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첫 공부방 캠프는 1993년 여름이었다. 그 땐 충청북도 진천이라는 곳에 농활을 겸해서 떠난 캠프였는데, 지금도 그 때 했던 여러가지 활동들이 기억난다. 모기와 사투를 벌이느라 더 힘들었던 담력 훈련이며, 한여름 땡볕에 밭에서 콩을 심었던 일이며. 돌아오는 길에 가까운 개울에서 물놀이를 했던 기억까지. 새록새록 솟아난다.

   2000년부터. 다시 이어진 공부방 캠프. 2000년 여름엔 언양의 살티공소에 갔었나, 그랬다. 그리고 해마다 여름이면 열 일을 다 제치고 참가했던 공부방 여름 캠프. 그러는 사이 초등학생이던 어린이가 대학에 들어가 공부방 선생님으로 돌아왔고, 우리와 함께 하던 많은 선생님들이 공부방을 떠나 각자의 삶터로 돌아갔다. 그랬다, 이번 공부방 캠프가 나에겐 열 번째 캠프였다.

   강원도 삼척의 맹방해수욕장 입구에 故 지학순 주교님의 별장이었던 곳이라는데 지금은 천주교 휴양소로 운영되고 있는 작은 집이 올 여름 우리들의 캠프지였다. 건물은 아주 낡았으나 본채와 별채가 각각 독립되어 있는 구조(그러니까 각 건물마다 화장실이 있어서 좋았다.)와 비교적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는, 넓은 마당이 마음에 들었다.

   8월 1일, 오후 학생들이 짐을 풀자마자 교사들은 텐트를 펼쳤다. 마당 한 곳에다가 1인용 텐트 2개를 비롯해서 5개를 쳐도 마당엔 40명의 대식구가 넉넉하게 밥을 차려먹고 마음대로 활동할 수 있는 공간이 충분했다. 아이들은 바로 해수욕장으로 달려가서 물놀이! 몇몇 선생님들은 아이들 따라 가고, 나는 마당에 앉아 가지고 갔던 윤성희의 거기, 당신,을 펼쳤으나 눈에 들어오지 않아서 곧 그만두고 말았다.

   이번 캠프에선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아이들 밥만 열심히 챙겨주리라, 또 말없이 설거지를 해 주리라하고 마음 먹었는데, 결론적으로 마음처럼 쉽지는 않았다. 저녁에 삼척시내에 잠시 다녀왔다.밤에 마당에서 영화를 보기로 했는데, 정작 영화를 빌려오지 않아 삼척 시내를 뒤져서 영화 CD 두 장을 빌렸다. - 1번가의 기적,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 우여곡절 끝에 영화를 봤는데, 다행스럽게도 반응이 괜찮았다.

   다음날 동해의 일출을 꼭 보리라 마음 먹었는데 새벽의 기상청 3시간 예보는 비 올 확률이 40%로 나왔다. 이후로 점점 강수 확률이 높아지는 것으로 봐서 낼 아침은 날이 흐릴 것이다는 생각을 하고 텐트에서 잤는데, 새벽에 빗방울이 후두둑 하는 소리에 놀라 잠을 깼다. 그 때가 새벽 4시 50분이었다. 내가 잔 텐트는 방수덥개가 없어 비가 오면 물이 샐까봐, 나도 모르게 자면서 긴장하고 있었던 가 보았다. (그러나 이내 비는 그치고 다시 잠이 들었다.)

   둘째날은 아이들이랑 모두 동해시에 있는 무릉계곡으로 물놀이를 갔다. 두타산과 청옥산이 만나 깊은 계곡을 이루었는데 피서온 사람들로 계곡이 넘쳐났다. 계곡 들어가는 입구에서 다시 가랑비가 내리기 시작했으나 이왕 여기까지 온 거 끝까지 놀다가 가자는 심정으로 계곡에 자리를 잡았다. 나는 또 물이 들어가기가 싫었다. 여벌 옷도 일부러 준비하지 않아서 애들이 물을 뿌리려고 하면, '디카'가 주머니에 있다고 사정해서 빠져나왔다.(사실, 디카는 이미 맡겨두었다.)

