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두근두근 내 인생
김애란 지음 / 창비 / 2011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김애란, 김애란 참 많이 들었다. 그러니 그 좋다는 소설집 달려라, 아비를 사서 읽을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나는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다시, 침이 고인다를 읽었다. 안타깝게도 그의 상상력과 감성이 내 마음에 와닿지는 않았다. 하긴 나는 김애란뿐만 아니라, 도통 2000년대의 한국 소설에 적응하지 못하는 박제된 독자인 듯하다. 아마 내가 박제된 독자가 된 데는 소설의 문장에 대한 내 무딘 감수성이 큰 원인일 것이다. 부끄럽게도 나는 문장에 대한 심미안이 없다. 그러니 문장이 아름답다는 글에는 난 항상 무덤덤하다.

 

   작년(2011년)에 문단의 가장 큰 이변이 황석영, 박범신 등 노장들의 소설과 나란히 걸린 김애란의 '두근두근 내 인생'이 평단과 대중의 관심을 두루 받았다는 것이라는 걸 기사로 본 적이 있다. 그런 기사를 읽으니 소설은 안 읽었어도 김애란이라는 소설가는 이미 내 마음 속에서 대단한 작가로 자리잡고 있었다.(이렇게 귀가 얇다.) 그런데 정작, 김애란의 소설 읽기는 연속해서 실패한 경험이 있어서 선뜻 손이 가지 않다가 '결국엔 읽어야 할 책'이라는 어떤 끌림때문에 작년에 거의 마지막으로 책을 살 때 슬쩍 끼워 넣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두근두근 내 인생에 대해 쏟아지는 찬사에 비해서는 역시나 좀 덤덤했다. 나빴다는 게 아니라, 폭죽처럼 쉴 새 없이 터진 찬사에 나도 모르게 큰 기대를 하면서 소설을 펼쳤나 보다. 그녀 특유의 재기발랄한 문장이 반짝반짝 빛나는 소설이라는 평을 해 놓은 평론가들의 양식이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 정도는 아니였는데, 이런 생각에 머릿속이 복잡했다. 분명히 나랑 똑같은 문장들을 읽었을텐데 평론가들은 역시나 허풍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평론가들은 주말에도 바빠서 개그콘서트도 안 보나 봐!

 

   소설의 내용은 열일곱에 어쩌다 보니 자식을 낳게 된 부모와 그들의 아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소설 속의 부모는 이제 서른네 살이니 그 아들은 열일곱 살이다. 열일곱에 낳은 그 아들은 이제 그 옛날 부모가 자기를 낳았던 부모의 나이가 되었다. 그런데, 그 아들은 희귀병인 조로증에 걸려 몸은 이미 여든 살이다. 소설은 가장 어린 나이에 부모가 된 사람과 가장 빨리 늙는 아들이 나누는 삶과 사랑, 늙음, 그리고 죽음의 의미를 잔잔하게 묻는다. 

 

  소설을 읽으면서 인상적이었던 점 두 가지를 꼽는다면, 소설의 각 장면들이 무척 선명한 인상을 남긴다는 것과 인생에 대한 젊은 작가의 상상력이 풍부하다는 것이다. 소설의 각 장면들이 꼭 구체적이고 세밀한 묘사로 이어지고 있는 것은 아닌데도, 각 장면의 모습이 선명하게 머릿속에 떠올려진다. 경쾌한 스텝을 밟는 춤꾼을 보고 있는 관객의 마음처럼, 소설의 속도감 있는 내용 전개는 독자의 마음을 살짝 들뜨게 만들어준다. 또한 나는 인간의 삶과 사랑, 늙음, 죽음에 대한 이제 갓 서른을 넘긴 이 젊은 작가의 상상력에 놀랐다.  

 

   예컨대, 다음의 문장들을 뽑아 읽어보면 더욱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머니의 얼굴에는 가임기 여성의 자신만만함과 자랑스러움이 그득했다. 자기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몰라 '진짜 권력'처럼 보이는 청춘의 민낯이었다. (37쪽)

 

내 생각에 그녀들은, 아마 미안해하고 있었던 것 같다. 활달함 혹은 친절함이란 누군가와 무의식적으로 이별을 준비할 때 나오는 태도 중의 하나니까.(41쪽)

 

나는 어머니의 짐승 같은 소리를 듣고 마음이 놓였다. '아, 나는 나와 비슷한 울음을 가진 사람들 사이에 태어났구나'라는 것과 '아, 내가 어머니께 무언가를 느끼게 만들었구나'하는 안심이 들어서였다. 그게 무엇인지 알 수 없어도, 어머니의 눈물은 적어도 내가 전혀 무가치한 존재는 아닐 거라는 믿음을 주는 그런 눈물이었다. (45-46쪽)

 

미숙한 아이의 눈을 통해 세상을 경험할수록 성숙해지는 부모...... 어딘지 원인과 결과가 바뀐 것 같지만 그건 정말 놀라운 일이었다. 가장 어리게 사고할수록 가장 지혜로워지는 일들이 매일매일 일어났으니 말이다. (63쪽)

 

진짜 어른. 그런 게 어떤 건지 알 수 없어도, 심지어는 오랫동안 그런 대우를 받고 싶었으면서도, 아버지는 자신이 그걸 진심으로 원한 적이 한번도 없다는 걸 깨달았다. 아버지는 인생이 뭔지 몰랐다. 하지만 어른이란 단어에서 어쩐지 지독한 냄새가 난다는 건 알았다. (중략) 아버지가 어른이란 말 속에서 본능적으로 감지한 것, 그것은 다름아닌 외로움의 냄새였다. 말만 들어도 단어 주위에 어두운 자장이 이는 게 한 번 빨려들어가면 다시는 헤어날 수 없을 것 같은 무엇이었다. (67쪽)

 

'사람들은 왜 아이를 낳을까?'

