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의 장례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45
천희란 지음 / 현대문학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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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서로의 인생을 훔친다면 그것은 제법 공정한 거래이지 않겠습니까? (39페이지)

 


타인의 인생을 훔친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었을까. 지금의 나보다 다른 삶을 꿈꾸었을 때. 실재에서는 그게 가능하지 않지만, 소설이나 영화 속에서는 꿈꾸어볼 수 있는 일이다. 상상의 나래에 의지해 나오는 스토리가 아니던가.

 


흡사 한낮의 뱀파이어처럼 정확한 시간에 들어갔다가 정확한 시간에 일어나는 K의 죽음을 맞딱드리고, K의 죽음을 여러모로 생각하는 이야기가 이 소설의 골자다. 죽은 자를 보내는 의식이 장례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죽음과 비교해 준비하고 있었던 죽음이 같을 수는 없다. 두 사람의 화자가 등장한다. 한 사람은 K의 이름을 빌려 새로운 인생을 사는 인물 전희정이며,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나려 아버지가 지어준 이름을 버리고 새로운 이름으로 작가가 된 손승미다.




 

평일 오전의 기차 객실에서 우연히 옆자리에 앉은 중년 남성이 K였다. 자살했다는 K가 전화를 걸어와 거래를 제안했다. 그녀의 이름과 얼굴을 빌려달라고 하며 그에 대한 대가를 치르겠다는 거였다. 그녀가 선택한 이름이 전희정이었고, 15년 동안 한결같이 K에게서 벗어날 수 있는 자유를 생각했고 당연한 결과처럼 벗어나지 못했다.

 


손승미는 연구실 앞에 있던 서류 봉투 속에서 버렸던 이름 강재인을 떠올렸다. 15년 전에 죽은 아버지가 쓴 걸로 보이는 글이었다. 어떠한 계기로 오게 되었는지 찾던 순간 한 작가를 떠올렸다. 아버지 K와 작가 K는 달랐다. 작가 K의 딸로 불리우기 싫어 소설 읽기를 멈췄지만 습작의 시기를 거쳐 소설가가 되었다. 아버지의 비극적인 죽음 이후였다.

 


항변하자면, 내 영혼은 현관 밖에 있었다. 나는 인형사의 줄에 매달린 꼭두각시처럼 누군가 의도한 서사의 일부분을 완성하기 위해 움직이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 집이, 그 소굴이, 그 감옥이 나를 그렇게 만들었다. (15페이지)

 


어쩌면 전희정은 손승미를 피하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다. CCTV에 드러나 할 수 없이 얼굴을 드러냈던 전희정은 K의 죽음 이후 자신의 흔적을 지우기 시작할 것이며 아무도 자기를 알아보지 못한 세계로 갈 것을 계획했을 것이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절필 작가로 알려질 것이었다. 자유를 찾는 과정이었다.

 


아주 단순한 스토리였다. 소설에서 느낄 수 있는 건 각자의 삶에서 드러날 수밖에 없는 생각들이었다. 아무것도 준비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찾아온 달콤하고도 유혹적인 제안을 뿌리칠 수 없었던 상황과 벗어나고 싶지만 이미 적응해버린 유명 작가의 삶을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을 것이다. 스스로 목숨을 버리는 삶을 택한 뒤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소설을 쓴, 스스로 무명인의 삶을 살았던 작가 K의 저의는 알 수 없다. 가족에게 좋은 아버지, 좋은 남편이 아니었을 그가 달라지기를 원했던가. 모든 것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것인가. 삶이 가진 굴레가 이렇게 컸던 것인가, 의심해 볼 수밖에 없었다.

 


