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9월 5일, 일요일 밤에
방학이 까마득한 옛날이 되어 버렸지만 그 아련해서 더욱 좋았던 기억 한 자락을 남기려고 한다.
동아리 여름캠프(금정산 학생교육원) - 우여곡절(태풍으로 하루 연기됨) 끝에 무사히 끝났다. 어설픈 준비과정이었으나 큰 욕심 없이 "즐기자"는 마음으로 진행됐으니, 모두 즐겁게 잘 놀았다. 공부도 하고 놀이도 하면서 재미 있고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 교사로서 요렇게 노는 게 난 즐겁다.
가족여행(덕유산-오도산휴양림) - 역시나 폭우 속에 다녀온 여행길. 특히 오도산에서 바라본 구름의 향연은 장관이었다. 오도산 일출은 합천호 때문에 생기는 구름 때문에 늘 멋진 모습이다. 더구나 오도산까지는 중계소가 있기 때문에 정상까지 차로 갈 수 있다. 구름이 산을 타고 넘는 모습을 오랫동안 보면서 "유연해야 넘는다"는 생각을 다시 해 보았다.
2학기 개학을 하고 며칠이 지났다. 항상 시작할 때 마음가짐은 그대로... 수업 준비를 좀 더 알차게 꼼꼼하게 해야지. 동아리 아이들이랑 더 즐겁게 책을 읽어야지, 아이들에게 친절한 교사가 되어야지, 내가 맡은 일은 제대로 해야지, 전교조 분회를 위해 성의껏 노력해야지... 책을 열심히 읽어야지, 교사로서 정체성을 확고하게 하기 위해 항상 마음은 가득한데, 문제는 항상 몸이다. 하, 몸이란 녀석은 언제나 이기적이고 예민한지라 마음이 조금만 방심하면 그 틈을 놓치지 않는다. 늘 의식하면서 조금 더 가다듬어야 할 부분이다.
저번 분회 번개 모임에 진복이를 데려간 이후에 조OO 선생님이 성장클리닉과 작업능력 평가를 권하셨다. 항상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조마조마해서 차마 못 가보고 있었는데... 뒤에서 부추기니 용기를 내서 지난 주 화요일에 성장 호르몬 검사를 받았다. (결과는 화요일에 알려 준다고 한다.)
마음이 두 갈래인데 성장 호르몬에 문제가 있어서 성장 호르몬 주사를 맞아 키나 몸무게가 "표준치"에 이르렀으면 하는 것이랑, 아무 문제가 없어서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이 문제가 해결됐으면 하는 것이다.
어떤 결과가 나오든 일단 문제가 해결될 계기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다행이다. 아무튼 이진복이라는 녀석 - 참 사연이 많은 녀석이다. 앞으로 가야 할 길이 멀지만, 언제나 -네가 필요하다고 할 때까지 - 지켜보며 응원해 주리라 다짐해 본다.
(요즘 EBS에 방송된 "아이의 사생활" 탐독 중! 어렵고도 놀랍다.)
2학기에 작은 목표가 있다면, 이 은밀한 일기를 읽는 사람들이랑 하룻밤을 보내고 싶다는 것! D-데이는 12월 15일 밤. 장소는 지리산? 다들 시간 비워 놓으실 거죠?
2010년 9월 27일, 월요일
진복이 병원은 정밀 검사가 필요하다고 해서 (2박 3일) 겨울 방학으로 미뤘다. 암튼 겨울 방학 때 이 일 때문에 조금 바쁠 듯. 그 전에 녀석이랑 신나게 놀아야겠다.
연휴가 무려 엿새간이었다. 처음부터 사흘은 '명절'답게 보내야겠다는 생각을 했었고, 나머지 사흘은 여행을 하기로 했다. 고심 끝에 고른 곳이 경북 울진. 지난 여름 방학 때 가려다가 아내가 아파서 못 갔던 곳인데, 이번엔 결국 다녀왔다. (예약을 8월 1일에 했었다.) 통고산자연휴양림은 말 그대로 깊은 숲속에 있었다. 덕구온천 스파월드에서 물놀이하면서 놀았고(난 음식이 그런 것처럼 온천물도 좋은 거, 안 좋은 거 잘 구별하지 못한다.)
히말라야에서의 밤 이후로 가장 맑은 숲에서 이틀밤을 잤다.
울진이 자랑하는 소광리 금강소나무숲은 거기에 오랫동안 살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로 좋았다.(스님이 되어 암자를 짓고 혼자 산다면 울진군 서면 소광리에 집을 지으리라.)차로 비포장 도로를 30분 이상 달려야 하는 험한 곳이었지만 2시간을 보낸 그곳의 솔향기가 지금도 아련하다.