......

'자기가 기억하지 못하는 생을 다시 살고 싶어서.' (79쪽)

 

고작 열일곱살밖에 안 먹었지만, 내가 이만큼 살면서 깨달은 게 하나 있다면, 세상에 육체적인 고통만큼 철저하게 독자적인 것도 없다는 거였다. 그것은 누군가 이해할 수 있는 것도, 누구와 나눠가질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몸보다 마음이 더 아프다'는 말을 잘 믿지 않는 편이다. 적어도 마음이 아프려면, 살아 있어야 하니까. (96쪽)

 

"누군가가 다른 사람을 사랑할 때, 그 사랑을 알아보는 기준이 있어요."

어머니의 두 눈은 퉁퉁 부어 있었다.

"그건 그 사람이 도망치려 한다는 거예요."

"......"

"엄마, 나는......엄마가 나한테서 도망치려 했다는 걸 알아서, 그 사랑이 진짜인 걸 알아요" (143쪽)

 

"그 느낌이 정말 궁금했어요. 어, 그러니까...... 저는...... 뭔가 실패할 기회조차 없었거든요."

"......"

"실패해 보고 싶었어요. 실망하고, 그러고, 나도 그렇게 크게 울어보고 싶었어요." (172쪽)

 

'이 아이, 모든 연애의 시작엔 반드시 음악이 있다는 걸, 벌써부터 알아차린 걸까?' (189쪽)

 

"근데 내가 마흔 넘었을 때 딱 그런 생각이 들더구나. 이제 내 몸은 나빠질 일만 남았다, 하는. 몸이 좋아 몸이 있다는 것도 모르고 산 게 지금까지의 삶이었구나, 앞으로는 뭔가 잃어버릴 일만 남았겠구나 하고 말이야." (298-299쪽)

 

'쿵...... 쾅...... 쿵......쾅......'

약하고 희미하지만 분명 거기 있는 소리였다. 우리는 말없이 서로의 파동 안에 머물렀다. 그 자장 끝 맨 나중에 그려지는 동심원이 토성 주위의 고리처럼 우리를 오목하게 감쌌다. 아주 오래전, 어머니의 뱃속에서 만난 그런 박자를, 누군가와 온전하게 합쳐지는 느낌을 다시는 경험할 수 없을 줄 알았는데, 그것과 비슷한 느낌을 줄 수 있는 방법 하나를 비로소 알아낸 기분이었다. 그건 누군가를 힘껏 안아 서로의 박동을 느낄 만큼 심장을 가까이 포개는 거였다. (320쪽)

 

 

   이렇게 인생에 대한 예리한 상상력이 가득 담긴 문장을 옮겨 쓰고 보니, 이 소설에서는 재미뿐만 아니라 깨달을 수 있는 내용이 참 많다는 생각을 한다. 내 엉뚱한 생각의 뒷통수를 치는 내용도 있고, 막연하고 흐릿하던 생각의 안개가 걷히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나도 이젠 어느덧 이런 문장들을 읽으며, 마음속으로 '맞아, 맞아' 하며 고개를 끄덕이거나, '인생이그렇지' 하며 씁쓰레할 나이가 된 것이다.

 

   그러니 굳이 빛나는 문장이 아니어도 좋다. 문장의 미감(美)에 아둔한 이 독자가 '재기발랄한 문장이 반짝반짝 빛나는 소설' 이라는 평론가들의 밝은 눈을 따라가지 못해도 굳이 실망할 필요는 없다. 나에게 이 소설은  또 다른 측면에서 즐거움을 주기 때문이다. 앞서 얘기했던 인생에 대한 아포리즘 같은 문장들만으로 소설의 재미는 충분하다. (이렇게 쓰고보니 그게 그거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고 보니 글의 앞부분에 썼던 내용은 좀 야박하지 않나 싶다. 그 야박함은 어쩌면 나에게만 쉽게 열리지 않는 문장에 대한 심미안을 갖춘 그들에 대한 눈먼 질투심일 것이다. 하긴 그 질투심의 화살은 과녁을 한참 빗나가긴 했지만!


댓글(2)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2-01-28 23: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1-29 10: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도가니 - 공지영 장편소설
공지영 지음 / 창비 / 2009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지난 이틀 동안에 도가니를 읽었다. 책은 제목과 저자만 알고 있었고, 이 소설을 원작으로 만든 영화가 폭발적인 흥행에 힘입어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몰고 온 정도는 이미 알고 있다. 물론 소설은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는 사실도. 그 사실이 독자들과 관객들을 분노케 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그래도 도가니를 읽을 생각은 여태껏 못 했다. 그러다가 대학병원 한 귀퉁이의 가판대에 놓인 도가니를 보고 망설이다가 집어 들었다.(가판대 앞에는 30~70% 할인이라는 광고가 큼지막하게 붙어 있었으나, 정작 계산할 때는 '신간'은 제외라는 말을 들어야했다. 어쩔까 하다가 이왕 집어든 거 '달려라 정봉주'와 함께 사들고 왔다.)