   오후에 다시 숙소로 돌아와서 서둘러 점심을 먹었다. 다시 아이들은 물놀이를 하고 다른 사람들도 마지막 물놀이라고 생각하는지라 모두 해수욕장으로 나갔다. 나는 물에 들어가는 것이 귀찮고 찝찝해서 눈에 안 들어오는 책을 집어들었으나, 이내 곧 잠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잠을 깨니 슬슬 저녁 준비를 해야할 시간이었다. 이날 저녁은 맛있는 삼겹살! 나와 다른 선생님 세 분이 함께 엄청난 양의 고기를 구웠고(공부방에서 자주 하다 보니 숯불에 고기 굽는 실력이 날로 늘고 있다.) 모두들 맛있게 먹었다.

   뒷정리를 하는 동안 아이들은 동네 산책을 다녀왔고, 이어서 영화 상영. 어제보다는 환경이 훨씬 나았다. 마당에 편한 자세로 1번가의 기적을 봤다. 음... 다시 보니, 제목이 잘 못 됐단 생각이 들었다. 1번가의 기적은 없다,가 제대로 된 제목이 아닐까 싶었다. 아, 이 영화는 우리 공부방과 자주 함께 활동하는 연산동의 물만골 공부방 부근에 세트장을 짓고 촬영을 해서 영화를 보는 내내 낯익은 풍경이 많이 나왔다.

   밤이 훌쩍 깊었다. 아이들은 하나 둘 자러 들어갔고, 바닷가로 낚시하거 가셨던 마태오 아저씨께서 붕장어 네 마리를 낚아서 오셨다. 나도 텐트 속에 누웠다가 나와 소주 한 잔과 붕장어회를 한 젓가락 먹었다. 요즘은 어딜 가도 이런 회식 자리가 싫어서 남들이 하는 이야기를 말없이 듣고만 있는 경우가 더 많아졌다. 내일 일정도 빠듯하여 금새 자리가 정리되었다.

   텐트에 누우니까 빗방울이 후두둑 떨어졌다. 울퉁불퉁한 바닥에 몸을 대고 빗소리를 들으며 가만히 있었다. 이렇게 있는 거 참 오랜만이었다. 어쩌면 내 생애 처음일지도 모르지. 불편하지만 불편한대로 매력이 있는 텐트 생활이다. 새벽엔 비가 그쳤지만 날이 꽤 추웠다. 가지고 간 이불도 없었기 때문에 새벽부터는 잠이 깼다 들었다를 반복했다.

   아이들이 아침을 준비하는 걸 잠깐 보고 수녀님들과 가톨릭 신자인 다른 선생님들과 함께 삼척 시내에 있는 성내동성당의 미사에 참여했다. 나로서는 진짜 오랜만에 가보는 미사였다. 집중은 당연히 안 되고, 그냥 미사 중에 나오는 말들이 계속 귀를 맴돌아 머릿속에서 윙윙거렸다. 하지만 마음이 불편하지는 않았다. 미사를 마치고 나오는데 비가 쏟아졌다. 마음이 급해서 서둘러 돌아왔다.

   돌아오니 우리 숙소는 햇볕이 쨍쨍! 아이들은 이미 아침을 먹고 짐정리를 하고 있었다. 남은 밥이 없어서 컵라면으로 아침을 대충 먹었다. 내 짐도 챙기고 숙소 뒷정리도 후다닥 해치우고 나서 버스에 올랐다. 우리는 추암해수욕장 근처에 있는 촛대바위에 들렀다. 해가 돋는 아침이었으면 장관이었을 거 같은데, 한낮이라 별다른 감흥은 없었다. 변화무쌍한 하늘만 좋았을 뿐!

