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외출
조지수 지음 / 지혜정원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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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수라는 이름은 소설을 위한 필명. 그는 이미 조중걸이라는 본명으로 여러 권의 인문학 서적을 낸 인문학자이다. 예술학, 논리학, 철학 등을 공부하여 이 분야의 인문학서를 주로 발표해온 경력을 알고나니, 그가 쓴 장편소설은 과연 어떤 내용의 소설일까 궁금했다. 

저자에 대해 아주 많이 아는 것은 아니지만 읽다보니 등장 인물 모두가 작가의 아바타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작품 속 인물들의 인생 경로나 성격이 자꾸 작가를 떠올리게 했기 때문이다. 

프롤로그와 에필로그에만 화자로 나오는 경찰관이 40대 여성의 실종사건을 맡게 되는 것으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프롤로그와 에필로그 이외의 모든 분량은 실종 여자가 남긴 기록으로 되어 있다. 이 경찰관은 원래 철학과 출신으로 철학을 공부하고 싶었으나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해야 해서 경찰직으로 방향전환을 했다고 나온다. 그렇긴 하지만 여전히 공부하다 만 철학에 미련을 갖고 있는, 어딜 보나 경찰관 같지 않은 경찰관이다. 

무언가 할 일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다시 철학으로 이끌린다. (15쪽)

사건 속 실종자는 40대 여자 교수. 남편 그리고 막 수능을 치른 아들도 있는 가정을 가지고 있다. 위에 말한 경찰관이 수사를 위해 그녀의 집을 방문하고 그녀의 방을 수색하던 중 금고 속에 보관된 열 한권의 노트와 PC에 저장된 기록들을 발견하게 되는데 자그마치 20년 동안의 기록인데다가 범상치 않은 문체, 철학과 미학에 관한 방대한 내용, 계속되는 한 남자와의 대화체 서술, 그 남자의 사진 등 흥미로운 내용에 빠져들어 심상치 않은 기록들임을 알게 된다. 며칠에 걸쳐 끝까지 다 읽는 경찰관이 그 내용을 추려 소개한 것이 이 책의 중심 내용을 이루고 있다. 책의 마지막 대여섯 쪽 경찰관의 에필로그를 제외하고는 실종된 여자가 남긴 20년 동안의 이 기록이 곧 이 소설 전부라고 봐도 좋을 것이다.

여자의 기록은 대학에 갓 입학했을 때부터 시작된다. 인문대생이었지만 평소 미술에 대한 관심때문에 교양으로 미대에서 '현대예술, 감상과 이해' 라는 과목을 신청해서 듣기로 하는데 첫 수업에서 만난 담당 교수는 처음 보았을때 교수로 알아보지 못했을 만큼 마치 학생 같은 외모의 젊은 교수였다. 외양보다 더 독특했던 것은 그의 강의 내용과 강의 방식이었다. 예술에 대한 얘기만 할 줄 알았는데 철학을 얘기한다. 예술을 이해하기 위해 왜 철학이 필요한가, 선과 악에 대한 새로운 해석, 예술과 철학과 논리학을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그의 해박한 지식 세계에 몰입하게 된 여자는 교수와 단독으로 스터디를 하면서 개인적으로 가까와지며 더욱 더 예술과 철학에, 또 그 교수가 가지고 있는 아우라에 몰입되고 그의 세계로 들어간다.


선과 악은 지식에 의해 정해지는 경우가 많다. 스스로 이해 불가능한  것은 결국 악이 되는 것. (54쪽)


현대철학의 심미적 반영이 현대예술이야. 모든 시대의 예술이 당시의 이념 위에 기초하듯이 현대예술도 현대의 세계관 위에 기초하지. 칸딘스키, 말레비치, 미로, 피카소, 몬드리안, 리히텐슈타인, 워홀 등의 미술가가 현대를 대표한다고 할 만한 예술가들이야. 비트겐슈타인 철학의 심미적 표현이 이들의 예술이야. (93쪽)


그런가? 비트겐슈타인 철학이 칸딘스키, 말레비치, 미로, 피카소 등의 예술 작품의 바탕을 이루고 있다고? 이것은 작가의 생각인지, 아니면 인용된 것인지 나로서는 알수가 없지만 철학과 예술이 별개의 분야가 아니라 이렇게 연관지어짐을 어렴풋이 알 것 같다. 이제 여자는 (이 책에서 여자의 이름은 나오지 않고 A 라고만 표시된다) 교수를 선배라고 부르기 시작한다. 교수가 꼭 학자는 아니라서 교수라고 불리는게 불만이라는, 교수의 요구에 의해서이다. 


