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 현수막의 관건은 호소력 있는 압축적 문구일 것이다. 이번 지방선거에서 내가 사는 동네에 걸렸던 것들을 보자. 지면이 제한된 현수막에 후보자 이름과 얼굴이, 아래와 같은 글귀와 함께 달랑 걸려있다고 생각해보라. “따뜻한 정치”, “○○동(洞)의 며느리”(무슨 뜻인지 파악 안 됨), “○○대학교 정책대학원 정치학 석사!”(희한한 후보 소개), “세금 도둑 잡는 홍길동이 되겠습니다”(단체장이 비리로 공석인 우리 동네에서 호소력이 있었다). 하지만 내게 가장 인상적인 문구는 “대한민국을 바꿀 서울시장”이었다.
서두에 분명히 해두고 싶은 것이 있다. 그 현수막을 내걸었던 ‘진보’ 후보가 이번 선거에서 3.6%를 득표했고 민주당과 한나라당의 차이가 0.6%였다는 상황은 적어도 이글에서는 나의 관심사가 아니다. ‘진보’의 득표율이 결과적으로 한나라당 당선에 기여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며, 설령 사실이라 해도 그 책임(?)을 ‘진보’ 후보가 져야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진보와 보수, 여야의 구분보다는 누구의 관점에서 무엇을 기준으로 그것을 나눌 것인가가, 더 중요한 정치적 문제라고 본다. 한나라-민주-‘진보’정당, 이들 간의 차이가 오십 보 백보인가, 오십 보 만보인가는 결정되어 있지 않다(이는 다소 부연을 요구하며 글의 논지에서 벗어나므로 생략한다).

함께 길 가던 친구에게 저 구호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그녀는 그 후보 지지자이다. 나도 (사안에 따라)그렇다. “좋잖니? 어차피 안 될 텐데, 인물은 대통령 감이라고 선전이라도 해야지”. 그녀의 말은 대통령(집권)이 목표인 정치 세력의 지도자에게 서울시장 ‘후보’는 중요한 지위와 경력이라는 의미일 것이고, 이는 거의 모든 한국 사람들의 생각일지 모른다. 따라서 이 글의 목적은 ‘진보’비판이 아니다. 문제는, 이 문구가 전제하는 사고방식, 즉, 서울은 작은 대한민국 혹은 사실상의 대한민국이기 때문에 대통령은 서울시장이나 경기지사 출신인 수도권에서 나와야 한다는(나올 거라는) 인식이다. “대한민국을 바꿀 서울시장”은 미래의 대통령이라는 거다. 서울 외 지방은 대한민국의 미래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대한민국을 바꿀 충청북도 도지사”, “대한민국을 바꿀 영월군수”라는 말은 발화되기 어렵다.

1인 1표의 민주주의 원리가 우중(愚衆)정치라고 비판받지만, 사실은 그 반대가 더 문제다. 서울시민, 그 중에서도 어떤 구민들은 자신의 한 표가 그냥 한 표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이들은 일단 투표율에서 다른 계층보다 산술적으로 한 표 이상을 행사하며, 언론, 동산, 부동산, 인맥, 학벌, 연대감 등의 자본을 통해 이미 선거 이전에 표를 선점, 누적한 사람들이다. 선거가 권력 분배 방식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은 상식이며, 누군가 나서서 절차적 민주주의의 허상을 설파하지 않아도 많은 사람들이 선거는 ‘사탕’이라고 생각한다(그래서 선거 때 가장 많이 등장하는 말이 ‘차선’, ‘차악’이 아니던가).

“대한민국을 바꿀 서울시장”은 특별시민에게 보내는 ‘진보’의 격려다. 아쉽지만 이것이 우리 사회 일부 진보진영의 수준이다. 이 말은 서울시민들에게 “당신들이 이 나라의 실질적 주인이며 대통령을 만들어내는 사람들”임을 상기시킨다. 그렇지 않아도 서울사람들은 과잉 재현, 과잉 대표, 과잉 주체화되어, 무의식적으로든 노골적으로든 다른 지역 사람들에 비해 ‘부풀려진 자아’를 갖고 있는데, 이 구호로만 보자면 ‘진보’ 후보는 서울시민들의 특권의식을 고무하고 있다. 뿐 만 아니라 지방 사람의 표는 도지사나 군수를 선출하는데 ‘그치지만’, 서울 사람의 한 표는 차기 대통령을 뽑는 것과 같다는 역사적 사명감(?)마저 일깨우고 있다.

서울은 하나의 지방이 아니라 ‘중앙’, ‘본부’, ‘대표’로 간주된다. 현재 한국사회에서 ‘서울’이라는 기호는 깊고 둔중하게 썩은 넝쿨, 가장 해체하기 어려운 권력의 경계(border)이다. 서울과 ‘비서울’의 위계는 너무나 체화, 정상화 되어있어 학력, 계층 등 다른 사회적 격차의 모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도의 탈식민주의 학자 디페쉬 차크라바티는 <유럽을 지방화하기(Provincializing Europe)>라는 유명한 책을 썼다. 유럽은 다른 대륙과 마찬가지로 지구상의 특수한 하나의 지역일 뿐이다. 유럽인을 인류로, 유럽의 역사를 세계사로 만든 것은 유럽인들의 총과 우월감 그리고 그들에게 맞서 싸웠던 이들이 흘린 피의 산물이지, 필연이 아니라는 것이다. 서울이 대한민국의 중심, 규범, 시작, 매개라는 생각 역시 유럽이 세계화되는 과정과 비슷한 경로를 거친 것이다. ‘진보’까지 나서서 서울의 대한민국화에 앞장 설 필요는 없지 않을까. 물론, 그보다 먼저 진보의 의미가 재정의되어야겠지만
 

http://hook.hani.co.kr/blog/archives/5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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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주미힌 2010-06-15 16: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 멋진 지적..

머큐리 2010-06-15 17:34   좋아요 0 | URL
흠...나 이분 좋아해요...^^

라주미힌 2010-06-15 18:45   좋아요 0 | URL
머큐리님은 많은 여성분들을 좋아하시는군요~!! ㅋㅋㅋ

무해한모리군 2010-06-15 19:04   좋아요 0 | URL
나도 이분 좋아해요 ^^

무해한모리군 2010-06-15 19:04   좋아요 0 | URL
그리고 저도 많은 여성분들을 좋아해요.