 

   굳이 리뷰를 쓸 생각은 없었으나 다른 사람들은 '도가니'를 어떻게 읽었나 싶어서 알라딘 리뷰를 눌렀는데, 리뷰가 무려 625개였다.(2012년 1월 20일 기준) 베스트셀러를 꼭 찾아서 읽는 편이 아닌 지라, 아마 지금까지 내가 읽은 책 가운데 가장 리뷰가 많이 달린 책일 것 같았다. '와, 리뷰가 엄청 여러 개 달렸네! 사람들은 이 책을 읽고 할 말이 많았나 봐' 이런 생각을 하면서 차례차례 리뷰를 읽어 보는데, 아쉽게도 내가 느낀 어떤 감정과 비슷한 내용은 찾을 수가 없었다. (보통은 리뷰를 쓰기 전에 다른 사람은 어떻게 썼나, 싶어서 리뷰를 읽어 보고, 내 맘에 드는 리뷰가 있으면 추천하고 나는 글을 안 쓴다. 훌륭한-나와 비슷한 생각을 한- 리뷰가 있는데, 굳이 내 글까지 덧붙여서 사족을 만들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이 리뷰는 제목처럼 작품의 훌륭함에 대한 칭찬이 아니라, 책의 내용에 대한 아쉬움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쓴다. 알라딘에 올라와 있는 엄청난 칭찬 일색의 리뷰를 보면서 '어, 난 좀 아쉬웠는데...' 하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나의 이 아쉬움의 정체는 무엇일까? 뭔가 아쉬움은 있는데 아직 그건 지금까지도 잘 모르겠다. 뭐 어떻게든 쓰다 보면 조금은 그 실체를 드러낼 수도 있겠지!

 

   내가 읽은 공지영 작가의 전작은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이었다. 나는 '우행시'를 읽고는 작가가 좀 더 용감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이 책도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우리 사회에 사형제도에 대한 반대 주장을 폭발시켰다. 그야 책을 읽었으면 당연한 생각의 수순이 아닌가 싶었다. 법원의 판결로 사형수로 확정된 사람이 살인범이 아니라는 소설의 결말은 독자들에게 사형제에 대한 반대 논리를 의심 없이 전파시킨다. 이 책을 읽은 사람은 사형제에 대해서 회의적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소설의 결론을 윤수가 살인범이라는 것으로 처리했다면 어땠을까? 윤수는 살인범이지만, 그도 여느 인간처럼 자신의 지난 잘못을 후회하고 뉘우치고 있으며, 다시 한 번 살고 싶다는 욕망을 지닌 존재이며, 사랑하고 사랑받는 어떤 한 인간으로 그려졌다면 어떤 반향을 불러왔을까? 만약에 그랬다면 독자들은 사형제에 대해 반대 논리를 의심 없이 받아들였을까? 아마 그렇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잔인하게 사람을 죽였잖아', '살인자를 똑같이 국가가 살인(사형)하는 건 야만적이야'라는 찬반 논란이 조금 더 거세게 일어났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작가는 조금 더 안전한 선택을 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게 아니라면 소설을 자신의 사형제 반대에 대한 신념을 사회적으로 확산시키는 수단으로 삼았을 수도 있겠다. 그런 태도가 좋은 사람도 있겠지만, 나에게는 좀 아쉽다. 나에게 소설(책)은 내 인식의 틀의 경계를 넘나들며 '고민'하고 '갈등'하게 하는 도구이기 때문이다. 내가 분명하게 본 것을 오히려 흐릿하게 만들어 보여 주는 것, 그게 소설을 읽는 이유다. 당연한 주장은 내 마음이 편안하게 하지만, 내 생각을 확장시켜 주지는 않는다.

  

   도가니를 읽은 리뷰랍시고 어줍잖은 글을 끄적거리면서 '우행시' 이야기만 냅다 하는 게 좀 이상하긴 해서 이제 책 이야기를 좀 해 볼까 한다. 여러 사람들의 찬사와는 달리 나는 도가니를 읽는 내내 좀체로 감정이입이 좀 안 됐다. 물론 독자를 소설의 상황에 끌어당기는 흥미진진한 내용과 이를 속도감 있게 펼쳐나가는 전개 솜씨야 이미 정평이 난 데로 훌륭했지만, 나는 소설의 인물들에게 들어갈 수가 없었다. 읽으면 읽을 수록 점점 더 소설의 인물들 감정선 밖으로 밀려나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니 소설의 상황에서 자꾸 격리되는 듯 했다.(희곡에서 말하는 '소격 효과'라는 것인가?) 소설을 읽으면서 '어쩜 이럴 수가 있지? 와, 미치겠다, 어떻게 이런 나쁜 놈들이...' 이런 '감정'이 드는 것이 아니라, '음, 화가 낫겠네. 세상엔 이런 나쁜 놈도 있겠지? 기득권자들의 행태가 원래 저렇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러면 왜 나는 몰입이 아니라, 격리되는 느낌이 들었을까?(그것도 제목이 도가니인데...) 위에 썼던 그런 '감정'이 아니라, 이런 '생각'이 들었던 것일까? 아마도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캐릭터' 때문인 것 같다. 이 소설의 등장인물은 명확하게 선과 악의 두 편으로 갈라져 있다. 나쁜 놈들에게는 근원적인 악의 야비함과 야만성'만'이 드러나 있고, 정의로운 자의 편에는 진실과 정의에 헌신하는 희생적인 면모만 드러나 있다.(강인호는 예외라고 할 수 있는가? 내가 볼 때는 전혀, 그렇지 않다. 그도 온갖 개인적인 불안과 어려움을 무릎쓰고 용감하게 진실을 추구하는 편에 뛰어들었으니까 말이다.) 나는 이런 사실이 불편하다.

 

   물론 이런 반론도 가능하다. 이 소설은 실화를 바탕으로 했기 때문에, 최대한 사실에 근접한 내용으로 구성했던 것 뿐이라고. 또, 아직도 우리 사회에는 그 '상식... 그런 게 없는, 말도 안 되는' 일도 많이 일어난다고. 실제 사회에서 나쁜 놈들은 정말 소설에 묘사된 것보다 더 야비하고 파렴치한 짓을 일삼는 자들이라고. 그러니 소설은 단지 그 실체적 진실을 보여주려고 했을 뿐인데, 인물의 성격이 선과 악이 분명해서 불편하다느니 이런 투정(?)은 너무 한가한 소리라는 타박도 가능하다.