불영사 계곡과 불영사, 민물고기체험관, 울진 엑스포공원 등도 예상보다 훨씬 알차게 꾸며 놓았고, 잘 가꾸어져 있었다. 또 이 모든 곳이 사람이 별로 없어서 한적하고 평화로웠다는 사실. 신나는 여행은 사람마다 가치 기준이 다르겠지만, 나는 요런 스타일의 여행이 신난다. 보너스로 일요일에 걸었던 휴양림 안에 있는 산책길도 환상적으로 아름다운 길이었다.
앞으로 또 당분간은 휴양림 주변 여행에 꽂혀 있을 것 같다.(지금도 그 생각을 하면 기분이 좋다.) 사실, 다음 여행지로 '영덕'을 생각하고 정보 탐색 중이다.
독서 동아리 회원을 새로 뽑았다. 이제 열두 명이다. 뽑아 놓고 보니, 학교에서 예산을 지원해 주지 않을까 조바심이 난다. 이제 교육청에서 지원받은 돈은 책을 두 번만 사면 없는데, "사교육 없는 학교" 관련 예산을 지원받지 못하면 큰일이다. (교감샘께서는 항상 애매하게 말씀하신다. 결정권자가 아니시니 어쩔 수 없겠지만...)
지난 번 동아리 아이들과 책을 읽으면서 나눈 이야기는, 내 인생을 풀어주는 키워드. 이걸 퀴즈쇼 형식으로 문제를 내면 다른 사람들이 맞히는 거였다. 나는 다섯 문제를 내고 100원-200원-500원-1000원-2000원을 각각 상금으로 걸었다.(슬럼독 밀리어네어처럼) 문제의 정답은 <땅끝마을><베트남><神><책><인큐베이터>였다. 다 내 인생을 이해하는 주요한 열쇠말이다. 참고로, 베트남은 내가 꼭 가 보고 싶은 곳. 스페인의 산티아고, 페루의 마추픽추와 함께 죽기 전에 꼭 보겠다고 결심한 곳이다. (소박한 꿈!)
아는 사람들은 알겠지만 내 취미는 <책 사 모으는 것-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이다. 이번 달엔 무슨 욕구 불만이 있었는지... 좀 난감한 상황이 되고 말았다. <핑퐁><카스테라><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사춘기><난 빨강><나는 유령작가입니다><맑스주의 역사 강의><4월 3일의 사건><B급 좌파 : 세 번째 이야기><휴전><나비 넥타이><월든><가난한 사랑 노래><경제학-철학 수고><로드><자발적 복종><지금이 아니면 언제?><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 이걸 어쩐다?
2010년 10월 26일 화요일
"그러나 간결함, 리듬, 그리고 쉬운 문장에 대한 내 모든 태도들은 오로지 '내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명료하게 드러내기 위해서 존재한다. 나는 이오덕 선생이 말씀한 '삶을 가꾸는 글쓰기'를 믿는다. 글을 씀으로서 내 일상의 에피소드들은 비로소 내 생각으로 정리되며 그렇게 정리된 생각들은 다시 내 일상의 에피소드에 전적으로 반영된다. 내 삶과 글은 끊임 없이 꼬리를 물고 순환한다. 내 삶을 더 낫게 만들지 않는다면, 나라는 인간을 더 낫게 만들지 않는다면, 내 글은 아무 것도 아니다. 결국 문장에 대한 내 태도는 삶에 대한 내 태도와 같다."
-B급 좌파 : 세 번째 이야기, 김규항, 리더스하우스
제법 시간이 지났지만 김규항의 글을 읽고 일기, 비슷한 글을 블로그에 써 둘까 싶었는데, 역시나 쉽지가 않다. 몸은 정말 예민하고 철저해서 늘 편안한 것을 집요하게 파고든다. 아직 일기를 시작도 못 하고 있지만, 그래도 저 글은 쉽게 잊혀지가 않는다. 그나저나 김규항은 읽으면 읽을 수록 불편한데 왜 계속 읽는지 모르겠다. 자학... 비슷한 심리인가?
"독자들의 정신이 번쩍 들게 울분을 토하거나, 학생들에게 위안과 희망을 주는 작품이면 어땠을까 싶지만 내가 목격한 모습들을 최대한 그 온도 그대로 담고자 했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제목처럼, '좀 애매한' 이야기가 되었다. 하지만 그것은 그들이 처한 상황이 목 놓아 울 만큼 극단적이지 않아서가 아니라 무엇 때문에 슬픈지 모를 만큼 복합적이기 때문이다.
"인생 찌질한 게 무슨 자랑이라고 맨날 그렇게 웃고 떠든대? 찐따 같이..."
"낄낄 은지, 나이스~"
"그... 그렇다고 울기도 좀 그렇잖아? 하아...하..."
"그게 말이지, 나도 그래서 한 번 울어볼라고 했는데... 이게 뭐랄까 참..."
