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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이닝
욘 포세 지음, 손화수 옮김 / 문학동네 / 2024년 3월
평점 :
이 소설은 희곡으로 각색되어 연극 무대에 오른 작품이다. 연극은 <검은 숲속에서>으로 올랐으며 책은 소설과 노벨문학상 수상 연설문과 번역가의 글까지도 작가와 작품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욘 포세 책은 처음이 아니다. 처음 작가의 책을 읽었을 때의 느낌과 이 소설의 느낌은 다르지가 않다. 작가의 문체에 익숙해졌기에 소설 속의 공간과 인물의 여러 생각들을 어렵지 않게 빠져들게 된다. 작가가 반복적으로 언급하는 장면들이 함축하는 의미들을 무한히 음미하게 한다. 현대 경제 세력에 대항하는 반대 세력이라고 자신을 명명하는 작가의 의지가 소설에서도 느끼게 된다. 반자본주의자이며 개종한 가톨릭교도라고 간주될 작가의 확고함이 작품에서도 전달된다. 소설을 처음 읽으면서 제대로 읽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빛과 어둠, 세상의 언어로 표현하기에는 부족한 현상들이 계속 여러 대상들을 통해서 전달된다. 인간이 사고하고 이해하는 범주는 한계점을 지닌다. 이분법적으로 분류되는 사회의 가치들이 무수히 소설에도 등장한다. 가까운 것과 멀리 있는 것, 빛과 어둠은 지극히 인간적인 사유이다. 하지만 소설의 화자는 이 모든 것들을 인간이 이해하는 범주를 넘어서는 경험들을 하게 된다. 이것들이 함께 공존하면서 죽음으로 나아가는 순간에 묘한 경험들을 소설로 전개한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을 글로 쓰고 싶었다는 작가의 의지가 작품에도 펼쳐진다. 삶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이해할 수 없는 무수히 많은 것들을 소설을 통해서 이야기한다. 이러한 현상들을 작품을 통해서 무수히 발견하게 된다. 깊은 숲속에서 홀로 경험한 것들을 화자는 이야기하면서 언어의 한계점을 무수히 발견하게 된다. 이러한 경험을 알기에 가슴 벅차게 읽게 된다.
일어나지는 않고 단지 경험만 하는 일이 가능할까 73
말의 의미도 사라진 것 같다.
마치 모든 것의 의미가 사라진 것 같다.
의미라는 것 자체가 더는 존재하지 않는 듯하다. 79
그 빛은 ... 존재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감싸고 있다. 80
말의 의미가 협소해진다. 부족한 자원이 되기도 한다. 말의 한계점을 전달하고자 노력한 흔적들이 욘 포세의 소설들을 통해서 다시금 경험하게 된다. 휴식이 얼마나 중요한지도 모른 상태로 살아가는 자본주의를 바위에서 쉬는 순간 깨닫지는 않아야 한다는 것을 알게 해준다. 얼마나 피곤하게 살고 있는지 현대인들은 얼마나 인식하면서 살고 있을까. 한국 사회는 밤을 잊은 나라이다. 야식 문화와 번쩍이는 불빛의 제2막의 거리들이 눈을 뜨는 나라이다. N잡을 부추기는 자본주의에 휩쓸려서 여러 가지 일자리로 노동을 하는 나라이다. 야근하는 문화, 불이 꺼지지 않는 나라만을 보다가 외국의 문화를 경험하면서 우물 안의 개구리라는 것을 알게 된다. 모두가 그렇게 살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시골에서 살아보아도 다르지가 않다.
주어진 인생을 자본주의에 길들여서 살아가는 것이 좋은 것인지 아닌지는 스스로 분별해야 한다는 것을 작품은 말한다. 화자는 죽음의 순간에 바위에서 처음으로 깨닫는다. 자신에게 필요한 것은 휴식이었다는 것과 얼마나 피곤했는지도 그제야 알게 된다. 피곤하다는 신호를 느끼지도 못할 정도로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두에게 질문을 던진다. 방향을 돌리고 잠시 멈추면서 또 다른 길도 가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것을 보는 능력도 필요한 시대이다. 삶과 죽음은 함께 우리와 하는 것이지 죽음이 아주 먼 곳에서 나를 기다린다는 착각으로 살아가서도 안된다.
