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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타는 평원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24
후안 룰포 지음, 정창 옮김 / 민음사 / 2014년 8월
평점 :
출간된 책이라곤 두권이 전부이지만, 권수와 무관하게 후에 그 몇배 되는 가치로 평가받고 영향력을 남기고 간 작가 후안 룰포.
그가 태어난 1917년 멕시코는 멕시코 혁명 이후 여파로 빈곤과 불안정 속 어두운 시기였고, 가정적으로도 룰포는 사회적 불행 못지 않게 결핍된 유년기를 보내야했다. 안팎의 이런 우울한 환경은 오히려 그에게 환상으로 가는 길을 열어주는데 한 역할 한 것일까. 그의 문학 작품속 독특한 구조와 구성 기법은 라틴아메리카문학 하면 많은 사람들이 떠올릴 그 환상적인 분위기를 세우는데 기초를 마련하였다. 이런 환상성의 임팩트는 장편과 단편에서 그 느껴지는 바가 달랐는데, 장편 소설 <뻬드로 빠라모>를 먼저 읽어 작가에 대한 느낌을 어느 정도라도 알고난 후라서 인지, 단편 모음집인 이 책을 읽으면서는 훨씬 더 작가의 성격을 이해하는 것이 수월하였다.
총 열일곱편의 짤막한 단편들이 실려있는데 죽임 또는 죽음은 빈번히 출현하는 사건의 소재이며 가난한 농민, 민중들의 구차한 삶의 단편들이 사실적, 구체적으로 드러나있다. 희극적 요소보다는 비극이고, 이상으로 환하게 불밝히며 현실의 고난을 잊게 해주던 혁명이었는데 그 결과와 잔재는 꺼진 불과 재처럼 농민의 삶에 이전에 없던 비극적 요소를 더해준다.
혁명, 가난, 복수, 도망, 살인, 운명, 소외, 아버지와 아들, 형의 아내, 누명, 저주, 허구, 위선. 읽으면서 키워드로 메모해놓은 단어들이 목차 페이지의 각 단편 제목 옆에 촘촘한 끄적거림으로 남아있다. 이것이 모든 인생들의 키워드는 아니기를.
죽고 죽이는 사건은 단도직입적인 문장으로 짧게, 갑자기 던져지기도 하고,
나는 레미히오 또리꼬를 죽였다. (23쪽, '꼬마드레스 언덕')
다음에서 처럼 간접적, 암시적으로 묘사되어 있기도 하다.
우리 두 사람은 지금 센손뜰라에 있다. 우리는 그가 없이 돌아왔다. 나딸리아의 어머니는 나한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내가 따닐로 형과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묻지 않았다. 나딸리아는 자기 어머니의 어깨에 고개를 기댄 채 울음을 터뜨렸고, 울면서 그간에 일어났던 자초지종을 말했다. (68쪽, '딸빠')
그리고, 한번 읽고 또한번 읽도록 나를 붙잡은 문장들 속에는 멕시코 출신 작가이기에 가능할 것 같은 정서가 있었다.
한동안 벼랑 밑에서 부는 바람이 마치 불어난 물살에 자갈 구르는 소리 같은 떠들썩한 소리를 우리 쪽으로 실어 오고 있었다.
돌담 밑에 벌렁 드러누운 우리 모습이 흡사 햇볕에 축축한 몸을 데우는 이구아나 같았다.
마치 멀리서 달구지들이 비좁은 자갈길을 지나갈 때 나는 소리를 듣는 기분이었다. (78, 79쪽, '불타는평원')
이런 표현을 그 어느 누가 할 수 있을까.
아래 대목에서는 인간의 슬픔이 열차의 슬픔으로 표현되고,
열차가 슬픔에 겨워 목이 잠긴 소리로 길게 경적을 올렸지만 다들 그저 눈을 뜨고 지켜볼 뿐 아무도 도와주지 못했다. (96쪽, '불타는 평원')
수록된 한 단편의 제목이기도 한 '나를 죽이지 말라고 해!'는 죽어가는 아버지가 아들을 붙잡고 호소하는 말로서 제목부터 처절하다. 죽음만 그런 것이 아니라 가난까지도 노력에 의해 극복되는 것이 아니라 숙명이 되고마는 현실에서 우리가 마지막에 할 수 있는 저 말 '나를 죽이지 말라고 해'는 내적 독백이자 의식의 흐름이 되어 소설 여기 저기서 대사처럼 그리고 울음처럼 스며나오고 있다. '우리는 너무 가난하답니다' 이것 역시 주인공의 독백이자 한 단편의 제목이다.
평론가들에 의해 특히 수작으로 꼽히기도 했고 나 개인적으로도 따로 표시를 해두고 다시 읽어보고 싶어질 작품으로 '불타는 평원'과 '나를 죽이지 말라고 해!', '너는 개 짖는 소리를 못 들은 거야'를 꼽겠다. 아니, 그러기에는 천국인지 연옥인지 시종일관 유령세계를 떠돌며 절묘하게 호소하는 '루비나'를 빼놓을 수 없겠고, 아들을 저주하는 아버지와 반란군 편에 서서 아버지 시신을 거두어들이는 아들이 등장하는 '마띨데 아르깡헬의 유산'도 그냥 넘어갈 수 없겠다.
작가 자신이 아버지를 일찍 여의었기 때문일까. 특히 아버지와 아들의 불편한 관계가 자주 등장한다. 이것은 룰포의 다른 책 <뻬드로 빠라모>에서도 그랬다.
혁명을 통해 정치, 권력, 정복, 발전이 아니라, 남겨진 인간들의 가난을 통해 존재의 고립과 죽음을 보았던 작가 후안 룰포. 그에게서 영향을 받아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백년동안의 고독>이 나왔고, 보르헤스와 더불어 라틴 아메리카 현대 소설 문학의 토대이자 양대 기둥으로 불리게 된다. 단 두권의 책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