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경
김화진 지음 / 문학동네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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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경 #김화진 #문학동네

 

둘이 의미하는 것은 애인이며, 넷이 의미하는 것은 가족, 셋은 친구였다. 라고 말하는 주인공의 말을 들어보자. 세 명의 친구는 트라이앵글처럼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고 도드라진 부분을 다듬어주는 관계라고 한다. 때로는 나와 맞지 않은 부분에 속으로 탓하다가 내가 부러워하는 부분이 보이면 감탄한다. 세 사람 중 이 사람과는 이런 부분이, 다른 사람과는 다른 부분이 맞아 삼각형의 형태가 된다. 고등학교 시절 따로 또 같이 세 명이 친하게 지냈다. 그때를 떠올리게 했다. 감정은 변하기 마련이어서, 불편한 부분도 그 사람의 본심을 알게 되면 마음을 열게 되는 순간이 있다. 저마다 다른 사람이 모여 삼각형을 이루듯 진정한 친구가 되는 과정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소설이었다.



 

김화진 작가의 동경은 아름다운 표지 때문에 읽게 된 책이다. 여름, 가을, 겨울을 거쳐 다시 봄과 여름을 맞으며 각자의 관계에서 세 명의 친구가 되는 과정이 꽤 인상적이다. 주인공이 저마다 상대방에게 느끼는 감정을 표현하는데 우리의 속마음을 들킨 것 같아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혼자서 웃었을 것이다. 친구와 있던 감정을 절묘하게 표현해서였다.

 





아름의 이야기부터 시작한다. 아름은 사진 찍는 일을 계속하고 싶었다. 인형 리페인팅 작업이 시들해질 무렵 그런 마음의 표시를 늦게 출근하고 갑자기 연차를 내는 등의 행동으로 이어졌을 것이다. 선배이자 강사였던 인아에게 그만둔다는 말을 망설였던 마음 또한 이해됐다. 쉽게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는 법이다. 아름을 지켜보는 인아 또한 다른 사람이 알지 못하는 마음이 있었다. 아름과 인아, 인아와 해든, 해든과 아름, 세 사람은 각자와 통하는 부분이 있지만, 맞지 않는 부분도 있다.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내가 하지 못한 행동이나 표현 방법을 동경하고 부러워하기도 한다.

 



사진 예술을 하는 사람이 주인공이라 사진을 찍는 사람의 따뜻한 시선을 바라볼 수 있었다. 빛이 스며들 때까지 기다려 사람의 모습을 찍고, 깨진 도자기 조각이 자신을 드러내는 것만 같아 카메라 셔터를 누르는 인아의 모습은 예술가만의 특징이 있었다. 배우면서 성장해가는 아름의 캐릭터가 마음에 들었다. 때로는 시크하게 행동하는 해든도 매력적인 캐릭터였다. 사진에 대한 자부심과 예술적 감각을 지닌 사진 예술의 아름다움에 심취했던 시간이었다.



 

따로 또 같이 지내면서 수술 때문에 입원한 인아를 해든과 아름이 차례로 방문하며 이들의 관계는 변하기 시작했다. 각자에서 셋이 함께하는 관계로 변한 것이다. 아마도 함께 삿포로 여행을 떠나며 급변했다. 셋을 이루는 삼각형의 고리가 마음에 든 것이다. 아무리 친한 친구라도 조금씩은 성향이 다른 법이다. 때로는 이해하기 힘든 말이나 행동을 해도 다른 점 때문에 관계를 유지해간다. 아름과 인아, 해든도 그런 관계로 이어지게 될 것이다. 하고 있는 일이 지루할 때 때로는 다른 일을 도모하면 더 열정이 생기지 않겠는가.



 

인형 리페인팅이라는 직업에 대해서도 새롭게 알게 됐다. 많은 사람이 자기가 좋아하는 배우, 캐릭터로 변신한 피규어를 찾는다고 한다. 좋아하는 것을 갖고 싶은 마음, 취향의 다양성을 살펴볼 수 있는 부분이었다. 책을 읽고 검색해봤더니 다양하게 리페인팅된 인형이 나왔다. 좋아하는 배우의 얼굴과 귀여운 아기, 애니메이션 캐릭터까지 있어 소장해도 괜찮을 듯 했다. 그리고 책점을 해본 적이 있는지 모르겠다. 책점은 고민이 있으면 그걸 생각하면서 책에 손을 올려놓고 아무데나 펼쳐보는 거다. 맨 처음 들어오는 문장이 그 사람의 것이다. 재미 삼아 한번 해볼까 하고, 장바티스트 앙드레아의 책을 펼쳤더니 네 완성된 작품이 살아 숨 쉬는 모습을 생각해 봐. 그것이 어떤 효과를 낳을까?’라고 나온다. 무슨 의미일까.



