. 툴루즈-로트레크의 어머니 아델 백작 부인은 재산이라면 남부러울 것이 없었지만 불구의 몸이 된 큰아들에게 늘 마음의 짐을 안고 있었을 것이다. 로트레크가 그린 아델 부인의 초상화를 보면 어딘가 어두운 그늘이 있고, 조심스러운 표정이다.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사람이 파리의 사창가에서 여자들과 어울리며 그림을 그리는 것을 로트레크의 아버지는 달갑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어머니는 걱정하면서도 늘 모성애로 감싸며 아들을 응원했다.



모더니즘 건축의 거장 르코르뷔지에의 작품을 놓고 우열을 가리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각 작품이 나름의 스토리가 있고 건축사에서 차지하는 의미가 그만큼 특별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라투레트 수도원’을 최고로 꼽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거대한 콘크리트 덩어리와 빛으로 빚어진 영성의 공간, 라투레트 수도원은 자연광을 건축의 기본으로 삼고 빛을 능숙하게 사용했던 르코르뷔지에의 예술혼과 재능이 만들어낸 걸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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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고래의 흼에 대하여

저자 홍한별

위고

2025-0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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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에 다닐 때 미술 선생님이 하얀 석고상을 그리라고 시킨 일이 있었다. 아니, 그 선생님은 말 같은 것을 하는 분이 아니어서 그저 무표정한 얼굴로 교실에 석고상을 들고 와 교탁 위에 올려놓았다. 미술학원에 다니는 아이들이 한숨을 토하듯 '아그리파'라는 이름을 중얼거렸다. 그게 갓 태어난 것처럼 순결하고 눈부신 하얀 머리의 이름이었다. 선생님이 말없이 내어준 과제는 우리 눈에 보이는 새하얀 형체를 종이 위에 그림으로 번역하는 일이었다. 그날의 준비물인 스케치북과 4B 연필만을 가지고. 흰 도화지와 시커먼 연필을 가지고 어떻게 하얀 것을 그리라는 걸까. 막막했지만 흰 종이에 더듬더듬 선을 그어 형상을 흉내 내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손을 댈수록 석고상 그림은 점점 더 어두워졌다. 흰색을 그린다는 불능한 과제.



흰 고래는 모든 것을 표상하지만, 동시에 아무것도 나타내지 않는 공허다. 멜빌은 이 흰 고래를 그리려고, 연필 선을 더해 흰 고래를 그리는 대신 흰 고래를 제외한 모든 것을 그렸다. 그렇게 글자들을 새카맣게 포개어 그리고 남은 중앙의 빈 공간, 흰 여백이 바로 흰 고래다.



나는 번역을 명료하게 정의하거나 논리적으로 설명할 자신은 없으니, 비유를 통해 비스듬하게 다가가려 한다. 내가 이 책에서 하려는 이야기는 흰 고래를 정의하려는 이슈메일의 시도 같은 것이 될지 모른다. 이슈메일이 그랬던 것처럼, 번역의 사례를 들고, 번역을 분석하고, 번역을 해부하고, 번역을 설명하려다가 결국 실패하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 여기 쓴 글들은 사람들이 저마다 번역을 어떻게 (같은 말로) 다르게 말하고 있느냐는 이야기이자, 번역이라는 실체 없는 행위를 말로 설명하려는 기도이자, 불가능한 번역을 정의하려는 불가능한 몸짓이자, 흰 고래를 그리려는 시도다.



번역이 배신인 까닭은, 혼란스러운 언어를, 부유하는 기의를 일시적으로나마 고정하려고 시도했기 때문이다. 번역은 끝없이 변화하는 언어를 한순간이라도 고정하려고 애쓰는 덧없지만 불가피한 시도다. 무수한 가능성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고 다른 것들은 - 대부분 - 저버리는 일이다. 누구나 알듯이 어떤 번역도 원문을 있는 그대로 거울에 비추듯 재현하지 못한다. 역설적이지만, 나보코프가 쌓아 올린 무한한 주석의 탑은 번역이 놓친 것이 얼마나 많은지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기념비다(나보코프가 열거한 것만 들자면 우아함, 좋은 소리, 명료함, 취향, 현대적 용례, 문법이 희생되었다. 그리고 주석의 탑이 뻗으며 여백도 손실되었다. 상상의 여지도, 모호함의 가능성도).