자유를 찾는 여정이다. 한 사람은 죽음으로 자유를 찾았고, 타인의 죽음으로 자유로울 수도 있었다. 다른 한 사람은 아버지의 죽음으로 비로소 자유로워졌다. 죽음과 자유가 동의어로 쓰인 소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문장 하나하나가 가슴 속 깊은 곳에 자리를 잡았다. 음미하며 일부러 천천히 읽었다. 짧은 소설임에도 삶의 감정이 응축되어 있었다. 작가의 경험과 생각들이 오랜 시간 쌓이고 변화했을 거라는 생각에 감동했다. 다음 작품이 기대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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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랫폼은 안전을 배달하지 않는다 - 배달 사고로 읽는 한국형 플랫폼노동
박정훈 지음 / 한겨레출판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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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한 음식을 먹고 싶을 때, 혹은 밥하기 싫은 주말이면 당연하다는 듯 배달 앱을 켜고 어떤 음식을 먹을까 고민한다. 드디어 하나를 결정하고 주문하기 버튼을 누른 후 음식을 기다린다. 주말 바쁜 시간대나 눈, 비가 올 때는 늦게 배달되는 걸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것 같다. 코로나-19가 바꾼 게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중 하나가 배달산업의 발달이 아닐까 한다. 대중매체에서는 한때 배달노동자가 급여 생활자보다 훨씬 많이 번다는 소식이 들리기도 했다. 정작 배달노동자로서 사고가 났을 때의 상황은 생각해보지 않은 것 같다. 무관심에서 나온 결과다. 사회를 바라보는 시선의 변화가 필요하고, 우리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알아야 한다는 것을 이 책을 읽고 느꼈다.


 

음식을 주문하고 배달받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배달노동자가 어떠한 위치에 있는지, 사고가 났을 때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지 알아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저자는 라이더유니온을 이끌고 있는 배달노동자로서 배달 플랫폼이 가진 문제점과 배달노동자들의 산재사고에 중점을 두고 설명한다. 근로복지공단 조사에 따르면 배달의민족과 쿠팡이츠는 대형 플랫폼 기업임에도 산재 1위 기업이기도 하다는 것을 말한다. 배달노동자의 현실과 플랫폼 기업, 산재보험의 법적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했다.


 

후배의 아이도 고등학교 다닐 적에 배달 아르바이트를 했었다. 몇 번의 사고로 다리를 다치고 깁스를 하기도 했었다. 오토바이 운전 미숙과 사고로 인해 치료비로 많이 들어갔었다. 자동차 운전면허증이 있으면 오토바이는 당연하게 운전을 잘할 거라고 생각했다. 자동차와 오토바이 운전은 전혀 다르다는 것을 설명했다. 자동차와 원동기 운전면허를 분리할 필요가 있으며 원동기 운전면허에 도로 주행 시험을 추가하고 시험을 강화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게 사고를 예방하는 방법이라는 거다. 플랫폼기업과의 이해관계가 얽힌 문제라고도 했다.

 


배달을 전문으로 하는 음식점에서는 배달 기사를 썼다. 인건비나 책임 혹은 비용 절감을 위해 배달대행업체와 위탁계약을 맺고 배달 영업을 한다. 위탁계약을 맺었음에도 배달노동자가 직접 고용한 배달원처럼 일해주기를 바라는 게 문제다 배달 재촉을 하는 사람 1위가 음식점 사장이다. 배달노동자가 음식을 기다리는 사이 음식점 안에 들어오는 것도 싫어할 뿐 아니라 화장실 사용하는 것을 싫어하는 사장도 있다.


 

배달의민족이나 쿠팡이츠, 요기요 같은 배달 플랫폼의 문제를 살펴보면 AI 시스템을 사용하는 배달플랫폼기업은 초보 라이더들의 직무 능력이나 경험을 보지 않고 무분별하게 고용하는 거라고 한다. 제도적 규칙이 없는 까닭이다. AI가 라이더에게 거리와 배달료 정보를 제공하고 선택하게 하고, 거절하면 같은 시간 앱에 접속해 있는 다른 라이더에게 보낸다.

 


언어폭력 및 갑질 사고에 취약한 감정노동자를 위한 내용을 산업안전보건법에 명시했다. 특히 고객 응대 업무 종사자에 대하여 적용할 수 있도록 했다. 저자는 배달플랫폼 기사에게도 적용하여야 한다고도 말했다. 부록에 배달라이더를 위한 산재보험 사용 설명서를 수록해 사고가 났을 때 산재 신청을 할 수 있도록 했다.