머큐리 2010-06-17 15:51   좋아요 0 | URL
나는 '라'님도 좋아해요~~ 메롱

비연 2010-06-15 19: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진 분이에요^^
 

졸저 <88만 원 세대> 이후, 몇 가지 변형된 단어들을 접하게 되었다. 66만 원 세대와 44만 원 세대는 각각 알바 10대 알바와 장애인 알바에 대한 이야기들이었다. <조선일보>에서 주도한 'G세대'라는 말이 있지만, 나마저도 당혹스럽게 20대들에게서 스스로 퍼져나간 개념은 '3무 세대'였다. 내가 처음 들었던 원 버전은, 돈이 없고, 집이 없고, 결혼이 없다, 그래서 3무인데, 그 후에 수많은 해석들이 생겨났다.

그런 변종 중에서 나보다는 훨씬 더 거시적이고 포괄적인 해석의 버전은 생태지평연구소라는 시민단체의 어느 20대 활동가의 입에서 나왔다. '88조 원 세대'라는 용어였는데, 22조 원으로 정부가 제시한 4대강 사업의 예산은, 대규모 토목사업이 최종적으로는 원래 예산보다 4~5배 정도의 돈이 지불된다는 측면에서, 88조 원의 돈이 들 것이고, 기성 세대의 부동산 경기를 지탱하기 위한 이 사업이 결국 다음 세대에게 88조 원의 빚으로 남게 될 것이라는 의미에서 '88조 원'이라는 단어가 제시되었다. 정수론적인 우연이지만, 2008년에 우리나라 국민들이 생명보험회사에 낸 돈이 또한 88조 원이었다. 원칙대로라면 생명보험은 다른 보험과는 달리, 자신이 살아서는 만져볼 수 없는, 즉 자신이 죽어야만 누군가가 만져볼 수 있는 돈이다. 보편적 복지가 부족한 한국의 상황에서 지금 10대와 20대, 즉 다음 세대의 부모들이 자신이 죽고 나면 자식들에게 목돈이라도 한 푼 쥐어주기 위해서 연간 88조 원이라는 돈을 생명보험사에 꼬박꼬박 납입하고 있는 셈이다.

한국의 부모들 혹은 배우자들, 진짜 눈물나는 삶을 살고 있는 셈이다. 만약 자신이 죽고 나서 자신의 배우자나 자식들이 어느 정도의 삶을 영위할 수 있을 자신이 있다면 현생의 삶을 누리기 위해서 '지금' 사용할 수도 있는 돈을, 순전히 자신이 죽고 나서 혼자 남게 될 식구들을 위해서 한국의 가장들은 88조 원이라는 돈을 생명보험으로 불입하고 있는 셈이다. 눈물 나지 않는가? 이명박 정부에서 목숨을 걸고 수년간 진행하겠다고 하는 4대강 사업의 4배나 되는 돈을, 지금 우리들의 부모들이 당신들은 한 번도 만져보지 못할 돈을 생명보험이라는 유가증권 한 장을 위해서 매년 납입하는 셈이다.

경제학적으로 따진다면, 이것은 한국에서 살아가는 것에 대해서 느끼는 국민들의 '불안 비용'에 대한 최소한의 기준이 될 것이다. 사교육과 주거권에 들어가는 비용에 이어, 생명보험 납입금 총액을 보면서, 드디어 나는 왜 한국의 30대와 40대 남성의 삶이, 국민소득 2만불이라는 수치적 실체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도록 이토록 비루하고 너저분한 것인지, 비로소 끊겨져 있던 마지막 논리적 고리를 찾은 듯한 느낌을 받았다. 매년 88조 원이라는 돈이 이렇게 보험사에 납입되고 있으니, 일년이 지나도록 책 한 권 살 돈 없고, 영화 한 편 제대로 못 보는 상황이 이제야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한국에서 자녀를 낳아 키운다는 것은, 여성에게도 엄청난 불안이지만, 남성들에게 그 못지않은 부담이라는 사실을 이제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죄수의 딜레마'라는 표현을 쓴다면, 우리 모두 이 딜레마에 빠져 있는 것이고, "자신의 일은 자신이 하자"라는 사회적 후생의 '개별 해법'이 얼마나 끔찍한 상황을 만든 것인지, 문득 깨달게 되는 것 아닌가? 이 돈이면, 대학 등록금 50만 원을 비롯해서 우리가 상상하던 모든 복지를 단번에 이룰 수 있다. 그리고 그 영광도 우리가 살아서 볼 수가 있다. 그러나 자기 자식을 위해서는 88조 원을 기꺼이 낼 수 있는 한국의 부모들이, 남의 자식을 위해서는 단 돈 십 원도 낼 수 없다는, 이 무서운 딜레마에 빠져 있는 셈이다.

나는 이 끔찍하도록 희생적인 연간 88조 원만큼의 자식 사랑에 감동하면서도, 자신의 목숨은 버리더라도 남의 자식을 위해서는 단 10원도 쓸 수 없다는 이 지독할 정도의 딜레마 속에서 정말로 우리가 지옥에 살고 있는 듯한 공포감을 지워버릴 수가 없다. 88조 원의 단 10퍼센트라도, 우리가 '공공의 것' 즉 우리 모두를 위해서 사용할 수는 없는가? 죽어서 자식에게 물려주겠다는 방식이 아니라 살아서 우리 모두 행복할 방법은 없는 것일까?

2.


민간 보험과 민간 의료가 발달했다는 것이 사회적 발달과 상응하는 개념일 것인가? 미국의 유명한 다큐멘타리 감독인 마이클 무어의 <식코>는 의료보험 개혁이라는 단 하나의 명분으로 미국 정치가 격동하게 된 바로 그 모티브를 설명한다. 우리에게는 이 영화가 남의 일 같아 보였지만, 민간 보험회사의 '불안 비즈니스' 속에서 한국도 <식코>의 세계로 가고 있는 중이 아닌가?

의사는 보편적 인류애를 가진 사람으로 이해할 수 있고, 약사 역시 우리의 건강을 지켜주는 사람이라는 게 내 평소의 생각이다. 그러나 '비즈니스'의 세계로 들어가면, 전혀 그 작동 방식이 달라지고, 다국적 제약회사의 세상으로 들어가면 우리가 아는 상식을 꽤 바꾸어야 사태의 진실을 이해하게 된다.

