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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워도 외롭지 않다 ㅣ 정호승의 시가 있는 산문집
정호승 지음 / 비채 / 2020년 11월
평점 :
오랜만에 시를 읊조렸다. 이해되지 않은 시 말고 마음속으로 스며드는 시. 시를 읊조리다가 이내 시를 노래로 만든 곡을 들었다. 가사가 된 시는 어쩐지 슬퍼졌고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그 노래를 불렀던 가수는 이제 스러지고 노래만 남았다. 노랫말이 살아 움직인다. 마음속으로 스며드는 시. 이 계절에 어울리는 시였다. 외롭고 슬픈 세상에 단비처럼 내려와 마음을 적셨다.
풀잎은 쓰러져도 하늘을 보고
꽃 피기는 쉬워도 아름답긴 어려워라
시대의 새벽길 홀로 걷다가
사랑과 죽음의 자유를 만나
언 강바람 속으로 무덤도 없이
세찬 눈보라 속으로 노래도 없이
꽃잎처럼 흘러 흘러 그대 잘 가라
그대 눈물 이제 곧 강물 되리니
그대 사랑 이제 곧 노래 되리니
산을 입에 물고 나는
눈물의 작은 새여
뒤돌아보지 말고 그대 잘 가라 (45페이지, 「부치지 않은 편지」 전문)
가수 김광석이 부른 동명의 노래를 몇 번이고 들었다. 예전에는 생각없이 김광석의 목소리로만 들었다면 이제는 영화 <1987> 속의 상황들이 떠올라 눈물이 차오른다. 정호승 시인이 1987년 1월 14일에 일어난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의 죽음을 생각하며 쓴 시다. 영화를 보며 얼마나 아파했던가. 시대가 가진 고통에 스러진 인물, 그 인물의 죽음을 생각하며 쓴 시가 노래가 되어 사람들에게 불려졌다. 사연을 알고 나니 이 시가 가진 고통의 근원이 생각난다.
노래하는 가수들이 종종 시를 빌려다 썼다. 정지용의 「향수」 뿐만 아니라 정호승 시인의 「이별노래」도 가수 이동원이 불러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졌다. 그때는 그저 가수 이동원이라는 이름만 기억했을 뿐 가사를 쓴 시인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했다. 「부치지 않은 편지」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김광석의 노래를 좋아하여 꽤 많이 불렀음에도 정호승 시인의 시라는 사실은 오늘에야 알았다.
시인은 60편의 시와 산문을 엮어 시가 있는 산문집 형태의 책을 펴냈다. 오늘의 시인을 있게 한 시 한 편과 시를 쓰게 된 동기나 주변 이야기를 쓴 산문이 짝을 이루었다. 시와 산문이 마음속으로 들어와 어루만져 주었다. 시를 읽고 이어 산문을 읽고 나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룸비니에서 사온
흙으로 만든 부처님이
마룻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이 났다
팔은 팔대로 다리는 다리대로
목은 목대로 발가락은 발가락대로
산산조각이 나
얼른 허리를 굽히고
무릎을 꿇고
서랍 속에 넣어두었던
순간접착제를 꺼내 붙였다
그때 늘 부서지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불쌍한 내 머리를
다정히 쓰다듬어주시면서
부처님이 말씀하셨다
산산조각이 나면
산산조각을 얻을 수 있지
산산조각이 나면
산산조각으로 살아갈 수 있지 (15페이지, 「산산조각」 전문)
불가에서는 '내일은 없다, 미래는 없다'라고 한다. 지금 이 순간을 열심히 살아라는 가르침이다. 그래서 시인은 늘 가슴에 품고 다니는 단 한 편의 시로 「산산조각」을 꼽는다. 아끼던 물건이 산산조각이 난 상황을 그려본다. 안타깝기 그지없다. 마음이 아파 한동안 아무것도 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인은 말한다. '산산조각이 나면 산산조각을 얻을 수 있다'고 말이다. 삶이 '산산조각이 나면 산산조각으로 살아가면 될 일'이다. 이처럼 내가 생각하기에 삶도 달라진다는 말일 것이다. 내일을 위한 오늘이 아니라 바로 오늘을 사는 것. 그것처럼 중요한 게 있을까.
