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사전 - 우리에게는 더 많은 단어가 필요하다 아무튼 시리즈 52
홍한별 지음 / 위고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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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거나 리뷰를 쓰면서 단어를 찾을 때 어학사전의 검색 기능을 자주 사용한다. 단어를 찾다 읽던 책을 밀쳐두기도 한다. 단어의 세계, 단어가 가진 힘. 그 역할을 사전이 담당한다. 어렸을 때 책장에 꽂혀 있었던 까만색 장정의 사전이 떠오른다. 순서대로 단어를 찾다 시간을 다 보낼 정도였다. 아는 사람만 아는, 책이나 글을 좋아했던 사람의 특징일 것 같다.

 


20년 경력의 출판 번역가에게 사전은 특별한 물건이다. 여러 개의 인터넷 사전을 펼쳐두고 번역 작업을 하는 작가에게 사전은 그만큼 특별한 존재에 가깝다. 사전을 주제로 한 아무튼 시리즈의 작가로 매우 어울린다고 해야겠다. 사전이 작가에게 주는 다양한 경험을 토대로 하여 언어란 어떤 것인가, 언어가 가진 힘과 그것을 표현하는 감정들을 담았다.




 


단어를 좋아해서인지, 사전에 관한 책을 꽤 읽었다. 사전을 만드는 작업을 배를 엮는 작업으로 비유한 미우라 시온의 배를 엮다와 사사키 겐이치의 새로운 단어를 찾습니다, 핍 윌리엄스의 잃어버린 단어들의 사전은 재미있게 읽은 책이기도 하다. 사전을 만드는 고단한 작업 과정과 그것으로부터 느껴지는 감동이 커 오래도록 기억에 남아있다. 책에서 언급한 위의 책들에 관한 느낌에 마구 공감을 표시하며 읽었다. 짧은 책에서 전해지는 감동에 오래도록 품고 싶은 책이었다.


 

여러 권의 책을 동시에 읽는 게 집중력을 높여준다고 했다. 이 방법을 따라 해보았지만 쉽지 않았다. 분야를 달리하여 소설과 시 혹은 인문학 도서를 읽는 방법은 가능했으나 비슷한 종류의 책은 쉽지 않았다. 아버지의 사전에서 저자는 아버지가 몇 권의 책을 베개맡에 두고 읽었던 기억을 떠올렸다. 책을 좋아하던 아버지가 책을 읽을 수 없게 된 기억들은 작가에게 안타까움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를 좋아하던 아버지, 칼 세이건의 딸 사샤 세이건의 책을 번역하는 작업 또한 작가에게는 남다른 경험이었다.


 

광대한 우주를 우리는 인지할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지만, 우리에게는 사전, 백과사전, 작은 진리의 조각들을 담고 있는 책들이 있다. 그 책들이 알 수 없는 세상을 어떻게든 이해하고 인지할 수 있게 해준다. 아득한 우주에서 우리가 무한히 멀어지며 한없이 헤매지 않을 수 있게 해주는 닻이 되어준다. 그 책들이 무한한 우주로 떠난 아버지의 기억을 우리 집 한구석에 붙잡아놓을 수 있게 해준다. (62페이지)

 


부모가 읽었던 여기저기 놓여있는 책들은 자녀에게 삶의 자양분이 되곤 한다. 자연스럽게 책을 가까이한다. 생각해보니 우리 아빠도 소설책을 좋아하셨다. 지금은 눈이 나빠 많이 읽지 않으시지만, 책을 많이 읽으셨고 도서관에도 자주 다니셨다. 그런 이유로 우리 자매들은 책을 좋아한다. 작가에게는 사전을 만드는 출판사에 다녔던 아버지가 있었다. 사전과 책을 좋아했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작가 또한 책을 번역하는 작가가 되었다. 자양분이 충분한 작가답게 작가의 번역은 매끄럽고 문학적이다. 단어 하나를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고민하고 찾은 노력의 결과다.

