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도 비담임이었다. 그래서 학교에 남아서 무슨 일을 해야할 날이 거의 없었다. 일과 후에 하게 되는 보충수업 정도가 6시 반에 끝나는 날이 일주일에 두세 번이라 그 때만 늦게(?) 퇴근했다. 사실, 잠깐잠깐 학교에 남아서 시간외 근무를 하기도 했는데, 그건 시간외 근무라고 하기엔 살짝 민망한 수준이었다.(이 글 보시는 여러 직장인 알라디너님들 화내시겠다.)
사실, 올해 악착 같이 시간외 근무를 안 해야겠다고 다짐-이상하지, 남들은 다들 악착 같이 시간외 근무를 하려고 난리인데-을 하게 된 데는 나름 이유가 있다. 바로 올해 1월 슬그머니 우리 학교에 도입된 지문인식기 때문이다. 초과 근무 부당 수령 사례를 줄이기 위해서 그동안 수기로 적던 초과근무대장을 없애고 개인별 지문을 등록해서 시간외 근무를 하고 퇴근할 때 인식기에 자기 지문을 찍어서 초과시간을 확인하는 시스템이다.
지문인식기 도입의 취지가 업무 경감이라는 교육청 공문이 오자마자 학교는 득달같이 지문인식기를 사들이고 새 제도를 시행했다. 그 과정에서 교사들에게 의견을 수렴하는 과정도 없었고, 지문인식 제도의 주요 문제점인, 인권 침해 여부에 대한 논란도 아무런 문제 제기 없이 정착되고 말았다. 그래서 나는 -대응방식으로는 엉뚱하지만- 일단 지문 등록을 안 하기로 했다.(당연히 등록을 안 하면, 시간외 근무를 기록할 수 없다. 그러니 아직까지 올해 시간외 근무를 한 번도 안 한 걸로 기록되어 있다.)
사실, 학생들과 함께하는 독서동아리 활동은 저녁 9시까지 하는 것이라 시간외 근무인 것이 맞지만 그냥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니, 일이라고 생각 안 하고 지금껏 그냥 넘겼다. 이제 그것도 두세 번이면 끝나니까 홀가분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내가 1년에 꼭 한 번, 야근을 피할 수 없는 날이 있다. 바로 졸업/진급사정회 전날이다. 각 반 담임선생님으로부터 사정 자료를 받아서 취합하고 정리해서 다음날 사정회의가 열릴 수 있게 문서를 만드는 게 한나절 안에 다 이뤄져야 한다. 그것도 순조롭게 끝나야 한나절인데, 한 분이라도 늦게 내면 작업에 차질이 빚어진다. (생각해 보니, 작년에도 10시까지 자료를 다 만들고, 혼자 인쇄기를 돌려서 인쇄하고 여러 장을 박음쇄로 묶었던 기억이 새롭다.)
올해는 그날마저도 야근을 안 하기 위해서 졸업생 자료는 지난 금요일에 90%는 정리해뒀고, 오늘 아침에 가볍게 졸업생 사정자료는 다 만들어서 담임선생님들의 확인 작업을 거쳤는데, 그런데, 딱, 그렇게 하고 나니 갑자기 모니터에 블루스크린이 뜨더니 껐다 켜도 컴퓨터가 먹통이다. 전산보조 선생님이 출근하는 날인데, 어디에 있는지 알 수가 없고, 선생님들께 받아놓은 자료는 쪽지로 50건이 넘는데 작업을 할 수가 없었다.
급한 마음에 집에서 노트북을 가져와 작업을 하려고-야근 안 하려고- 집에서 노트북을 챙겨 다시 학교로 갔다. 그러니까 전산보조 선생님이 컴퓨터를 고치고 계신데, 결론은 윈도우를 새로 깔아야 한다는 것! 교감샘은 당장 새걸로 교체하라고 하시지만, 윈도우를 새로 까는 것이 시간이 조금 덜 걸린다고 해서 일단 수리부터 하기로 했다. 그래서 가져갔던 컴퓨터가 다시 돌아온 게 2시 20분이었다.
오늘은 내년도 노조 분회장을 누구로 세울까 고민하는 사람들이 만든 점심 약속이 있었고, 2시 40분부터는 수업이 한 시간 있었고, 수업을 하고 나온 후에는 <교원능력개발평가> 때문에 좀 문제가 있어서 그 일에 잠깐 끼였다가 다시 중요한 회의가 있어서 갔다 왔다. 회의가 끝나서 내 자리에 앉으니까 그 때가 4시 30분이었다. (이 때가 공식적으로 근무시간이 끝나는 시간이다. 이 때 퇴근하는 경우는 잘 없지만!) 선생님들이 보내서 내가 안 읽은 쪽지만 다시 50건이 넘었다. 이 쪽지들을 하나하나 확인해서 자료를 입력하고 정리하는 게 오늘 내가 할 일이다.(보통 일과 중에 끝나면, 인쇄물을 맡기면 되지만, 일과 후에는 할 수 없이 내가 해야 한다.) 그 많은 쪽지 중에도 아직 자료를 안 내신 선생님도 서너 분이시다. 찾아가서 자료를 보내주십사 하고 말씀을 드리고 내려왔다.