외국에서는 '스와인 플루(swine flu)'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질병 등 신종 바이러스형 질병들이 등장할 때마다 이게 백신을 팔아먹으려는 다국적 기업의 음모라고 하는 음모설이 횡행했다. 물론 사태의 진실과는 아주 거리가 멀다. 다국적 제약회사가 하는 가장 고귀한 행위가 백신 개발이라고 해도 과하지 않은 것이, 백신은 이윤율이 아주 적기 때문에, 정부와의 협약 혹은 UN의 권고 때문에 제약회사에서 하고 싶지 않은 데에도 억지로 하는 것이 백신 개발이다. 보통의 다국적 제약회사는 그런 큰 돈 벌리지 않는 일 보다는 다이어트 신약 개발이나 보조제를 만드는 게 훨씬 돈이 많이 되고, 그래서 정말로 제약회사들에게 황금알을 낳는 거위는 백신 같은 이윤율 박한 공익성 사업이 아니라 다이어트를 위한 보조 약품들이다.

이런 매우 특이한 상황은 민간 의료보험에 의지한 미국이라는 매우 특수한 사회 그리고 그곳을 자신의 기지로 하고 있는 제약회사의 특수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오바마 정부가 한국의 의료보험을 자신들의 모델이라고 할 정도로 미국의 의료보험은 아주 형편없는 상황이고, 그러다보니 공공의 의료정책은 실종된 상황이고, 어떻게 하면 병을 싸게 고칠 것인가, 그런 치료 중심으로 가고 있다. 유럽 방식과는 아주 다르다.

경제학만 가지고 비교를 한다면, 세계 최고의 보건 경제학 그리고 보건학을 발달시킨 곳은 하버드 대학이다. 유럽에는 보건 경제학이라는 게 없고, 그 자리를 문화 경제학이니 영화 경제학이니, 미국과는 조금 다른 응용학문들이 채운다. 당연한 게 미국은 개인의 보건 비용이 최고이니, 이걸 다루는 경제학자들에게도 먹고 살 길이 열리지만, 보건은 정부의 일이 된 유럽에서 굳이 보건 경제학 같은 것을 별도의 학문으로 분화시킬 필요가 없다. 보건 경제학이 발달한 하버드보다는 그런 학문은 할 필요가 없는 유럽이 오히려 보건적으로는 우수하다는 역설이 생겨난다. 아파도 돈은 걱정할 필요가 없는데, 뭐하러 보건 경제학 같은 걸 발달시킬 필요가 있겠는가?

좀 투박하게 얘기하자면, 미국은 국민들이 병들게 하고, 그 병을 민간 병원들이 고쳐주게 하고, 그렇게 해서 생겨난 막대한 치료비를 중심으로 경제학이 투입될 공간이 생기는 셈이다. 아까의 다이어트의 예를 들어보자. 다이어트는 온갖 성인병의 출발점이기는 한데, 주로 흑인 등 유색인종과 빈민 지역 거주자들을 '빈곤형 비만'으로 방치시켜서 나중에 다이어트 치료를 하는 것보다는, 식품까지 포함해서 비만 현상이 발생하지 않도록 종합 정책을 투입하는 편이 사회적으로는 더 저렴하고, 국민들도 편하다.

유럽은 비만을 사회적으로 해결하고, 미국은 비만을 방치한 다음에 나중에 다국적 기업이 비만 치료제를 출시하면서 돈을 벌게 하는 시스템이다. 국가가 의료비용을 지불하게 된다면, 비만율을 떨어뜨리는 학교 식단에서 공공 실내수영장과 체육 시설들을 보급해서, 전체적으로 의료비 지출을 줄이는 종합적 예방의학으로 가게 된다. 국민들의 입장에서도 그게 편하다. 아주 값싼 체육관과 수영장 같은 곳에서 운동을 하고, 그렇게 삶을 즐기면서 전체적으로 보건비용을 줄이면서도 아프지 않게 사는 것, 그게 모두에게 이익이 아닌가?

물론 이 상황이 되면, 다국적 제약회사로서는 아주 골치 아픈 일이 생긴다. 제약회사는 국민들이 아파야 하고, 집이라도 팔아서 병원에 돈을 갖다 바치게 되어야 이윤이 늘어난다. 종합적으로 보자면, 상황이 뻔한 것 아닌가? 민간의료 보험은, 국가가 국민을 보건적으로 방치한 나라에서 맹활약하게 된다.

예방 의학의 대표적인 형태로 우리가 제시하는 또 다른 예시가 아토피의 경우이다. 유럽에는 'EU 아토피 프로토콜'이라는 것이 있다. 아토피에 걸린 환자가 발생했을 때, 부모와 의사들에게 가이드 라인을 준다. 개인들에게 불필요한 비용을 줄이면서 사회적으로는 문제의 근원을 해소하기 위한 예방 의학이 이런 식으로 작동한다. 미국은 아토피의 경우에, 개인의 문제에 맡겨 두고, 온갖 의료비용이 개인 부담으로 전가된다. 한국은? 공공 의료이지만, 유럽형의 예방 의학이 아직은 체계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최소한 6세 미만의 유아들에게 피했으면 하는 남성 호르몬 계열의 스테로이드성 원고를 남발하고, '아토피 비즈니스'라는 용어로, 그야말로 "대박났다"고 온갖 사설 치료 산업이 만개한다. 부모들의 고통 위에서 이걸 "비즈니스는 비즈니스"라고 방치한 게 한국의 의료산업이고 또한 정부 대책이다. 한마디로, 한국의 공공의료는 보장성이 유럽에 비해서 뒤떨어진다고 할 수 있다. 최근 유행하는 암보험 역시 같은 작동원리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누군가 돈을 더 내야 하고, 정부가 더 적극적으로 나서야 하는데, 생명보험이 그런 것처럼, 그 돈을 내려면 차라리 자기가 스스로 해결해야겠다는 풍조가 강했고, 한국의 경제 엘리트들은 "미국식으로 가자"고 수 년간 주장했기 때문이다. 매우 훌륭한 공공의료보험을 가지고 있지만, 지난 몇 년 동안 한국 의료보험의 보장성은 발전하지 못했고, 유럽 수준의 '암 치료'와 완벽한 보장과는 거리가 먼, 그래서 그 빈 공간으로 민감 보험이 침투하게 되었다.