두꺼운 철학책은 이를테면 원근법과 입체처럼 구시대의 유물이야. 육백 쪽의 순수이성비판이 팔십 쪽의 논리철학논고로 바뀌었을 때 현대가 온 거야. 현대 회화는 그 두꺼움을 제거하며 시작돼. 쿠르베는 진정한 천재야. 들라크루아의 두꺼움은 그에게서 사라져. 이제 표층의 시대가 온 거야. 새로운 길은 평면에의 길이야. 새로운 비아 모데르나는 원근법을 저버리며 시작돼. 마사치오는 폐위되고 이제 세잔이 왕이야. (184쪽)


역시 예술과 철학의 연관성이다. 이제 예술과 철학은 더이상 다른 세계가 아니다. 


신념과 관련해서 중요한 것은 신념을 가져서는 안 된다는 거다. 신념은 유행일 뿐이야. 오늘까지 모순되는 많은 신념이 있었어. 오늘의 신념도 곧 부끄러움이 될 거야. 이것은 신념이 없이 살아야 한다는 건 아니야. 신념은 가져야 해. 그러나 그 신념은 자기 인식적이어야 해. 

지금 나는 그 신념에 물들어 있지만 그것은 단지 오늘 그것이 필요할 뿐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당위는 아니다. 단지 우리는 어디론가 움직여야 하고 그것은 지금 판단의 어느 방향을 지시해줄 뿐이다. 그러나 그 별들이 언제고 태양은 아니다. (201쪽)


교수의 말을 A는 즉각적으로 이해하고 나름대로 정리해가면서 받아들인다. 이렇게 영특하게 자기의 말을 제대로 알아듣고 이해하는 여자 A를 교수도 각별히 생각하며 이 둘의 관계가 발전해나간다.


밑줄을 그으며 읽다보면 내가 지금 소설을 읽고 있는지 예술 철학서적을 읽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느낌이 여러번. 아마 다른 독자들도 그렇지 않았을까.


아무것도 아닌 주제에 무어나 된 듯이 생각하는 인품은 삶을 참을 수 없이 무겁게 만들고 스스로를 오만 속에서 몰락해 가게 만듭니다. 누구라도 죽을 때까지 배워야 하고 노력해야 합니다. 무엇인가가 옳다고 하는 것은 그것이 어떠한 올바른 요소를 쥐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고 올바름을 향해 분투하고 있는 그 순간을 동시에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죽음은 없고 죽어가는 내가 있을 뿐이듯이 노력하고 있는 그 순간만이 유의미할 뿐입니다. (238쪽)


이렇게 읽자마자 공감이 되는 부분에 밑줄을 그을 때는 더욱 그렇다.


사실 소설이라고 하지만 뛰어난 서사가 이 소설의 장점은 아닌 듯 하다. 오히려 작가는 자신과 같은 전공을 한 교수를 주요 인물로 삼아 그동안 인문서를 집필하면서 제한을 받았던 그의 생각과 이론을 소설이라는 형식을 빌어 또한번 지식의 향연을 벌이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개인적인 생각이다.


실패한 선택이란 없어. 선택을 뒷받침하지 못한 실패한 의지만 있을 뿐이야. (263쪽)


선택이 실패가 아니라 그것을 뒷받침할 의지의 실패라면, 그게 더 참담하지 않을까. 그건 환경과 조건 탓을 배제한 오로지 나의 문제에서 비롯되었을 테니까. 