 


인터넷의 발달로 종이책 사전은 더 이상 명맥을 유지하기 힘들다. 인터넷을 이용하는 사람이 많기에 인터넷 사전을 조금씩 손보는 것에 가깝다. 단어 찾기를 할 때 주로 네이버 어학사전에서 그 답을 찾는다. 예문을 이용해 쓰임새를 찾아보는데 작가는 전문적인 사전을 이용하고 있었다. <금성그랜드 영한사전>이나 <옥스퍼드 영한사전>, <롱맨 영한사전>을 즐겨 찾는다고 했다.


 

말과 언어는 사라지기도 하고 새롭게 생기기도 한다. 줄임말이나 신조어는 과거에도 있었고, 지금도 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사용하는 이들이 달라지며 변해간다. 그 역할의 중간에 사전이 있다. 표준어가 아닌 말이 틀리거나 잘못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 말을 알아들을 사람이 없으면 의사소통이 이루어지지 않기에 사전을 기준으로 삼아 번역한다는 작가의 말이 인상적이었다. 작가 엄마의 전라도 사투리 사삭스럽다라는 말이 반가워 전라도 사투리 사전이 책으로 나왔으면 하는 바람이다. 전국의 사투리들을 모아놓은 사투리 사전이 있다면 우리의 언어를 보존할 수 있는 한 방법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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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황하는 소설 창비교육 테마 소설 시리즈
정지아 외 지음, 이제창 외 엮음 / 창비교육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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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읽었던 소설을 시간이 지난 후에 다시 읽으며 감탄하는 경우가 있다. ‘이게 이런 내용이었어’, 하며 놀라고 소설의 깊이 있는 내용에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진다. 방황하는 소설에 수록된 두 작품에서 그런 감정을 느꼈다. 작품이란 고로 몇 번을 읽어야 그 의미를 제대로 알며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거에 가까워지는 것 같다.

 


창비교육에서 테마 소설집이 나오는데 이번에 나온 작품은 방황을 주제로 했다. 우리는 한때 방황했으며 지금도 여전히 갈 길을 찾지 못하고 헤매기도 한다. 어떤 상황에 대하여 깊이 고민하는 것에 가깝다고 해야겠다. 수많은 고민과 방황 끝에 하고자 하는 일을 선택하고 어떤 삶을 살지 결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수록 작품은 총 일곱 편으로 정지아의 존재의 증명을 비롯해 박상영의 요즘 애들, 정소현의 엔터 샌드맨, 김금희의 월계동月溪洞 옥주와 김지연의 먼바다 쪽으로, 박민정의 세실, 주희그리고 최은영의 파종이다. 단편의 매력을 발산하는 작품으로 저마다 방황하는 시절이 있었음을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이었다.


 

미래에 대하여 생각해볼 때 자기의 존재를 잊는 치매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어느 작품에서 차라리 암에 걸리고 말지 치매는 정말 싫다고 했던 말에 남의 일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정지아의 존재의 증명은 기억을 잃은 한 남자의 이야기다. 머무는 장소에서 자기의 취향과는 별개로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을 때의 난감함, 두려움이 남의 몫만은 아니다. 기억나지 않은 집의 소파에서 비로소 편안하게 누워 사람의 품격이 취향을 결정한다고 외치는 그가 못내 안타깝다. 요즘 애들은 신입 앵커 남준이 은채를 만나며 과거 자기들을 요즘 애들이라고 치부하며 깎아내렸던 첫 직장의 인턴 시절을 떠올린다. 남준 또한 과거의 배서정을 지금에야 이해할 수 있었으나 우리는 모두 방황하는 존재라는 것을 알겠다. 관계에 대하여, 말이 주는 무게감이 어떤 것인지를 알 수 있었다.


 

엔터 샌드맨은 도시 괴담을 작성하고 재창작하여 무서운 이야기를 담당하는 지수의 이야기다. 매일같이 불면에 시달리는 지수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고 나니 트라우마가 남긴 흔적은 좀처럼 지워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화재 사고의 생존자였던 지수와 지훈은 사고에서 은하와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로 이야기를 나눈 사람은 지수였다. 사고의 그늘에서 서로 의지하며 헤쳐나올 것 같지만 실제로는 쉽지 않은 일인 것 같다.