나도 번역이라는 일이 탐정이 하는 일과 비슷하다고 생각하기를 좋아한다. 탐정소설 속 탐정의 목표는 범죄가 왜, 누구에 의해, 어떻게 저질러졌는지를 설명하는 이야기를 구성하는 일이다. 탐정이 모든 정황과 맥락을 고려해 가장 그럴듯한 한 가지 서사를 완성하듯이, 번역가도 단어들의 단서를 모아 매끈한 하나의 문장, 빈틈없는 하나의 줄거리를 만든다. 번역가는 흩어진 의미의 조각들을 이렇게 맞추어보고 저렇게 맞추어보며 도무지 옮겨지지 않는 것을 옮기려고 애쓴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스르륵 퍼즐이 풀린다. 비어 있는 한 자리에 딱 맞는 단서/단어를 끼워 맞추자 이야기가 완결된다. 이렇게 문장을 완성할 때의 희열. 결국 번역을 하는 이유는 번역이 이런 일이기 때문이다. 드물게 찾아오는 완성의 감각.



실제로 번역을 할 때는 ‘단어’를 번역(직역)하거나 ‘단어의 의미’를 번역(의역)하기만 하는 게 아니다. 제3의 무언가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What do you think?’ 같은 간단한 문장이 수십 가지로 번역되는 것이다. 행간을, 침묵을, 여백을 번역한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행간에는 참 많은 것이 있다. 맥락, 어조, 정서, 분위기, 성격, 암시, 어감, 문화적 인유, 의도.



언어의 본질은 변화다. 언어는 고정되지 않는다. 아무리 샤일록이 “맹세, 맹세, 나는 하늘에 맹세했소. 내 영혼이 위증을 해야 하오?”라며 자신의 계약을 신에게 한 맹세에 동일시하며 신성시하려고 하더라도 계약이 언어로 이루어져 있는 한, 해석의 차이는 필연이다. 그 차이를 통합하고 이해하려면 자비가 필요하다.

언어의 본질이 이러할진대, 번역에서 자비 없는 축어역을 고집한다면, 어떤 불충도 허용할 수 없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의미와 행간의 침묵을 무시한 채 단어만 번역하려 한다면 언어의 몸과 영혼이 분리되고 파괴되는 치명적 결과를 낳지 않으리라고 누가 보장하겠는가?



어쩌면 번역은 변신?몸을 바꾸는 일이 되어야 하는지도 모른다. “처음부터 그런 모습인 양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하고 늘어서는” 번역, 몸을 버리고 새로운 몸을 입는 번역이 되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해서 걱정이다. ‘나’는 말보다 내가 먼저 변신할까 봐 두렵다고 말한다. 이 말은 무슨 의미일까? 마치 내가 저자인 것처럼, 내가 저자라고 착각하고 마치 내 글을 쓰듯 글을 쓰게 될까 봐 두렵다는 걸까? 번역 과정에서 기표와 기의 사이의 끈이 끊어지고, 단어가, 이야기가 변신해서 완전히 다른 모습이 되어버릴까 봐, 저자를 배신하는 배신자가 될까 봐, 번역으로 원문을 손상시킬까 봐? 뻔뻔스럽게 살을 베어내고 글을 다듬으며 문학성을 지워버릴까 봐?



단어를 옮길 수도 의미를 옮길 수도 없는 딜레마에 빠진 번역가에게는, 아예 단어도 의미도 아닌 감각으로 이루어진 시를 번역하는 경험, 읽을 수 없는 시를 읽을 수 없는 시로 번역하며 언어를 창조할 자유가 필요한지도 모른다. 그러고 나서 아르토처럼 번역본이 원본보다 더 원본에 가까운 것이라고 선언하는 거다. 번역은 순수 언어에 더 가까워진 것이므로 사실 그 말이 맞다.



