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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라는 멋진, 거짓말 - 어쩌다 보니 황혼, 마음은 놔두고 나이만 들었습니다
이나미 지음 / 쌤앤파커스 / 2021년 2월
평점 :
그때까지 나도 영낙없이 갖고 있던 의사라는 직업에 대한 편견에서 벗어나기 시작한 것은 오래 전 이 저자의 수필집 <여자의 허물벗기 (1992, 문학사상사)>를 읽고나서였다. 해박한 인문학적 지식, 문학에 대한 통찰, 자기가 대하는 사람을 환자로만 보는 것이 아니고 정신과 의사로서 환자의 고민과 불안을 치료하는 입장이지 자기 자신은 고민과 불안으로 시간과 정신 낭비하지 않는다는 특권의식을 내세우지 않았다. 치료하는 직업가보다는, 사람에 대해 사회에 대해 끊임없이 읽고 쓰고 공부하는 것을 더 좋아하는 것 같은 저자의 행보가 괜히 존경스러워, 이후로 그녀가 내온 책들은 거의 다 읽어오고 있다.
최근에 나온 에세이집 <인생이라는 멋진, 거짓말>. 저자의 경향을 워낙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제목이 어떻든 신경쓰지 않았다. 이도 저도 아닌 듯한 표지도 신경쓰지 않았다. 그저 구입하여 바로 읽기 시작했을 뿐이다.
1961년생. 염색하지 않은 백발 그대로, 단정한 단발로 사람들 앞에 서는 저자가 어느 새 손주를 둔 할머니가 되었다고 했다. 노년과 죽음에 대한 생각이 책 전체에 흐르는 주제라고 할까. 심각한 이론을 바탕으로 쓰지도 않았고 그저 평소 생각을 정리한 기록에 가까워 공감하면서 부담없이 읽을 수 있었다.
제발 젊은 사람들에게, 특히 무엇을 원하는지 모르는 사람들에게 "네가 원하는 것을 하라!"는 참으로 아리송하고 쓸모없는 주문 같은 것은 하지 말았으면. 예수님도, 부처님도, 그분들이 진정으로 원하시는 것만 하고 살지는 앖았다. 하물며 우리 같은 어리석은 미물이 무슨 수로 나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산단 말인가.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살라는 부추김은 '폭력으로 정권을 뒤집어라.', '혁명으로 계급을 전복시켜라.'하는 말처럼 때론 아주 위험하다. (30)
젊은 세대에게 조언을 하는 것을 매우 삼가하면서 그래도 해야한다면 사회의 트렌드가 어떻든 책임감있고 자기 경험과 소신을 바탕으로 해야한다는 입장이었다.
아버지, 어머니가 돌아가시지만 그분들의 유전자를 내가 받았으니 여전히 내 안에 살아 있는 것이고 부모의 가르침이 내 머릿속에 있고 내가 그것을 잊지 않고 실천한다면 여전히 부모의 영혼이 내 안에 살아 있다는 것. 그러니 부모의 죽음, 먼저 가는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슬퍼하지 말고 그들과 나눈 시간과 경험과 지혜를 잘 간직해 가능한 많이 꺼내 많이 써먹으면 된다고,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될까. 사랑하는 사람의 유전자 혹은 기억이 내 몸과 마음 속에 있는 한, 죽음으로써 그들이 내 곁을 떠난 것은 아니라고 말이다. (74)
먼저 간 이의 죽음을 슬픔 외에 다른 방식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방법이자 나의 죽음을 두려움 외에 다른 방식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방법이다.
대부분의 자살은 자신이 지고 갈 짐을 살아남은 사람들에게 모두 옮겨지게 하고 생명을 가진 주체의 책임에서 우물쭈물 도피해보려는 시도가 불운하게 성공한 결과일 뿐이다. (100)
정신과 의사이니 아무래도 다른 진료과보다 많이 접했을 자살에 대한 저자의 정의랄까.
불운한 성공을 흉내내지 말것.
노년이 되면 가장 큰 두려움 중 하나가 '쓸모없음'이라 고백하면서 그녀가 생각하기에 가장 끝까지 지키고 싶은 "쓸모"란 무엇일까 얘기한다.
밥을 하는 행위는 계획하고 실행하는 과정이 상당히 섬세하고 때론 복잡할 수 있다. 무언가를 다듬고, 썰고, 씻고, 무치는 행위들을 집중해서 하며 마치 참선하는 것처럼 마음을 비우는 데 도움이 된다. 또, 누군가 내가 해주는 음식을 깨끗이 먹고 감사해 한다면 성취감을 느끼고, 그 대상과 끈끈한 유대감을 갖게 되기도 한다. 누구든, 밥상 차려주는 사람에게는 빚을 지는 것이니까.