   숙소 근처의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우리는 부산으로 출발했다. 동해에서 포항으로 내려가는 7번 국도는 아름다운 동해의 여러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게다가 울진 근처에서는 적당히 길도 막혀서 풍경을 보기에 더욱 좋았다. 다시 책을 펼쳤으나 몇 장 읽지 못하고 또 덮었다.(여행 가서 한 40 쪽이나 읽었을까?ㅋ) 이후 쏟아지는 잠!

   부산에 도착하니 6시 40분이었다. 아직도 날이 훤했다. 공부방에 짐을 옮기느라고 한 시간 정도 들었다. 이후에 선생님들과 간단한 저녁 식사를 했고, 난 밥만 먹고 바로 일어섰다. 돌아오는 길이 참 가볍다는 생각을 했다. 이것으로 나의 열 번째 여름 캠프는 끝났다. 앞으로는 당분간 공부방도 방학이다. 이번 방학에 꼭 해야 할 일 두 개가 끝난 셈이다.

   이제 보충수업만 끝나면 나만의 방학을 즐기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학교 화단의 느티나무 그늘


느티나무 그늘 아래서 책을...


댓글(2)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드팀전 2008-08-04 17: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지내시는군요....언제 한번 뵈요.^^

2008-08-04 23: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일행들, 추암해수욕장 앞에서

 


무릉계곡에서의 물놀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공부방 여름 캠프로 일출로 유명한 동해시의 추암 촛대바위에 갔었다.

전당대로 올라가기 전에 올려다 본 바다와 하늘

전망대 근처에서 바라본 촛대바위

 

전망대에서 바라본 촛대바위 일부 1

전망대에서 바라본 촛대바위 일부 2

전망대를 넘어서 바라본 촛대바위 일부 1

 

전망대를 넘어서 바라본 촛대바위 일부 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모두 아름다운 아이들 문지 푸른 문학
최시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6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1990년이었고, 난 그 때 고 3이었다. 정신없이 공부에만 몰두하는 스타일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두 달 앞으로 다가온 학력고사를 앞두고 선지원(先支援)할 대학교를 고르기 위해 일주일 간격으로 네 번 치는 배치고사는 한 달도 남지 않았기에 내 마음에도 여유가 별로 없었다. 그해는 수험생도 역대 최다라고 떠들어대서 수험생들 모두가 다른 일을 할 생각이 없었다. 

   나는 10월 9일로 기억하는데(아니면, 10월 3일이었을 것이다.), 휴일이었지만 학교에 나와 자습한답시고 교실에 앉아 있었는데 그 날은 여느 휴일과 분위기가 확 달랐다. 고등학교 정문 근처에 전투경찰부대가 한동안 쫙 깔렸기 때문이었다. 내가 고 3이던 그해는, 6월 항쟁이 있던 그 다음해였으니까 전투경찰이야 텔레비전 속에서 익숙했지만, 이런 변두리 고등학교에서 전투경찰을 보는 것이 흔한 일이 아니었다. 얼마 있다 전투경찰 부대가 사라지자 술렁였던 학교도 이내 아무 일 없는 듯이 평온해져서 나는 운동장에서 농구공을 던졌다.

   다음날, 등굣길도 여느 날과 다를 게 없었다. 그러나 우리 반 교실에 들어서자 분위기가 확 달라졌다. 모두들 모여서 웅성웅성. 내 자리에 가방을 던지고 앉기도 전에, 아이들의 어깨 너머로 들리는 소리 -- OO이가 잡혀갔다더라. 아니다, OO이는 집에 있는데 학교를 못 나온다고 하더라. 학교에서 못나오게 했단다. 교육청에서 퇴학, 아니 제적시키라고 학교에 요구했대. -- OO이는 우리 반 반장이었고, 나와는 단짝은 아니었지만, 꽤 친했던 친구였다. 이게 무슨 황당한 소린가? 아니, 왜? -- OO이가 부고협(부산지역고등학생대표자협의회) 활동을 했는데, 어제 부산대 도서관 앞에서 ‘성명서’를 발표했대. 교육청에서는 고등학생이 (허락 없이) 집단행동을 하고 또 ‘성명서’의 내용도 문제 삼아서 징계하기로 했다더라. 어제 전경이 우리 학교에 온 건 그 ‘성명서’ 발표를 우리 학교에서 하기로 했다는 첩보를 입수했기 때문이래.