 

다양한 생각들을 하고 있는 것 같다. 다른 사람과는 차별화된 생각과 재능이 있기에 인형 리페인팅하는 직업도 생겨났을 것 같다. 좋아하는 캐릭터를 찾는 사람들을 위해 작업하는 광경이 매력적이었다.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이야말로 행복한 일이지 않나. 굳어져 있던 마음 근육을 넓히는 시간이었던 것 같다. 다양한 작품을 읽어야 하는 이유다. 아름다운 삼각형의 고리를 만들어가는 성장통을 함께 즐겨볼 수 있을 것이다.

 

 



#동경 #김화진 #문학동네 ##책추천 #문학 #소설 #소설추천 #한국소설 #한국문학 #장편소설 #장편소설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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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를 지키다
장바티스트 앙드레아 지음, 정혜용 옮김 / 열린책들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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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를지키다 #장바티스트앙드레아 #열린책들

 

영화감독이자 시나리오 작가인 장바티스트 앙드레아의 네 번째 장편소설로 왜소증으로 태어난 석공예가 미모와 아름다운 비올라의 성장과 자유 그에 따른 투쟁을 다룬 작품이다. 세계 3대 문학상인 2023년 공쿠르상을 수상하여 걸작이라는 평을 들을 만큼 감동적인 소설이다.



 

파시즘 혹은 독재는 역사 속에서만 있는 단어인 줄 알았다. 그에 가까운 것을 실제로 겪어보니 다시는 이러한 역사가 반복되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에게 민주주의와 자유가 쟁취되기까지 수많은 사람의 노고와 핍박이 있었다. 하지만 하나의 목적으로 가지고 움직인 사람들이 많았기에 우리는 다시 과거의 역사를 반복하지 않아도 되었다. 방심하는 사이에 반복될지도 모르는 환경에 처하고 보니 개개인의 감시가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았다. 그녀를 지키다를 읽으면서 느끼는 바가 있었다. 누군가가 부르짖는 주장에 현혹되면 더 깊이 빠지는 모양새가 되며 자유를 위한 갈망을 부를 뿐이라는 거다. 누군가는 그 사상이 정착되지 않게 제재하고 강조해야 하는 법이다.






 

미모 비탈리아니는 왜소증으로 태어났으나 아버지를 돕다가 석공예 재능이 있는 것을 알았다. 아버지가 전쟁에 나가 죽은 후 어머니는 가산을 팔아 그를 조각가인 삼촌 치오 알베르토에게 보냈다. 그의 말에 의하면 알베르토는 위대한 조각가였던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오히려 미모의 재능을 탐내고 질투했다. 산피에트로 성당의 피에타상이 그를 조각으로 이끌었다. 조각상을 바라보는 그를 발견한 사제 돈 안셀모는 피에타가 슬픔에 잠긴 어머니라는 뜻이라며 친절하게 설명한다. 그리고 아무도 오지 않는 밤, 묘지에 갔다가 새빨간 입술의 비올라 오르시니를 만나 삶이 변화한다. 비올라와 미모는 서로의 존재를 이끌어주는 관계에 가깝다. 비올라는 미모가 위대한 조각가가 되기까지 책을 읽히고 단련시키는 역할을 했으며, 미모는 비올라 곁에서 그녀가 자유를 갖도록 응원하는 상호보완적인 존재가 되었다. 미모 비탈리아니는 그 유명한 미켈란젤로 비탈리아니라는 이름이었으나 미모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우리는 그녀를 보호하기 위해 유폐하는 겁니다. (48페이지)



 

이 소설의 가장 중요한 문장이다. 왜 유폐했는지 그 과정을 찾는 여정을 다룬 소설이라 해도 되겠다. 소설은 제2차 세계대전의 이탈리아를 배경으로 한다. 파시즘이 난무하는 시대에 정치에 빠진 오르시니 가문의 아들과 그를 지켜보는 정치인들, 그리고 가족들. 자유를 갈망하는 비올라, 위대한 조각가로 이름을 날리는 미모. 이 둘의 삶의 투쟁을 말한다. 미모가 주인공인 동시에 미모가 바라보는 비올라가 이 소설의 중심을 이끌어간다. 비올라로 말하자면, 서재에 있는 책을 거의 다 읽었으며 그런 만큼 지식이 풍부했다. 대학 공부를 하고 싶었으나 부모는 여자아이라는 이유로 반대했다. 날 수 있는 장치를 만들어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는 연습을 했으며 미모와 친구들은 이에 기꺼이 동참했다. 그녀는 삶의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를 갈망했다.