교수와 여자 A ㅡ이 관계에 있어서는 그들의 어떤 선택이 의지의 뒷받침을 받지 못한 것인지, 이 소설의 제목 앞 괄호 속 문구 까지 더하면 이 책의 완전한 제목은 (이미 없는 그와 아직 없는 그녀의) 마지막 외출 이다. 모호하다.


작가에겐 한권의 소설이 더 있다. 이 소설보다 15년이나 먼저 나온 <나스타샤>라는 장편소설이다. 그 작품도 이것과 비슷한 느낌일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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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이설의 소설 <우리가 안도하는 사이>를 읽었고,


작가 후기에 소개된 이 노래 Nel Blu Dipinto di Blu를 알게 되었다. (원래 알고 있던 노래이긴 하지만)



https://youtu.be/XSFIVyyrgl4?si=qm_XtcArM5ays2ib



 


여러 버전으로 불려진 이 노래를 듣다가 최근에 이 노래가 삽입된 미국 드라마를 알게 되어 보기 시작했다.




From Scratch (TV series) - Wikipedia

 

From Scratch


미국 텍사스 출신으로 조지타운 로스쿨에 재학중이던 에이미는 예술에 대한 자신의 열정을 펼쳐보고자 학업을 중단하고 이탈리아 피렌체에 미술 학교에 등록한다. 택사스에서 나름 잘 사는 집의 딸이지만 보수적인 변호사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오느라 재정적인 도움 전혀 없이 타국에서 혼자 힘으로 다 해결해야 하는데, 역시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셰프가 되고자 하는 꿈을 이루기 위해 이탈리아 시칠리에서 피렌체로 온 남자 리노를 만난다. 

여덟개의 에피소드로 되어 있는데 에피소드 1에서 노래 Nel Blu Dipinto di Blu 가 나온다.

이탈리아의 피렌체는 물론이고, 후반으로 가면 남주인공 리노의 고향인 시칠리 마을이 많이 나온다. 영어를 못하는 이탈리아 사람들이 등장하는 장면에선 이탈리아어도 막 나오고, 막연하지만 언젠가 가보리라 이탈리아 여행을 꿈꾸기 시작한 이후로 혼자 이탈리아어 공부를 조금씩 하고 있는 나에겐 살짝 살짝 아는 단어가 들릴때마다 느끼는 작은 즐거움까지 더해져서, 기대 이상으로 재미있게 에피소드 8까지 다 보았다.

둘의 결혼식때 에이미의 엄마가 결혼 생활을 Shoes에 비유하여 한 결혼식 축사는 정말 공감.

결혼 생활이란 한 신발을 신고 오랫동안 걸어야 하는 여정. 계속 걷다 보면 신발 속에 돌도 들어갈 것이고 그 돌이 자잘할때도 있지만 꽤 커서 걷기 힘들 정도일 때도 있을 것이다. 발이 아파 계속 걷기 어려워질 때 그 돌의 존재를 무시하고 그냥 걸을려고 하면 결국 발도 상하고 걷는 것도 계속 못하게 될것이다, 신발을 풀러 돌을 제거하고 걷는 것이 옳다...그런 요지.


'깊은 사랑을 받게 되면 사람을 강하게 만든다' 이 말도 기억에 남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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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4-07-11 09: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저 드라마 저도 봐야겠어요. 다행히 구독중인 넷플에서 가능하군요!!

hnine 2024-07-11 10:55   좋아요 1 | URL
저도 넷플에서 봤어요.
이 드라마에 대한 것을 어디서 본것 같은데, 그게 어딘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재미있게 봤어요. 실화를 바탕으로 한 원작 소설이 있다더군요.
 
우리가 안도하는 사이 새소설 15
김이설 지음 / 자음과모음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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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읽었다. 작가 후기 읽었다. 이 책에 대한 인터뷰 기사를 몇개 찾아보았다.

이제 리뷰 써야겠다 하면서 마지막 한 일은 Nel Blu Dipinto Blu 를 듣는 일이었다. 들어보니 알고 있는 노래.)



