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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오는 날
임수진 지음 / 상상마당 / 2021년 5월
평점 :
어디서 알게 되어 이 책을 보관함에 담아놓았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주 오래전 일도 아닌데. 아마도 수필가가 쓴 소설이라는 것이 내 호기심에 큰 작용을 했을 것이다. 수필가로 등단한 저자 임수진은 그동안 수필가로 활동하며 두권의 수필집을 출간하였는데 올해는 처음으로 소설집을 발표하였다. 열개의 단편이 한권으로 가지런히 묶인 회색 표지의 아담한 책을 처음 펼칠 때의 마음은 재미있기를 기대한다기 보다 과연 어떻게 썼을까에 대한 호기심이 컸다. 소설이라는 한 장르에서도 단편과 장편 쓸때 마인드가 다르다고 하는데, 수필가로 활동해오다가 소설을 썼다면 어렵지 않았을까? 소설에서도 수필의 느낌이 날까? 서사를 어떻게 진행시켜나갔을까? 소설의 흐름이 어색하지나 않을까?
한장 한장 넘겨가는 동안 처음에 가졌던 기대라는 이름에 섞인 약간의 불안감은 이내 사라졌다. 처음부터 소설을 쓴 작가라 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을만큼 잘 읽혔고 소재가 다양했으며 주제도 분명했다.
<삼각김밥을 먹는 동안>
거의 모든 식사를 편의점 음식으로 해결해오고 있는 방송작가 인'나'는 습관적으로 삼각김밥이 주식이 되어오고 있다. 보디 빌더가 꿈이어서 운동에 집착적이던 아버지가 어느 날 부상으로 사지 마비가 와서 하나부터 열까지 누군가의 보살핌을 받는 생활을 시작하고 그 아버지 뒷바라지에 지치다 못해 나는 어느 날부터 아버지 끼니도 편의점 삼각김밥을 사다주는 것으로 해결하는데 삼각김밥에 익숙해질 무렵 아버지는 세상을 떠난다. 방송 취재차 알게 된 같은 동 802호 남자. 전해듣기로 그의 한때 직업은 보디빌더였으나 지금은 몸이 망가져 계속 할수 없는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운동을 하고 있지 않으면 불안증세를 보인다는 말을 체육관 관장으로부터 전해들은 나는 그에게서 과거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복잡한 심정에 우연히 만난 그에게 마침 사가지고 온 삼각김밥을 건넨다.
<언니오는 날>
엄마와 바람난 남자와의 관계를 위해 어릴 때부터 엄마로부터 학대를 받아온 언니의 얘기이다. 동생인 나 '이수'는 성인이 되어서도 엄마라는 감옥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사는 언니에게 미안하고 죄책감을 느끼는데 언니가 오랜만에 이수를 방문하기로 한날 언니로부터 뜻밖의 결단과 고백을 듣는다.
<중독>
초기 치매 증세를 갖고 있는 아내가 집을 나가 소식이 없자 책임을 물으며 사위를 채근하는 장모. 그리고 아내가 고독사했을 경우를 생각하며 스스로 특수청소업체 일을 시작하는 남자가 있다. 그러나 남자는 그 상황에서도 불륜의 상대 여자를 목말라 한다.
<스멜헌터>
냄새에 민감한 특성을 가진 남자가 냄새 사냥을 직업으로 하게 된다. 냄새에 대한 특별한 능력을 갖게 되거나 잃게 되는 배경에는 개인의 역사가 치명적으로 얽혀들어가 있고 좀처럼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기 좀처럼 힘들도록 삶에 영향을 미친다.
<푸른문>
학교 다닐 때 자기를 성추행했던 담임선생님에 대한 기억을 가지고 있는 지수는 결혼을 하고 아이도 키우는 나이가 되었지만 남편은 그녀로부터 육체적 욕구 충족이 원하는 전부이다. 딸의 입학식에 참석한 날 그 옛날 자신을 성추행했던 담임이 딸이 입학한 학교 교장이 되어 신입생 환영사를 하러 단상에 나온 것을 본 지수는 즉각적 방어본능이 발동한다.