민간 보험의 작동원리 역시 간단하다. 정부가 해결하고 난 빈 부분을 처리하겠다는 것인데, 그러다보니 보험의 일반 원리대로 '과잉 진료'가 횡행했고, 공공 의료보험의 부담이 늘어갔다. 병원에 자주 가는 게 이익이 되니, 당연히 과잉 진료를 받게 된다. 예방적 의료로는 더 이상 돈이 가지 못하고 의료 서비스는 답보하는 일이 벌어진 것이 현실이다. 노무현 시절, 의료 서비스의 고급화라는 명목으로 어떻게 하면 영리 병원을 늘릴 것인가, 그런 것 밖에 안 했고, 의료보장의 로드맵은 로드맵이라는 단어 전성 시기에도 명함도 못 내밀었다.

그리고 이명박 정부가 들어섰다. 의료 민영화 시도가 국민들의 집단적 반발로 잠시 수그러들었지만, 여전히 정부는 삼성생명 등 보험회사 편에 서 있지, 예방 의학을 포함한 종합적 대책은 가지고 있지 않는 듯하다. 그들이 바라는 것은, 객관적으로 본다면 하루라도 빨리 건강보험이 더 많은 빚을 지고, "이제 우리는 감당할 수 없다"고 손을 들고, 미국처럼 "자신의 일은 자신이 하자"는 길을 선언하는 그 날이 오는 것인 듯하다.

3.

88만 원 세대라고 부르든, 88조 원 세대라고 부르든, 혹은 그 무슨 이름이 되든, 한국의 20대는 거의 완벽하게 95:5의 비율로 분화되고 있다. 부모를 아주 잘 만났든, 아니면 정말로 자신이 잘났든, 5퍼센트의 20대에게는 의료보험이든, 그 어떤 이름의 사회적 보장이나 보편적 복지가 필요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나머지 95퍼센트에게는, 보편적 복지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들 중 얼마나 그들이 부모들이 지금 지불하고 있는 88조 원이라는 생명보험의 수혜자가 될 것인가? 또 다른 부익부 빈익빈이다.

내가 '국민건강보험 하나로' 모든 의료 보장을 처리할 수 있는 방식을 지지하고 그 출범에 준비위원으로 참여한 이유는 두 가지이다.

짧게는, 우리가 '22조 원'이라는 규모에서 본 토건에 들어가는 돈을 어떻게든지 문화와 지식 혹은 복지로 들어가게 되는 전환점을 찾기 위해서이다. 돈이 없다고 주류 언론에서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멀쩡한 강바닥을 준설하고, 그 자체로 생태적 비경인 상주 일대의 낙동강 발원지인 회룡포 일대를 파헤치는 데 괜히 돈이 들어가는 것을 보지 않았는가? 88조 원을 지불하는 이 '불안 비즈니스'의 근원에 대처하는 데 그 돈이 들어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멀게는, 특단이 대책이 없다면 비정규직 혹은 알바로 살아가게 될 95퍼센트의 20대에게 최소한의 보장성 의료가 미국형 민간보험에 의해서 무너지지 않도록, 그야말로 최소한의 기준선을 지켜주고 싶은 것이다. 그들 중 대부분인 평균 이하의 의료보험비를 지출하게 될 것이다. 아마 지금처럼 간다면 공공 의료보험은 결국 무너지고 민간 보험으로 넘어가게 되는 시점이 10년 내에 오게 될 가능성이 높다. 그러면 이 사람들은 어쩌란 말이냐?

누군가는 돈을 더 내야 하고, 누군가는 더 많은 부담을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진정한 예방의학 체계가 성립되면, 사실은 그 부담 자체도 줄어든다. 나는 내가 '88만 원 세대'라고 불렀던 그 사람들이 한 달에 만 원 정도의 비용을 내고 수영장에도 가고, 자전거도 빌려서 탈 수 있고, 공공 헬스장에서 바벨도 들고, 런닝 머신도 탈 수 있고, 그들이 그렇게도 원하는 복근도 만들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주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 나한테 돈을 더 내야 한다면, 나는 더 많은 비용을 지불할 의사가 있다.

지금 우리는 위태한 의료보험을 지켜낼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하면 "병이 생기지 않게" 사회가 관리하는 사회적 예방의학 체계로 넘어갈 것인가의 불안한 갈림길에 서 있다. 나는 지금의 10대와 20대를 위하여, 최소한 의료체계만큼이라도 '보편적 복지'로 가야한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내가 <조선일보>나 <문화일보>와 같은 신문에서 말하는 포퓰리스트인가? 나는 보편적 박애주의자일 뿐이고, 한국의 다음 세대가 생태적 모순과 경제적 모순으로 몰락하지 않기를 바라는 생태주의자일 뿐이다. 내가 바라는 한국은 국민경제의 기본이 지켜지고, 이 땅에서 태어난 누구도 배 굶지 않고 아파도 병원에 가지 못하지 않는, 최소한의 인간의 얼굴을 한 선진국의 모습을 가지는 세상이다.

우리는 '보편적 토건 사회'에서 '보편적 의료복지 사회'로 가야한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들의 부모들이 88조 원씩 되는 '불안 비용'을 매년 슬프게 지불해야 한다. 그들이 생명회사에 바치는 돈을 줄이는 것, 그게 그들의 자식들이 느끼는 불안을 사회가 흡수하는 노력으로부터 생겨날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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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6-14 17: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제목은 지금부터 할 얘기와 관련은 있지만 일종의 낚시다. 나는 진보신당 당원이다. 선거 결과를 두고 진보신당과 노회찬을 질타하는 최근의 조류에 불만이 많지만, 지금부터 하려는 말은 그런 얘기가 아니다. 민주당 대변인이 노회찬의 결단을 촉구하고 민주당 관계자가 노회찬의 완주에 대놓고 섭섭함을 표하는 이런 일은 지금까지 없었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해진 것일까에 대한 비평적 관심이 이 글의 초점이다. 여기에 요즈음의 한국 정치를 작동시키는 비밀이 있다.

‘비판적 지지’론이란 것은 본래 운동권의 내부 담론이다. 일단 민주당을 지지하는 것이 맞는지, 아니면 진보정당의 독자노선을 걸어가야 하는지를 좌파들끼리 논의하는 것이 ‘비판적 지지’론이었다. 따라서 진보신당 부산시당의 야권연대 합류와 심상정의 사퇴 등을 ‘비판적 지지’로 접근하는 것은 올바르지만, 민주당의 군소정당에 대한 압력은 또 다른 차원이다. 이 문제는 또 다른 관점에서 규명되어야 한다.