 



삶의 자유, 개인의 자유를 위해 투쟁한 이들은 자기들만의 방식으로 그 꿈을 이뤄냈다. 한때는 다른 길로 들어서기도 했지만, 미래를 위해 잠시 돌아갈 뿐이었다. 파시즘에 빠진 인물을 지키는 방법 또한 아주 간단하다. 그를 고발하는 것. 감옥에 잠시 있더라도 궁극적으로는 자유를 향한 길임을 깨닫는 일이었다.



 

지치고 힘든 일상에 단비 같은 책이었다. 어떤 삶을 살 것인가.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얻을 것인가를 통찰할 수 있는 작품이었다. 수도원의 담장 아래 헐떡거리는 숨을 간신히 붙들고 있는 자의 지난 삶의 반추는 우리가 무엇을 잊고 있는지를 묻는다. 또한 무엇을 놓치지 말아야 하는지를 말한다.

 


 

#그녀를지키다 #장바티스트앙드레아 #열린책들 ##책추천 #문학 #소설 #소설추천 #프랑스소설 #프랑스문학 #공쿠르상 #공쿠르상수상작 #파시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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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라닌 - 제29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하승민 지음 / 한겨레출판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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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라닌 #하승민 #한겨레출판

 



파란 피부를 가진 소년을 주인공으로 하여 한국과 미국의 정치 상황을 비교하고, 피부색과 인종이 다르다는 이유로 무시하는 시선, 그로 인하여 우리 사회에 만연한 차별과 편견을 말하는 소설이었다.

 



내 피부는 파랗고 엄마는 베트남 사람이다. (7페이지)



 

차별과 편견이 드러나는 소설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된다. 한국에서도 파란 피부는 다른 사람들 틈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더군다나 엄마는 베트남 사람이므로 소설의 주인공은 이 모든 차별과 편견에 노출되어있다고 봐야 한다. 열세 살의 재일은 아빠와 함께 한국에서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미국 생활도 만만치 않았다. 파란 피부는 백인과 흑인, 갈색 피부를 가진 사람보다 더 낮은 단계에 있다. 파란 피부를 가진 사람이 다른 사람을 해치는 사건도 발생했다. 재일을 보면 사람들은 흠칫 놀라며 피했다. 미국에 도착한 재일의 생활이 쉽지 않을 거로 보인다.

 





엄마는 아픈 할머니를 보살핀다는 이유로 동생 재우와 함께 베트남으로 갔다가 미국으로 오지 않았다. 편견과 차별이 심한 장소에서 의지할 단 한 사람의 친구만 있어도 버티는 법이다. 클로이와 셀마 때문에 학교생활을 버틸 수 있었다. 클로이와 셀마, 강우 삼촌이 사고를 당하자 재일은 누군가와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아무도 가지 않는 채석강에서 수영을 하며 후드를 눌러 쓰고 다닌다. 자기를 감추는 것만이 살길이라고 여겼던 듯하다. 호기심과 멸시, 차별과 편견에 맞서는 방법이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작가는 파란 피부 즉 블루 멜라닌을 가진 소년을 통해 편견과 차별을 말하고 싶었던 듯하다. 한국 사회와 정치 등을 덧붙여 우리가 살아가는 수많은 상황에 대처하는 방법을 배운다. 아무에게도 드러나지 않는 삶. 아이들에게 구타를 당해도 조용히 넘어가려 한다. 실제로 파란 피부를 가진 인간이 태어난다면 모두에게 호기심의 대상일 것이다. 더군다나 재일에게 한국의 상황도 만만치 않았다. 아빠는 소위 블루칼라라고 일컫는 직업을 가졌으며 엄마는 베트남 사람이다. 누구에게나 호기심의 대상이 되어 힘들었으나 미국에 가면 좀 더 나을 줄 알았다. 할머니와 아빠의 판단은 오산이었다.