 

이 책으로 인해 도로 위를 질주하는 배달 라이더들의 애환과 플랫폼 산업과 문제점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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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운
티파니 D. 잭슨 지음, 김하현 옮김 / 한겨레출판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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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 앞에서 노래하고 싶은 소녀가 있다. 꿈 많은 소녀는 각종 오디션을 보러 갈 때마다 기대감에 부풀어 노래한다. 사람들이 자기의 노래 실력을 알아봐 주었으면 하고 바란다. 어느 날 엄마 몰래 오디션에 응모했다가 떨어진다. 그때 유명한 가수 코리 필즈가 다가와 브라이트 아이즈라고 부르며 노래에 대한 칭찬과 함께 노래 수업을 하면 실력이 좋아질 거라고 말한다. 인스타 디엠으로 사랑 노래를 보내며 소녀의 마음을 훔친다. 더불어 코리 필즈의 공연에 게스트로 참여하여 노래를 부를 수 있게 된다. 인챈티드의 나이 17, 그는 28세인 성인이었다.

 


가수가 꿈인 소녀의 성장담이라고 볼 수 있겠지만, 이 소설은 미투 운동이 촉발되던 시기에 나왔던 실화, R. 켈리 사건에서 모티프를 가져왔다. 아직 미성년인 소녀를 그루밍하고 성 착취했을 뿐 아니라 감금, 폭행했다. 다른 사람에게 말하면 자살할 거라고, 사랑하는 사람은 너밖에 없다며 가스라이팅했다.





 


티끌 하나 없는 코리의 펜트하우스, 비트주스라고 표현한 피 웅덩이에서 인챈티드가 깨어나며 소설이 시작된다. 코리를 만나서 그가 준 보라색 음료(코데인)를 마신 후 기억나는 건 없었다. 누가 코리를 죽였을까. 인챈티드는 코리를 죽이지 않았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해야 했다. 대중은 코리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며 그의 노래를 부르고, 인챈티드를 향하여 살인자라고 외친다. 이미 코리가 미성년인 소녀를 감금 폭행하고 성 착취했음을 알리는 뉴스가 터져 나온 때였다.


 

인챈티드를 애타게 찾는 부모가 경찰을 대동하고 찾아왔을 때, 인챈티드는 왜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을까 의문이었다. 오랫동안 가스라이팅을 당하면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인챈티드처럼 행동할 수 있겠구나 싶었다. 여기에서도 문제가 되는 게, 남자 경찰이 인챈티드가 미성년임에도 스스로 선택했다고 여긴다는 거다. 백인이 아닌 흑인이라서, 인종 문제로도 여겨지는 부분이었다. 비행기에서 스튜어디스가 인챈티드의 눈을 바라보며 도움이 필요하냐는 질문은 인상적이었다. 누구라도 그냥 지나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스튜어디스는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관심 있게 지켜보고 도움이 필요한지 물었다.

 


코데인 중독으로 정확히 기억나지 않은 일에 사람들은 더 의심했고 인챈티드를 살인자로 몰아갔다. 백인들이 주류인 사립학교에서 흑인으로 산다는 건 쉽지 않았다. 수영선수로서, 엄마 아빠가 직장으로 바쁜 시간을 대신에 동생들을 돌보는 와중에도 인챈티드는 꿈을 잃지 않았다. 단 하나, 마음을 나눌만한 친구 갭이 있어 버틸 수 있었다. 코리 필즈에게 갇혀 있으면서 인챈티드는 갭의 전화를 애타게 기다렸다. 갭과 만나기를 간절하게 바랐으나 학교에서 갭의 이름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 인챈티드의 머릿속에만 존재하는 상상의 인물로 여겼다. 갭은 과연 존재할까. 인챈티드가 친구라 부를 수 있는 존재가 맞았던가, 의심하게 했다. 신뢰가 깨지는 순간은 아주 단순한 이유 때문이다. 오해에서 비롯됐다. 인챈티드의 마음을 돌릴 수 있는 사람은 갭밖에 없을 것 같았다.

 


가독성이 좋다. 인챈티드가 코리 필즈의 죽음을 인지한 날에서 처음 코리 필즈를 만났던 상황이 동시에 나타나 몰입하게 하는 효과가 있다. 꿈을 좇는 일이 불러오는 악몽 같은 상황에 마음 졸였다. 가진 자가 약한 자에게 행하는 일이 어떠한 결과로 나타나는지 경종을 울리는 듯했다.

