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부터 두드러기로 고생 중... 보기에 흉한 발진도 그렇지만, 가려움도 있고, 손발과 얼굴이 자꾸 부어 걱정이다. 첫날 두드러기가 났을 때 병원에 다녀와서 처방해 준 항히스타민제를 먹고는 금세 가라앉아서 별 일 없으려니 했는데 이틀 전부터 더 심해졌다. 오늘 병원에 가니 치료를 꾸준히 하지 않으면 만성질환이 될 거라는 엄포! 이런 피부질환 약은 복용할수록 내성이 생긴다는데... 이것도 걱정이다.

   비슷한 시기에 다른 증세도 같이 왔다. 명치 끝이 무엇에 눌린 듯한 답답함. 통증이 하루 정도 계속 되어 내과를 찾아갔더니 딱 한 마디만 듣고는 바로, "위염"입니다.(솔직히 전혀, 믿기지 않았다. 무슨 점쟁이처럼...) 역시나 약을 처방 받아서 두 번 먹었는데, 이건 좀 괜찮아졌다.(사흘치 약을 받았으니 가능하면 다 먹어야겠다.) 그래서 밥을 먹을 때 신경 써서 먹고 있으며(천천히 규칙적인 식사), 커피를 마시지 않고 있다. 

   아프니까 몸에 대해서 여러 가지로 생각을 해 보게 된다. 지금껏 무탈하게 거의 40년을 썼으니 이제 이곳저곳 슬슬 아프기도 하겠지, 하는 생각도 들고, 지금부터는 꾸준히 관리를 해야 앞으로 40년을 더 쓸 수 있을텐데... 하는 생각도 든다. 내 몸을 이렇게 걱정해 보는 건 참 오랜만인 거 같다. 아무튼 이번 일 때문에라도 건강한 상태를 오래 관리하는데 관심을 많이 쏟아야겠다. 

   참, 사는 건 만만치가 않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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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핸 유난히 짧은 여름방학이 벌써 1/3이 지나가버렸다. 이번 방학 즈음엔 우리 모임에도 좀 변화가 있었고, 지금도 그 변화는 이어지는 거지? 지난 모임에 보니까 모두들 과감하게 다른 나라에서 학교를 다니려고 결심하고 실천을 옮긴 민지의 용기를 부러워하는 거 같던데……. 그런데 민지는 떠나게 되기까지는 우리가 속속들이 알지 못하는 수많은 문제들을 풀어내면서 여기까지 온 것이겠지? 우리는 민지가 씩씩하게 다녀올 수 있도록 맘껏 격려해 주자. 그리고 나는 남은 사람들이 이런 때일수록 중심을 잡고 모임을 단단히 꾸리려는 의지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해 봤다. 물론 한 사람이 모임을 위해 헌신하는 것도 좋지만, 그보다는 각자가 자기가 할 수 있는 만큼 무엇을 할 것인지를 스스로 판단하고 실천하는 게 훨씬 중요하겠지? 

   자,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 보자. 인생, 읽었어? 우리가 푸구이처럼 인생을 살아야 한다는 운명을 만약 미리 알게 된다면 어떨까? 무서울까, 슬플까, 담담할까, 괴로울까, 체념할까…… 내 미래가 저렇게 예정되어 있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한가? 그러면…? 그런데 예전에 내가 이 책을 읽고 작가가 우리에게 말하려는 메시지는 써 놓은 게 있는데, 대충 내용이 이렇다.

   작가는 이 소설을 통해 우리에게 묻는 것 같다. 이런 인생도 의미가 있는가? 우리가 죽을 고생을 하며 살아도 결국 우리에게 남는 것은 아무 것도 없지 않는가? 그런데, 왜 우리는 살아야 하는가? 작가 자신은 이런 말로 스스로의 질문에 답을 해 두고 있다. ‘사람은 살아가는 것을 위해서 살아가지, 살아가는 것 이외의 그 어떠한 것을 위해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나도 작가의 질문을 씹어본다. 우리도 가끔은 사는 것이 고통스러운 일이라고 곧잘 말한다. 그러면서도 늘 오늘의 고통스러운 삶이 더 나은 내일을 만들어줄 밑거름이 되리라고 기대한다. 그래서 결국엔 현재 우리의 고통스러운 삶이 지나가고 나면 이 고통 속에서 피어난 그 무엇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하기도 한다. 그러나 위화의 소설을 읽고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해 보건데, 우리가 눈물을 보태며 고통스러운 강을 건너더라도 그 강 건너엔 우리가 기대한 그 무엇도 없을 것이라는 데 동의할 수밖에 없다. 그러면 우리네 삶은 비루한 것인가? 희망은 어디에도 없는 것인가? ‘희망이 없다’라고 단언할 수는 없지만, 삶이 비루하다는 데는 대체로 수긍한다. 그러면 그런 비루한 삶은 왜 살아야 하느냐고? 그렇다면 이런 질문을 돌려주고 싶다-살지 않으면 어떤 선택을 할 수 있느냐고? 살아간다는 건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이미 주어진 것이니 선택하고 말고의 문제를 이미 초월한 문제라고 말이다.  