 



재일에게 강우 삼촌은 새로운 세상을 열어주는 사람이었다. 클로이에게 벌어진 사건에서 벗어나지 못할 때, 게임 고득점자 리스트에 이름을 올릴 시간에 힘을 키우라는 말을 했다. 비록 삼촌은 세계를 구경하고자 나선 여행에서 아이가 생기자 바로 돌아왔지만, 재일에게는 세상을 돌아보라고 말했다. 삼촌이 맸던 여행 배낭을 선물로 받고 떠날 결심을 했는지도 모르겠다. 세상을 돌아보는 것이야말로 삶의 변화를 이끈다. 타인의 삶에서 내 삶을 바라보고 그에 따라 살아갈 수 있는 계획을 세우는 법이다. 한곳에 머무르지 않고 떠도는 삶을 꿈꾼 적 있었다. 두려움에 시도를 못 했는데 소설 속 인물들은 과감하게 떠난다. 떠나는 발걸음에 용기와 도전이 엿보인다.

 



삼촌의 배낭에 물건을 채우는 재우의 표정이 상상된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고, 멀리 떠나려는 마음에 공감했다. 스스로에게 답을 찾는 과정이 필요할 것이다. 처음 여행지는 당연하게 우리가 예상했던 나라였다. 비로소 마주한 사람과 시간을 보내고 다른 나라로 향할 수 있었을 것이다. 다가올 두려움은 이미 경험한 바다. 타인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진짜 삶을 향해 나아가는 재일을 응원했다.

 



차별과 편견을 딛고 새로운 삶을 향하는 성장소설이었다. 우리는 이러한 소설을 읽으며 우리를 돌아보는 것 같다. 소수의 존재를 핍박하고 차별과 편견에 사로잡힌 행동을 하지 않았는지 돌아볼 일이다. 블루멜라닌을 찾아 세계를 탐험하는 재일에게 모두의 응원이 필요하다.

 

 


#멜라닌 #하승민 #한겨레출판 ##책추천 #문학 #소설 #소설추천 #한국소설 #한국문학 #한겨레문학상 #한겨레문학상수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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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실 - 2024 노벨문학상 수상 강연문 수록,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문지 에크리
한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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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실 #한강 #문학과지성사


 

작년 가을, 이사 준비를 하면서 짐 정리를 시작했다. 아이들이 쓴 오래된 일기장, 그림, 상장 등이 있었다. 들춰봤더니 아이만이 가진 글들이 가득 들어있었다. 그걸 보고 웃고, 멀리 있는 아이에게 사진 찍어 보내주기도 했다. 소중한 것을 버리지 못하는 마음. 다시는 돌아가지 못할 유치원 때부터 초등학교 때의 추억이 깃든 물건이었다. 반면 나의 어렸을 적 추억거리는 없다. 가난한 살림, 수많은 좁은 집을 거치면서 우리의 공책 같은 건 남겨둘 생각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살뜰하게 챙기는 부모여야 가능한 법이다. 노벨문학상 수상 이후 첫 책, 문지 에크리 시리즈로 나온 한강 작가의 글을 보고 있으니 감동이 밀려온다. 유년시절에 쓴 일기장들 사이에 시집이라고 적힌 책자 한 권을 발견하며 글이 시작된다. 썼던 시를 엮은 작가의 첫 작품집이다. 벌써 작가의 싹이 보였나 보다. 사랑에 대하여 고민하고 떠오르는 마음을 글로 쓴 거다. 유명한 시인이 썼다고 해도 믿을 만한 시어다. 아래의 문장을 보라.

 


사랑이란 어디 있을까?

팔딱팔딱 뛰는 나의 가슴 속에 있지.

 

사랑이란 무얼까?

우리의 가슴과 가슴 사이를 연결해주는 금실이지. (10페이지)






 

노벨문학상 수상 소감문을 비롯해 작품을 펴낸 시점의 마음을 담은 강연, 산문, 그리고 소설의 글감이 되는 메모장, 작가만의 북향 정원을 가꾸는 이야기가 사진과 함께 실려 있다. 이로써 다음 작품을 기다렸던 마음을 잠시 달랠 수 있다. 장편을 쓰면 짧게는 1~2, 길게는 7~8년 동안 쓰는데, 그에 따른 시간과 노력 그리고 고뇌가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작품이 나오기까지 그토록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걸 독자들은 자각하지 못하는 것 같다. 출간된 책 한 권을 휘리릭 읽은 후 다음 작품을 그저 기다린다. 기다림의 시간이 길었다고만 여겼다는 게 독자로서 조금은 미안하다.