등장하는 세명의 여자는 아직 오십대가 아니다. 아직 1년 있어야 오십이 되는 49세의 여자 대학 동창 세명이 25년 만에 함께 강릉으로 여행을 떠나 그동안의 살아온 얘기를 하며 회포를 푼다. 얘기는 과거에 주로 집중되어 있고 세명중 그 누구도 현재에 대해 기꺼이 말하기를 꺼린다. 보여주기 그럴듯한 삶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대학 시절 학생운동 했던 미경은 대학생활의 또다른 축이었던 총학생회 선배 성희 언니와의 선후배 이상의 관계를 되돌리고 싶다. 되돌아갈 수만 있다면 이뤄질 수 없던 관계로 두고 싶지 않다. 군립 도서관 사서로 일하며 아직 결혼도 안했지만 앓는 노모를 책임지고 사느라 여느집 가장만큼의 삶의 무게 속에 살고 있다.

결혼해서 아이 둘을 키우며 사는 정은. 동갑내기 사랑하는 남자와 결혼했지만 사랑하는 남자는 재산이 없는 남자. 아이 둘을 키우느라 대학 졸업이 무색한 각종 알바 수준의 일을 몇가지씩 해가며 무너지는 가정경제를 무너지지는 않게 하느라 초등학교 급식실에서부터 설거지 아르바이트까지, 고군분투하며 산다. 담보대출, 잔고 부족, 연체 미해제 등은 그녀의 현재 인생 키워드이다. 대학때부터 쪼들리며 학교 다녔던 그녀는 가난의 시작은 어디이고 어디가 끝일까 생각한다.

겉으로 보기에 제일 별탈없이 결혼해서 잘 살고 있는 난주. 두 아이 키우고 살림 잘 하는 것에 이십 몇년을 보내고 아이 둘을 대학에 보내고 나자 별 수 없이 집에서 점점 쓸모 없어지는 아줌마가 되어 있는 자신이 속상하다. 당장 하루 종일 말 할 상대도 없는 자신에게 남은 것이 무엇인가. 행복하지 않다.


우리가 안도하는 사이 무슨 일이 일어났나. 결코 안도할 만하지 않는 상황에 닥쳐 있다. 인생에 안도한만한 시기가 있기는 한 것인지. 오십을 넘어갈 무렵, 좀 달라진다 말할 수 있을까. 상황이 나아져서가 아니라, 어느 정도 받아들이고 포기하는 여유가 조금씩 생겨난다.

작가의 소설을 초기부터 읽어온 독자로서, 갈수록 그녀의 소설이 편하게 읽혀져간다. 힘들지 않게 페이지가 넘어간다.

성격이나 살아온 인생경로가 다른 세사람을 주인공으로 썼을 것 같은데 읽다보면 그 경계가 없어져간다. 현실에서 너무나 익숙한 모습들이라는게 공감을 끌어내고 가독성있게 읽을 수 있게 한다는 장점으로 돋보인다. 이 소설에서 새로 발견해낼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생각해보게 하는 아쉬운 점은 있다. 



(Nel blu dipinto di blu 이 노래의 다른 제목은 Volare. 이탈리아말로 '떠나자' 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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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선 2024-07-07 18: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이설 좋아해요!

hnine 2024-07-08 06:02   좋아요 1 | URL
한때 알라딘 서재의 친구였고 처음 낸 소설부터 쭉 따라 읽어왔지요. 각별해요.
초기에 낸 소설보다 읽기는 훨씬 수월해졌어요. 그녀의 소설이 이렇게 달라질줄이야. 앞으로도 어떻게 달라질리 모르고요.
작가란 ‘오늘도 쓴 사람‘이라는 김이설 작가의 신조가 있는한 앞으로도 계속 될 작품들을 기다리고 응원합니다.

