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한 게으른 시인의 이야기
최승자 지음 / 난다 / 2021년 11월
평점 :
푹 꺼진 볼, 화장기 없는 얼굴, 손가락 사이에서 피어오르는 담배 연기는 단지 폼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준다.
어떤 내용일지 미리 짐작하고는 오히려 읽기를 주저하게 되는 책이 있다. 너무 푹 공감하게 될 것 같아 두려운 것이다. 그러다가 이렇게 결국 읽게 된다.
최승자 시인은 1952년 충청남도 연기에서 태어나 열살까지 살았고 이후 서울로 전학. 고려대학교 독문학과를 나오고 이십대 중간쯤의 나이에 시인으로 등단하여 지금까지 여러권의 시집과 산문, 번역책을 내었다.
<한 게으른 시인의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1989년에 산문집을 이미 낸바 있고, 여기에 내용을 추가하여 2021년에 같은 제목으로 새 판본을 낸 것이 바로 이 책이다.
'20대 중간쯤의 나이에 벌써 쓸쓸함을 안다'라고 책의 첫문장부터 운을 떼었지만 오히려 그 이전부터가 아닐까 생각이 드는, 시인은 그런 감수성과 성향을 가지고 태어난 듯 보인다. 시인이 어릴때 고등학생이던 막내삼촌 덕분에 글을 빨리 깨우칠 수 있었고 책 읽는 재미를 붙이게 되었는데 그때 고독과의 의식적인 첫 만남이 이루어진 것 같다고 저자 자신도 뒤에 나오는 글에 썼으니 말이다.
남녀 간의 정신적인 순수한 사랑에 눈떴다는 게 내가 이 책을 읽고 얻은 소득의 전부는 아니었다. 오히려 그보다 더 큰 게 있었다. 그것은 고독과의 의식적인 첫 만남이었다. 그 이전에도 고독이라는 단어를 읽었는지 어쨌는지는 기억에 없지만 그 책 속에서 나는 고독이라는 이상한 단어와 마주치게 되었던 것이다. 그 뜻을 제대로 알 리가 없었겠지만, 책을 읽어나가면서 나는 내 나름의 느낌으로 그것이 쓸쓸하다, 외롭다 등의 느낌과 어떤 연관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105)
책이 항상 유익한것은 아니다. 이 뭔가. 초등학교 때 벌써 고독의 감을 잡게 했다니.
하지만 유년기의 이 의식적인 고독 연습은 오래 계속되지 않았다. 그 조금 후에 나는 서울 국민학교로 전학하여 낯선 학교, 낯선 아이들 속에서 실제로 외로움을 타기 시작했고, 이 세계 속에서 독립된 개체로 성장해가면서 한 인간이 그의 삶 속에서 경험할 수 있는 온갖 종류의 고독을 '실제로' 겪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108)
이렇게 직접 체험까지 하게 되니, 시인이 만들어져 가는 과정이다. 물론 이런 성장 과정을 거친 사람이 최승자 시인 한 사람은 아닐테지만. 그 모두가 시인이 되는 것은 아니겠지만 말이다.
이런 개인적인 글뿐 아니라 당시 사회 분위기와 시류에 대해 청탁받아 쓰여진 글도 들어있다. 다음은 1980년대 시단의 특징을 양적 팽창과 표현의 폭력화 현상으로 보고, 이런 현상에 대해 저자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1980년대 들어서 시는 요란한 양적 팽창을 보이면서 동시에 과격한 질적 변화를 드러내보였다. 과격한 질적 변화 중 가장 뚜렷이 드러나는 것은 시적 표현의 폭력화 현상이다. (122)
물리적으로 가해지는 힘만 폭력이 아니라 글도, 시도, 폭력이 될 수 있음을 인정하고 어떤 때 글이 폭력이 되고 마는지를 언급하는데, '비판의 근거를, 논리적 정당성을 설득력 있게 제시하려는 노력과 수고 없이, 명분만을 등에 업고 일방적으로 두드려 부숨으로써 오히려 흑백논리까지 넘어선 무비판적 정신'이라고 했다. 즉, 근거와 논리가 비판의 필요 충분 요건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논리적인 정당성과 근거를 제시하는 수고 없이 자신의 주장만을 외치는 무반성적인 폭력적 비판 정신이란 근본적으로는, 그렇게 하도록까지 만든 외부적 압력 구조로부터 가해지는 폭력과 똑같이 강압적이고 일방적이며 권위주의적이고 중앙집권적인 성격을 갖고 있으며 그것은 막말로 하자면 노상강도의 폭력과 다를 게 없다. (123)
그것이 정당한가 먼저 생각해보는 수고를 우리들은 하고 싶지 않아한다. 말만 하는 것 보다 더 어렵고 책임이 따르는 일이니까.
다작도 못되고, 다만 시가 좋고 시를 씀으로써 스스로 위안이 되니까, 시 아니면 다른 수단을 딱히 떠올리지 못하기 때문에 시인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는 것 뿐이지 시를 씀으로써 우리가 사는 사회에 영향력을 미친다거나 어떤 힘을 발휘하려는 노력을기울이지 못하기 때문에 스스로를 게으른 시인이라고 했다.
시인님, 한번 인정을 받으면 계속 그만한 인정을 받아야하고, 다른 사람들이 인정하는 방향으로 가열차게 달려야 하는, 그런 무비판적 기준을 시인님 자신에게도 적용시키지 않기로 해요 시인님. 당신을 스스로 게으른 시인이라고 부르신다면 그것은 반칙입니다.
시인의 시가 너무 고독하고 우울하듯이 산문 역시 그러하리라, 읽는 나로 하여금 더 바닥으로 끌어내리리라 짐작하고 건너뛸뻔 했다. 하지만 도서관 서가에서 이 책이 꽂혀있는 것을 발견하는 순간 책을 꺼내오는 손이 1초 더 빨랐다.
자신의 병에 대해 털어놓는 부분은 읽으며 안타까웠다. 자신이 현재 앓고 있는 병에 대해 솔직하게 털어놓을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당당하고 담백한 삶이라는 것 아닐까. 하지만 지금도 입원중이라면, 그렇다면 도대체 몇년 째 입원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인가. 자신의 삶을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한 시인. 부디 그런 마음으로 회복해나가시기를 진심으로 바라는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