 

   그런데 이 소설이 사실을 왜곡하고 있다며 검찰에 고발하겠다는 모 정당의 정치가를 소설에 대한 최소한의 개념도 없는 사람이라고 비웃는 게 당연하다면, 소설이 현실을 그대로 드러내야 할 필요는 없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본다. 한편으로는, 소설가가 일부러 현실 그대로의 모습을 소설에서 묘사했을 수도 있다. 우리 사회에 얼마나 나쁜 놈들이 있는(많은)지, 그들이 어떻게 기득권을 유지해 나가는지, 그들의 연결시키는 사회적 고리들의 참모습은 또 어떤지를 보여주기 위한 의도일 수도 있다. 

 

   자, 여기서 나는 이 소설이 다시 '우행시'의 결론과 묘하게 겹치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한다. 독자들에게 사형제의 찬반에 대해서 조금 더 정공법-윤수가 살인범이라는 결말로-으로 물어봤으면 하는 아쉬움이 들었던 것처럼, 가해자들과 그들의 편에 선 자들에게서 보이는 '어쩔 수 없음'을 들여다 보거나, 피해자들과 그들의 편에 선 자들에게서 나타나는 '어쩔 수 없음'도 함께 나타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어떤 상황에서도 정의를 위해 헌신하는 모습은 아름다워서 경외감이 들게 하지만 그만큼 독자의 고민의 영역을 줄인다. 반대로 오로지 악마의 화신 같은 모습은 추악해서 분노케하지만 그 감정은 즉자적이다.(물론 이 즉자적인 분노가 한국 사회 특유의 역동성과 결합해서 이번에는 바람직한 결과(?)를 만들어 내기도 했다.)

 

   소설은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무감각한 상황을 고민하게 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그런 점에서 비춰보면 도가니는 조금 아쉬움이 남는 작품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공지영 작가의 현실 인식이나 거침 없는 소신은 그 자체로 존중받아 마땅하지만, 꼭 소설의 주제까지 그래야 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더구나 읽는 이들에게 별다른 고민의 여백을 남겨두지 않는 구성이라면 더욱 그렇다.

 

   도가니라는 소설과 영화가 이끌어 낸 현실의 변화를 보면서 새삼 문학(예술)의 힘을 느꼈다. 이를 이끌어 낸 소설가의 집념과 노력에 존경을 보내고 있다.(그래서 책 샀다.) 그것은 그것대로 훌륭한 일이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나에게는 조금 아쉬움이 남는 그런 소설이다.

 

*사족* 원래 재미 있게 잘 읽히는 소설인데, 도가니에 대한 칭찬은 다른 리뷰어들이 무척 많이 해 놓았길래, 나는 그냥 이렇게 느끼는 사람도 있었다, 것을 알리는 정도로 쓰려고 했는데, 쓰다 보니 조금 더 나간 점도 있는 것 같다. 워낙 재주가 없으니 할 수 없는 일이지만! 


댓글(4)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2-01-22 19: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1-22 23: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열매 2012-01-23 0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느티나무 님~~새해복 많이 받으세요..^0^ 새해 첫 손님이에요. 선물 없어요??ㅋㅋ

느티나무 2012-01-23 02:19   좋아요 0 | URL
조금 특별한 방학이지요? 인생에서 이런 좋은 시간들이 다시 올까요?ㅋㅋ 멋진 시간, 행복한 기억 많이 만들길 바래요...선물? 음, 다음에 학교에 오면 이모 친구랑 같이 제 자리로 찾아 오세요. 선물 줄게요.
 
장미의 이름 - The Name of the Rose
영화
평점 :
상영종료


<권력과 웃음의 상관성>

 

   승리의 2012년을 시작한 지 열흘 째! 몸은 감기로 계속 고생중이지만, 초저녁에 잠깐씩 들었다가 깨는 잠 때문에 한밤 중에도 깨어있는 일이 요즘 잦다. 책을 읽기도 하지만, 그것도 시들해지는 날이면 가끔 '다음'에서 영화를 다운받아 보게 된다. <루키>라는 영화를 보려고 했으나 다운로드 목록에 없어서 결국 고른 영화가 <장미의 이름>이다.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은 예전에 읽었지만, 내가 예전에 읽어 온 책이 대부분 그랬듯이  스릴러 넘치는 소설이었다는 정도만 머릿속에 어렴풋이 남아 있었다.(영화를 보다 보니까 조금씩 줄거리가 기억이 떠올랐다.)

 

   영화를 보면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이 수도원 수사들의 죽음의 원인을 알아 낸 윌리엄 수사와 호르헤 수사와의 논쟁이었다. 호르헤 수사는 수도원의 장서관에 보관된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제 2편'에 관심을 보이는 수도사들을 죽인다. '시학 제 2편' 아리스토텔레스의 희극론에 대한 이야기인데, 호르헤 수사는 종교(기독교)는 인간의 두려운 마음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데, 바로 웃음이 그 인간의 두려움을 없애주기 떄문에 이 책을 읽었던, 또는, 읽으려던 수사를 죽이는 것이다. 웃음은 종교(권력)의 가장 큰 적으로 생각했다. 결국 호르헤 수사는 장서관에 불을 지르고 수많은 책들과 함께 죽음을 선택한다. 

 

   이 장면의 대사를 듣는 순간 번개 같이 머릿속에 떠오른 한 구절은 한나 아렌트가 했던 "권위의 가장 큰 적은 경멸이며, 권위를 훼손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웃음이다." 라는 말이다. 확실히 웃음에는 두려움을 없애는 극복하는 에너지가 있다. 또한 웃음의 전파력은 강력한 것이라 현실의 권력은 웃음을 두려워하는 것 같다. 이를 증명하는 실례가 바로 나는 꼼수다(이하 '나꼼수')가 아닐까? 

