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을 말하자면, 나는 『빨강 머리 앤』을 애니메이션으로 먼저 만났었기에 원화 그림이 더 좋다. 어딘가를 갔을 때 빨강 머리 앤의 그림 상품이 놓여있으면 그 곳으로 먼저가 하염없이 바라본다. 이런 것은 나 뿐 아니라 내 친구도 그런데 언젠가 카페에 갔을 때 앤과 다이애나가 있는 인형을 보고 그것을 사려 인터넷을 뒤졌었고, 그게 좋아 그 카페에 자주 간 적이 있었다. 다양한 팬시 상품도 구매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데 그런 것들을 만드는 사람들은 아마 나같은 사람들을 타겟으로 해서 만들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어떤 판본이든 『빨강 머리 앤』이 좋다. 그림을 그린 작가가 달라 조금 어색해도 금방 그 그림에 익숙해지고 만다. 왜냐면 나는 『빨강 머리 앤』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이번에 만난 『빨강 머리 앤』은 일러스트레이터인 설찌 작가가 그린 새로운 판본이다. 알에이치코리아에서 아트앤클래식 시리즈로 새롭게 선보인 작품으로 다양한 그림들을 만날 수 있다는 즐거움이 있다. 설찌 작가가 그린 빨강 머리 앤은 상당히 귀엽다. 입술도 뾰족하고 다른 앤들에 비하여 말괄량이 기질이 더 보인 모습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다른 점은 고지식해보였던 마릴라 아줌마가 굉장히 젊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변하였고, '글쎄다'를 외치던 매슈 아저씨도 상당히 밝아 보이는 모습이다. 물론 매슈 아저씨는 앤 앞에서 항상 밝고 사랑이 지긋한 마음으로 쳐다보긴 했다.
하도 여러번을 읽어서 외울 법도 하지만 그래도 『빨강 머리 앤』 읽는 일은 즐겁다. 순서에 맞게 읽으려고 쌓아둔 책탑에서 다른 책을 제쳐두고 읽기 시작할 정도로 나는 『빨강 머리 앤』 팬을 자처한다. 언젠가부터 앤을 받아들였던, 그래서 사랑해마지 않았던 마릴라에게 자꾸 시선이 갔다는 것을 밝히고 싶다. 물론 항상 앤이 먼저이긴 하다. 하지만 남자 아이를 기대했던 노처녀 마릴라에게 여자 아이를 키운다는 것은 쉽지 않았을 것 같다. 아무리 앤의 발랄함과 상상력이 풍부해 긍정적인 마인드를 갖고 있었어도 말이다.
매슈 아저씨와 마릴라 아주머니를 보며 핏줄로 연결된 가족 형태보다 오히려 핏줄로 연결되지 않는 가족이 더 끈끈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싸우고 마음을 다치는 가족보다는 다양한 형태의 가족들이 최근 자주 대두되기도 한다. 한 지붕안에 함께 살아간다는 것보다 더 중요한 건 없는 것 같았다. 말 많은 아이를 좋아하지 않았던 매슈나 마릴라가 앤을 받아들이고 사랑을 느끼는 과정들이 그렇다. 앤이 다이애나의 집의 지붕에서 떨어졌을 때 '저릿한 고통이 심장을 관통했다'라고 표현된 곳을 봐도 그렇다. 친구들에게도 사랑받았지만 그 누구보다도 매슈나 마릴라에게 앤은 소중한 존재가 되었다.
매번 읽을 때마다 같은 문장에서 감동하고 또 눈물을 흘린다. 그리고 새로운 문장에 꽂히기도 한다. 이번에 나에게 꽂힌 문장은 마릴라가 앤에게 건네는 말이었다. 퀸스 학교 입학시험을 치기 위해 상급반을 준비하자는 스테이시 선생님의 권유를 듣고 나서 학비 때문에 걱정하는 앤과 나누었던 대화다.
매슈랑 내가 너를 키우기로 했을 때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최고로 좋은 걸 해주겠다고, 좋은 교육을 받게 하겠다고 다짐했단다. 나는 여자도 자기 생계를 꾸릴 능력이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매슈랑 내가 여기 있는 한 초록 지붕 집은 늘 네 집일 테지만 이 불확실한 세상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누구도 모르는 데다 미리 준비해서 나쁠 게 뭐냐. (433페이지)
이는 1868년에 출간된 루이자 메이 올컷의 『작은 아씨들』에서 조가 추구했던 것과 닮았다. 자기 삶은 스스로 개척해야 한다는 것, 남자에게 의지하지 않는 삶을 추구했던 조의 현명함 말이다. 마릴라 아주머니는 이러한 열린 사고를 갖고 있었다. 린드 아주머니가 여자애는 많이 배우지 않아도 된다고 했던 것과 상당히 비교되는 부분이다. 교육에 대한 열망도 있었고 무엇보다 앤은 상당히 영리한 아이였다. 영원히 아이로 남아주었으면 하고 바랐던 마릴라 아주머니처럼 말이 없어지고 생각이 깊어지는 앤이 안타까웠던 건 여전했다.
앤은 마릴라와 매슈의 사랑안에서 성장했다. 매슈가 심장마비로 쓰러진후 초록 지붕 집을 지키기 위해 대학을 연기하고 마릴라 곁에 있기로 했다. 그렇게라도 초록 지붕 집을 지키고 싶었고, 앤이 말한 대로 살짝 구부러진 길로 가면 되었다.
퀸스 학교로 떠날 때는 제 앞에 미래가 쭉 뻗은 직선 도로처럼 펼쳐져 있었거든요. 수많은 이정표가 보이는거 같았어요. 지금은 그 직선 도로에 구부러진 길이 생겼을 뿐이에요. 그 모퉁이를 돌면 어떤 일이 펼쳐질지 모르지만, 최고로 좋은 게 놓여 있다고 믿을 거예요. 나름 매력이 있더라고요. 구부러진 길이요, 마릴라 아주머니. 모퉁이를 돌고 나면 어떤 길이 나올지 궁금해지잖아요. 푸르른 장관이 펼쳐질지, 가지각색의 빛과 그림자가가 있을지, 어떤 새로운 경치가 보일지, 어떤 새로운 아름다움일지, 어떤 구부러진 길과 언덕과 계곡이 펼쳐질지요. (541~542페이지)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하는지, 가고자 했던 길에서 잠시 돌아갈 뿐이라고 말하는 부분에서 앤의 긍정적인 마인드를 엿볼 수 있다. 미래에 대한 희망을 잃지 않는 것. 무엇보다 앤은 사랑을 선택했다. 그토록 원하던 집이었으니까. 그러한 집을 갖게 해준 매슈와 마릴라의 초록 지붕 집을 버릴 수 없었던 것이다. 『빨강 머리 앤』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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