 


집과 텃밭에서 작은 정원을 가꾸고 있다. 이사한 후 전보다 좁아진 발코니에 제라늄을 키운다. 제라늄들도 새집에 적응하느라 힘들었는지 잎을 틔우지 못하고 있었다. 봄이 되자 분갈이를 하고, 영양제를 조금 주었더니 어느 정도 적응 후 잎과 꽃을 틔우기 시작했다. 혹시나 햇볕이 부족할까 봐 집에 있을 때마다 혹은 출근 전에 화분을 이리 옮기고 저리 옮겨주었다. 북쪽 정원을 가꾸는 작가의 산문을 보고 느끼는 바가 많았다. 햇볕이 들지 않은 쪽에 정원을 가꾼다는 것 자체가 독특했다. 작가가 부른 조경사는 거울을 이용해 식물을 키우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거울 몇 개를 들여와 햇볕을 식물에 쏘아두고 햇빛이 움직일 때마다 옮겨주느라 하루를 보낸다는 작가였다. 그 애틋함이 공감되었다. 미스김라일락이 꽃필 때, 단풍나무의 키가 자랄 때, 불두화에 진딧물이 올라 잡아주느라 쪼그리고 앉았을 작가를 그려보았다. 식물이 자라는 과정을 일기로 담아 일상의 소중함과 삶의 통찰을 바라보게 했다. 보살피고 지켜보아야 잘 자라는 인간의 삶처럼 말이다.


 

지난 주말에 텃밭에 갔더니 한 달 전에 잘라준 장미는 금방 꽃 피울 듯 풍성하게 자랐다. 7월에 피는 목수국 아래 잔가지를 잘라주고 꽃망울이 맺힌 불두화 가지도 정리해주었다. 꽃양귀비는 일주일쯤 뒤에는 꽃이 필 것 같다. 늦은 오후엔 오이, 고추, 참외, 토마토 모종을 심었다. 자연에서 나는 식물과 꽃, 채소가 점점 더 귀하게 느껴진다. 키우는 즐거움이 있다.

 


언어가 우리를 잇는 실이라는 것을, 생명의 빛과 전류가 흐르는 그 실에 나의 질문들이 접속하고 있다는 사실을 실감하는 순간에. 그 실에 연결되어주었고, 연결되어줄 모든 분들에게 마음 깊은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29페이지)

 


작가는 언어로 말하는 사람이다. 글쓰기로 인생을 껴안아 보았고, 사람들을 만나고, 충분히 살아냈다고 표현한 작가의 글이 오랫동안 마음에 남을 것 같다. 하루하루 정원을 지켜보며 자라는 나무를 보는 즐거움, 사회에 일어난 폭력을 글로 풀어내야 하는 고통과 부담감, 그럼에도 작품을 완성하고 출간하는 순간을 기다려온 것들의 감정이 곳곳에 숨어 있었다. 폭력의 역사가 되풀이되어서는 안 된다. 작가로서 어떤 이야기를 써야 하는지 폭력에 대처하는 명확하고 명징한 시선이 담긴 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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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의 마치
정한아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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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의마치 #정한아 #문학동네


 

죽을 때까지 온전한 기억으로 살아간다면 좋겠다. 적당히 잊고 살아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정작 자기 자신을 잊어버린다고 생각을 하면 아찔하다. 어떻게 기억을 잃을 수 있느냐며 한탄할까. 때로는 고통스러운 기억은 잊는 게 좋다. 가슴에 부여안고 있으면 제대로 된 삶을 살아갈 수 없다. 아프고 또 아프면 통째로 잊어버리는 방법도 있다. 그러고 보면 알츠하이머 치매가 하나의 방법이라고 할 수 있겠다. 모든 걸 잊는, 어쩌면 자기 자신조차 잊어버리는. 슬픈 일이지만 말이다.



 

주변에 치매를 앓고 있는 분들이 많다. 그토록 총명하던 분이 기억을 잃고 가만히 앉아 있는 모습은 슬프기 짝이 없다. 과거를 잊어도 나는 나다. 알츠하이머 치매인데도 현재를 살아가는 이들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영화 <스틸 앨리스>가 생각났다. 우리 또한 미래에 그러지 않을 거라는 보장이 없기 때문에 그냥 지나칠 수 없다는 게 맞겠다.