 

   사람들이 나꼼수에 폭발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은 나꼼수가 전달하고 있는 내용이 거대 보수 언론이 외면하던 사실인 까닭도 있지만, 그런 메시지를 전달하는 태도나 방식에 있다. 이들은 현실과 소설-합리적 추론-의 영역을 넘나들지만, 언제나 메시지를 전달하는 태도는 거침 없이 당당하다. 소위 말해서 '쫄지 않는다'. 여기에 적절한 타이밍에 웃음이 더해지면, 뭔가 조마조마하던 청취자도 그 순간 어느새 권력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진다. 그러면서 스스로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주눅들어 살았구나, 하는 생각을 해 보게 된다. 

 

   결국 나꼼수의 힘은, 이 웃음에 있다. 이 나꼼수의 웃음은 이제 공공연히 전파되어 사람들이 더 이상 권력의 눈치를 안 보게 되었다. 나꼼수의 웃음이 사람들에게서 두려움을 없애버린 것이다. '쫄지마, 씨바',는 이제 내 친구가 새해 문자 메시지로 보내기도 하는 상황이 되었다. 답장으로, '그래 씨바!'로 답장해야 할 것 같은 분위기다. 이제 많은 사람들이 '승리의 2012년'을 기대하고 있다. (1년 전을 생각해 보면 정말 상전벽해가 아닌가 싶다.) 이 모든 게 가카 때문이 아니라, 그 웃음 때문이다. 2012년 말에, 웃음이 우리를 승리로 이끌었다고 말할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느티나무 2012-01-18 2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이페이퍼에 썼던 글이지만, 리뷰로 옮기는 게 안 돼서 다시 똑같은 글을 리뷰로 옮겼다.ㅠ책이든 영화든 종류를 가리지 않는 잡식성이 되어 가는 걸까?ㅋ

2012-01-19 16: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원자력 신화로부터의 해방 - 개정판
다카기 진자부로 지음, 김원식 옮김 / 녹색평론사 / 2011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세계적 반핵운동가이자 시민과학자인 다카기 진자부로 박사의 유언적 저서'라는 부제가 붙은 원자력 신화로부터의 해방,은 내가 2011년에 마지막으로  읽은 책이다. 해마다 연말이면 한 해를 돌아보는 기사에는 원자력발전소에서 일어난 사건이나 사고가 양념처럼 등장하지만, 올해는 일본의 대지진으로 인한 후쿠시마 원전 사고 때문에 특히 더 원자력발전소에 대해 세계적인 관심이 모아지기도  했다. 아마도 먼 훗날, 역사가들은 2011년을 원전에 대한 세계인의 인식이 전환되는 해로 기록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2011년을 마무리하는 12월의 중순에, 세계적인 탈원전의 흐름을 거스르면서 우리나라는 영덕과 삼척 인근에 새로운 원자력 발전소 건설 계획을 발표했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전 세계에서 처음으로 원자력발전소 건설 계획을 밝힌 것이다. 원전의 안전 문제에 대한 불안감이 어느 때보다 커진 상황인데도, 항상 '한국 원전은 (일본과) 다르다, 안전하다'고 입버릇처럼 말한다. 물론 이 말을 믿는 국민은 별로 없을 테지만, 어쨌든 원자력발전소는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단 우리 동네만 빼고!) 하는 생각을 가지는 것도 사실이다. 이는 원자력에너지에 대한 우리 정부의 오랜 홍보전략이 효과적이라는 방증이다. 아울러 우리들은 여전히 원자력에너지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기도 하다.  

 

   우리 학교에 토론논술 교육 전문가이신 선생님이 계신데, 겨울방학 중에 고등학교 1학년 학생을 대상으로 논술 특강을 해 보자는 제안을 하셨다. 배운다는 자세로 얼른 참여하기로 했고, 수업을 준비하는 선생님들끼리 모여서 논술 특강의 주제를 생각해 보기로 했는데, 대체로 <원자력 시대, 이대로 괜찮은가?>라는 주제가 시의적절하다는 의견이 대세였다.

 

   각자 역할 분담을 했는데, 학생들에게 읽힐 책 선정은 내 몫이었다. 나도 원자력 분야에 대해서는 읽어본 책이 없는지라 알라딘을 돌아다니며 눈대중으로 고른 책이 세 권이었다. 우리나라의 원자력에너지 현황을 비교적 객관적으로 소개하고 있는 (것 같은) <기후 변화의 유혹, 원자력>을 주 텍스트로 삼았고, 원자력발전을 옹호하는 입장의 <원자력, 대안은 없다>, 원자력발전의 효용성을 부정하는 <원자력 신화로부터의 해방>을 부텍스트로 삼았다.

 

   우연히 주문한 부텍스트인 <원자력 신화로부터의 해방>이 먼저 도착했기 때문에 읽기 시작한 책인데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했다가 점점 집중력이 생기면서 며칠에 걸쳐서 천천히 읽었다. 나로서는 새로운 세계에 발을 들이는 것이라 읽는 내내 흥미로웠고, 막연했던 믿음-신화-이 구체적인 사실로 바뀌는 재미도 함께 느꼈다.