 


비슷한 시기에 가까운 사람이 떠나 마음이 아팠던 옥주는 어학연수를 위해 베이징으로 왔다. 새벽녘 기숙사 문이 열릴 때까지 추위를 참으며 웅크리고 있었던 그녀에게 괜찮냐고 물어오는 예후이와의 기억을 떠올리는 월계동月溪洞 옥주또한 방황하는 젊음을 엿볼 수 있다. 예후이는 옥주에게 중국어 강습을 시작했고, 중국어 강습을 받았던 친구들과 함께 예후이의 고향마을에 호수를 보러 갔다. 평안하지 않은 나날, 떠난 사람이 대부분이지만 중국에서 예후이와 함께 보았던 호수의 빛깔을 떠올리며 자기 자신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먼바다 쪽으로의 현태는 불안 증세가 있다. 종희와 함께 서울을 떠나 바닷가가 보이는 펜션을 관리하고 머물고 있다. 낯선 사람을 경계하고 그들의 대화를 엿듣기도 하며 누군가 자기를 죽이러 왔다고 여긴다. 아무렇지 않게 했던 거짓말이 불러온 효과일 것이다. 세실, 주희의 주희와 세실은 외국인 고객이 더 많은 뷰티 편집샵에서 일하고 있다. 일본인인 세실은 좋아하는 아이돌 때문에 한국에 왔고, 주희는 뉴올리언스에서 있었던 일이 촬영되어 동영상 사이트에 있다는 걸 알고 충격을 받는다. 이러한 이유로 세실이 주희에게 예쁘다고 하는 말이 불편하다. 전범 기업이며 우익단체 지원하는 일본의 회사 이름이나, 할머니를 자랑스러워하는 세실의 할머니에 대한 진실은 문화가 다른 차이일 것이다. 세실이 소녀상의 의미를 몰랐던 것처럼 말이다. 과거 뉴올리언스에서 J의 말과 행동을 이해하는 순간이다.

 


파종은 고통을 외면하려던 사람이 비로소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마주한다는 이야기다. 민주는 소리와 함께 오빠의 텃밭에 있었던 때가 가장 행복했던 때라는 것을 이제는 안다. 딸 소리도 자기와 마찬가지로 감정을 표현하지 않았던 것 같다. 학교를 그만두고 싶다는 이야기 했으나 이유는 말하지 않았다. 마음을 표현하는 방법도 배워야 하는 법이다. 원하는 바를 말할 수 있는 것. 그것이야말로 위로의 순간이 되는 것이다.


 

아픔을 정면에서 마주할 수 있을 때에야 상실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 가장 행복했던 때를 떠올리며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아팠던 흉터 또한 기억하고 싶은 매개체가 되어 우리를 감싸 안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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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똑한데 가끔 뭘 몰라
정원 지음 / 미디어창비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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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만화를 보고 있자니 만화에 심취했던 어릴 적 기억들이 떠올랐다. 세상 어떤 것보다 재미있었던 기억들이었다. 정원이 그리고 쓴 만화는 어린이들에게 소중한 것들이 무엇인지를 일깨운다. 우리가 잊고 있었던 날들의 감정과 함께 말이다.

 


김정훈은 열한 살의 초등학생이다. 새학년이 되고 좋은 선생님을 만난 것 같아 좋다. 다만 여자와 남자를 짝꿍으로 앉힌다는 게 조금 별로다. 정훈이는 석진이랑 앉고 싶다. 석진이는 키도 크고 운동도 잘하는 아이다. 정훈은 같이 앉고 싶은 사람과 짝꿍을 하고 싶다고 일기장에 적어 선생님께 건의한다. 앉고 싶은 사람과 앉으면 좋겠지만, 대부분은 그렇지 못하다. 우연히 정해진 짝꿍과 친해지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때로는 금을 그어놓고 넘어오지 못하게 할 수도 있지만, 학교생활을 함께하다 보면 어느새 둘도 없는 친구가 된다.