 (위화, 인생, 을 읽고 쓴 감상문 중에서) 

   아마 부모님이 이 소설을 읽으신다면 내 말에 공감하시리라 믿는다.(아직 너희들은 앞길이 창창하니 이런 내 말이 잘 흘러들지 않겠지만! 그래서 무척 아쉽다.) 조금 더 인생의 속살을 맛 본 사람들은 알기 마련이거든. 눈물의 강을 건너면 아름답고 찬란한 무엇인가가 우리를 맞아줄 것이라고 믿지만-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열심히 공부하지!- 사실은 그 강을 건넌 우리가 볼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을지 모른다구! 그럼 왜 열심히 살아야 하냐구? 그건, 글쎄다. 그걸 알면 내가 이러고 있지는 않겠지.

   그만하고! 이제는 우리 모임에 대한 이야기를 해 볼까 한다. 우리 모임은 다음 주 금요일인거 다들 알고 있지? (6일) 책의 완독은 기본 중에 기본!(이런 걸로 잔소리 안 하게 해 주렴.) 글쓰기 숙제는 1) 내 인생 최고의 사건과 내 인생 최악의 사건!이라는 주제로 각각 사연을 소개하는 글을 써 올 것! 2) 내 생애 80번째 생일을 맞아 써보는 가상의 자서전을 완성해 올 것이야.

   우리에게 슬픈 일은 기말고사 성적이 나쁘게 나온 것이라든가 여름방학이 꽤 많이 지났다는 사실이 아니라, 지나간-그래서 더욱 아름다운- 그 순간에 어쩌면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는 자책이 아닐까 싶다. 그러니까 슬픔은 자기 자신이 마음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러니 치유도 자기가 해야 할 몫이다. 다음엔 그런 자책이 들지 않도록 내 행동을 변화시키는 것이 진정한 슬픔에서 해방 되는 길이고! 우린 지금도 충분히 힘든데, 오늘부터 폭염이 시작된단다, 모두 조금 더 씩씩해져야할 때다.     

                                                  여름밤에 느티나무가 쓴다.

[덧붙임] 

   인생을 읽고 어떤 숙제를 내줄까, 사실 고민을 많이 했어. “음…… 내 인생 최대의 사건은 말이야……”하고 싱긋 웃으며 너희들에게 말을 건네려다가 멈칫거렸다. 순간, 인생이라는 게 그렇게 사건의 연속으로만 설명할 수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거든.  

   오늘만 해도 등교하면서 폭염 사이에 쏟아진 빗줄기 속을 자전거로 내달릴 때의 상쾌한 기운이나 비를 맞아 더욱 싱싱하고 당당한 교사(校舍) 앞의 느티나무의 늠름한 자태를 볼 때 들었던 흐뭇함은 ‘인생은 사건의 연속’이라며 구체적인 사건을 써오라고 하는 내가 내 준 숙제 속엔 분명 빠져 있을 거니까.  

   그래도 어쩌겠노? 내 능력은 여기까지인데, 더 욕심내지 말아야겠다. 오히려 우리의 숙제가 삶의 속살을 온전히 드러내지 못하는 모순을 인정해야겠다. 하지만 굳이 변명을 하자면, 인생은 이런 수많은 모순 속에서도 계속 이어지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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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밀양 공연을 마치고 돌아오는 밤차 안에서 나눈 이야기, 혹은 들었던 노래! 

당신들과 소통하기 위하여...