 

드라마 <안나>의 원작 소설인 친밀한 이방인의 작가 정한아의 신작이 출간되었다. 3월에 태어났다고 마치라는 이름을 가진 여자가 주인공이다. 국민엄마 배우로 연기와 인기, 재력을 거머쥔 이마치에게 일어난 이야기다. 55킬로그램 몸무게가 변하지 않던 마치는 육십 살 생일에 체중계에 올라갔다가 59킬로그램의 숫자를 보고 깜짝 놀랐다. 자주 깜빡거리고 지갑 없이 택시를 타는 등 경증 치매 증세가 있는 알츠하이머 전 단계 상태다. 거금의 병원비를 지불하고 기억을 되살리는 VR 치료를 시작했다. 과거의 기억을 되살리는 치료로 기억 속 건물에서 과거의 이마치와 만나며 잊었던 기억을 하나씩 떠올린다.



 

이마치가 살던 아파트가 재건축했다가 다시 입주하기 시작했을 때 이마치는 누구보다 먼저 예전의 집 형태 그대로 입주했다. 사라진 아들이 찾아올까 봐 기다리기 위해서였다. 아들의 방을 그대로 두고 그 방만은 깨끗하게 정돈을 했다. 과거 마치에게는 남편과 딸, 아들, 매니저 K가 있었지만, 지금의 그녀에게는 누구도 없다. 그러나 가상현실 속의 마치에게는 노아라는 젊은 청년이 기억을 돕는다. 43층의 이마치와 딸 준영, 40층의 마치, 더 어린 딸 준영을 만나며 과거의 기억 속을 들여다본다. 마치와 노아가 방문하는 집은 모두 마치의 기억 속 공간이다. 언니 준이 살아있을 때의 기억으로 돌아간 마치는 그리움에 눈물을 흘리고, 엄마에게 맞는 십 대의 마치에게는 조금만 참으라고 말한다. 마음속으로는 엄마의 집을 나갈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되뇐다. 다른 소설과 달리 과거의 자신에게 무언가를 하라고 말하지 않는다. 과거는 바꿀 수 없으며 바꿔서도 안 된다는 걸 강조하는 듯했다. 마치의 치료법은 과거를 바꾸는 게 아니라 과거를 기억해내는 게 필요해서다.



 

과거의 나에게 돌아간다면 해줄 말이 뭐가 있을까. 살아온 과거는 바꿀 수 없으니 그저 기다리라는 말만 할 수 있는 건가. 과거의 장소에서 과거의 나와 조우한다는 건 내가 놓쳤던 무언가를 찾을 수 있다는 거다. 그녀가 놓쳤던 것 하나가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남편과의 불화, 아이들을 뿌리쳤던 지난날들의 후회가 마치를 괴롭힌다. 과거의 기억을 마주했을 때 후회뿐이었다는 것마저 내 기억을 돕는 장치라는 게 슬펐다.

 



아들을 잃은 엄마를 옆에서 바라봐야 했던 딸 준영의 마음을 살피지 못했다. 성년이 된 딸은 엄마를 거부하고 떠났다. 남편은 전국으로 아들 정민을 찾아다녔지만, 마치는 아들을 잃은 고통을 잊고자 더욱 연기에 집착했다. 그 결과가 알츠하이머 치매 증세로 나타났다. 아마 과거를 잊고 싶었을 것이다.

 



과거의 기억과 마주한 마치는 돌이킬 수 없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딘가에 아들이 살아있을 거라는 희망, 비오는 날 택시비를 받지 않았던 운전기사와의 조우, 마치의 기억을 찾는 과정을 함께 한 노아의 정체를 아는 순간 고통스러운 슬픔이 몰려왔다. 잊고 살았던 과거, 잊지 못했던 것들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아무도 없는 집안에서 들려왔던 소음, 바닷가에서 서핑을 하던 청년과의 만남 등 세상은 이해할 수 없는 일투성인 것 같다. 도무지 실재했다고 보기 어려운 일이 지금도 어딘가에서 일어난다. 남은 사람에게 죽은 자가 건네는 다정한 위로가 아니었을까.

 



사람들이 인생이라고 부르는 것, 그것은 다만 죽어가는 과정이라는 것. 매끈하던 선이 뭉개지고 지워지는 과정, 조밀하던 이목구비가 흐물거리고 늘어지는 과정, 환했던 빛이 점차 희미해지는 과정. 이윽고 우유를 다 마신 아이는 빈 잔을 노아에게 건네주었다. 여자들이 모여 서 있는 곳으로는 눈길 한번 주지 않고 방으로 들어갔다. (213페이지)



 

사랑하는 사람에게 괜찮다고 말하기 위해 주변에서 맴도는 사람이 있는지 둘러보라. 간절한 바람을 안고 주변을 맴돌 그 사람을 위해 마음을 열어볼 수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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