 

우산은 소중해에서는 우산이 필요한 아이에게 우산을 전해주는 따뜻한 정훈이를 만날 수 있다. 누나를 기다리던 아이였음에도 자기는 집이 가깝다며 우산을 건네주고 빗속을 달리는 따뜻한 마음을 가진 정훈이다. 돌려받은 우산을 펴자 그곳에는 하늘이 그려져 있었다. 다만 수채화 물감으로 색깔을 칠해 옷에 물감이 묻는 일이 생기긴 했다. 정훈이 더 어렸을 때 비 오는 날 우산을 건네준 언니가 있었다. 이름 모를 언니가 베풀어준 친절에 정훈이도 우산을 건네줄 줄 아는 따뜻한 아이가 되었다.




 


소중한 것은 이처럼 많다. 바뀐 짝꿍도 소중하고, 떡볶이도, 여름방학도 소중하다. 할머니가 맛없는 짜장라면을 끓여줘도 그것 또한 소중하다.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고, 원하는 바를 확실히 말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많은가. 동물을 사랑할 줄도 안다. 정훈이는 소중한 것을 아는 착한 아이다.




 


정훈이를 바라보고 있자니 마음이 따뜻해진다. 이름만 듣고는 성별이 구별되지 않는다. 차별을 배제해 어린아이들이 바라볼 평등한 세상을 보여준다. 정원 작가가 추구하고자 하는 감정이 고스란히 배어있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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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책방
엘리너 파전 지음, 이도우 옮김 / 수박설탕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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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 읽었던 동화는 나이가 들어서도 우리의 마음을 훔친다. 책으로 가득 찬 작은 책방에 앉아 있는 소녀를 상상해본다. 책먼지들이 흩날렸을 공간에서 책장을 넘기고 있었을 소녀. 읽지 못할 책이 없으며 모든 책을 읽을 수 있는 작은 공간이다. 보물찾기와도 같았던 공간에 머물렀을 소녀는 어른과 어린이가 함께 읽을 수 있는 책. 작은 책방의 먼지 속에서 태어난 책이다. 동화를 읽고 자란 소녀는 어른이 되어서도 동화를 읽는다. 추억과 감동이 공존하는 순간이다.


 

한평생 머리카락만을 위해 살았던 여섯 공주 이야기 일곱 번째 공주는 행복은 여왕이 아니라 자유롭게 삶을 살 수 있을 때라는 것을 말한다. 머리카락이 가장 긴 공주가 여왕이 될 것이라는 말을 듣고 유모들은 공주들의 머리카락을 감기고 빗겨주었다. 세계의 왕자가 찾아왔을 때 여섯 공주의 머리카락 길이는 똑같았다. 일곱 번째 공주만이 빨간 손수건을 풀어 헤쳤을 때 소년처럼 짧은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었다.





 

레몬 빛깔 강아지는 가난한 나무꾼이 공주와 결혼한다는 이야기다. 안데르센의 동화처럼 닮았으면서도 다른 색깔을 지녔다. 지혜와 빛나는 재치를 발한다. 아픈 아버지를 대신해 숲에 나가 나무를 베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조 졸리에게 남은 거라고는 낡은 의자와 구리로 만든 어머니의 결혼반지뿐이었다. 새로운 삶을 위해 길을 떠난 조 졸리는 레몬 빛깔의 스패니얼 개를 구하고, 금빛 털을 가진 새끼 고양이를 구했다. 팔이 부러진 왕실 숲의 나무꾼을 보살핀다. 길 잃은 동물과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도울 줄 알았던 조 졸리는 꿈속의 예언대로 행동하여 공주의 사랑을 얻는다. 흔한 이야기이지만 어렸을 적 상상의 나래로 빠지는 듯 흐뭇하다.


 

견습생 신분임에도 실력이 뛰어난 작은 재봉사는 이 나라 최고의 재봉사였다. 여왕은 일흔 살이 될 때까지 결혼하지 않아 왕위를 계승할 자녀가 없었다. 이웃 나라 왕의 고모 역할을 했던 여왕이 나라를 통치할 젊은 왕의 결혼을 재촉했다. 결혼 생각이 없었던 왕은 열아홉반의 나이, 허리둘레 19인치반인 사람 아니면 결혼하지 않겠다며 가장무도회를 열어 결혼할 귀족 아가씨를 찾겠다고 했다. 밤을 새워가며 드레스를 만들었던 로타는 드레스를 입고 가 무도회에 참석할 귀족 아가씨의 시중을 들어주었다. 공작 따님의 아가씨가 기다리고 있던 방 밖에 시종이 기다리고 있어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춤을 추었다.