주지하다시피 지난 십 년간 민주노동당 지지자들이 가장 얄미워한 민주당 성향의 정치인은 유시민이었다. 유시민은 2002년 대선과 2004년 총선에서 사표론을 부채질하여 민주노동당의 표를 절반 이상 잠식했다. 뺏을 건 다 뺏어가고도 “얻을 건 다 얻었는데 마지막에 던지지 못했다.”라고 2002년 권영길의 완주에 대해서 논평하는 등 얄미운 짓을 그치지 않았다. 가져가고도 미안하단 말 한마디 없었고, 진보성향 표를 가져갔으니 그 지지자들의 바람도 일부는 반영해 주겠다는 진정성도 없었다. 오히려 참여정부의 경제정책 우경화를 주도하고 옹호하며 대통령에 대한 ‘정치적 경호실장’ 노릇을 했다. 하지만 유시민이 특히 미움받았다는 건 다른 민주당 정치인의 경우 좌파들에게 별 관심이 없었다는 얘기도 된다.

그랬던 이유는 간단하다. 역풍을 맞을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김대중은 지주계급이란 물적 토대를 지녔던 보수야당을 ‘중산층과 서민을 위하는’ 당으로 혁신시킨 위대한 지도자였다. 하지만 그는 재야세력 및 운동권들과 연합을 했다가 오히려 독재정권의 ‘빨갱이’ 공세에 시달려 표가 깎이는 경험을 했다. 민주당은 경험에 의해 스스로를 ‘좌파’와 끊임없이 구별짓기 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것이 동족상잔의 전쟁과 정치적 좌익의 학살이라는 토대 위에서 건국된 대한민국의 주류 정치세력이 되기 위해 민주당에게 강요된 생존의 문법이었다. 민주당은 좌파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처럼 행세했다. 어휘로도 그랬고 정책지향으로도 그랬다.

1997년부터 2007년 사이 많은 변화가 있었다. IMF 사태라는 국가적 위기상황 속에서 극적으로 집권한 민주화 세력은 ‘신자유주의적 개혁’을 스스로의 정체성으로 삼게 되었다. 민주화 운동을 주도한 세력의 경제정책이 역설적으로 독재정권의 그것보다 덜 민중적이게 된 역전현상이 벌어졌다. 사회주의 혁명을 꿈꾸던 좌파들은 1991년 소련 붕괴 후 우왕좌왕하다 합법적 좌파정당 운동을 시작했다. 민주노동당의 창당과 성장은 ‘좌파=친북’이라는 연결고리를 완화시키고 ‘좌파’란 단어의 시민권을 되찾는데 조금이라도 기여했을 것이다. 한편 한나라당은 지극히 보수적인 집권당의 경제정책에 대해서까지도 ‘사회주의적’이란 수사를 남발하면서 이념에 대한 혼동을 조성하는데 지대한 기여를 했다. ‘좌파’란 말은 예전보다 덜 위험한 말이 되었지만, 점점 더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이 되어갔다. 

민주당의 보수적 경제정책에 과격하게 가속 페달을 밟은 듯한 이명박 정부의 미칠듯한 반서민 정책은 사태를 더 악화시켰다. 한나라당은 김대중과 노무현을 ‘좌파’로 몰아붙인 대가로 정권교체에 성공했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의 정책에 대한 반감은 또 한 번의 역설로 돌아와 민주당이 스스로를 ‘좌파’로 규정하게 했다. 사실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시대에 그들은 ‘좌파’를 철지난 유행으로 규정했더랬다. ‘신자유주의’라는 말은 좌파 꼴통들이나 쓰는 어휘로 치부했더랬다. 그런데 그들이 요즘 ‘신자유주의 반대’라는 말을 한다. 경기도지사 후보 토론회에서 진보신당 심상정 후보는 민주당 김진표 후보에게 물었다. “스스로를 좌파라고 생각하십니까?”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의 대표적인 보수 경제관료였던 그가 대답했다. “예.” 세상이 뒤집혔다.

선거 직후 어떤 대학생들의 대화를 들었다. “(서울시장 선거에서) 한나라당이 이겨서 다행이야.” / “왜?” / “한나라당은 우파고 민주당은 좌파잖아. 좌파가 승리하면 사회가 어지럽거든.” 이들의 대화는 어찌해서 한나라당 지지자와 민주당 지지자들이 모두 “민주당이 좌파다.”란 명제에 동의할 수밖에 없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한마디로 말하면, 민주당이 좌파라야 한나라당도 존립근거가 생기고 민주당도 존립근거가 생긴다. 민주당 지지자들은 민주당으로의 폭력적 쏠림을 방치하는 ‘야권단일화’를 논할 수 있고 노회찬이 완주하면 진보신당 홈페이지를 폭격하고 노회찬 정계은퇴 서명운동을 전개할 수 있다. 공당의 대변인이라는 사람이 떳떳하게 다른 정당 후보의 사퇴를 촉구한다. 이 모든 것들이 가능한 세상이 되었다.

조중동은 언제나 좌파의 준동을 두려워한다. 그들이 말하는 좌파는 “사회질서를 교란하고, 체제에 위협이 되며, 대한민국을 언제든지 조선노동당에게 팔아먹을 준비가 되어 있는 나쁜 놈들”이다. 조선노동당 문제를 제외하고 생각하면, 꽤 멋있어 보인다. 그런데 진보신당 당원이란 나란 사람은 그렇게 위협적이고 무시무시한 존재일까? 내 꼬라지를 돌이켜보니 한숨이 나온다. 민주당이 좌파가 된 세상에서, 좌파정당의 지지자들은 한줌도 안 되는 일종의 오타쿠 집단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그들은 진보신당이 국민의 명을 따르지 않았다고 규탄한다. 국민이란 건 민주당 지지자들만을 일컫는 말이 아니라 대한민국이란 정치적 공동체 안에서 살아가는 모든 사람을 지칭하는 보편적인 수사인데 말이다. 정상인의 말로 번역하자면, 그들은 노회찬에게 진보신당 당원 말을 듣지 말고 민주당 지지자 말을 들어야 한다고 요구하고 있는 거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요구가 가능해진 것은 무엇 때문일까. 이미 답을 말했다. 민주당이 좌파니까. 