장사익 - 삼식이 

장사익 - 찔레꽃 

Jason Mraz - I'm you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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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일요일에 밀양여름예술축제에 다녀왔다. 밤 10시에 공연하는 오구... 이제 10년이 된 지역 예술축제의 간판극답게 강부자, 오달수, 하용부와 연희단거리패가 함께 하는 초호화 캐스팅이다. 야외에 마련된 좌석도 무려 1500석.

   배우들의 이름을 보니 좀 설렜다. 오달수 씨 때문에... 강부자 씨는 실제로 본 적이 없으니 잘 모르겠고(그래도 배우로선 살아 온 인생이 벌써 반세기라면 배우의 능력에 토를 다른 것은 실례다.), 오달수 씨가 부산에서 공연할 때 극장에 서너번 가서 본 적이 있다. 음, 정동숙 씨와 함께 '너도 먹고 물러나라'라는 공연을 하는데 정동숙 씨는 관객을 빨아들이는 열정이 넘쳤고, 오달수 씨는 치고 빠진다고 해야 할까, 관객의 감정을 긴장시켰다가 풀어 주는 능력이 탁월했던 기억이 난다. 마치 밀양에서 전도연의 연기를 더욱 돋보이게 하는 허허실실의 송강호처럼.

   그리고 또 한 사람, 밀양백중놀이 기능보유자로 밀양연극촌장인 하용부다. 처음엔 진옥섭의 노름마치에서 하용부, 하보경. 하XX, .... 이런 사람들의 이름이 겹쳐져서 극이 시작될 때만 해도 춤꾼 하용부 선생이 맞나 싶었으나, 극이 시작되고 얼마 안 있어서 북을 어깨에 을러매어 치면서 춤을 추는데 '딱' 감이 왔다. (사실, 나는 소리에도 춤에도 완전 까막눈이다.) '앗, 보통 춤과 소리가 아니구나!' 연극을 보는 동안에도 특히 집중해서 봤다.  

   연극을 보고 집에 와서 노름마치를 펼치니 바로 하용부 선생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다시 한 번 정독하고,(이때가 새벽 2시 반?) 학교에 가져가서 같이 본 샘들에게 복사본을 나눠드렸다. 그리고 아직도 하용부 선생의 북소리와 춤사위가 어른거려서 이렇게 동영상을 찾고 기사를 검색해 봤다.

   그러다가 다시 흐릿한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하용부 선생과 둘러서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고 연극을 본 후에 그 연극에 대해서도 감상평을 전했던 기억이 났다. 꽤 지난 일이기 하지만, 어느 겨울 밀양연극촌에서 하는 공연을 보러 갔었는데, 우리 일행(함께 학급운영 모임을 하던 선생님들이랑 밀양으로 여행을 갔었다.)들이 좀 일찍 도착해서 건물 밖에서 연극이 시작되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드럼통에 불을 지펴지니까 자연스럽게 그 주위에 둘러 서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그때 우리와 이야기를 나눈 분이 바로 하용부 선생이었다. (그때 우리 중 누군가가 궁금해서 뭐하시는 분이냐고 하니까, 그냥 '지역에 사는 백수'라고 하셨던 것 같다.) 공연이 끝나고 배우들과 뒷풀이(?) 비슷한 자리가 마련되었는데, 하용부 선생도 함께 자리에 있어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 받었다.  

   아무튼 이런 오구-죽음의 형식, 공연에서 하용부 선생의 춤과 북소리를 들을 수 있었던 것 만으로도 큰 행복이었다. 비록 그 피로의 여파가 아직까지 미치고 있지만...... 

* 아래는 궁금해서 찾아 본 하용부 선생의 인터뷰 관련 기사

   1955년 경남 밀양에서 태어난 다섯 살 소년은 할배의 춤사위를 보며 우리네 움직임과 소리를 익힌다. 밀양백중놀이를 이끈 할배와 같은 길을 걸어온 것이 벌써 50년이다. 한국적인 양식을 고민하는 무대라면 어디라도 서슴지 않고 찾아가는 한국 춤의 세계적인 전도사 하용부(54,중요무형문화재 68호) 선생을 만났다.  







   그가 '춤꾼'으로 살아온 50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자신의 이름을 걸고 처음 춤판을 열었다. 이 춤판은 영남의 춤을 대표하는 그가 프랑스 공연예술의 자존심으로 통하는 파리 바스티유 오페라극장 무대에 서기 위한 시연공연으로 준비한 것이다. 한국 전통 춤꾼으로는 프랑스 '상상의 축제((Festival de L′imaginaire)'에 정식으로 초청된 것이 처음이기에 하용부 선생의 춤판은 여느 때보다 절로 흥이 솟는다.