강렬하지만 아프지 않은 것, 놀랄 정도로 편안하고 좋아지는 것, 기분이 좋아지는 것, 더 따뜻해지는 것의 존재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빛은 어둠과 상반되면서 빛은 그렇게 우리를 그러한 것들을 무한히 느끼게 해준다. 불안에 침식당해서 경쟁하고 비교하면서 달리는 자본주의에 얼마나 무방비로 노출되면서 살아가는지도 고찰하게 된다. 사교육비와 어린 시절까지도 경쟁으로 내몰아서 황폐해지는 영혼을 자랑하는 것이 정답은 되지 못한다. 어둠은 천사와 같은 모양으로 우리들을 감싸며 착각하게 한다는 것도 소설에서 언급된다. 악마인지 천사인지 도통 감을 잡을 수가 없는 상황이다. 빛으로 다가서는 것의 존재까지도 분별하는 힘이 무엇보다도 필요해진다. 온기를 느낄 수 있는 것들을 연상하면서 편안해지는 것들도 떠올려보게 한다. 어둠에 빼앗겨서 쉬지도 못하는 인생을 살아서는 안되는 소중한 인생이다.
막힘없이 술술 읽혔던 소설이다. 작가가 집필한 의도를 제대로 이해할수록 문장은 멈출 수가 없는 하나의 문장이 되어 마지막 페이지를 덮게 한다. 작가의 의도를 이해할수록 깊게 들어마시는 작품이 된다. 정신없이 살다가 문득 홀로 검은 숲속에 있을 순간이 오늘이 될 수도 있음을 알게 해준다. 자동차는 인생이며 달리는 것만이 인생의 정답이 아님을 알려주는 비유가 된다. 뒤늦게 화자는 후회하기 시작한다. 주변의 집들도 상징적이다. 사람이 살지 않는 집들, 커튼이 내려진 집들, 황폐한 집들은 무너져서 사람이 산 흔적을 찾을 수가 없는 상황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영혼이 집으로 상징성을 지닌다. 경쟁과 비교하며 달리는 인생, 숫자로 불안을 침식시키는 자본주의를 보게 한다. 『월든』의 기차가 떠오른다. 카프카의 『돌연한 출발』도 생각나게 하는 소설이다. 욘 포세가 카프카와 릴케를 번역하는 일을 하였다는 사실도 접목하게 된다. 차분해지게 하는 소설이다. 시가 기도라고 말하는 카프카와 욘 포세의 말도 상기하면서 소설의 문장들도 기도가 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나는 나일 뿐이라고 대답하는 목소리가 있다. 온화함과 충만함, 사랑을 떠올리게 하는 목소리이다. 그 목소리를 항상 여기 있다고 말한다. 그 목소리를 오늘도 듣고 있는지 확인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일깨워준다. 텅 빈 눈으로 살고 있지 않는지, 생각 없이 경쟁만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도 살펴야 한다. 늦가을, 늦은 저녁 시간, 쌀쌀한 날씨, 눈까지 내리는 순간은 이미 늦은 깨달음이 되어버린다. 인생은 순식간에 지나쳐버리기에 늦지 않은 시간에 진짜 필요한 것들을 찾고 즐기는 인생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오늘이 한없이 소중해지고 충만해지는 것을 느끼게 해주는 작품이다.
나는 항상 여기 있고, 여기에는 항상 내가 있습니다...
온화함과 깊은 충만함이 느껴지는 목소리.
사랑이라 부를 수 있는 그 무언가가 담겨 있는 목소리.
아무 의미가 없는 단어가 있다면
바로 이 사랑이라는 단어인 것을 39
갇힌다는 것은 타의에 의한 것.
자신을 스스로 가둘 수는 없다.
스스로 가두는 일도 가능할까,
나는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스스로 나를 가두었다.
단어와 단어, 말과 말,
지금 나는 홀로 있다.
나는 완전히 홀로 서 있다. 39
내게 가장 필요했던 것은 이런 휴식이었으리라.
내가 얼마나 피곤했었는지 이제야 알겠다.
생각보다 훨씬 더 피곤했던 모양이다...
바위. 이것은 마치 나를 위한 조그마한 집 같다. 71
당신은 누구인가요. 나는 나일 뿐입니다. 44
불가해하다. 세상에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수없이 많다 65
지력과 이성을 넘어서는 일이다. 나는 이해할 수 없다...
마치 모든 일에 한계가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
세상일은 이것이 아니면 저것이다.
이것 또는 저것, 어머니 또는 아버지,
순백색의 존재 또는 검은색 양복의 남자 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