 


, 그랬습니다. 아시다시피, 시종은 그냥 시종이니까요. 단지 젊은 왕은 조금도 결혼할 마음이 없었기 때문에 그의 자리에 시종을 보냈던 것입니다. 시종은 로타에게 첫눈에 반했고, 첫 번째 무도회가 열리기도 전에 이미 마음이 정해졌습니다. 요거트 아가씨든 캐러멜 아가씨든 밀크젤리 아가씨든, 안타깝지만 전혀 기회에 없었던 거예요. (111페이지, 작은 재봉사중에서)

 


작은 재봉사신데렐라와 이야기가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신데렐라였다면 젊은 왕이 시종으로 가장하여 현명하고 지혜로운 아가씨를 찾았을 거다. 하지만 작은 재봉사에서 젊은 왕은 결혼이 싫었으며, 시종은 시종일 뿐이었다. 지극히 현실적인 동화다.

 


샌 페리 앤은 인연에 관한 이야기다. 어둡고 찌푸린 얼굴을 한 채 완두콩을 따는 캐시 굿맨은 늙은 바이닝 부인의 감시를 받는다. 소녀에게 어떤 사연이 있을까 궁금하다. 들판 연못가를 바라보는 두 여성 마을 의사의 아내 레인 부인과 학교 선생님 반스 양이 있다. 냄새가 지독할뿐더러 쓰레기로 가득 찬 연못을 청소하기로 한다. 레인 부인과 반스 양은 소매를 걷어붙이고 연못의 잡동사니를 주워 올렸다. 밤이 깊어지자 진흙투성이 팔로 집으로 돌아갔다가 연못 한복판에 있던 어린 소녀를 발견했다. 샌 페리 앤 인형을 구해주지 않았다며 울고 있었다. 도자기 인형의 머리를 찾자 캐시 굿맨은 샌 페이 앤를 외쳤고, 레인 부인은 셀레스틴을 외쳤다. 19392차 세계대전으로 피난을 떠나야 했던 아이들은 여기저기 흩어졌다. 전쟁으로 고아가 된 어린 소녀, 아끼던 인형을 잃어버린 소녀는 찌푸린 표정을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전쟁은 상처를 남길 수밖에 없다. 누군가가 베푼 친절이 어떤 효과를 가져오는지 보여주는 대목이었다.


 

부지런한 나라의 젊은 왕의 대신들은 그에게 이웃 나라의 공주를 왕비로 맞아들이라고 조언한다. 청혼을 위해 간 북쪽, 남쪽, 동쪽 나라에서 청혼을 부디 거절해달라는 시를 읊는다. 울타리로 막힌 서쪽 숲은 덤불숲이 가로막고 있었다. 왕이 쓴 시를 소중하게 간직했던 청소부 셀리나의 손을 잡고 서쪽 숲에서 청혼의 시를 읊는다. 고아원에서 발견됐던 셀리나는 서쪽 숲의 공주였다.

 


서쪽 숲은 우리 마음속의 동화다. 평범한 사람에게는 열리지 않은 미지의 숲. 마음을 열었을 때만 보이는 숲이다. 혼자서는 안되며 누군가와 함께했을 때라야 비로소 열리는 숲이다. 진실한 마음과 자질을 갖추었기에 가로막힌 울타리를 영원히 떼어낼 수 있었다.

꿈을 간직한 소녀는 동화와 더불어 이야기를 사랑하는 사람이 되었다. 작은 책방을 사랑하는 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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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국에서의 일 년
이창래 지음, 강동혁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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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의 성장은 그냥 이루어지는 게 아니다. 시련과 고통이 있어야 하는 법이다. 삶은 어떤 사람을 만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내가 확고한 신념이 있더라도 영향을 끼치는 법이라는 걸 우리는 삶을 통해 알아간다.