나는 그분의 신발을 들고 다닌다
지금까지 내가 살아오면서 한 일이라고는
그분의 신발을 들고 다닌 일밖에 없다
그분의 신발에 묻은 먼지로 밥을 해 먹고
그분의 신발에 담긴 물로 목을 축이며
잠들기 전에 개미처럼 고요히 무릎을 꿇고
그분의 신발에 입 맞춘 일밖에 없다
언제나 내 핏속을 걸어다니시는 그분
내 심장 속을 산책하다가
심장 속에 나무를 심으시는 그분
그 나무가 자라 꽃을 피우지 못해도
그 나무의 열매가 되어주시는 그분
그분은 아무것도 지니지 말고
신은 신발 그대로 따라오라 하셨지만
나는 언제나 새 신발을 사러 가느라
결국 그분을 따라가지 못하고
오늘도 그분의 신발을 들고 다닌다
그분의 발에 밟혀도 죽지 않는 개미처럼
그분의 발자국을 들고 다닌다
발자국의 그림자를 들고 다닌다 (551~552페이지, 「신발」 전문)
유년 시절의 검정 고무신과 어머니에 대한 마음을 담은 시다. 「신발」이란 시를 읽는데 울컥해졌다. 아마 엄마가 기억나서일 거다. 누구에게나 가장 애틋하고도 아름다운 기억을 불러 일으키는 시였다. 한 편의 시가 이처럼 다가오는 일은 내가 그 시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을 때에야 가능한가 보다. 전에 읽었던 시인의 시와 글은 어쩐지 생각이 나지 않는다. 지금 읽은 시가 있는 산문집이 마치 처음 시인을 접한 것처럼 감동적이고도 따스하다.
시인은 시가 있는 산문집에서 60 편의 시를 추렸다. 어떤 상황에서 누군가에게 보내는 강렬한 마음을 담아 쓴 시가 많았다. 시를 읽고 보니 그 감정이 그대로 보여지는 듯했다. 법정 스님과 정채봉 작가에 대한 인연과 애정 뿐 아니라 부모님에 대한 기억들이 한 편의 시와 함께 실려 있었다. 시인은 가톨릭 신자인데도 종교적으로 구분짓지 않았다. 영주 부석사에서 부처님께 엎드려 삼배를 올리고, 화순 운주사의 와불 님을 뵈러가기도 하고 저 멀리 북인도 쪽의 불교 성지 순례도 다녔다. 그곳에서 사온 흙으로 만든 부처님이 깨져 안타까움을 표현한 시가 「산산조각」 이다. 이처럼 열린 마음을 가지고 있는 시인이었기에 그가 쓴 시도 따스하고 다정다감하였다.
운주사의 와불 님과 부석사의 무량수전을 보았던 게 벌써 몇 해 전이다. 그곳에서 느꼈던 감동을 다시 느껴보고 싶어졌다. '사람이 절을 찾아간다는 것은 복을 지으러 가는 일이다. 복을 짓는다는 것은 자신과 이웃과 세상 만물에 대해 사랑하는 마음을 지니는 일이다. 따라서 복을 짓는 일과 남을 사랑하는 일은 같은 일이다. 진리에 도달하는 길만 다를 뿐 진리는 늘 같은 마음을 지니고 있다.' (386~387페이지) 라고 시인은 말했다. 몇 달 전 제천의 배론성지에서 촛불을 밝혀 소원을 빌고 마음의 평안을 느꼈던 것처럼. 몇 주 전 서울의 조계사에서 간절한 마음을 담아 부처님께 금박을 입혔던 것처럼. 나도 복을 짓기 위해 다시 절을 찾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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