다락방 2024-07-07 22: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단락에서 나인 님께 동의하는데요, 김이설의 소설이 갈수록 편하게 읽히기는 하지만, 그런데 최근의 이 [안도하는 사이]는 무얼 말하고자 함인지를 모르겠더라고요. 저도 그 점이 좀 아쉬웠습니다.

hnine 2024-07-08 06:10   좋아요 0 | URL
조심스럽게, 그리고 솔직한 감상을 썼어요. 친숙함으로만 읽히는게 전부라면 아쉬울수 밖에 없겠지요. 친숙하게 읽히다가 뭔가 새로운 발견을 제시하는 서사가 있었더라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요. 전작 <우리의 정류장과 필사의 밤>이나 <잃어버린 이름에게>에서는 나름대로 주인공에 대한 공감대를 불러일으키면서 주인공 나름의 방법으로 그 고비들을 넘어가는 모습이 잘 그려졌다고 생각되었었는데 말이지요. 이번 작품에서는 공감대 형성, 거기에서 더 무엇이 있었을까 생각해보게 되더군요.
그런데 스르륵 읽히는 자연스런 묘사, 말투, 어색하지 않은 대화들은 벌써 작가의 연륜이 짧지 않구나 느끼게 해주더라고요.
 
반바지 당나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27
앙리 보스코 지음, 정영란 옮김 / 민음사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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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때문에 읽기를 미뤄놓고 있던 소설을 제목때문에 뽑아 읽게 되는 날도 있나보다. 소설 제목이라기 보다 동화책이나 시집 제목같은 이 책을 다 읽고 난 지금도 이걸 동화라고 봐야할까 소설이라고 봐야할까 구분이 잘 안선다. 

작가가 그리는 이상향을 동화처럼 그렸다고 할까? 그렇다면 개인적으로 내가 처음부터 끌려갈 내용은 아닌데 그럼에도 지루하지 않아 페이지는 금방 금방 넘어갔다.

읽기 시작하고 곧 이건 성경의 아담과 이브, 에덴 동산의 다른 버젼 아닌가 넘겨짚기도 했고, 그렇다면 등장인물들을 성경과 대조시켜볼까 시도도 해보았다. 나중엔 그게 오히려 작품에 집중도를 떨어뜨리는 것 같아 그만 두긴 했지만 어느 정도 관련이 있다는 생각이다. 


너희들은 잊어선 안 된다. 우리 주님께선 어린 암나귀 등에 앉으신 채 예루살렘으로 입성했다는 사실을. (48쪽)


이 문장으로 봐도 제목의 당나귀는 그냥 당나귀가 아니었던 것. 성경에 나오는 내용에 근원을두고 있다.

책의 처음 부터 끝까지 각종 성지 축일이 줄줄이 나오고, 금단의 땅, 천사, 악마 등이 자주 언급된다.


이곳은 비옥한 땅에 붙어사는 사람들이 거하고 있는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곳, 피안의 세계 (52쪽)


열두살 소년 콩스탕탱이 금단의 땅에 처음 들어서는 장면을 묘사한 부분이다. 속세에서 멀리 떨어진 피안의 세계.


콩스탕탱은 남프랑스 프로방스 지방의 뻬이루레 마을 의 산 기슭에서 할아버지와 할머니, 하인 세명과 한 집에서 살고 있다. 마을의 산 위에는 다른 마을 주민들과 떨어져 접촉을 않고 사는 시프리앵이라는 수수께끼 같은 노인이 있는데 가끔 마을의 성당에 당나귀를 내려보내고 성당의 신부와 말을 나누는 것이 소통의 전부이다. 어디서 왔는지 근본을 알 수 없는 이 노인은 사람들과는 떨어져 지내지만 '플레롸이드 (꽃 피는 동산이라는 뜻)' 라는 정원을 가꾸며 동물, 식물들과 교류를 나누며 살면서 여우의 살생으로부터 정원이 다른 생물들을 지키기 위해 노력한다. 아무도 드나들지 않는 그곳, 금단의 땅에 대한 궁금증에 이끌려 비밀스런 접근을 시도한 콩스탕탱을 발견한 후부터 시프리앵은 콩스탕탱에 대한 특별한 관심을 키워간다.

콩스탕탱 또래의 이아생트라는 소녀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데, 이 소녀 역시 출신, 성격, 존재 의미가 묘연한 인물이고 콩스탕탱과 시프리앵, 모두와 관계를 맺고 있지만 뚜렷하게 그 관계의 정체가 무엇인지 묘사되어 있진 않아서 이아생트가 이 작품에서 갖는 의미에 대해 해석의 여지가 많다. 