프랑스 파리가 선택한 한국춤의 자존심…중요무형문화재 68호 하용부 선생

   '하용부 춤판 2009'의 리허설 공연에 경의를 표하는 기자에게 "늘 춰오던 춤인 것을 모…, 공연도 아닌 것을…" 이라며 털털한 웃음으로 온 몸에 비 오듯 흘린 땀을 닦으며 기꺼이 인터뷰를 응했다.

   "내가 다섯 때부터 춤을 췄다. 할배 좇아 추던 춤이 스물다섯 되니까 중요무형문화재라고 정식으로 제도권에 인정됐다. 그때서야 제대로 인정받은 것이다. 97년에 조부가 돌아가셨다. 조부가 살아 생전엔 내 감히 이런 걸 생각하지도 못했던 일이다. 스승이 살아계시는 데 어찌 제자가 이런 걸 생각 하겠어…."

   5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춤'만이 자신의 길이라고 생각하고 살았던 하용부 선생은 이제서야 자신의 이름을 건 '춤판'을 벌인 것에 대해 이야기를 풀어냈다.

   "전쟁에다 민주화운동에다 사회적인 혼란도 있었고 전통에서 현대로 넘어오는 과도기적인 그런 복잡한 시대였기 때문에, 시대가 시대인 만큼 전통을 되짚어 어떻게 해볼만한 때가 아니었다. 전통에 대해 나조차도 모르는데, 어떻게 전통을 얘기할 수 있겠는가. 이제 그런 시대는 아니지 않나 싶다. 나 역시 현대 몸짓에 대해
이윤택(연극 연출가)을 만나서야 알게 됐고, 이제까지 내 '춤판'이 늦은 것이 아니라 이제는 판을 벌려도 될 때가 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화하는 한국의 '전통 춤'… 현대와 소통하는 '우리 춤'

   하용부 선생은 1989년 연극연출가 이윤택 씨를 만나 의기투합해 연희단거리패에 들어가 안무가로 활동하기도 한다. 그는 연극 '오구-죽음의 형식'을 시작으로 '죽은 영혼' '길 떠나는 가족' '어머니' '일식' 등에 안무가로 참여한다. 이를 통해 '한국적 몸짓'을 연극무대에 담아 안무는 물론 연기까지 욕심을 부렸다.

   밀양과 서울을 오가며 후학양성에 힘쓰고 있는 그는 SIDance와 춘천아트페스티벌 등 국내 유명 페스티벌에 초청돼 수많은 무대를 통해 자신의 '춤판'을 벌여왔다. 이 가운데 프랑스 ART 초청 워크숍 지도를 맡기도 하며 프랑스 발드마른 국제댄스페스티벌에 참가하는 등 세계적인 무대에서 '한국 춤'을 알리기 위한 노력도 꾸준했다.

   "지금 이 시대는 전통의 재해석과 보존이라는 두 갈래에서 방향을 찾아야 한다고 본다. 내가 세계무대에서 기대를 거는 것은 현대와 전통이 공존할 수 있는 방향을 찾길 바라는 것과 지금 이 시대의 '우리 춤'을 보여주는 것이다. 전통을 그대로 보존할 것인가, 현대에 맞게 재해석해 과거와 현재가 공존해야 할 것인가 그것의 중간지점을 찾아야하지 않을까."

   하용부 선생의 춤판은 절로 흥을 솟게 한다. 어깨선을 따라 부드러운 손이 하늘을 치켜올리고 버선발을 주춤주춤 올렸다 내렸다를 반복해 장난기 가득한 취임새로 자연스레 관객과 마주한다.

   그의 밀양북춤과 범부춤, 양반춤을 비롯해 창작무 영무는 서양예술과 호흡을 시도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는 한국 전통예술의 깊이를 더해 전통의 보존과 현대적 재해석으로 시대가 공감하는 전통예술을 꽃피운다.  

 2010.3.10  [OSEN=박희진 기자] 

 

** 아래는 궁금해서 찾아 본 하용부 선생의 밀양북춤 동영상

 

하용부 선생님의 밀양북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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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즐겨 듣는 노래... 쓸쓸하고 허전한...  

 

 

마흔을 5개월 앞둔 나에겐, 여전히 내 꿈의 엔진이 필요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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