 

   이 책은 한 평생을 일본의 원자력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해 온 다카기 진자부로(이름은 낯설었으나 저서 목록을 보니, <시민과학자로 살다>는 책은 이미 알고 있는 책이었다.)의 주장을 총체적으로 정리한 글이다. 일반 시민들의 원자력에 대한 문제 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한 성격의 책답게 전문적인 용어는 거의 없고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도록 쓰여졌다. 책의 성격에 맞게 내용도 원자력의 개념과 역사를 개괄하고, 우리가 원자력에너지라고 할 때 일반적으로 떠올리는 '무한하다, 깨끗하다, 안전하다, 우수하다, 경제적이다' 라는 이미지가 사실과 다른 거짓된 믿음이라는 뜻의 '신화'라고 비판하고 있다. 그리고 이런 신화를 유지하기 위해서 일본 정부를 비롯한 원자력 옹호 세력들이 어떤 전략을 쓰는지도 구체적으로 지적하고 있다. 또한 원자력 사고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늘 보여주는 정부의 무능한 대처도 함께 꼬집고 있다.(이 책 보면서 느낀 건데, 일본 정부와 우리나라 정부가 원자력발전 정책에 대처하는 방식이 어쩌면 그리도 똑같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서 이렇게 하라고 누가 가르쳐주나?) 

 

   이 책에 따르면 원자력은 다른 에너지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형성 배경(화학반응이 아니라 핵반응)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또한 처음 핵분열 현상을 발견하고는 이를 원자폭탄 같은 무기로 활용하기로 했다는 것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것이다. 종전 이후, 핵의 평화적 이용이 강조되었으나 초기에는 누구도 평화적(상업적) 이용에 회의적이었지만, 1960년대 이후 적극 도입을 주장하는 정부의 강력한 정책적 뒷받침을 받아 원자력 발전소가 처음 건설되기 시작했다.

 

   처음엔 원자력에너지를 '발전'뿐만 아니라 다양한 분야에 이용하기 위한 연구가 진행되었으나 그 희망섞인 기대에도 불국하고 결국 그 생산과정에서의 위험성 떄문에 '발전' 분야로만 제한되고 말았다고 한다. 이후 원자력발전소를 도입한 정부의 강력한 후원 아래, 1980년대말까지 원자력발전소에 대한 '신화'는 그 양상을 달리하면서 지속적으로 강화되어 갔으나, 원자력발전의 잇단 사고와 함께 이에 대처하는 정부의 무능력을 보면서 국민들이 서서히 그 신화를 의심하게 되었고, 이때부터 산업으로서의 원자력 시대는 서서히 사양화의 길을 걷게 된다고 주장한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그렇듯 나 역시도 원자력발전에 대해서는 막연히 경제적일 거라는 생각을 해 왔다. 사람들이 지금과 같은 생활 수준을 유지하려고 한다면 에너지원으로서의 원자력은 '필요악'이라고 믿었다. 신재생에너지에 대한 관심이 점차 높아지고 있지만, 당장은 대안 에너지-아직은 주류가 될 수 없는- 수준에 그치고 있는 것을 과장하는 것이라고 짐작하기도 했다. 전체 에너지 생산량에서 신재생에너지가 차지하는 비중이 지금의 원자력발전소의 비중에 버금가려면 아직도 많이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게 아닌가 하는 추측을 하기도 했다. 따라서 지금은 생활 수준을 유지하려면 원자력에너지의 위험성을 감수해야만 한다는 것이 내가 내린 막연한 결론이었다.

 

   그런데 이 책은 좀 다르게 설명한다. 앞으로 더욱 전력자유화 추세가 본격화된다면 초기 자본이 많이 드는데다가 원자력 발전의 난제인 핵폐기물 문제(처리 비용이 엄청날 것으로 예상된다.)를 떠안아야 한다는 점에서 그 어떤 전력회사도 원자력 발전에 뛰어들지 않을 것이라고 단언하고 있다.따라서 이익을 위해선 지옥에라도 찾아가는 기업이 포기하는 사업이 원자력발전 사업이기 때문에 이 분야는 경제성이 없다는 것이다.  현존하는 매장자원의 경제성이야 말할 것도 없고, 곧 태양에너지를 비롯한 신재생에너지의 경제성도 엄밀히 계산하면 지금의 원자력에너지의 경제성에 비해 떨어지지 않는다고 한다.

 

   이 책을 읽고 나면 원자력 에너지를 유지해야 할 이유가 전혀 없는데, (사양화의 길을 걷고 있다고는 하지만) 왜 원자력의 시대는 지금도 계속 되고 있는 것일까? 이 책에 따르면 원자력 에너지 도입은 경제성이든, 안전성이든, 지속가능성이든 모든 측면에서 문제가 많은데 왜 일본 정부는 이를 고집하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을 가질 수 밖에 없었다. 또한 1960년대 초반 일본 정부의 강력한 정책적 지원으로 발전회사에서 원자력 발전을 시작하게 되었다는데, 일본 정부가 재벌에 엄청난 특혜를 베풀면서까지 원자력 발전소를 짓도록 해야할 어떤 필연적인 이유가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더구나 일본은 원자폭탄의 피해당사국이 아닌가? 이런 상황에서도 정부가 원자력에너지를 서둘러 도입하려는 것을 잘 설명할 수 없을 것 같다.

 

   오히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반대편의 주장, 즉 원자력을 옹호하는 세력의 논리를 들어보고 싶었다. 다카기 진자부로 박사의 말처럼 원자력에너지에 대해 이렇게 명약관화(明若觀火)한 결론이 내려진다면 전 세계에 원자력발전소는 당장 가동을 중지해야 할 것인데, 독일 등 일부 국가는 가동중단을 선언하기는 했지만, 원전 강국인 미국, 프랑스를 비롯한 다른 여러 나라들은 원전 계속 정책을 밀고 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 나라들의 원전 옹호 논리는 무엇일지 궁금해졌다. 