<틈>
환자 시어머니를 모시게 되어 하루 종일 시어머니와 한집에 붙어지내며 수발을, 때론 감시를 해야하는 며느리 민주는 공간적인 틈뿐 아니라 감정적인 틈을 목말라 하게 된다.
<매미의 시간>
반지하 단칸방에 세들어 살다가 드디어 지상의 방으로 이사를 앞두고 있는 나는 지상에 나와 여름 2주 동안 우렁차게 울어대고 살기 위해 땅속에서 7년을 보낸다는 매미의 생과 자기의 삶이 비슷하다는 것을 발견한다.
<노란비옷>
쓰러진 남편 대신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갓난 자기 아이는 집의 남편에게 맡겨놓고 남의 집 유모로 들어간 여자의 이야기이다. 아기 젖을 받기 위해 빗속에 아기를 데리고 찾아온 남편에게 미리 짜놓은 젖을 건네주고 들어온 여자는 노란 비옷을 입고 일기 예보를 전해주는 TV 속 기상캐스터의, 내일을 맑음이라는 멘트를 떠올린다.
<뜻밖의 행운>
남보다 늦게 결혼하여 가난하지만 열심히 살아가던 부부 사이에서 뒤늦게 태어난 아이가 건강하지 않다. 남편마저 일자리를 잃게 되고 아픈 아이 뒤치닥거리까지 해야하는 상황에서 닥치는대로 일을 찾아 하던 여자가 어느 날 버스 대합실 청소를 하다가 발견한 그것은 과연 그들 부부의 바람대로 모든 것을 해결해줄 행운이 되어줄까.
<축제는 진행중>
딸만 넷을 둔 외할머니의 첫 기일. 넷중 막내인 엄마가 제사를 모시기로 하여 외손녀인 나는 엄마를 도와 함께 음식 준비를 하고, 오랜만에 모인 이모들, 엄마는 외할머니의 고생하던 지난 날에 대한 회상과 추억을 얘기하며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제사를 지낸다. 제사는 끝났냐고 묻는 남자 친구에게 전화문자가 오자 답장을 보낸다. 축제는 진행중이라고.
삼각김밥으로 연결되는 잃어버린 꿈, 희망, 좌절, 버팀의 생. 동생에게는 그날이 언니가 오랜만에 방문하는 날이었지만 언니 자신에게는 비로소 자기 생을 자기 중심으로 되돌려 놓는 날이었을 것이다. 인륜과 도덕이 이기지 못하는 본성과 중독성, 경험이 감각을 바꿔놓고 운명을 바꾸어놓을수 있다는 것, 딸이 입학한 학교의 푸른문은 푸른 괴물이 사는 성으로 들어가는 문임을 즉각적으로 깨달은 엄마의 방어 본능, 틈은 메워야 할 공간이 아니라 살아가는데 반드시 필요한 숨구멍이기도 하다는 것, 안타깝게 바라보는 매미의 일생이 우리와 닮아있다는 것을 모르고 사는 인간, 비옷은 노랗게 화려해도 비올 때 입는다는 속성, 가난은 어떻게 치장해도 견뎌내야 하는 빗줄기 같은 것이다. 멈추게 하는 것이 아니라 버텨내야 하는 것. 뜻밖에 찾아온 행운이 행운이 될지 불운이 될지 조차 인간이 결정해야하고 선택해야 하기 때문에 비극이 되는 삶, 제사가 축제가 될 수도 있는 것은 삶과 죽음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방식에 있다는 인식의 전환을 새롭게 보여주려는 시도까지, 열편이 모두 작가의 메시지가 옹골차게 잘 들어있었다.
수필가가 소설을 써도 이렇게 무리없이 잘 쓸수 있구나 오랜만에 느끼게 해주는 기회가 되었다. 작가는 아마도 오랜 시간 공을 들여 소설을 위한 준비를 하고 벼루에 먹을 갈듯 정성을 기울였을 것이다. 그런 흔적이 열편 작품 하나하나에서 느껴진다. 여기 실린 것은 열편이지만 아마 수십편의 소설을 써놓지 않았을까.
정작 그녀의 수필은 읽어본 적이 없다. 거꾸로, 이런 소설까지 써낸 작가의 수필은 어떤 색일까 찾아서 읽어보고 싶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