   이날부터 ‘OO이 징계 반대’를 내걸고 수업 거부 돌입. 전교생이 어떻게 나오게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첫날 오전은 운동장에 전교생이 모였다. 오후가 되자 1,2학년은 교실로 들어가서 수업을 받았다. (총학생회에서 들여보내기로 결정했는지, 선생님들 때문에 아이들이 들어갔는지, 당시에 평범한 학생이었던 나로서는 잘 모르겠다.) 하루를 3학년만 운동장에 남았던 거 같다. 다음 날이 되자 3학년 이과 반도 수업을 한다는 소문이 들렸다. 문과 반 네 반만 그렇게 하루를 더 버텼다. 사흘째가 되자 우리 반만 빼고 세 반은 수업을 했다.

   우리 반은 책상을 뒤로 돌려놓고 앞문을 잠그고 교실에 앉아서 자습을 했다. 대부분의 선생님들은 미리 알고 우리 교실로 올라오시지 않았다. 어쩌다 오신 분들은 ‘이러면 안 된다’고 말씀하셨으나 이미 상처받은 우리 마음엔 그 말씀이 전혀 와 닿지 않았다. 우리는 그렇게 책상을 돌리고 일주일을 더 버텼다.(그러니까 우리는 열흘 동안 ‘파업’ 했다.)

   그 사이에 형사가 자주 학교를 다녀간다는 무서운 소문도 들리고, 담임선생님을 비롯한 여러 선생님들이 교무회의에서 ‘OO이 징계’가 부당하다는 의견을 내시면서 학교를 상대로 싸우고 있다는 소식도 들려왔고, 그사이 ‘OO이의 제적’이라는 징계가 절대로 풀리지 않을 것이란 우울한 소문도 바람을 타고 교실 문턱을 넘어왔다. 조금 더 자세하게, 학교는 교육청에서 결정한 일이라며 책임을 떠넘기고, 교육청은 학생의 징계는 학교장의 권한이라는 뻔한 소리로 ‘나 몰라라’한다는 소문도 이내 우리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이럴 때마다 우리는 얼마나 치를 떨고 분개했던지!

   아니, 우리는 누가 만들어내는지 알 수 없는 그 소문이 무서웠는지 모르겠다. 그 때마다 아이들이 난상토론을 벌였고, 열흘 째 되는 날 오후에 학생들의 투표로 다음날부터 수업 복귀를 결정했다. 수업에 찬성한 학생이나 반대한 학생이나 아무도 수업 복귀 결정에 대해서 좋아하는 학생은 없었다. 그냥, 부당한 힘에 졌다는 생각에 억울하고 분했다. 나도 학교와 선생님이 싫어졌다. 그때는 세상 모든 게 그냥 싫었던 것 같다.

   나는 이 싸움을 통해 학교 밖 세상을 두려워하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옳고 그름이 너무나 분명한 싸움에서도 이렇게 지는구나, 하는 그 쓰라린 경험은 어린 나에게 적개심을 넘어 공포감, 그 자체였다. 단 한 번의 싸움에서 진 이후로 나는 오랫동안 기운을 잃어버렸다. 변명 같지만, 그 이후로 대학을 다닐 때 자주 일어난 시위에는 거의 참여하지 않았다. 우리가 분명 옳은데도, 싸움에서는 질 수 밖에 없다는 그 절망감을 피하고 싶지 않았을까 싶다. 고백하자면, 지금도 나는 사소한 싸움이라도 두렵기는 마찬가지다.