 


아울러 흑인 소녀로 산다는 게 어떤 건지 보여주는 작품이기도 하다. 노래하고 싶은 소녀의 꿈을 무참히 짓밟고 그루밍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챈티드는 스스로 일어섰다. 살인 용의자에서 벗어날 방법을 직접 찾았고, 노래에 대한 희망도 잃지 않았다. 우리는 한 소녀의 성장을 본 것이다. 가해자 임에도 권력과 돈으로 무마시켰던 것과 달리 범죄자는 제대로 처벌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작품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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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리와 파도 - 제1회 창비교육 성장소설상 우수상 수상작 창비교육 성장소설 8
강석희 지음 / 창비교육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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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다 보면 이상하게 분야가 겹친다. 이번에 읽은 책은 성장소설이었다. 꿈 많은 십 대 소녀가 등장하고 그 마음을 이용해 착취하고 폭력을 가하는 내용이다. 물론 주인공은 스스로 헤쳐 나오기도 하지만,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주변 사람이 있어 이 상황에서 벗어나는 이야기이다.

 


1회 창비교육 성장소설상 수상작 꼬리와 파도또한 여자 축구 선수로서 폭력을 마주한 뒤 생기는 일을 나타낸 소설이다. 또한 서로 연대하여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힘이 되어주는 내용이기도 하다. 중학교 축구 선수인 무경은 지선과 함께 국가대표선수로 나란히 이름을 올리고 싶다. 합숙 훈련소에서 소주를 권하고 지선을 괴롭히던 상황에서 구해주었던 코치가 또 다른 폭력을 가해 매일 죽음을 생각하는 친구를 바라보아야 한다.




 


축구 선수를 그만두고 체육 교사가 되고 싶은 무경은 태권도를 배우러 다니고, 체육관에서도 검은 띠인 아이들이 약한 아이들을 괴롭히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그 대상자인 예찬과 그를 괴롭히는 황동수. 황동수와 사귀는 서연이 경험한 데이트 폭력은 우리 사회에 폭력이 만연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것에 대처하는 사람들의 인식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여학생이 성폭행이나 성추행을 당했을 때 여자에게 잘못을 있었을 거라는 생각은 우리 사회 인식의 한 면을 보는 것 같다. 잘못한 사람은 따로 있는데 피해자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식이다. 무언가 여지를 주었을 거라는. 지선이 전근세에게 고마워했던 것도 너 잘못한 것 없다.’고 했던 말 한마디 때문이었다.


 

여학생으로 산다는 것은 상당히 힘든 일이다. 의지했던 선생님에게 상담했더니 이성으로 바라보고 폭행하기도 한다. 책임을 물었을 때 여학생은 나쁜 학생으로 이름이 오르내리고 교사는 전근을 가면 끝이다. 누구를 믿어야 할지, 누구에게 도움을 청해야 할지 모르게 된다.

 


이럴 때 주변에서 도와주는 사람이 있다면 든든하고 힘을 얻어 맞서 싸울 수 있다. 진실은 전해지기 마련이고 또 알려야 하는 거다. 연대하면 힘이 세진다. 함께 헤쳐 나가고 다른 사람의 생각을 변화하게 할 수 있다.

 




우리가 지켜 줄게. 혼자서는 못하지만 우리가 되어, 너를 지켜 줄게. (257페이지)

 


연대의 물결은 꼬리를 물고 파도가 되어 펼쳐진다. 누군가를 위로하고, 더 이상의 폭력을 가하지 못하도록 한다는 건 얼마나 의미 있고 용기 있는 일인가. 힘을 합하면 못할 것이 없다. 우리 주변에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 있으면 다가갈 수 있는 마음이 필요하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은 아주 간절한 마음일 것이므로. 모른 척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연대와 사고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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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딜 수 없는 사랑
이언 매큐언 지음, 한정아 옮김 / 복복서가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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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신성한 일이다. 때로는 가혹한 결과를 안고 오기도 한다. 예를 들면 스토킹 같은 거다. 우연한 계기로 알게 된 사람이 나에게 사랑을 말한다. 무심한 눈길이었음에도 암시를 주고 있다고 여기는 것. 착각에서 비롯된 거지만 잘못된 결과로 이어진다. 사랑을 말하는 사람도 힘겨운 일이겠지만, 물론 망상이라고 해도 말이다. 스토킹을 당하는 당사자는 고통스럽고 두려운 일이다.