 

영원한 이방인의 작가 이창래의 신작 소설 타국에서의 일 년이 출간되었다. 소설의 주인공은 한국계의 피가 약간 섞인 백인 이십 대의 틸러 바드먼이다. 틸러가 어렸을 때 엄마는 이유 없이 가출하여 아버지와 둘이서 살았다. 엄마가 떠난 뒤에도 아버지는 변함없이 아버지의 자리를 지켰으며 혼자서 말없이 울었을지언정 틸러에게 폭력을 가하지 않았다. 그게 문제였을까. 틸러는 내면에 커다란 짐을 지고 있는 것 같았다.




 

식당에서 접시 닦던 일을 하던 틸러는 친구의 대타로 컨트리클럽의 캐디 일을 했다가 퐁 로우를 만났다. 퐁 로우는 중국계 미국인 제약회사의 화학자였다. 그를 만나 틸러의 삶은 변한다. 학기를 다 마치지 않고 호놀룰루, 중국 선전, 마카오, 홍콩 등을 다니며 새로운 사업 아이템 자무를 유통할 계획에 따른다. 틸러는 퐁을 아버지처럼 의지했고 따랐다. 그의 말이라면 무조건 믿을 준비가 되었다고 해야 맞겠다.

 

틸러는 현재 증인보호프로그램을 받는 밸과 그녀의 아들 빅터 주니어(비즈)와 살고 있다. 아무런 일도 하지 않으면서 하루하루를 견디고 있었다. 퐁의 신용카드를 사용하면서 말이다. 엄마가 자기를 떠났던 사실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처럼 밸이 사라지자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인다. 누군가에게 버려진다는 건 두려움을 갖게 되는 건지도 모르겠다. 틸러는 타국에서의 일 년을 떠올렸다. 타국에서의 일 년 동안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궁금했다. 틸러가 과거를 떠올릴 때마다 그의 말에 집중하려 했던 것 같다. 어떤 경험을 했는지 그의 발자취에 마음이 쓰였다.

 

여행을 다녀온 이후, 나는 내가 극도의 고난을 견딜 수 있다는 걸 안다. 나는 갈려 나가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들이 슬픔을 먹는다고 생각하면 견딜 수 없다. 그런 찡그린 표정을 상상하기만 해도 무너질 것 같다. 아마 모두가 그럴 것이다. 전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영원히 그러겠지. (160페이지)

 

틸러가 밸을 보호하려고 했던 행동과 다르게 밸에게 의지하고 있는 모습을 보인다. 비즈와 다르지 않게 말이다. 자살하려던 밸을 퐁의 날카로운 칼로 구하면서 그는 달라졌다. 성장하기 위해서는 계기가 필요한 것 같다. 드럼의 저택에서 퐁을 기다리는 일념으로 그들이 시키는 일을 했던 것처럼. 그가 하는 말은 어떤 것이든 믿고 싶었던 게 아니었을까 싶다. 이제 누군가를 지킬 마음의 변화를 느꼈다는 게 옳을 것 같다.

 

나는 늘 내가 태어난 직후부터 어정쩡한 것들의 강에 담긴 것만 같았다. 그냥 괜찮음이라는 투명한 잉크가 내게 묻어 있는 것 같았다. 일부 사람들은 즉시 그 점을 알아챈다. 대부분의 다른 사람들은 결국 나에 대해 알고 나서 , 그렇군.’ 하는 표정을 잠시 짓는다. 보통 그 표정은 출구로 안내되는 전주곡이었다. (551페이지)

 

세상을 떠도는 자들을 떠올려본다. 어느 곳에도 정착하지 못하고 떠도는 자들. 작가는 틸러와 이민자 퐁을 통해 어떤 말을 하고 싶었던 걸까. 낯선 장소, 낯선 사람들 세계에서 헤맸을 한 남자를 상상해본다. 자기의 존재를 인정하고 살아간다는 건 어떤 느낌일지 그 해답에 다가가고자 했다. 확신의 감정, 마음의 변화와 성장을 알려주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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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24-01-08 07: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창래 작가의 작품에 공통적으로 보여지는 주제인 것같아요. 정착이 어려운 외로운 사람들, 떠도는 자들이요.
저도 관심도서로 올려놓고 아직 못읽은 책인데 잘 보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