   다음 날부터 수업은 시작되었으나 그 어느 선생님도 그 열흘에 대해 이야기하시는 사람은 없었다. 그 일로 담임선생님은 우리 반 담임을 그만두셨고, 우리 반 아이들은 진학 상담을 낯선 선생님과 해야만 했다.(사실, 선지원시험제도라 입시 상담이 아주 중요했는데 다들 혼란스러워 했던 것 같다. 물론 그때나 지금이나 담임선생님으로선 그게 최선의 길이었다고 믿는다.) 그래도 우리는 대학 합격 소식을 들었고, 입학하기 전에 딱 한 번 담임선생님을 찾아간 적이 있었다. 선생님 댁을 찾아간 기억은 또렷하나 다른 내용은 흐릿한 것으로 보아, 그 자리에서 'OO이‘ 이야기는 거의 안 나왔지 싶다. 그만큼 우리에겐 상처가 깊었다.

   졸업을 하게 된 우리는 더 이상 그 얘기를 하지 않았고, 그렇게 모든 게 잊혀진 것처럼 보였다. 아니 많은 사람들이 그냥 잊고 살았을 것이다. 나도 그런 줄 알았다. 그러다 사범대에 진학했던 내가 몇 년 전에 모교에 발령을 받았다. 모교에 발령을 받았다는 걸 알게 된 순간, 제일 먼저 떠오른 기억이 내가 고등학교 3학년이던 1990년 10월의 어느 가을날의 그 사건이었다. 그렇다, 나는 지금 그 때 싫었던 그 학교의, 싫어했던 그 선생 노릇을 하며 지내고 있다.

   그 때 친구들에게 미안했던 기억이 계속 남았던 것일까? 난 해마다 아이들에게 최시한의 ‘모두 아름다운 아이들’ 읽기를 권한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참 눈부시게 아름다웠던 우리 반 아이들! 어디 가서 무엇을 하더라도, 씩씩하게 잘 지내고 있으리라 믿는다.

[모두 아름다운 아이들]과 관련해서 남은 이야기 둘!

하나) 이 책, 아름다운 아이들을 처음 만난 게 벌써 10년 전이지 싶다. 대학 동기였던 OO이랑 도서관 서가를 훑다가, 녀석이 ‘우리의 교육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 책’이라며 권해준 책이다. 며칠 후에 그 책을 사서 읽고, 난 앞에 쓴 글처럼 고등학교 때 우리 반 아이들을 떠올렸고, 한동안 원인 모를 통증에 시달렸다. 그러면서 슬그머니 ‘왜냐 선생’처럼 멋있게 아이들을 가르치는 꿈도 꾸었다.(지금 생각하면 정말 ‘꿈’같은 이야기이다.) 

    ‘모두 아름다운 아이들’과의 인연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해마다 나는 마음을 나누고 싶은 동료교사를 만나면 늘 이 책을 선물로 건넸고, 이제는 같이 책읽기 모임을 하는 아이들에게 여름방학 캠프에 가서 읽고 토론하는 책으로 정해 두었다. 이번 여름도 예외는 아니어서, 얼마 전에 캠프에서 이 책을 주제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네 안의 구름그림자는 어떤 것인가? 허생과 왜냐 선생, 선재와 윤수의 관계는 어떠한가? 반성문의 의미는 무엇인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떠오르는 생각들!