5시가 좀 넘어서 작업을 시작한다. 학교 일이 대부분 그렇듯 어렵고 복잡하지는 않은 일이다. 그저 시간만 많이 투자하고, 덜렁거리지만 않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2학년 1반부터 시작해서 2학년 11반까지 하는데 1시간 반이 걸렸다. 다른 사람은 다 저녁을 먹으러 가는데, 난 기분도 그렇고 기운도 없어서 그냥 하던 일이나 계속한다. 거의 8시가 다 돼서야 자료 취합 및 정리가 끝났다. 모니터로 보는 건 안심이 안 돼서 출력물을 뽑아서 오류가 없는지 확인한다. 자기가 만든 자료는 자기 눈으로 오류를 찾기가 쉽지 않다.
행정실에서 가서 열쇠를 받아 인쇄실 문을 연다. 냉기가 훅 끼친다. 인쇄기를 다뤄 본 적이 있었는데,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기억을 더듬어보니 할 수 있을 것 같다. 인쇄기가 말썽을 부리지 않아야 할 텐데...... 여러 번 실패하고 인쇄를 했더니 벌써 시간이 8시 반이다. 이제 이 종이들을 분류해서 각자가 볼 수 있도록 묶으면 할 일이 끝난다. 내일이 학예전이라 교실 곳곳에서 연습 중인 아이들에게 도움을 청했더니 흔쾌히 도와준다. 이것으로 내일 오전에 돌릴 사정회의 자료가 완성되었다. 딱 8시 56분이다. 동아리 모임을 하고 나면 9시 반에 학교를 나설 때도 많은데, 오늘은 유난히 더 늦은 것 같아 마음이 춥고 바쁘다. 학교의 담임선생님들은 9시, 10시에 퇴근하는 게 일상인데, 나만 이렇게 늦게 간다고 투덜되는 꼴이 좀 우습기도 하다. (하긴 나도 담임할 땐 거의 매일 10시에 퇴근했었지.)
내년에 담임을 하겠다고 써냈다. 거의 70명에 가까운 교사들 중에 채 20명도 안 써 내는 담임희망에 O를 쳤다. 교감선생님께서는 한 해 더 담임을 하지 말고, 업무(?)를 맡아달라고 하셨지만, 오늘 나는 웃으면서 "저는 아이들이 좋아요. 담임이 하고 싶습니다."라고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내 말은 진심이었을까, 싶지만-솔직히 반만 진심인 것 같다- 온전히 거짓말은 아니(라고 믿고 싶)다.
그런데 오늘 찬바람이 쌩쌩 부는 늦은 밤, 학교에서 시간외 근무를 하고 보니 내년에 펼쳐질 시간들이 눈 앞에 선명하게 그려져서 마음이 착잡하다. (그렇지만, 담임을 하겠다고 나선 걸 후회할 정도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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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부터 20분 동안 더 썼는데 를 누르는 바람에 내용이 다 지워져 버렸다. (가끔 있는 일이긴 한데 이럴 땐 좀 허탈하다.) 자동저장 기능을 확인해 보니, 본문저장 시간이 1분 단위인데, 12시 57분에 지웠는데 왜 12시 38분까지의 내용만 임시로 저장이 되어 있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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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튼 일은 9시 쯤에 다 끝냈다는 내용이고, 내년에 담임을 희망했다는 이야기를 주저리주저리 썼었다. 담임하면 이깟 야근이야 일상이고 아무 것도 아닌데, 오늘은 왜 야근 한 번 한 것 가지고 이렇게 생색을 내느냐? 아마, 마음이 싱숭생숭해서 그런 것일 거다. 가끔 다른 사람의 속마음이 너무 빤히 읽히는 그런 날이 있지 않느냐? 나는 가끔 그런 날이면 슬프다. 그런 날이 잦은 요즘이다.
......뭐 이른 내용을 썼는데 지워졌으니 할 수 없는 거다. 이제 잘 시간, 지났네. 이번 달에도 중간에 수영을 그만둬야 하는가? 쩝, 참, 수영 배우기 어렵다. (언제쯤 물에는 뜰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