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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서진 여름 - 이정명 장편소설
이정명 지음 / 은행나무 / 2021년 5월
평점 :
거짓말은 새로운 거짓말을 낳는다. 사람들은 거짓말을 끝까지 감출 수 있다고 여긴다. 누군가를 통해서 혹은 자신의 입으로 말하게 되는데, 언젠가 진실은 드러나게 마련이다. 만약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면 현재의 그들은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복수 하겠다고 계획했던 사람도 상대방을 순수하게 사랑했을지도 모른다.
삶에서 가장 완벽한 순간, 홍콩 옥션에서 그림이 팔렸고 성공한 화가 이한조라는 이름을 각인시킨 중요한 순간이었다. 그런 시점에 아내가 사라졌다. 한조는 아내가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의 모든 것을 아내가 결정했고 지금의 그로 이끌었다. 아내의 작업실에 소설로 보이는 글이 적힌 봉투만 있을 뿐이었다. 그 소설에서 화가는 열여덟 살의 소녀를 만나 예술가로서의 발판을 마련했으며 아내의 시점에서 쓰인 내용이었다. 누가 봐도 한조를 가리키는 내용이었다. 소설이 발간되면 그의 삶은 낱낱이 파헤쳐질 것이었다.
한조는 열여덟 살의 여름의 기억을 떠올렸다. 하워드 주택에 새로 들어온 모두 흰 옷을 차려입은 가족. 하워드 주택과 맬컴 주택은 굉장히 사이좋은 이웃으로 보였지만, 보이지 않은 경계선이 그어진 상태였다. 열여덟 살의 지수는 하워드 주택을 주로 그렸던 한조의 모델이 되어 주었고 여름날 변사체로 발견되었다. 면식범 소행일 경우 주변의 남자들이 용의 선상에 오르게 되는데, 학교의 관리인으로 일하는 맬컴 주택의 이진만과 그의 아들들 수인과 한조가 그 대상이었다.
수인은 한조에게 지수가 사라진 날 하워드 주택의 지하 화실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었던 것을 누가 아느냐고 물었고, 그가 위험해질 것을 우려해 함께 수학 공부를 하였다고 말하라고 했다. 한조는 형을 의심했다. 수인을 좋아했던 지수와 다투지 않았을까 하는 의구심이었다. 형이 살인자일 가능성 때문에 한조는 입을 다물었다.
한조의 시선에서 사건을 바라보게 되므로 아마 많은 사람들이 수인을 의심했을지도 모르겠다. 나 또한 작가가 의도하는 대로 수인이 의심스러웠다. 한조는 자꾸 되묻는다. 그때 거짓말을 하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형은 무엇을 감추기 위해 거짓말을 하게 했던가. 아버지는 두 아들 때문에 스스로 살인자가 되었다. 그렇다고 수인과 한조의 아버지가 전혀 아니라고 말할 근거 또한 부족했다. 한조 또한 의심의 대상에서 완벽하게 빠져나올 수 없다.
결국 그는 그녀의 무엇도 이해하지 못했다. 타인의 기억을 이기는 사람은 없다. 아무도 없다. 그것은 진실을 이기는 사람이 없다는 말과 같다. (186페이지)
그러고 보면 사람의 기억이란 충분히 왜곡될 수 있으며 또 얼마나 연약한 것인가. 지수가 사라지던 날 태리가 보았던 그 장면은 이언 매큐언의 소설과 원작 영화 <어톤먼트>를 떠올리게 한다. 왜곡된 기억으로 전쟁터에 나가야 했으며 두 사람은 오래도록 떨어져 지내야 했다. 『부서진 여름』 또한 자기가 보았던 장면과 그 사건을 지켜본 수사관의 몇 마디의 말로 진실이 왜곡되었다. 사랑하면서도 복수를 위해 자기의 모든 것을 던졌다. 얼마나 어리석은지 모르겠다.
그러면 사건의 진실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지수는 누가 죽였을까. 지수의 마지막을 지켜본 사람은 누구였을까. 충격적인 장면을 보고 스스로 죽기로 결심했던 것일까, 아니면 누군가에 의해 죽임을 당한 것일까. 끝내 진실은 밝혀지지 않았다. 어쩌면, 어쩌면 전혀 의외의 인물이 살인자일 수도 있었다. 진실이 묻히고 말았다는 게 몹시 안타까웠다. 결국, 누가 지수를 죽였는지는 중요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거짓말로 인하여 진실이 묻히고 그것이 어떤 형태의 결과를 나타내는지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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