지금도 365일 부엌에는 빠짐없이 들어간다. 아파도 들어간다. 먹고 살아야 하니까. 정말 죽기 직전까지, 음식을 스스로 해 먹을 수 있을 정도로만 살 수 있다면 원이 없을 것 같다. 어쩌면 음식 차리기란 대소변 내보내는 것을 제외하고는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최후의 창조적 행위이며 사실은 참 숭고한 일이 아닌가 싶다. (166)
내 손으로 음식 만드는 자들이여. 자부심을 가지라. 나 역시 오랫동안 밥상을 차려오면서 투덜대지도 않았지만 이렇게 까지 의의를 달아본 적이 없었는데.
'어른답게 말하기'란 소제목의 글은 더 주목해서 읽게 되었다. 다른 이에게는 쉽게 던지면서 자신은 듣기 싫어하는 '라떼'와 '꼰대' 라는 말이 유행어인 세상 아닌가. 노년이 되면 입을 여는 대신 귀를 열고 지갑을 열라고 했다지만 그렇다고 그저 입 다물고 듣기만 하다가는 우스운 노인, 비웃음 혹은 배제의 대상, 호구가 될 수 있다고 했다.
문제는 말의 양이 아니라 '질', 즉 언제 무엇을 어떻게 이야기하느냐가 진짜 관건이라고 했다.
일단, 지금까지 잘 살아온 '나'에 대해 하고 싶은 이야기는 좀 참자. 내 경험을 나누어주면 좋을 것 같지만, 들을 귀가 없는 사람에게는 내 입만 아프다. 젊은이들과 좋은 관계를 맺겠다는 지나친 의욕은 버릴 것. 늙은이들에게 중요한 이야기가 젊은이들에게도 중요하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묻기 전에 자기 이야기를 먼저 풀어내는 것은 되도록 자제할 것. 이야기가 그리 하고 싶으면 돈 주고 정신과 의사를 찾는게 낫다. 만약 자신의 이야기를 상대방이 싫어한다면 정말 필요한 불행한 이들에게 자선을 베풀고 그들과 함께 식사라도 한끼 하는것이 훨씬 낫다.
첫째, 배우고 싶은 후배나 제자에게만 전수해줄 것
둘째, 때를 잘 살필 것
셋째, 나는 그럼 얼마나 잘 알고 있는지 끊임없이 점검하고 그 시간에 자기 계발을 더 할 것. (217, 219)
자기 자신을 점검하고 계발하는데 더 힘쓰라는 세번째 사항이 특히 마음에 든다.
몇 페이지 넘기면 나오는 다음 대목도 함께 세트.
노인이 되어 갈수록 나보다 어린 사람들에게 통제대마왕이 되려고 한다면서 이들이 간과하고 있는 것을 지적하였다.
그들이 잊고 있는 것, 보고 싶지 않은 것은 자신들을 뛰어넘는 젊은이들의 능력과 잠재적인 에너지다. 그들이 끊임없이 환기시키고 보고 싶은 것은 젊은이들이 삶의 과정 중에 겪을 수 있는 시행착오와 실수들이다. 누가 도대체 실패를 하지 않고 기술을 연마할 수 있고, 좌절을 겪지 않고 지혜로울 수 있는가? 자신보다 젊은이들을 통제하려는 이들은 그런 기본적인 삶의 원칙은 거부하고, 상대를 자신들의 꼭두각시, 집사, 노예 혹은 로봇으로 만들고 싶어 한다. 그리고 그 마음속 깊이에는 '자신이 사라지고 있다, 쓸모 없어지고 있다'는 것에 대한 불안이 숨어 있다. 불안은 때로 파괴적인 에너지로 작용한다. (232)
지금까지의 저자 자신의 생을 돌아보며,
세상의 귀한 분들처럼 일생을 다 바쳐서 진리를 찾아 헤매지는 못했지만, 다만 매일 밥을 핶고 책을 읽었고 몸이 허락하는 한 일했으면 된 거 아닐까.
이 마지막 페이지의 문구대로라면 나도?
이렇게 위안삼으며, 노년을 통과하는 비결중 하나는 역시 과한 욕심 내려놓기임을 되새겨 본다.
나보다는 연배인 저자. 다행이 많이 차이가 나지 않아 조금 뒤에 따라가며 흉내라도 낼 수 있는 사람이 있어 다행이고 행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