 

   어쩌면 다른 분야에서처럼 과학계에서도 같은 현상을 두고도 다른 해석을 할 수 있거나, 자신의 논리를 뒷받침하는 데 필요한 자료와 통계를 이용해서 필요한 결론을 이끌어 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이 한 권의 책으로 섣부른 결론을 내리지는 않겠다. 아무리 도덕적으로 타당한 주장도 사실에 기초하지 않은 주장이라면 그 또한 거짓된 믿음인 '신화'에 불과한 것이 아니겠는가? 아직은 서로의 주장을 더 비교하고 검토해봐야겠다. (어째 결론이 좀 어정쩡하다.) 그러니 기다려달라, 아직은 생각할 시간이 더 필요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수업이 바뀌면 학교가 바뀐다 - 배움이 있는 수업만들기
사토 마나부 지음, 손우정 옮김 / 에듀케어 / 2006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수업이 바뀌면 학교를 바꾼다를 읽었다. 아마, 순대선생님이 쓴 리뷰를 본 게 기억에 남아있어서 고른 책이 아닐까 싶다. 230쪽 정도의 두껍지 않은 분량, 게다가 책의 크기도 보통 책보다 적고, 또 직업이 직업인지라 작심하고 읽으려 했다면-더구나 요즘엔 더더욱- 한 이틀 정도면 충분했을텐데 적어도 일주일은 걸린 것 같다. 

   그만큼 확 와 닿지는 않았단 얘기. 그러면서도 끝까지 읽은 걸 보면 뭔가 마음에 흔적이 남았단 얘기도 되겠다. 간단하게 내용을 정리하면서 마음에 닿은 이야기와 내 마음을 비켜간 이야기를 기록해 보려고 한다.  

   우선 내용 정리부터, 이 책은 학교라는 조직은 '외부에서 쉽게 바꿀 수 조직이 아니'라는 걸 전제로 한다. 그럼, 학교를 바꾸려고 할 때 어떻게 해야할 것인가라는 질문이 따를텐데, 저자는 책의 제목에서 정답을 일러주고 있는데, 바로 수업을 바꾸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 결론을 이끌어 내기 위해서, 학습만 이뤄지고 있는 교설 수업을 진정한 '배움' 이 있는 수업으로 바꿔야 한다.(1부) 수업 공개를 상시적으로 이뤄낼 수 있는 공개연구회를 개최한다.(2부) 국가나 교육청 단위의 주어진 교육과정을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교사와 학생의 '배움'의 과정에서 파생할 수 있는 총합학습을 중심으로 일상적 교육과정을 구성한다.(3부). 주장을 담은 내용은 여기까지고 4부에서는 1,2,3부의 학교 개혁의 성과가 있는 실제 사례를 소개한다. 

   먼저 내 마음에 닿은 이야기를 생각해 보면, 첫 번쨰로 1부에서 교실 수업에서 진정한 '배움'이 일어나고 있는가에 대한 문제 의식에 공감이 갔다. 그러면서 무엇이든 배우기면 하면 좋을 것이라고 막연히 기대하기 보다는 '배움'에 대한 교사의 방향성에 대한 안내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그러면서 '수동적 능동성'을 강조하고 있는데, 적절한 내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최근 들어 '자기주도적'학습이라는 말이 유행이다. 이름은 그럴싸한데, 이게 뭐 새로운 개념은 아니고, 공부는 스스로 해야 한다, 는 옛말의 최근 유행 버전일 것이다. 그런데, 이 말에는 결정적으로 '무엇'을 배울 것이냐, '어떻게' 배울 것이냐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이 빠져 있는 게 아닐까 싶다. 그러니까, 학생들의 배움에 '무엇'과 '어떻게'에 대한 길잡이 역할을 교사가 맡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배움'의 과정에서 중요한 것이 '관계'이다. 교사가 안내자가 되어야 한다고 해서 일제식학습을 지향하는 것은 아니다. 교사가 미처 예측하지 못한 아이들의 목소리까지도 거기에 담긴 의미를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고 하고 있으니 이런 수업이야 말로 진정한 '배움'이 싹트는 수업이라고 말할 수 있다.  

    두 번째로 '말하기'보다는 '듣기' 활동에 대한 강조도 인상 깊었다. 나도 독서동아리 활동을 하고 있는데, 소모임 활동을 몇 년째 해 오면서 항상 강조하는 게 '듣기'다. 고등학교 수업시간에 학생들은 앉아서 듣기만 한다는데, 동아리 활동을 해 보면 모두들 자기 이야기만 하려고 하지, 남의 이야기에 정성껏 귀를 기울이는 학생은 찾기가 쉽지 않다. 그런데, 모든 '배움'의 출발은 '듣기'이고, '듣기'야 말로 사실, '배움'의 주된 활동이 아닌가? 정말, '말하고 쓰는' 시간은 아무리 상호소통이 활발하게 일어나는 수업시간이더라도 그 비중이 '듣기'보다 많을 수는 없을 것 같다.(어쩌다 1~2시간 정도는 그럴 수도 있겠지만...) 

   세 번째는 연간 수업 공개를 상시적으로 운영하자는 데도 공감이 간다. 수업 공개를 통한 학교의 변화는 아마 비용과 효율 측면에서는 아마 최고의 제도가 될 것이다. 우리나라도 지금의 수업 공개 방식이나 제도가 1회적이고 보여주기식으로 진행되어 왔다는 건 두번 말하면 입 아픈 사실! 그래서 수업공개를 교과 동료교사들끼리 상시적으로 열어두고 모든 교사들이 수업 공개에 참여(?)할 수 있도록 운영하자는 제안은 좋다. 사실, 최근에 들어서 현장에서는 점점 이런 시도가 많아지고 있다. 유명무실한 경우도 있지만 전 교사 수업공개(동교과 교사 참석)는 기본이고, 학부모 수업 참관 주간 설정에다가 작년에 도입된 교원능력개발평가를 위한 수업공개까지... 이젠 적어도 수업 공개 활동이 교사들에게 '왜?'라는 의문을 품어야 하는 낯선 활동은 아니라는 것도 사실이다.  