책의 전반부 반 이상은 콩스탕탱의 이야기로 진행되고, 후반부엔 시프리앵의 일기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작품의 핵심은 콩스탕탱보다는 시프리앵의 일기 부분에 집중되어 있다고 보여진다. 외로움 속에서 그가 정원, 즉 금단의 땅, 작가가 그리는 이상향을 만들어 추구해온 것, 그의 자기 성찰과 고뇌가 일기 속에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부분은 상당히 문학적이고 철학적인 깊이가 보여지는 서술이다. 여러 가지로 볼때 시프리앵은 어쩌면 작가의 분신이라는 생각을 굳히게 한다. (작가 연보를 훑다보니, 작품 속 시프리앵의 생일과 작가인 앙리 보스코의 생일이 같다는 발견!)


작가 앙리 보스코는 프랑스 작가이지만 원래 이탈리아 집안이다. 할아버지가 프랑스로 넘어와 정착하여 앙리 보스코는 프랑스에서 태어나고 자랐지만 후에 이탈리아에서 수학하기도 하고 프랑스와 이탈리아, 모로코에서 문학교사로 있으며 작품 활동을 하다가 57세때에는 창작에 전념하기 위해 교사직에서 은퇴한다. 모로코에서 거주한 기간이 24년. 꽤 오랜 기간이고 <반바지 당나귀>는 모로코에 거주하는 동안 연재 형식으로 발표한 작품이다. <반바지 당나귀>는 우리 나라에 처음엔 <반바지를 입은 당나귀>라는 제목으로 소개되었었고, 이 외에 <이아생트>, <아이와 강>, <말리크루아> 등이 국내에 소개되어 있다.

책 뒤의 작품해설을 읽어보니, 작가가 성경 내용을 배경으로 하여 그가 그리는 이상향은 어떤 곳이고 그런 곳을 추구하는 것이 곧 삶의 과정이고 핵심이었음을 말하고 있다는 정도를 겨우 끌어낸 나로선 짐작도 못한 해석과 의미가 달려 있었다.

술술 읽힌다고 후딱 한번 읽어선 얻어내기 어려운, 아직 캐내지 못한 뜻이 담겨 있는 듯 하다.


"살고 있다는 사실에 별로 경탄하지들 않는 것 같아요."

그분이 대답했다.

"자네 말이 맞네, 그리고 정말이지 이상한 일은, 죽는다는 일에는 다들 놀라워하지." (206쪽)

수수께끼 노인 시프리앵과 그가 유일하게 소통했던 신부와의 대화이다.

위의 대사는 시프리앵, 아래 대사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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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4-07-04 12: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이 삼부작의 첫권이라는데요, 두번째 이아생트, 세번째 이아생트의 정원, 모두 번역 출판했습니다. 저는 두번째가 가장 마음에 들었지만 함부로 추천하기는 쉽지 않군요.
상당히 몽상적인 작품이라서 말입죠.

hnine 2024-07-04 14:03   좋아요 0 | URL
그렇다더군요. 삼부작의 첫권이라는데 이 책과 많이 다를 것 같진 않아요 저도 몽상적인 작품 읽기가 쉽지 않아서요. 12살때 부터 시작하여 상도 많이 받은 작가이던데...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한 것에 비해 국내엔 많이 소개되지 않은 것 같죠?
 
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 - 경이로운 세계 속으로 숨어버린 한 남자의 이야기
패트릭 브링리 지음, 김희정.조현주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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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과 박물관에 대한 나의 관심과 끌림이 언제 시작되었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무슨 계기가 있었냐 하면 그것도 딱히 없다. 시작은 모를지라도 아마 본격적으로 가까워지게 된 계기는 나의 20대 후반 남의 나라 가서 혼자 지내는 몇년을 미술관과 박물관을 구경다니며 버틸 수 있었던 그 기간이 아닐까 싶다. 스스로 선택한 혼자의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고, 그럴수록 그 기간을, 나의 선택을, 잘 넘어가고 싶었다. 이 책에서 저자는 사랑하는 형을 먼저 저 세상으로 떠나보내고 갑자기 생겨버린 빈 자리에 익숙해지는데 자기만의 조용한 시간이 필요했고 그 시간을 미술관에서 일하며 갖기로 한다.