아무래도 사람은 자신이 죽여버린 것에 대해서 환상을 가지는 모양이다. 가령 영화 <아바타>를 보라. 인디언과 숲을 죽여 버린 인간이 첨단 테크놀러지로 그것을 가상적으로 재현하는 것을 볼 수 있지 않던가. 좌파가 아닌 사람들이 ‘좌파’라는 말을 멋으로 알고 유행처럼 그것을 걸치게 된 현실은 좌파정치의 진정한 죽음을 의미한다. 그 지지자들에게 ‘진정한 보수’이기도 했고 ‘진정한 진보’이기도 했던 한 매력적인 정치인의 죽음은 그를 따르는 정치세력을 부활시켰고 그들이 좌파를 ‘대체’하게 했다. ‘좌파’란 것이 ‘사회에 있어서는 안 되는 위험한 것’으로 치부되었을 때는 차라리 가능성이 있었던 것이다. 민주당이 경제정책의 뚜렷한 변경없이 손쉽게 ‘좌파’라는 구호를 접수한 이 사회에서 심상정은 ‘국민’의 뜻을 떠받들어 왕년의 두 전직 대통령처럼 ‘중산층과 서민을 위한 정치’를 이야기한다. 도대체 좌파는 어디에 남아있단 말인가. 

3.3%의 지지율이 비난의 근거가 되는 황당한 현실은 ‘진보정치의 성장’에 대한 고민이 아닌 ‘진보정치의 생존’에 대한 고민을 요구한다. 아무도 우리와 연합하려는 이들은 없으니 진보신당 사람들은 허망한 정치공학적 계산에 매달리지 말고 이 지지율로도 살아남는 법을 고민할 일이다. 선거전략 평가하고, 다시 원칙 세우고, 다른 길을 선택한 사람은 보내고, 당선된 3명의 광역의원과 22명의 기초의원들의 의정활동을 총력지원해야 한다. 중앙정치에서 성공할 수 없다면 지역정치의 길이라도 노려봐야하지 않겠나. 사회에서 우리의 쓸모가 무엇인지 처음부터 다시 고민하고 노력한다면, 다시 세상이 바뀔 때 한번쯤은 기회가 올 거다. 민주당이 서민들을 행복하게 해줄 수는 없으니까 말이다. 

 http://hook.hani.co.kr/blog/archives/53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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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0-06-11 1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든 정당이 자신들의 당론을 맘껏 펼치는 세상이 왔으면...
 

이번 지방 선거의 결과를 보면, 일희일비가 엇갈린다는, 다소 진부한 표현부터 떠오릅니다. 긍정적 측면부터 보자면, 일단 "북풍"과 같은 정치 쇼들의 약발이 더이상 잘 먹히지 않는다는 것부터 참 반가운 일입니다. 6.25의 불행한 세대는 물론이고 1968년의 이북 정권의 실패된 "빨치산식 공격" 작전을 목격한 세대까지만 해도 좀 달랐지만, 이제 20대나 30대들에게는 "북한 도발"보다 그 "도발"의 가능성을 재탕삼탱 이용하면서 현실보다 백배, 천배로 "뻥튀기"하는 남쪽 정치꾼들은 더 위험해 보입니다. 지금 정권은 1970년대형 토건형 부양책에다가 1970년대를 연상케 할 정도의 대북대결형 국민통합정책을 추진하는 셈인데, 그게 1970년대에 유치원에 다녔거나 1970년대를 보지도 않은 사람들에게는 말그대로 "과거의 망령"처럼 느껴지죠. 간절히 바라는 바입니다만, 이제 당로자들이 북한을 이용하는 저질 정치쇼들의 "비용 대 효력" 효율성이 낮다는 점을 간파하시어 더이상 "북한 납치범"들의 유령들과 싸우다가 결국 불명예 퇴장되어버린 고이즈미나 부시의 흉내를 내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뭐, 직업적으로 머리회전이 빠르신 분들이니 알아서들 잘 하시겠지요?
 
그런데 이와 동시에 더 한 가지 실감한 것은, 한국 자유주의자 (한명숙씨나 유시민씨 형의 "온건" 부르주아 정객)들의 엄청나게 강한 "소생 능력"입니다. 노무현 정권 말기 같으면, 비정규직 양산과 성장률의 경향적 저하, 부동산대책 실패, 그리고 한미FTA과 같은 신자유주의적 망동으로 "노빠" 그룹은 거의 고립된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지금 기억하시는 분들이 계시는지 모르지만 그 때는 "놈현스럼다" 같은 단어들이 사전에 수록될 뻔한, 그런 분위기이었지요. 경제에 대한 이해 수준이 낮아 비정규직 양산과 내수 저하, 그리고 중소기업의 구조적인 고질적 위기와 해외경기에의 의존 등이 어떻게 구조적으로 연결돼 있는지를 제대로 알지 못하신 듯한 분들은, 사실상 "개혁"이라는 양두구육형 불량 정치상품의 인기 폭락으로 정치 시장 퇴출 위기에 몰려 있었지요. 그런데, 약 3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는, 이들의 정치자본이 거의 회복된 셈입니다. 김대중, 노무현 시절에 저소득층의 실질소득이 사실상 전혀 증가되지 않아 가난의 대물림이 일상화된 반면 "부동산 부자", "주식 부자"들의 호강이 날로 심해졌다는 것도, 국가의 고용자측 두둔이나 단순 무관심으로 분쇄 당한 고속철도 여승무원이나 기륭전자의 비극적인 세계사상 최장기 파업들도, "개혁주의자"들의 극단적인 무능과 비겁함으로 인해 끝내 없어지지 않아 살아남은 국보법도, 다 망각되거나 "용서" 받은 모양이었습니다. 거의 사냥 수준의 탄압을 당해온 쌍용 파업 노동자와 달리 별 방해없이 그 정치 활동을 해온 "개혁" 판매업자들이 20여년 전처럼 "독재 대 민주"라는 구도를 잡아 매우 편안한 중상층 상류의 생활을 해온 자신들을 "민주 투사"처럼 치장했는데, 사회의 상당부분은 이를 액면대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자유주의자들의 패러다임에 이끌리게 된 그 "시민 사회"의 압력이 얼마나 거세기에 심상정씨처럼 산전수전 다 겪은 노동운동가까지도 이라크 파병을 수긍한 사람에게 표를 주라 하면서 퇴장하게 이른 것입니까? 그러면 저들이 정치시장에서의 위치를 도대체 어떻게 해서 이렇게 회복할 수 있었을까요?
 