 


오랜만에 만난 연인 클래리사와 함께 소풍을 즐기던 순간, 와인 오프너로 병의 마개를 따는 순간, 들리는 고함에 달려 나갔던 일로 인해 견딜 수 없는 일상을 만든다. 헬륨 기구에 탄 아이를 구하기 위해 달려온 남자들은 모두 다섯이었다.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는 바구니 안에 있는 소년을 구하기 위해 밧줄을 잡았다. 순간 돌풍이 불었고 허둥대던 그들 사이에서 누군가 한 명이 밧줄을 놓았다. 한 명이 밧줄을 놓자 돌풍에 떠밀려가지 않기 위해 조와 다른 사람도 놓았다. 유일하게 밧줄을 놓지 않았던 존 로건이 헬륨 기구와 함께 높이 떠올라 날아갔다. 버티지 못했던 로건이 추락했다. 죄책감을 견딜 수 없었던 조는 로건이 죽은 장소로 갔다가 함께 밧줄을 잡았던 제드 패리와 눈이 마주쳤다.





 

시선이 마주쳤다는 이유로 조가 패리에게 뭔가의 암시를 줄 수도 있을까. 패리는 조가 자기를 선택했다고 하며 마음을 열라고 말한다. 전화를 걸고 강연회에 찾아오고, 그가 쓴 글을 읽고 집에 찾아와 문 앞을 지킨다. 클래리사와 경찰에게 패리의 스토킹을 이야기해도 믿어주지 않는다. 조의 망상이라고 여긴다. 나 또한 헬륨 기구에서 추락한 존 로건의 죽음에 대한 죄책감이 상상력의 산물, 즉 망상의 형태로 나타나지 않았을까, 의심했다. 과학 칼럼니스트인 조는 패리의 망상을 드클레랑보 증후군으로 결론 짓고 그에 대한 글을 쓰기로 마음먹는다.

 


드클레랑보 증후군은 다른 사람이 자기를 사랑한다고 믿는 증상이며 조현병이나 망상장애, 조증 환자에게서 주로 나타난다. 책의 부록에 있는 드클레랑보 증후군의 P의 사례는 실제처럼 여겨진다. 패리의 존재가 조의 망상인지, 조를 향한 사랑으로 폭력과 죽음에 이르기를 바라는 패리의 망상인지 시종일관 긴장하며 읽었던 것 같다. 조와 클래리사의 사랑은 견고했으나 패리의 존재로 틀어지기 시작했다. 드클레랑보 증후군에 집착하는 조가 클래리사에게는 망상에 빠진 듯 보였다.

 


과학 칼럼니스트로서 세상을 바라보는 이성적인 시선과 존 키츠를 연구하는 문학적인 시선이 다정하게 얽혀 있었다. 비록 조가 자기(패리)를 사랑한다는 믿음으로 신과 과학이 부딪치는 부분 또한 인상적이었다. 한 사람의 잘못된 사랑이 불러오는 파국이 어떠한 형태로 나타나는지 자세히 보여준다.




 


사랑이 아무 문제 없을 때는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 만큼 아름다운 것도 없다. 사랑이 의심받기 시작할 때부터 사랑은 변질되고 만다. 나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변하여 어떤 거로도 되돌릴 수 없는 지경에 이르기까지 한다. 하지만 굳건한 사랑을 찾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한 법이다. 조가 클래리사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서는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사랑을 지켜야 했다.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란 사람은 종교와 비뚤어진 사랑에 집착하는 것 같다. 아버지의 부재와 어머니의 무관심 속에 자란 결핍이 나이 든 남자에게서 아버지를 기대했을 수도 있다. 사랑의 관계란 얼마나 얇은 것인가. 마치 종이 한 장처럼 가볍기만 하다. 어떤 계기가 되어야 이해하고 화해할 수 있는 것 같다. 부재와 결핍이 만들어낸 망상, 그 안에 갇힌 사람의 몸부림이 안타깝기만 했던 건 나만의 감정일까.


 

1997년에 발표된 견딜 수 없는 사랑은 수많은 작가와 비평가들의 열렬한 반응 속에서 <뉴욕 타임스> ‘올해의 책으로 선정되었으며 부커상 수상이 기대되었으나, 작은 것들의 신이 수상했고 그다음 해 발표한 암스테르담이 부커상 수상작이 되었다. 암스테르담에 비해 조명이 덜 되었으나 매력적인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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