미술관에는 여러 직종이 모여있지만 저자가 지원한 직종은 경비원. 전시 미술품 옆에 서서 관람객으로부터 전시물을 보호하고 주의 시키는 임무를 하는 사람이다. 

경비원 동료들 사이에서 '아무 할 일도 없는데 하루 종일 걸려서 해야 하는 일'이 경비일이라고 농담을 할 정도로, 지루할 수도 있는 일이다. 관람객 대상으로 전시 해설을 하는 일도 아니고 기획자도 아니고 그저 경비 업무이니까. 하지만 책을 읽어나가면서 대번 느꼈다. 저자는 경비원이면서 동시에 미술관 관람객으로서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것을. 한 작품 앞에서 가장 오랜 시간을 두고 충분히 볼 수 있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이미 알려져 있는 다른 사람의 방식이 아니라 자기 눈으로, 자기 마음으로 감상해보려고 했다. 이것은 곧 자기의 세계를 잃지 않으려는 의지이기도 하다.


시간이 흐르면서 예술 작품을 감상하는 나만의 방식을 갖추게 됐다. 우선 작품에서 교과서를 쓰는 사람들이 솔깃해할 만한 대단한 특이점을 곧바로 찾아내고 싶은 유혹을 떨쳐낸다. 뚜렷한 특징들을 찾는데 정신을 팔면 작품의 나머지 대부분을 무시하기 십상이다. 

어느 예술과의 만남에서든 첫 단계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야 한다. 그저 지켜봐야 한다. 자신의 눈에게 작품의 모든 것을 흡수할 기회를 주는 것이다. 예술이 우리에게 힘을 발휘하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하다. (114쪽)


일주일, 혹은 수 주일 단위로 담당 구역이 바뀐다. 그럴 때마다 저자는 책의 한 챕터에서 새로운 챕터로 넘어가듯이 새로운 분야에 대해 감상할 수 있는 기회로 삼아 공부도 하고 자료 조사도 해가며 이해를 위한 노력의 시간으로 여긴다. 이슬람 전시관에서의 3개월 근무가 주어졌을때에는 이슬람 디자인에 대한 공부를 통해, 왜 이들의 디자인에서는 원과 분할, 반복에 의한 패턴이 생겨났는지, 그것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아낸다. 그것이 이슬람이라는 종교와 어떻게 연관이 되는지. 


전시된 초상화의 대상이 된 인물인 16세기 수피파의 더비시 (고행을 통해 수행하는 인물. 수도사와 비슷) 란 인물이 더 알고 싶어 그에 대한 문헌을 찾아보고 그가 남긴 다음과 같은 문장을 발견한다.


<그렇다면 나는 왜 내게 영혼을 준 것에 대해 하늘에 감사한 마음을 가져야 하는가? 바로 그 영혼을 고통스럽게 하는 슬픔의 원천을 하늘이 내 안에 만들었는데도.>


신을 모시는 입장에서 신을 향한 더비시의 이 비난에 얼마나 날이 서 있는지 믿기지 않아 저자는 문장을 두세 번 반복해서 읽었다고 했다.


초상화의 얼굴에서 이제야 발견한 침울함이 내가 고민하던 몇가지 질문들을 인간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해준다. 이렇게나 뚜렷하게 느껴지는 이 남자의 번뇌는 무엇이었을까? (218쪽)


그림을 보는 동안 우리가 보는 것은 그림이 하고 있는 말이다. 누구에게는 들리고 누구에게는 들리지 않을 수 있는 말이고, 들린다 할지라도 같은 말로 들리지 않을 수 있다. 나와 그림 사이에 다른 방식으로 교감이 형성된다. 그동안 인식 못하던 나의 번뇌와 의문점이 그림을 통해 발견되기도 한다. 그것이 그림을 보는 동안 일어나는 일이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경비원으로 있는 동료들 중 일부러 미술관 경비원이 된 괴짜는 저자 뿐이었다고 했다. 계획대로 되지 않는 인생. 하지만 지금 살고 있는 모습이 바로 삶 그 자체라는 걸 모두들 알고 있었을까.