아마도 이 질문에 상당수 독자들이 "대북대결과 4대강 망동 등을 더이상 좌시 못한다 싶은 수많은 이들이 될성싶은 자유주의 정치인들에게 표를 모은 게 당연한 게 아니냐" 반문할 것입니다. 그건 다 맞는 이야기인데 노회찬과 같은 진정한 진보주의자들이 "나야말로 이명박의 진정한 대항마"라는 의식을 유권자들에게 심지 못한 이유가 뭐냐는 건 제 질문의 핵심입니다. 이 질문에 대한 상투적인 답 역시 "언론 외면, 당세 미약, 풀뿌리 조직 미비" 정도일 테고, 그것도 다 맞는 말이지만, 저는 거기에다 더 몇 가지 첨가하고 싶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자유주의 정치인들을 받들고 그 담론을 생산해주고 그 메시지를 전파해주는 "시민 사회"의 핵심들 - 주요 비정부 기구들의 지도자나 상당수 교수, "온건한" 조합 관료, 그리고 언론인 등 - 이 "노빠", "유빠"와 같은 그룹들의 정치시장 점유율 제고에 매우 중요한 기여를 한 것 같습니다. 한국 사회에서는 비정규직 노동자나 20대 "백수", 즉 노동시장 진출 실패자 등 사회적 하층은 독립적인 조직을 갖지 않으며 독립적으로 정치, 사회적 담론을 생산하지 못합니다. 젊은 가난뱅이들이 아나키스트가 되어 하나의 유력한 사회, 정치적 담론의 자장 안으로 흡수될 수 있는 희랍과 너무나 보수적인 "저강도 민주" (케빈 그래이 교수의 용어) 국가 대한민국은 그러한 차원에서는 천양지차를 보이죠. 국내 하층은 결국 정치, 사회적으로 중산층에게 종속돼 있는데, 중산층은 "반MB연대론"을 생산, 전파하는 NGO주역들과 교수, 기자들의 그 점잖은 문화 자본에 잘 이끌리게 돼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현실적인 자기이익 계산의 차원에서 노회찬에게 정직한 한 표를 던질 것 같은 사람들 - 예컨대 살인적 등록금에 약탈 당하고 졸업후에 입장 장벽이 계속 높아지는 노동 시장에 진압조차 못할 가능성이 높은 대학생, 특히 "비문명대" 대학생 -마저도 결국 자유주의자들의 유효기간이 지난 정치상품의 구매자가 됩니다. 그 광고의 포섭력은 그 정도로 강한 것이죠.
 
그 포섭력의 한계는 도대체 어디일까요? IMF충격으로 노동운동이 결국 정치화를 결정해 민노당을 창당한 10년 전의 일을 회상해보면 하나의 관건이 경제가 아닐까 싶습니다. 지금까지는 천문학적인 (주로 토건에의) 부양책과 극소수 재벌들의 수출 성과 지속으로는 토건, 수출형 경제는 아직까지 그럭저럭 굴러갑니다. 그런데 지금부터 유럽 준주변부 위기, 나아가서 국가 채무의 위기 등으로 세계 경제 상황이 전반적으로 악화돼 장기 공황이 본격화되고 주요 수출시장들부터 본격적으로 흔들리게 되면, 몇 년후에 이야기는 조금 달라질 수도 있습니다. 지금처럼 나라빛 늘려 성장률 2-3% 달성하지 못하는, 그런 임계 상황이 온다면 매우 대대적인 복지 증강은 수많은 서민들에게 사활의 문제가 될 것이고, 젊은이들의 소극적인 절망은 그리스형 적극적 절망, 즉 대사회적 행동으로 이어지는 절망으로 발전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마도 그러한 상황에서는 매우 대폭적 복지 확대를 도모하면서 근본적으로 토건, 수출의존형 경제 전체를 뜯어고치려는 진보신당형 훨씬 더 강한 설득력을 발휘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일단 인내심을 갖고 미래를 준비하는 게 최선일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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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6-06 03: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6-06 12: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어제 우리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들었습니다. 진보신당의 얼굴이나 다름없던 심상정 경기도지사 후보가 유시민 후보를 지지한다면서 후보직을 사퇴한 것입니다. 저는 하나의 정치 행위로서 그 결정을 이해할 수는 있습니다.

청천벽력 같은 소식

하지만 그것이 참된 의미에서 정치적 행위가 되기 위해서는 당 내에서 공공적인 의사결정 과정을 거쳐야만 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사사로운 결정이요, 당이 후보자 개인의 사사로운 결단에 따라 움직인다면 그런 정당은 더 이상 공당이 아니라 사당에 지나지 않습니다. 제가 아는 진보신당은 그런 정당이 아니며, 또 그런 정당이 되어서도 안 됩니다.


   
  ▲ 김상봉 상상연구소 이사장(전남대 교수)
로마 시대의 장군이었던 카툴루스 루크타티우스가 킴브리아와의 전쟁에 나갔을 때, 압도적인 적의 위세에 눌려 그의 병사들이 무질서하게 도주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 그는 자신의 병사들 사이로 들어가 같이 달리면서 로마의 병사들은 적을 앞에 두고 도망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지휘관의 명령에 따라 후퇴하고 있노라고 외쳤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지휘관으로서 자기 병사들의 명예를 지켜주고 무질서한 도주행렬을 질서정연한 후퇴의 대열로 만듦으로써 피해를 최소화하고 새로운 전투를 준비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병사들이 목숨을 걸고 싸우겠다고 전의를 불태우고 있는데, 적의 위세에 눌려 앞에 서 있던 장수가 먼저 도망을 쳐버린다면, 이런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사람들이 진보는 분열로 망한다고 합니다. 틀린 말입니다! 한국의 진보 정당이 성장하지 못했던 까닭은 진보 정치인들이 믿음을 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동학농민항쟁 때 많은 농민군들이 자기가 살던 집에 불을 지르고 전봉준을 따라 갔습니다.

그것은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 전에는 결코 이 비루한 삶으로 다시 돌아오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의 표현인 동시에, 자기들이 걸어야 할 길과 그 길의 지도자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의 표현이기도 했습니다. 그것은 전봉준이 마지막까지 자기들을 버리지 않으리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진보, 분열이 아니라 리더들이 문제였다

하지만 오늘날 한국의 진보 정치인들은 너무 쉽게 자기가 들고 있던 깃발을 버리고 자기가 있던 자리를 떠납니다. 그들이 떠나는 곳은 그들이 혼자 갈 수는 있어도 우리가 같이 갈 수 없는 곳입니다. 그래도 그들은 때마다 자기를 믿고 따라 달라고 말합니다.