둘) 이번 동아리 캠프를 가기 위해 교장샘에게 말씀을 드렸더니, 내가 평소에 ‘어떤 책’을 통해서 학생들을 ‘의식화’시키는 게 아닌지 걱정스럽다는 투로 얘기하셨다. 이번 캠프에 가서 무슨 일을 하느냐고 물으시길래 이 책, 모두 아름다운 아이들을 읽고 토론할 거라고 했더니, 책 내용이 어떤 거냐고 묻고, 이 책을 쓴 작가의 다른 작품도 물으셨다. 이럴 땐 정말 황당해서 말도 잘 안 나온다. 자신 있게 책 한 번 읽어보시라고 권했다. 교장실을 나오면서  학교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모두 아름다운 아이들’은 교육민주화 운동이 활발하던 1980년대 후반과 1990년대 초반의 우리 교육 현실의 문제점을 담아내고 있다. 내가 이 책을 읽게 된 건 소설이 그리고 있는 현실과는 10년 정도 지난 1997년 즈음이었다. 그 때는 10년 정도 지났으면 좀 나아졌으리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오늘 학교에서 벌어지는 일을 보고 있노라면 학교의 현실은 그 때와 조금도 변하지 않고, 20년 전의 모습 그대로이다. 아니, 오히려 입시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살풍경한 모습이나 아이들을 옥좨는 풍경은 그때보다 더욱 잔혹하다.

   내가 아직도 이 책을 손에서 놓지 못하는 이유다. 내가 좋아하는 동료 교사들에게 이 책을 선물로 주는 이유다. 빨리 이 책에서 벗어나는 날이 오기를……!


댓글(6)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글샘 2008-07-28 2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학교는 정말 극우의 인간들이 버글거리는 곳이죠. 건전한 보수조차도 별로 없는... 조중동 스러운 인간들이 교장이 되는... 정말 희망이 있는가... 하는 생각도 합니다. ㅠㅜ 우리 학교엔 촛불 드는 애들도 없는 거 같긴 한데... 아이들이랑 독서팀 꾸리는 일도 과연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인지 두려울 때도 많습니다. 90년이면, 학교는 완전히 우경화되어 전교조 이야기도 못 꺼내던 때죠. ㅠㅜ

느티나무 2008-07-29 08:50   좋아요 0 | URL
학교 뿐일까 하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생각해 보니 교장이 더 심한 말도 했던 거 같네요. -선생님 말씀이 애들 인생을 좌우한다, 애들이 평생 후회할 수도 있다. 90년의 우리 학교는 달랐어요. 전교조샘들이 참 많았어요. 학교 분위기도 자유롭고 좋았던 거 같은데...

심상이최고야 2008-07-28 2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8년 전 고등학생은 지금 대학생보다 의식 수준이 높네요. 수능 한 달 전 수업 거부라!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 힘듭니다. 그때 선언문을 발표한 그 학생은 지금 어디서 무얼 하고 살고 있을까요? 아이고... 신산했을 삶을 떠올리니 마음이 짠해지네요.

느티나무 2008-07-29 08:52   좋아요 1 | URL
그 학생, 검정고시를 거쳐 지금 OO여고에서 기간제 국어교사로 있어요. 그 전에 있던 학교에서 실컷 부려먹고 정식으로 발령내기 직전에 다른 사람을 뽑았다더군요. 아이러니한 상황이라고 해야할까요?ㅋ

AHN♥ 2008-08-06 0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을 읽고나서 선생님께서 왜 이 책을 읽어보라고 하셨는지 알것같아요.
선생님께서 이런 경험을 하셨다니,,, 내가 만약 그당시 선생님 반의 학생이었다면 선듯 수능한달전에 열흘동안 수업거부를 할 수 있었을까요??
그리고 교장선생님 아무리 생각해도 많이 어이없네요.

느티나무 2008-08-06 13:20   좋아요 0 | URL
이참에 아예 가입을 했군요.^^ 시간이 안 나겠지만, 가끔이라도 여기서 볼 수 있으면 좋겠네~~!! 교장샘 얘기는 여기서 그만~!ㅋ 그 땐 할 수 없었어요. 그럴 수 밖에. 아마 모레쯤 그 친구를 만날 거에요.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