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월 25일-여행 네째날(촘롱-시누와-뱀부-도반)
촘롱의 아침! 역시 날씨가 맑다. 일어나자마자 숙소 앞 마당에서 만년설을 감상하는 사람들. 저쪽 산위에서부터 해가 나기 시작했다. 날씨는 상당히 쌀쌀해서 두꺼운 파카에 잔뜩 몸을 웅크리고 있다.(아침엔 이렇게 맑았는데, 이날 오후에도 잔뜩 흐려져서 더 올라가기 싫을 정도였다. 말간 하늘에 또렷하게 보이는 설산은 점점 경이감을 넘어 감동으로 다가온다.
왼쪽에 앉아 차를 마시는 두 남자는 작년 9월부터 아시아 여행을 다니고 있다는 일본인이다. 이들은 아마 아침을 먹고 출발하기에 앞서 차 한 잔의 여유를 즐기는 것이리라.(보통 트레커들의 보편적인 패턴이다.) 근데, 우리 일행(초록색 파카와 모자쓰고 앉은 사람)은 아직 밥도 안 먹은 것 같다.(우리 팀은 비교적 출발이 늦은 편!)
오늘은 저 설산을 바로 올려다 볼 수 있는 곳까지 갈 예정이다.
어제 저녁에 본 산의 모습을 아침에 보면 이렇게 조금 더 명징하게 볼 수 있다. 8시 반에 출발하자고 전날에 얘기하지만 항상 출발은 9시 전후! 침낭 속에 있어도 난방이 안 되는 곳이라 새벽이면 잠을 깰 수 밖에 없지만, 밖으로 나오기가 더욱 싫어서 자꾸 꾸물거리게 된다. 그러니까 식사가 늦어지고, 출발도 당연히... 늦다. (대신 우리는 다른 팀들보다 걸음이 좀 빠른 편이라 1시간 정도 늦게 출발해도 저녁에 도착은 비슷비슷하게 했다.)
어제부터 시큰거리던 무릎이 아침이 되니 좀 낫지만 이것으로 나아졌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그것 외에도 탈진 증세는 완전히 없어졌지만, 속이 울렁거려서 음식을 못 먹는 건 여전하다.(비위가 약해서 일수도 있고, 고산 증세의 일부일 수도 있을 것이다.) 뭐 상황이 어떻게 되었든 우리는 가야하니까 그냥 가는 것이다.(한국에서부터 입고 와 사흘 내내 짐이 된 페딩점퍼와 작은 가방은 과감하게 이곳 숙소에 맡기기로 했다.)
촘롱은 이곳 트레팅 주변의 산 속 마을 중에서도 가장 규모가 큰 마을 중 하나이다. 처음 숙소에 도착했을 때 산 정상의 너른 분지에 둥그렇게 모여사는 마을을 예상했던 우리는 무척 당황했다. 적어도 숙소에 도착하면 많은 사람들이 사는 곳 답게 좀 북적대거나 아니면 숙소에서 내려다보면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거와는 딴 판이었으니까.
인터넷에서 촘롱이 아주 큰 마을이고, 학교 환경도 다른 곳보다 좋아서 산 속에 사는 많은 사람들은 좀 멀어도 촘롱에 있는 학교를 보내고 싶어한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었다. 그래서 촘롱에 오면서 내심 기대를 좀 했었다. 꼭 학교에 들러서 아이들이 공부하는 모습을 봐야지, 가능하면 선생님도 만나서 얘기할 수 있으면 좋겠다, 학교에서 잠시 놀 수도 있지 않을까?, 등 혼자서 별 생각을 다 하면서 왔다.
그 전날 숙소에서 저녁을 먹으면서 이 근처에 학교가 어디 있냐고 물었더니, 숙소에서 10분 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고 했다. 숙소에서 출발해서 아래쪽으로 난 길을 따라 마을의 중간쯤에 오니 정말 '작은' 학교가 하나 보였다. 아직 등교하기에 이른 시간(이 때가 9시 반쯤)이라 학교는 텅 비어 있으니 우리끼리 사진을 찍기가 좋았다.
학교 이름은 잘 모르겠지만 분명히 secondary School이라고 나와 있으니 우리나라의 중고등학교 정도의 학교일 듯 싶다.
소박한 교사(校舍)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으며 아이들이 오기를 기다렸다. 물론 슬슬 아파오는 무릎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런데 제법 기다렸는데도 아무도 오지 않는다. 뭔가 잘못된 게 분명하다. 교실에 들어가 허름한 책상에서 수업하는 놀이도 해 보고 했지만 아이들의 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는다. 휴일이나 방학인가보다 생각하면서 학교를 돌아나왔다. 학교를 나와 집안 일을 돕는 아이를 보자 우리 팀의 포터인 비스누가 네팔어로 물으니, 오늘부터 약 열흘간 방학(?)에 들어갔다고 한다.
어제만 해도 '지누단다'쪽으로 올라오다가 사울리 바자르쪽으로 학교 가던 초 중학생들을 길에서 많이 만났는데... 하필 오늘부터 방학이라니! 좋은 기회를 놓쳤다 싶다. 네팔 아이들에게도 낯선 사람(외국인)을 봤을 때 수줍어하는 특유의 표정이 있었다. 순박하면서도 부끄러워하고 경계하면서도 호기심이 가득한 그 표정! 늦었다며 논두렁 밭두렁길을 냅다 달려가는 모습이 귀여웠다.