언제 다시 떠날지 모르는 사람을 따라 우리가 어떻게 자기의 모든 것을 걸고 따라 나설 수 있으며, 언제 내려질지 모르는 임시 정당의 깃발을 누구더러 같이 들고 지키자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아무리 영리하고 아무리 열정적이고 아무리 선량한 마음씨를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자기가 믿음이 없고 남에게 믿음을 주지 못하면 진보 정당 운동이란 한갓 역사의 에피소드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그리도 쉽게 우리의 진보 정치인들은 자기의 깃발을 버리고 제 자리를 떠나는 것입니까? 그들에겐 늘 떠날 곳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 가진 것 없어 떠날 곳이 없는 사람들만이 어쩔 수 없이 자기의 자리를 지킵니다.

적의 침략 앞에서 장수들이 도망쳤을 때 아무 것도 모르는 백성들이 의병이 되어 싸웠던 것은 그들이 특별히 용감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에겐 도망갈 곳도 떠날 곳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살아도 거기서 살고 죽어도 거기서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자기 땅을 죽음으로 지켰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겠습니까? 저는 이명박을 심판해야 한다는 사람들의 절박한 마음을 이해합니다. 하지만 그 마음이 진심이라면, 그리고 이명박을 심판하기 위해 될 사람, 될 정당에 힘을 모아주어야 한다고 믿는다면, 그들이 해야 할 일은 입으로만 이병박 정권을 심판해야 한다면서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있는 거대 야당에 입당하여 그들을 비판하고 독려하는 일입니다.

소수정당 욕하기 바쁜 무능한 거대 여당

하지만 이 나라의 거대 야당들은 자기가 할 일을 하지 않으면서 그 책임을 남에게 전가하는 일에 너무도 능수능란하고, 그런 정당의 지지자들 역시 수백만 명 한나라당 지지자들을 설득하려 하기보다는 겨자씨만큼 작은 진보신당의 당원들이 자기 편을 들어주지 않는다 해서 분파주의자들이라 비난하는 데 지칠 줄을 모릅니다.

존재는 평면이 아니라 깊이이며, 시간은 현재 속에 언제나 과거와 미래를 같이 품고 있습니다. 정치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정당은 오늘의 적과 싸우지만 또 누군가는 내일을 준비해야 합니다. 진보신당은 미래의 정당입니다.

우리가 민주당이나, 국민참여당 또는 민주노동당이 아니라 진보신당에 몸을 담고 있는 까닭은 저 정당들이 더 이상 미래를 책임질 수 있는 정당이 아니라고 우리가 믿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명박의 독재를 심판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지만 그 뒤에 더 중요하고 근본적인 이 시대의 모순이 가로 놓여 있다는 것을 우리가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낡은 것이 지나가고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는 때입니다. 그것은 예전의 싸움이 지나가고 새로운 싸움이 시작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명박의 독재를 입에 올리면서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이명박을 심판해야 한다고 열을 올립니다.

하지만 이명박은 박정희도 아니고 전두환도 아닙니다. 그는 다만 자본과 재벌과 삼성과 이건희의 꼭두각시일 뿐입니다. 머지않아 이 땅의 시민들은 그것을 명확하게 인식하고 서로 물을 것입니다. 누가 이 괴물을 퇴치할 수 있는가? 누군가는 그 때 그 물음에 대해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분노는 잠시 접고, 전화기를 들자

그러기 위해서는 갈 곳 없는 우리가 흩어지지 말고 그날을 위해 참고 견디며 성을 지켜야 합니다.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우리는 아무 것도 잃을 것이 없고, 아무 것도 두려워 할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2.94%보다는 3%가 낫고 3%보다는 5%가 낫습니다. 그리고 진보신당의 후보와 정당지지율이 10%를 넘는다면, 그것이야말로 한명숙이나 유시민 후보의 당선보다 이명박에게는 더 큰 현실적 위협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심상정 후보의 사퇴에 대한 분노는 잠시 접고 이제 남은 하루 동안 전화기를 들어 주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의 가족과 친구들에게 진보신당을 지지해달라고 한 번 더 간절히 호소해주십시오. 그리고 진보신당이 무엇하는 당이냐고 묻거든 어려운 말씀은 다 접고 단 한 마디 진보신당은 삼성의 범죄자 이건희를 감옥에 보내기 위해 싸우는 당이라고만 말하십시오.

그리고 무기력하고 위선적인 거대야당들이 시도지사 한 두 자리 더 얻는 것보다 진보신당이 10%를 얻는 것이 이명박에겐 훨씬 더 실제적인 위협이 된다는 것도 알려주십시오. 그리고 마지막으로 진보신당이 누구의 정당이냐 묻거든 노회찬도 조승수도 심상정도 아니고 바로 나 자신의 정당이요, 우리 모두의 정당이라고 대답해주십시오. 장수들이 떠난 자리에 갈 곳 없는 우리가 의병이 되어 성을 지킵시다.

사랑과 존경의 마음으로

김상봉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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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주미힌 2010-05-31 18: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게 진보신당은 정부, 권력, 자본, 삼성에 가장 치열하게 싸워왔던 정당이다..
지금의 야당연합(민노당을 제외한)에서 진보신당보다 당당하게 반MB를 외칠 수 있는 정당은 없다. 특히 국참당..
MB를 막는 것도 중요하지만, 싸울 수 있는 세력을 키우는 것도 중요하다. 당선 가능성만으로 판단할 수 없는 것들을 보여줘야 할 것이 이번 지방선거의 핵심이라고 본다.
지자체 선거는 그래서 중요했는데... 아 정말 아쉽다.
왠 북풍, 노풍이냐... 이 낡은 망령들.

머큐리 2010-06-01 10:53   좋아요 0 | URL
라님에게 꼭 옆지기를 소개해야 겠다능~ 난 옆에서 구경만해도 재미있을거 같은데..ㅋㅋ

라주미힌 2010-06-01 11:20   좋아요 0 | URL
안되용... 무서워용 ㅋㅋ

무해한모리군 2010-06-01 12:47   좋아요 0 | URL
오 저도 관전하고 싶군요! ㅎㅎㅎ

순오기 2010-05-31 23: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거 보고 오늘 문자하고 전화하고~ 열심히 운동중이에요.

라주미힌 2010-06-01 00:39   좋아요 0 | URL
저도 열심히 할게요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