사이먼은 교사가 되고 싶었다고 한다. 블레이크는 지질학을 전공했다. 루시는 시 전공으로 문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우리 네 사람의 삶이 정확히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에 대한 확신은 없다. 지금 바로 이 모습, 이것이 삶이라는 사실은 점점 분명해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231쪽)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경비원으로 일하고 있는 동안 저자에게는 아이가 태어나고 아내와 번갈아 육아를 시작하면서 지금까지와 또 다른 새로운 삶에 맞닥뜨린다. 7만 평이 넘는 미술관에서보다 20평 짜리 자기 아파트에서 할 일이 훨씬 많고 적응하기 힘들었다는 대목에서는 웃음이 나왔다. 그 20평 짜리 아파트에서 하는 일은 몇 시간을 일하든 무보수라는 것은 또 어떻고?


메트에서 일하기 시작한후 첫 몇 달을 돌이켜보면 내가 한때 날이면 날마나 말없이 뭔가를 지켜보기만 하는 상태를 그토록 오래 유지할 수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놀랍다. 아마 그것은 커다란 슬픔이 가진 힘을 잘 보여주는 사례일 것이다. 날마다 수많은 밀고 당기기를 해야 하는 요즘 같아서는 그렇게 뭔가에 집중해서 사는 삶을 상상하기가 힘들다. 이제는 더 이상 처음 미술관에서 일을 시작했을 때처럼 단순한 목표만 바라보지 않는다. 대신 살아나가야 할 삶이 있다. (269쪽)


눈 앞에 닥친 새로운 상황이 자연스럽게 저자의 삶의 목표를 바꾸어 놓는다. 그는 그렇게 상황에 적응할 줄 알았다. 다행스런 일이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저자가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그림으로 꼽은 것은 15세기 이탈리아 수사 프라 안젤리코의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라는 작품이라고 했는데, 놀라운 것은 그가 이 그림에서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의 모습에 집중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보고 있는 구경꾼 무리들에 주목을 했다는 것이다.


옷을 잘 갖춰 입은 사람, 말을 타고 있는 사람 등등 꽤 많은 구경꾼들의 얼굴에는 놀라우리만치 다양한 반응과 감정들이 떠올라 있다. 침통해하는 사람들, 호기심을 느끼는 사람들, 지루해하는 사람들, 심지어 다른 곳에 신경이 팔려 있는 사람들도 있다. (319쪽)


그리고 W.H.오든의 <미술관> 이라는 시에 나오는 한 구절을 떠올린다.

"끔찍한 순교"가 벌어지는 와중에도 "어떤 사람들은 음식을 먹고, 창문을 열고, 별 생각 없이 그 옆을 걸어간다."

라는.

그림 하단을 본다. 거기에는 수동적인 구경꾼들과 달리 슬픔에 겨워 쓰러진 어머니를 돌보는 연민 가득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자기가 따르고 싶은 모범이라고 했다. 


내 앞에 펼쳐진 삶에서 나를 필요로 하고 내가 필요한 경우들이 있을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다른 이들도 나를 위해 그렇게 해줄 것이라는 게 나의 희망이다. (320쪽)


이것이 그림에서 뽑아내는 통찰이고, 그림을 보는 이유이다. 


그냥 조용하게 책장을 넘겨가던 시작이, 이렇게 뿌듯한 마음으로 끝에 도달하게 할 줄은 몰랐다.

원제는 All the bueaty in the world

번역본의 우리 제목이 훨씬 인상적이다. 어떻게 이렇게 제목을 달 생각을 했는지.


얼마전 모 박물관의 자원봉사에 지원했다가 떨어진 일이 있다. 전시해설 자원봉사였다. 아무리 자원봉사라고 해도 전시해설이라면 함부로 지원할 일이 아니었는데 차라리 떨어지길 잘했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저자 처럼 경비 자원봉사라면 해 볼 수 있을까, 잠시 다시 꿈꾸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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