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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곡 - 지옥.연옥.천국 귀스타브 도레 삽화 수록본
단테 알리기에리 지음, 귀스타브 도레 그림, 김운찬 옮김 / 열린책들 / 2022년 3월
평점 :
1. 다 읽었긴 하다. 애초에 천 페이지 넘는 책이라고 해서 부담이 갔던 것은 아니다. 전쟁과 평화나 카라마조프의 형제들 같은 책들은 분권되어 그렇지 전체 분량으로 치자면 이보다 분량이 더 무지막지 하지 않은가. 그리고 열린책들의 신곡도 처음엔 분권으로 나왔다가 개역판이 나오면서 이 육중한 파란책 한권으로 나온 것이다.
신곡에 대한 접근성이 떨어졌던 것은 그 내용이 어렵게 쓰여있어서 한 페이지 넘어가는데 오래 걸리는 그런 책이었기 때문도 아니었다. 그것으로 치자면 나에게는 차라리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경우 더 했다.
그럼 왜 신곡을 이제서야 읽게 되었을까. 아마 알라딘에서 같이 읽어봅시다 분위기가 아니었다면 더 늦어졌을지도 모르겠다. 시의 형태로 쓰여져 있어 오히려 읽기에 어렵지 않고 문장이 아름답기조차 하다.
신곡 읽기에 넘어야 할 진짜 벽이라면 바로 역사적인 배경 상식이었다. 이탈리아라는 남의 나라의 정치, 역사, 문화에 대한 배경 지식을 웬만큼 갖고 있지 않은 한 아마도 신곡의 본문 보다는 주석 읽는데 더 시간을 들였을 독자가 나 뿐 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같은 이름 아래 1세 2세 3세 등으로 달라지는 황제, 교황의 이름들, 이탈리아가 이탈리아 라는 하나의 나라로 통일되기 전 수십개 나라로 존재하던 시절부터의 역사와 정치, 그리스 로마 신화는 기본, 기독교 성경의 내용 등, 이 책에 인용된 배경 지식은 방대하였다. 주석 아니라면 아예 글자 읽기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이 책이 단테 알리기에리 한 사람이 쓴 것이라니 그의 방대한 독서양과 지식의 깊이에 놀랄 따름이다. 그것도 30대에 이 책을 쓸 생각을 하였고 완결하였다니. 아마 그가 순탄한 일생을 보내었어도 이런 대작이 나올 수 있었을까. 피렌체에서 영구 추방령이 내려져 다시 돌아올 시에는 화형에 처한다는 선고를 받았고 그렇게 떠돌이 생활이 시작되어 끝내 고국 피렌체로 돌아오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대신 그는 이런 대작을 남겼다.
2. 지난 주에 모 대학 박물관 대학에서 '서양 중세 세계지도의 그림기호 읽기'라는 주제의 강의를 듣다가 알게 되었다, 13세기에서 14세기로 넘어가는 시점에 영국에서 만들어진 세계지도인 헤리퍼드 마파문디 (Hereford Mappa Mundi)를 보면, 지금의 지도 같은 지형적 정보를 주는 지도가 아니라 중세 세계관의 집합체가 그려진 '이념형 지도'였다. 여길 보면 이승 세계뿐 아니라 저승 세계까지 그려져 있고 신과 인간, 동물의 그림을 통해 죽음 이후의 심판과 구원이라는 주제의 이야기까지 담고 있다. 당시 신곡을 읽고 있던 나로서 이 대목에서 어찌 신곡을 떠올리지 않을 수 있으랴. 강의 끝나고 질문을 해야겠다 생각하고 있는데 곧이서 단테의 신곡 이야기가 나왔다. 단테가 신곡을 쓸 무렵 (1308-1321) 중세에는 저승여행담이 유행하는 시기였다고.
이날 강의에서 헤리퍼드 마파문디라는 지도 한장을 가지고 그 위에 빽빽하게 그려진 그림을 보고 해석하며 그것들이 의미하는 성경, 중세 역사, 그리스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신, 천국과 지옥에 대한 상상도에 대한 설명을 듣느라 2시간이 모자랄 정도였다.
저승 세계를 그림으로 나타낼 수 있게 상상하여 나타낸 것은 단테만이 한 일은 아니었다.
3. 단테의 신곡이 다른 여러 작품을 제치고 더 위대한 걸작으로 평가받는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해 보았다.
저승 세계를 상상하고 실제 다녀오는 인물을 등장시키는 소설은 여럿 있다. 저승 세계에 대해 글로써 뿐 아니라 구체적인 그림으로 자세히 그려진 바 있다는 것은 위의 마파문디를 보며 알았다. 단테의 신곡이 더 독보적인 가치로 받아들여지는 근거는 무엇일까.
(1) 지옥이나 천국, 하나만 쓰지 않고 지옥, 연옥, 천국이라는 단계적이고 조직적인 질서를 부여하여 망라하였다.
(2) 단테가 살았던 시대를 살고 있거나 살았던 실제 인물들을 대거 등장시켜 그들의 잘, 잘못을 구체적으로 열거하고 왜 죄가 되는지 설명하였다. 여기에는 단테의 개인적 경험이 반영되어 있다. 자기 고뇌와 희망, 시대적 상황을 신곡이라는 작품 속에 원없이 녹여내었다.
(3) 처음부터 끝까지 시의 형태로 규칙적인 형식을 유지하고 있다. 지옥 (1+33편), 연옥 (33편), 천국 (33편). 이렇게 100편으로 완성체를 이룬다.
(4) 이 당시 학문과 문학의 언어였던 라틴어가 아닌 자기 고향 피렌체의 언어로 썼다. 이것은 아마 서울 표준어가 아닌, 경상도나 전라도, 충청도 사투리 그대로 작품을 쓴 것에 비유할까.
(5) 중세에서 르네상스로 넘어가는 시기에 완성되어, 이후에 오는 여러 예술가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6) 신, 인간, 어느 한쪽에 편중되지 않고 초월적 존재인 신과 한계를 가진 인간의 영혼이 구원을 통해 질서를 유지할 수 있는 메시지를 담았다. 즉, 철학과 종교, 문학을 결합하어 탄생시킨 작품이다.
4. 마지막으로, 단테 자신이 이 책에 붙인 제목은 Commedia (희극) 이다. 책 뒤의 해설을 보니, 라틴어로 쓰인 아리스토텔레스의 비극이 고상한 문체로 쓰여진 최고의 문학장르라고 생각한 반면 단테는 피렌체 민중의 언어인 속어로 썼고 저승 여행이라는 세속적인 주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스스로 Commedia라는 제목을 붙였다고 되어 있는데, 나중에 결국 보카치오가 Commedia 앞에 거룩하다라는 형용사를 붙여 거룩한 희극, 즉 La Divina Commedia 가 된 것이다. 여기에는 인간의 영혼은 신과의 관계에 의해 정화되고 구원될 수 있다는, 행복 가능한 결말에 대한 의지를 담았다는 의의도 있으리라 생각된다.
세계적으로 평생 단테의 신곡만 연구하는 학자, 단테 학회, 영화, 문학, 그림 등이 가능한 이유가 충분히 이해되고 남는다.
(TMI) 신곡을 읽는 동안 생긴 버릇: 어디서 서양의 역사적 인물 이름을 보게 되면,
'가만, 그 사람이 죽은 후에 지옥, 연옥, 천국 중 어디에 갔더라?' (당연히 단테의 신곡 속에서의 이야기이다.) 하면서 생각이 안나면 신곡 책을 막 뒤져보고 확인해본다. 웃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