학교 교문에 들어서서 산을 바라보면 이렇다. 야트막한 담 아래는 계속 내리막길이 이어지는 길인데, 만약 저기서 공놀이를 하다가 담 너머로 넘기면?ㅋ 최악의 경우 300m 아래로 내려갈 각오를 해야 할 것이다. ㅋ
'작은' 학교(여기서는 아주 큰 학교)에 다행히 운동장은 없고, 교문 앞으로 난 마을길을 사이에 두고 맞은 편에 작은 공터가 하나 있는데 배구 네트와 농구 골대가 덩그러니 놓여 있는 걸 보니 아마 그곳이 운동장인가 보다.(여기는 넓은 평지를 확보할 수 없으니 축구는 어려울 테고, 공이 잘 튀려면 바닥이 평평해야 하니 농구도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아이들은 주로 배구를 하고 논다. 직접 본 아이들의 배구 실력은? 장난이 아니다.-브라질 동네 아이들의 축구 실력을 보고 놀라는 것과 비슷할 듯. 다른 이야기지만, 그런데 왜 네팔이 배구를 잘 한다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없을까? 다른 이유들도 많이 있겠지만, 아마도 체격이 너무 작은 것도 큰 이유가 될 것 같다.)
촘롱 마을의 전경이다. 사진 왼쪽의 가장 위에 있는 숙소에서 하룻밤을 자고 드문드문 이어진 집들을 통과해서 반대편 산으로 올라섰을 때 비로소 '촘롱'이라는 마을이 한 눈에 들어온다. 역시나 엄청난 계단식 논밭이 산비탈에 펼쳐져 있다.
촘롱에서부터 시누와라는 곳까지는 1시간 정도를 계속 내려와서 다시 1시간 이상을 계속 올라가야 하는 길이다. 사실, 공포감은 촘롱에서 내려가는 길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이렇게 하염없이 내려가면 다시 그 이상을 올라가야 할 게 분명하다는 사실과 지금 내려간 이 길을 돌아올 때 힘들게 올라와야 한다는 진리 앞에서 내려가는 길에서 두려움이 들었다.
그런데, 여행다니면서는 좀 이런 생각 안 하고 살면 안 될까? 그렇게 생각한다고 해도 달라질 건 아무 것도 없는데, 이런 생각만 하다보면 괜히 느긋하게 내려가는 즐거움은 즐거움대로 놓치고 올라올 때 고생하는 것도 달라지지 않고... 참, 눈앞의 행복은 내 발로 차버리고 달라지지 않을 미래만 걱정하고 있으니 여간 어리석은 게 아니다.
이제 시누와에서 점심을 먹는데 트레킹 내내 우리의 이정표가 되어주고 있는 마차푸차레는 아직까지 분명하게 보였다. 전체적으로 일행들의 컨디션이 썩 좋지 않다. 시누와까지 오는데 시간이 너무 많이 걸렸다. 포터와 의주는 앞서서 잘 걸어나가는데 나와 이은영 씨는 무릎 때문에 속도가 잘 나지 않았다.
대부분의 트레커들은 '촘롱-시누와-뱀부-도반-히말라야'까지를 하루 코스로 잡는다. 그래야 다음날 '히말라야-데우랄리-MBC-ABC'까지 갈 수 있기 때문이다. 고산증세만 심하지 않다면 ABC에서 자고 일출을 볼 수 있는 최적의 일정이다.
그런데 우리는 어쩌다 보니 시누와에서 점심을 먹을 정도로 전체적인 일정이 좀 늦었다. 물론 시누와부터 뱀부, 도반까지는 좀 평탄한 길이라고는 하지만, 도반에서 히말라야까지는 고도를 꽤 높여야 하는 길이니 힘들 것이다. 의논 끝에 도반까지 가서 다시 생각해 보기로 했다.
나는 여전히 음식 때문에 힘들고, 무릎 때문에도 고생했지만, 말처럼 시누와 뱀부를 거쳐 도반까지 걷는 길은 좀 편했다. 더군다나 밀림처럼 햇빛이 잘 들어오지도 않는 길이 계속 이어지고 중간중간에 포터가 야생원숭이며, 네팔의 특산품으로 유명한 석청을 소개해줘서 지루하지 않게 잘 도착했다.
촘롱에서 같이 출발했던 여러 팀 중 반은 히말라야까지 올라갔고, 반 정도는 도반에 남았다. 우리도 물론 도반에 남았다. 도반에 도착한 시간도 꽤 늦었을 뿐 아니라 날씨가 잔뜩 흐려서 도반에 도착하기 전에는 제법 눈발이 날렸기 때문이다.
도반에서 하루를 머물게 되었으니 전체적인 일정을 수정했다. 다음날은 '도반-히말라야-데우랄리-MBC'까지! 새벽에 일찍 출발해서 MBC-ABC로 가서 일출을 보고 내려오는게 좋겠다는데 의견이 모아졌다.
밤이 되니까 다행히 날씨는 맑아져서 눈은 내리지 않았으나, 입맛이 없어서 거의 밥을 먹지 못한 것이나 무릎의 통증은 더하다. 따뜻한 물을 침낭 속에 넣어 무릎에 끼고 있으니 좀 나은 것 같지만 이것도 내일 좀 걸어봐야 알 일이다. 무릎이 아파서 이런 저런 잡생각이 많다보니, 도보여행 4번, 하프마라톤 완주, 지리산 종주, ABC 트레킹... 이젠 이런 활동은 접어야 할 나이가 된 거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어 좀 서글펐다.
도반의 숙소에는 네덜란드인 커플, 프랑스인 커플, 일본인 두 남자, 네팔인 포터, 우리팀이 섞여서 밥을 먹고 이야기를 하며 즐거운 밤을 보내기도 했다. (난 말을 잘 못하니까 주로 듣는 쪽! 은영 씨가 가져온 김을 이들에게 돌리니 모두 맛있다고 하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