  네 번째는 총합학습에 대한 관심도 좋았다. 총합학습의 개념이 구체적으로 와 닿지는 않은데, 교사나 학생이 관심을 가지게 된 특정한 주제에 대해 다양한 방면으로 깊이 연구해 보는 교육활동 정도로 이해하는 정도다. 주제 중심의 교육활동이라고 해야하나? 예를 들어, 초등 저학년 정도의 수업이라면 연필을 주제로 정했다면, 연필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연필은 어떻게 만들어 지는지. 연필과 비슷한 기능을 하는 것들은 무엇이 있는지...이런 것들을 범교과학습으로 묶어서 수업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올해부터 고등학교 1학년들을 대상으로 '창의적체험활동'이라는 과정을 한 주에 4단위(주당 4시간) 개설된다. 이 창체시간 안에다가 계발, 자치, 행사, 적응활동을 포함시키서 운영한다. 이 시간을 학교현장에서 새로운 수업 모델로 운영할 수 있다면 이 책에서 말하고 있는 총합학습이 운영대로 저자의 기대대로 교과학습의 변화까지도 불러일으킬 수도 있을 것이다.  

   나도 이 책에서 말한 '총합학습'이라는 개념이 맞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새학기에 계발활동으로 지역사회탐구반을 만들 계획을 세웠다. 지역내 여러 공공, 사회단체를 탐방하는 프로그램으로 계발활동 1시간으로 운영하기에는 시간이 부족할 것 같아 뒤에 이어지는 보충수업시간을 함께 묶어서 운영해 볼 결심을 했다. 학교에서는 진학공부에 별로 도움이 안 되는 일에 튀는 행동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겠지만, 이제는 그 정도 눈치주기는 슬쩍 외면할 수 있을 정도는 되었으니까. 결심이 섰을 때 자신감 있게 한 번 시도해 보자.  

   이제는 이 책의 내용 중에서 내 마음을 비켜간 이야기를 한 번 떠올려 본다면 대부분의 사례가 초등학교 중심이고 중학교의 사례도 제한적이라는 점이다. 아마도 일본의 사정도 우리와 비슷할텐데, 초중학교는 대학입시의 압박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우니까 다양한 형식의 수업모델의 개발하고 이를 현장에 적용하는 것이 가능하리라고 본다.  

   그러나 지금 우리나라의 상황을 보면, 특히 고등학교는 모든 수업 방법이나 내용이 입시를 떠나서는 유명무실해 지는 실정이다. 이런 상황은 개별 교사의 책임도 있겠지만 제도의 책임이 더 크다고 말할 수 밖에 없다. 입시 체제를 그대로 두고는 다른 어떤 처방이나 아무리 좋은 선진 시스템을 도입해도 학교 현장에 처방과 시스템이 적용될 때는 왜곡될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다. 지금까지의 수많은 교육개혁의 실패의 역사가 이를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수업 공개를 연간 운영한다고 할 떄 어쨌든 교사들의 협조를 이끌어 내는 것이 관건일텐데...일반 학교에서 이를 받아들일 수가 있을까? (책에서 소개된 소규모 학교거나 정말 학교의 변화해야할 절체절명의 위기상황이라면 모를까?) 단순히 수업의 공개 운영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수업을 통해 자신의 수업 상황도 함께 반성적으로 성찰해서 변화를 이끌어 내야 하는데 말이다. 그럴려면 모든 교사들이 이 수업 공개에 엄청난 에너지를 쏟아부어도 할 것이다. 이는 어떻든 구성원 모두가 간절히 필요하다고 느껴야 가능한 일이다. 역시나, 어려운 문제!(물론 책에서는 교사들이 수업 공개에 에너지를 집중하기 위해, 교장이 교사의 '잡무'를 다 없애버리는 혁명(?)이 일어난다. -이것이야 말로 혁명이다.) 

   마지막으로, 총합학습의 '배움'이 교과학습의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있다는 말도 쉽게 수긍하기 어렵다. 총합학습은 기본적인 시수가 교과학습에 비해 훨씬 적지만, 이 수업방법을 통해 일반 교과학습에도 총합학습의 방법이 적용되어 실질적인 교육과정 변화의 계기가 될 수 있다는 말인데, 내 경험상으로는 실제 결과는 그 반대가 되지 않을까 싶다.  주당 2시간 정도의 수업으로 전체 30시간  교과학습의 변화를 기대하는 건 무리가 아닐까 싶다. 교과학습의 틀을 변화시키지 않고는 총합학습도 교과학습의 구태를 답습하다가 사라지고 말 것이라는 우울한 전망이다.  

   사실, 지금까지의 내 지적들이 이 책을 쓴 의도와는 한참 벗어나 있는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이 책은 전제에서 말한 것처럼  수업(배움)을 통해 학교를 바꾸고,  다시 학교를 통해 전체의 변화를 이끌어내려는 의도가 있는 듯 하고, 내 지적은 기본적으로 지금과 같은 학교 틀에서는 어떤 일의 변화를 만들어내기 몹시 어려운 환경이라는 점을 지적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이제 마무리를 해야할 시점, 매끄럽지 못한 번역문이 좀 거슬리나 얇은 책이 던지는 시사점은 그렇게 허술하지 않다. 이 책이 주로 다루는 대상이 초중등학교에 한정되어 있을지라도 교직에 있거나 교육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진 사람이 읽어보면 좋을 것 같다.  

   덧붙임 - 우리나라에서도 이와 비슷한 문제의식을 가진 교사들을 중심으로 시도하고 있는 학교모델이 '혁신학교'라고 알고 있다. 이제 변화가 시작되었는가? 어쨌든 그 변화의 바람이 공교육의 벽을 뚫고 들어오기를 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