나는 잘 읽히는 번역문을 쓰고 싶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한국어 독자가 자연스러운 논리로 글을 읽게 하려고 어쩌면 나에게 허락된 것보다 더 많이 개입할 때가 있다. 마치 편집자가 된 것처럼 원문에 가위를 댈 때도 있다(있는 것을 잘라내거나 없는 것을 집어넣는다는 말은 아니다. 문장을 합하거나 나누거나 문장구조를 뒤틀거나 긍정과 부정을 뒤집을 때가 있다). 그런데 번역 원고를 다듬고 고치다가 피츠제럴드처럼 진부함에 가까워질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면 가슴이 철렁해진다.



번역이 아무리 자연스럽고 편안한 한국어를 추구한다고 할지라도 번역문에는 번역의 흔적이 남을 수밖에 없다. 때로는 그 흔적이 번역문의 미덕이 된다. 타자의 언어와 나의 언어가 포개어지고 간섭이 일어날 때 아롱거리는 무늬가 언어에 아름다운 흔적으로 남는다. 나는 한국어로 글을 쓰는 사람을 흉내 내려 하는데 번역가를 흉내 내어 글을 쓰는 사람도 있고, 이런 교환과 충돌을 통해 언어의 가능성이 최대로 이끌어내어지기도 한다. 내가 쓰는 언어에도 지금까지 내가 읽고 번역한 무수한 글들의 기억이 사라지지 않는 흔적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최초의 여성 번역이라는 문구와 함께 에밀리 윌슨의 책이 출간되었을 때, 한편에는 의심의 눈으로 보는 이들이 있었다. (요즘 세상에) 여자가 번역했다는 게 뭐 대단한 일인가? 이미 수십 편의 번역이 있는데 왜 또 다른 번역이 필요한가? 여자의 번역이라서 의미가 있다는 말은 곧 번역가가 투명해야 한다는 의무를 저버리고 원본에 함부로 개입해 훼손했다는 뜻이 아닌가? 요즘 말로 하면 호메로스에 ‘페미 묻힌’ 것이 아닌가? 그렇지만 위의 사례를 보아도 그렇고, 윌슨이 옮긴이의 글에서도 밝혔듯이, 윌슨은 원문 충실성을 저버리지 않으려고 애쓰고 오히려 현대의 편견이나 관념이 글에 옮겨지는 것을 경계했다. 오뒷세우스에게 장려하고 과장된 수사를 붙이고 페넬로페의 손에 필터를 먹이고 여자 노예들에게 ‘창녀’라는 오명을 덧씌운 것은 남자 번역가들이다.



에밀리 윌슨의 『오뒷세이아』 번역은 원본의 틈새에 파고들어 은폐된 모순을 드러내는 것만으로 권위 있는 텍스트에 미세한 균열을 낼 수 있음을 보여준다. 우리가 근원적인 서사로 생각한 것에도, 호메로스의 위대한 작품에도 균열이 있고 여러 목소리가 섞여 있으며 순수한 하나의 목소리란 신화에 불과함을 여성의 번역이 드러낸다. 반들반들 다듬어진 표면에 감추어져 보이지 않던 균열, 삶의 고통, 노예들의 비명, 우리가 보고 싶지 않았기에 눈을 돌렸던 것들이, 그럴듯하게 구성된 신화를 치웠을 때 비로소 보인다. 번역이 원문의 틈새에 깃들어 있던 목소리를 끌어낸다.



바벨탑 때문에 같은 것을 말하는 수만 가지 다른 방식이 생겼다. 우리는 그전으로 거슬러 가서 모두 똑같은 방식으로 말하게 되고 싶은가. 서로 다른 말들의 부딪힘과 어울림, 언어를 가지고 노는 다양한 방법, 날마다 우리가 느끼고 겪는 언어의 신비한 변화, 언어의 무한한 가능성을 버리고 싶은가. 살아 있는 풍부하고 섬세한 언어 없이 문화가 발전할 수 있을까. 흐릿하고 개성 없는 공용어로는 접근할 수 없는 섬밀하고 정교한 언어의 세계가 있다. 단테가 사람들이 실제로 쓰는 속어가 아니라 공용어이지만 죽은 언어인 라틴어로 글을 썼다면 『신곡』은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다. 번역이든 창작이든 우리가 쓰는 글은 지금까지 그랬던 것과 마찬가지로 더 평범해지는 쪽이 아니라 더 탁월해지는 쪽으로 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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