"울기에는 뭔가 애매하더라고. 전쟁이 난 것도 아니고 고아가 된 것도 아니고..."
"웃거나 울거나만 있는 건 아니잖아. 화를 내는 것도 중요하지"
"누... 누구한테요?"
"그게 문제지"
- 울기엔 좀 애매한, 최규석, 사계절
만화를 그리는 고등학생들 이야기. 제목처럼 뭔가 좀 애매하다. 하긴 현실이라는 게 좀 그렇지 않은가? 몹시 슬프지도, 몹시 기쁘지도 않은 '그저 그렇다'고 할 수도 있고, '애매하다'고 할 수도 있는 두리뭉실함. 양면성이 늘 존재하는 상황!
엉거주춤한 상황이 대부분인 현실을 살아가는 고딩들 얘기를 읽으면서 나는 아이들과 소통을 꿈꾼다. 내가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착각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점점 불통의 벽은 높아지고 내가 노력으로 뛰어넘기엔 힘이 부친다. 아이들의 무심한 표정이 자꾸 눈에 밟힌다. 기운이 쭉 빠진다.
"너의 장미꿏이 그토록 소중하게 만드는 건 그 꽃을 위해 네가 소비한 그 시간이다" 나는 이런 충고의 진실을 의심하지 않는다. 내 삶에서 무엇인가가 소중하다면 그것은 정녕 내가 그것을 위해 고민하고 진땀흘리고 눈물 흘리며 비틀거리던 시간들 때문이다. "
- 쾌락의 옹호, 이왕주, 문학과지성
아이들과 함께 읽기 위해 산 책. 저렇게 멋있는 문장들이 참 많다. 저 글을 읽으며 가만히 생각해 본다. 나는 무엇을 위해 고민하며 진땀 흘리며 눈물 흘리며 비틀거렸던 시간이 있는가?<여기까지 쓰고 김OO 선생님의 쪽지(시낭송 대회 참가 안내)가 와서 급하게 동아리 시극 대본을 옮긴다.>
그래 문제는 결국, 나 자신이지. 다른 누군가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해 그런 시간들이 더욱 필요하다. 문제는 이 생각을 얼마나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느냐겠지. 어휴~ 나만 어려운가? 다들 삶이...
2010년 11월 19일, 금요일
노래를 듣고 있다. 디어 클라우드라는 인디 '록'(여기서 '록'인지, '락'인지, '롹'인지 몰라서 국립국어원 사이트에서 검색하니, 록=로큰롤, 으로 나와서 '록'으로 썼다.) 밴드의 "그 때와 같은 공간, 같은 노래가"라는 곡. 3집까지 나온 밴드인데, 노래가 하나 같이 슬프고, 우울하다. 끝 모를 우울함. 그래서 '좋다'고 느낀다. [이런 게 좋으니 좀 이상한 사람인가?]
그래 놓고 보니 영화도 흥행이 될 만한 영화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한창 영화를 봤을 때도 흔히 말하는 '대박 흥행' 영화는 이상하게 안 보게 되더라.(예전에 '영매'라는 다큐 영화는 우리 동네 영화관에서 나 혼자- 극장에 아무도 없는- 본 적도 있다.
나의 어떤 생각이 이런 취향을 만들었는지, 이런 취향의 결과가 내 생각을 만들었는지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비주류적인 취향(이런 걸, 마이너리티 감수성이라고 해야 하나?)을 가진 건 점점 분명해지고 있다.
아이들은 이런 나를 가리켜 "이상한 샘"이라고 말했었다. "뭔가 좀 다른 샘"이라는 말도 흔하게 듣는 말이었다. 칭찬도, 욕도 아닌 가치 중립적인(?)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어떻게 반응해야 할 지 늘 애매했다. 씩, 웃으며, "뭐가?" 이렇게 되물으면, 항상 "그냥요. 좀 이상해요." 이런 반응! 조금 더 어릴 때는 늘 '내가 뭐가 이상하지?' 이런 생각을 참 많이 했었다. 근데 시간이 지나니까 그것도 시들. 그냥, 그러려니 하면서 지낸다.
이렇게 무덤덤하게 지내게 되는데 가장 큰 이유는, 내가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면서부터인 것 같다. 못난 모습까지도 내 모습이라고 인정하게 되는 순간, 다른 사람의 못난 모습에서 내 못난 모습이 함께 보였으니까, 사람을 말할 때 조금은 조심스러워졌다.
이런 게 나이를 먹는다는 것인지, 나로서는 알기 어렵지만 이러다 영 물러터진 인간이 돼 있지나 않을지 심히 걱정이 된다. 하지만, 그것 또한 사랑해야 할 내 모습이겠지. 내가 아니면, 그 누가 나의 못난 모습을 사랑해 줄 것인가?
디어 클라우드의 노래가 꼬리를 물고 불러 온 내 생각은 여기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