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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해의 마지막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7월
평점 :
소설을 다 읽은 후 그 여운이 길었다. 무언가를 써야할 것 같은데, 계속 백석 시인에 대하여 생각했다. 그러다 발견한 게 김연수 작가의 음성으로 '연재를 마치고 난후'와 연재소설을 듣기 시작했다. 귓가에 맴도는 소설의 내용이 내 주변을 장악하고 나는 그렇게 한동안 소설 속에 빠져있었다. 김연수 작가의 소설을 오래도록 기다려왔다.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이후 8년 만의 신작이라고 한다. 이 소설이 어떤 내용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김연수 작가의 소설이라는 것이 중요했다. 그렇기에 어떤 내용을 다루고 있는지 백지 상태에서 소설을 읽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이 소설은 시인 백석의 이야기였다.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혹은 '사슴'으로 유명한 시인. 소설 속에서 백기행으로 불리는 시인의 삶을 바라본다. 작가는 이 소설을 가리켜 '백석이 살아보지 않은 이야기'라고 하였다. 백석 시인이 살았음직한 이야기. 그가 북한에서 어떻게 살아왔는지, 작가의 시선으로 마치 백석을 다독이듯 풀어낸 글이었다.

백기행은 시인이다. 1957년과 1958년을 그리며 과거를 오가는 상황을 그리고 있다. 소위 문학을 한다는 시인이 북한에서 살아가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충성을 맹세해야하고 어떻게든 수령을 찬양하는 문구를 넣어야만 하는 사회주의 체제다. 글 한 문장, 단어 하나때문에 문학을 하는 사람이 육체노동을 해야하는 수도 있다. 그래서 그는 시를 쓰지 못한다. 그가 하는 일이라곤 러시아 문학을 번역하는 일을 뿐이다. 샘솟는 말들을 침묵 속에 감추고 있어야 한다. 기행 뿐만 아니라 문학을 하는 많은 작가들이 그랬다. 기행의 벗인 준이 말했다. 이런 세상에서 글을 쓴다는 것은 자기를 속일 수 있어야만 가능하다고 말이다.
북한의 작가 외에도 러시아의 시인인 빅토르와 벨라를 등장시킨다. 벨라가 북한의 조선작가동맹으로부터 초청을 받아 기행과 만나게 되었다. 벨라의 옆에서 통역을 하고 헤어질때 자신이 쓴 시가 든 노트를 건넸다. 빅토르와 벨라는 세로로 길게 쓰여진 시, 그 시의 아름다움을 말하면서도 러시아와 북한이 처한 상황을 동일시하기도 한다. 기행이 벨라와 나누었던 이야기들은 기행의 생각을 대변하고, 작가의 생각을 말해주는 듯 하다. 마음속으로 죽여야만 하는 단어와 글쓰기에 대한 생각들을 말이다.
당신 안에서 조선어 단어들이 죽어가고 있다면, 그 죽음을 생각해야만 해요. 아침저녁으로 죽음을 생각해야만 해요. 그러지 않으면 제대로 사는 게 아니에요. 매일매일 죽어가는 단어들을 생각해야만 해요. 그게 시인의 일이에요. 매일매일 세수를 하듯이, 꼬박꼬박. (165페이지)
사회주의 체제에서 문학은 어쩌면 죽은 단어일지도 모른다. 그가 사회주의 체제에 반하여 그들이 원하는 글을 쓰지 못했을때 멀리 삼수군의 축산반으로 내처졌다. 글을 쓰지 못하니 차라리 몸을 사용하는 일이 편했다. 기행이 합숙소가 아닌 사무실에서 수많은 편지를 쓰고 시를 썼다 난롯불에 태우는 작업을 밤마다 계속했다. 언어가 막히고 단어가 막힌 곳에서 드디어 숨통이 트였다. 비록 보내지 못하는 편지이고 발표되지 못하는 시였지만 그 시간이 있었기에 비로소 그 사회주의 체제에 순응할 수 있지 않았을까. 그렇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으므로.
언어를 모르는 불행과 병은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언어는 뜻밖의 방식으로 인간을 위로한다. 당신, 이미 죽은 사람, 이라는 말. 그 겨울의 골짜기에서 당신도 얼어붙고 당신의 노래도 얼어붙었다는 말. 그리고 봄에 내가 당신의 노래를 분명히 들었다, 는 말. (213페이지)
수령을 찬양하는 시를 쓸 수밖에 없었던 기행이 안타까웠다. 그것을 써야만 했을 그 마음 때문이었다. 작가는 시인을 계속 기행이라고 불렀다. 시인이기 전에 기행이라는 이름을 가진 인간으로 보았음직하다. 언어와 단어를 죽일 수 밖에 없었던, 마음의 소리를 죽여야만 했던 그의 내면을 나타내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단어를 가지고 시를 쓰는 시인이므로 단어와 언어와 화해해야 했다. 러시아의 언어에 매달렸어도 조선의 단어와 언어에서 나오는 그 그리움을 잊지 못했던 것이다.
비교적 짧은 소설이다. 그럼에도 제대로 알려지지 않는 백석의 삶을 말하는 글에서 아픔을, 안타까움을, 같은 작가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애정과 다정한 위로가 감동적이다. 우리가 그의 삶을 제대로 알지 못하기에 더 아름다운지도 모르겠다. 그의 시집을 제대로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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