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 내 인생 최대의 사건은 말이야……”하고 싱긋 웃으며 너희들에게 말을 건네려다가 멈칫거렸다. 순간, 인생이라는 게 그렇게 사건의 연속으로만 설명할 수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거든. 오늘만 해도 등교하면서 하룻밤 사이에 달라진 서늘한 가을기운에서 느낀 상쾌함이나 스탠드 위에 가지를 옆으로 길게 늘인 느티나무 너머로 내다본 멋진 풍경 때문에 들었던 흐뭇함을 ‘인생은 사건의 연속’이라고 구체적인 사건을 말하려던 내 이야기 속엔 분명 빠져 있을 거니까. 그래, 그래서 다시 글을 쓰면서 결국은 되돌아온 내 개똥철학의 결론-물론 이것은 위화의 ‘인생’이라는 소설을 읽고 들었던 생각을 정리한 것이다.-이 생각이 나더라.
작가는 이 소설을 통해 우리에게 묻는 것 같다. 이런 인생도 의미가 있는가? 우리가 죽을 고생을 하며 살아도 결국 우리에게 남는 것은 아무 것도 없지 않는가? 그런데, 왜 우리는 살아야 하는가? 작가 자신은 이런 말로 스스로의 질문에 답을 해 두고 있다. '사람은 살아가는 것을 위해서 살아가지, 살아가는 것 이외의 그 어떠한 것을 위해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나도 작가의 질문을 씹어본다. 우리도 가끔은 사는 것이 고통스러운 일이라고 곧잘 말한다. 그러면서도 늘 오늘의 고통스러운 삶이 더 나은 내일을 만들어줄 밑거름이 되리라고 기대한다. 그래서 결국엔 현재 우리의 고통스러운 삶이 지나가고 나면 이 고통 속에서 피어난 그 무엇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하기도 한다. 그러나 위화의 소설을 읽고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해 보건데, 우리가 눈물을 보태며 고통스러운 강을 건너더라도 그 강 건너엔 우리가 기대한 그 무엇도 없을 것이라는 데 동의할 수밖에 없다. 그러면 우리네 삶은 비루한 것인가? 희망은 어디에도 없는 것인가? ‘희망이 없다’라고 단언할 수는 없지만, 삶이 비루하다는 데는 대체로 수긍한다. 그러면 그런 비루한 삶은 왜 살아야 하느냐고? 그렇다면 이런 질문을 돌려주고 싶다-살지 않으면 어떤 선택을 할 수 있느냐고? 사는 건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이미 주어진 것이니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고 말이다.
(위화, 인생, 을 읽고 쓴 감상문 중에서)
아마 부모님이 이 소설을 읽으셨다면 내 말에 공감하시리라 믿는다.(아직 너희들은 앞길이 창창하니 이런 내 말이 잘 흘러들지 않겠지만! 그래서 무척 아쉽다.) 조금 더 인생의 속살을 맛 본 사람들은 알기 마련이거든. 눈물의 강을 건너면 아름답고 찬란한 무엇인가가 우리를 맞아줄 것이라고 믿지만-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열심히 공부하지!- 사실은 그 강을 건넌 우리가 볼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을지 모른다구! 그럼 왜 열심히 살아야 하냐구? 그건, 글쎄다. 그걸 알면 내가 이러고 있지는 않겠지.(유명한 철학자? 종교인?이 되었을 걸?)
그만하고! 이제는 우리 모임에 대한 이야기를 해 볼까 한다. 우리 모임은 다음 주 화요일이야.(28일) 숙제는 당연히, 위화의 ‘인생’이라는 책을 완독해 오는 것! 글쓰기 숙제는 내 인생 최고의 사건과 내 인생 최악의 사건!이라는 주제로 각각 사연을 소개하는 글을 써 올 것! 재미있으면서도 진지한 글쓰기 기대할게.(항상 하는 말이지만 글은 써야 자신감이 생기고 실력이 는단다.)
오늘 연극 보러 가는 건 담임선생님께 말씀을 드렸으니 왠만하면 허락해 주실 거야. 최대한 정중하게 가서 말씀드리고 허락을 받으렴. 8교시 후에 중앙계단에서 만나기로 하자. 그리고 내일(토)은 토요특강 있는 거 알고 있지? 입학사정관제에 대한 개요 설명과 2009년 입시 경향, 논술 방향에 대해서 설명해 주신다니까 입시에 실질적인 도움이 될 수 있을 거야. 또, 출석관리 잘 해야 하는 것도 잘 알지?(이건 내가 나중에 도와줄 수 없거든.)
우리에게 슬픈 일은 중간고사 성적이 나쁘게 나온 것이 아니라, 지나간-그래서 더욱 아름다운- 그 순간에 어쩌면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는 자책이 아닐까 싶다. 그러니까 슬픔은 자기 자신이 마음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러니 치유도 자기가 해야 할 몫이다. 다음엔 그런 자책이 들지 않도록 내 행동을 변화시키는 것이 진정한 슬픔에서 해방 되는 길이고!
가을볕이 정겹다, 나중에 보자! 10월 24일 느티나무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