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운이의 일기 

  

어제 점심시간, 일찍 도시락을 먹고 운동장에서 미수와 농구 슈팅 연습을 했다. 키가 좀 더 컸더라면 더 잘 할 수 있을텐데. 평소에 나보다 체육을 더 잘하는 편도 아닌 미수가 훨씬 골을 잘 넣는 것을 보니 미수의 큰 키가 부러웠다. 엄마한테 농구 공을 하나 사달래서 집 앞 체육 공우너에 가서 혼자 연습을 해야겠다고 마음 먹으며 수돗가로 가는데, 저 앞에 영빈이와 호란이가 함께 걸어가는 것이 보였다. 둘이 무슨 얘기인가를 나누며 가고 있는데 무척 다정해보였다. 그러고보니 요즘 부쩍 영빈과 호란이 함께 다니는 모습을 자주 본 것 같기도 하다. 모르던 애들은 아니지만 그렇게까지 친한 편도 아니었는데, 같은 반도 아니면서 저렇게 붙어다니는 이유가 뭔지 모르겠다.  
옆에서 얼굴의 땀을 물로 씻고 있는 미수에게 물었다.
"영빈이랑 호란이가 요즘 같이 다니는 걸 자주 보지 않니?"
"걔네 영어 원어민 과외 같이 한다지 아마."
"그래?"
"응, 캐나다에서 오신 선생님인데 강남의 학원에서 유명한 선생님인데 호란이네 엄마가 특별히 부탁해서 일주일에 두번씩 오신대. 영빈이랑 호란이 둘 만 하는 과외래."
"그래서 둘이 친해졌나보구나."
둘이서 학교 끝나고도 일주일에 두번은 함께 공부한단 말에, 그게 무슨 과외였던간에기분이 그리 좋지 않았다. 저러다가 영빈이가 호란이와 아주 친해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자 그렇게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갑자기 들면서 가만 있을 수 없다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나도 영빈이와 친해질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퇴근하신 엄마를 보자마자 말했다.
"엄마, 나도 영어 공부 하고 싶어요."
"갑자기 영어 공부는 왜? 하면 좋지. 하려므나."
공부하겠다는 데 말릴 엄마가 아니다.
"아빠한테 새운이도 영어 공부하고 싶어한다고 말씀드리지 뭐."
"난 영어 말하기 공부를 하고 싶어요, 엄마. 진짜 영어를 하는 원어민 선생님한테 배우는 영어 말하기요. 그래서 제가 다 알아봤어요."
"알아보다니 뭘?"
"작년에 우리 반이었던 영빈이가 아주 잘 가르치시는 선생님에게서 영어 공부를 한대요. 저도 그 선생님한테 배울래요."
"아빠가 영어 선생님인데 굳이 다른 선생님한테 배울 필요가 있니?"
"아빠가 가르쳐주시는 영어는 좀 어렵단말예요. 그건 중학교 올라가면서 하고 지금은 영어말하기부터 할래요. 언니도 아빠한테 중학교 가면서부터 배우기 시작했잖아요."
학교에서 집이 오며 내내 생각했던 것을 엄마에게 쉴틈도 없이 말씀드리고 나자 속이 시원했다.
"아빠한테 상의좀 해보고."
영빈이와 친해질 수 있는 방법으로 내가 선택한 것은 바로 나도 호란이처럼 영빈이와 함께 공부를 하는 것이었다. 아빠께서 꼭 허락을 하셔야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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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틸이미지

 

며칠 전에 오랜 만에 영화 '원 위크'를 보고나서 올린 페이퍼에, 좀 더 가슴이 따뜻해지는 영화가 보고 싶다고 썼었다. 바로 이런 영화였다.
어제 밤, 다림질하는 동안 켠 TV의 EBS 채널에서 마침 영화를 하고 있길래 무슨 영화인지도 모르고 보기 시작했다. 나중에 자막이 나오는데 보니 주말에 하는 세계의 명화 시리즈로서 영화 제목은 '스트레이트 스토리 (The Straight story)'란다. 처음 보기 시작한 장면은 이웃 노인이 주인공 노인인 앨빈 스트레이트 집에 무슨 일이 있나 찾아 오는 장면이었는데 나는 무슨 다큐멘타리 프로그램인 줄 알았다. 영화로 만들어지기 위해 카메라 앞에서 연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어느 마을의 평범한 주민들이 그냥 자기 일상을 살고 있는 듯한 모습때문이었다. 곧 앨빈의 딸 로즈 역의 낯익은 배우 씨씨 스펙을 보고서 영화인 줄 알아차렸다. 

프랑스, 영국, 미국 합작 영화로서 데이빗 린치 감독 작품이고, 2001년 개봉되었다.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고 한다. 일흔 세살의 노인 앨빈은 아이오와 주의 시골 마을에서 어눌한 딸 로즈와 함께 살아가고 있다. 의사로부터 건강이 몹시 안좋다는 말을 듣고 그는 살 날이 얼마 안남았다고 생각했는지 잔디깎기 기계에 트랙터를 매달고는 10년 전에 다툰 후 왕래를 안하고 있던 형을 만나러 위스컨신 주 까지 길을 떠나겠다고 한다. 자동차로 가는 것도 아니고, 건강도 안 좋은 그가 그런 행색을 하고서 하루 이틀 걸리는 것도 아닌 길을 떠나겠다고 하자 주위의 모든 사람이 말렸지만 노인은 끝까지 뜻을 굽히지 않는다. 그의 이름처럼 (go) straight 이라고나 할까.

 

스틸이미지 

 

스틸이미지 

 

말이 별로 많지 않은 노인이 주인공이다보니 대사가 그리 많지 않았지만, 그 많지 않은 대사로 그는 짧지 않은 세월 그가 살아온 인생의 굴곡과 깨달음, 믿음을 대사보다 더한 깊이로 전해주고 있었다. 

스틸이미지 

천둥치고 비오는 어느 날, 나란히 앉아  창 밖을 바라보고 있는 부녀.
노인이 자기는 천둥치는 날이 참 좋다고 말한다. 딱 그 한마디 뿐.

 

스틸이미지 

이 배우는 대사로 연기하지도, 풍부한 표정 변화로 연기하지도 않았다. 어떻게 이렇게 연기를 할 수 있을까 감탄할 정도로, 그 깊은 눈빛, 그리고 아주 미세한 얼굴 근육의 움직임을 통해, 보는 사람이 그의 마음을 읽어낼 수 있게 하였다. 웃고 있는지 찡그리고 있는지 언뜻 구분이 안되는 표정, 지병으로 거동이 불편한 몸 동작, 조용조용하지만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는 고집.  

핏줄이란, 가족이란 무엇인가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해준 영화이다. 생을 마치기 전에 꼭 해결해야 할 일인 듯 무리를 하면서까지 남은 혈육을 찾아 떠나게 하는 그것.
누구의 도움도 필요 없이 꼭 혼자 해내고 싶어하던 그의  긴 여정 끝에, 마침내 물어 물어 형의 집을 찾아 형을 만나서도 서로의 이름을 확인하고는 그저 쓰러져가는 집 앞의 의자에 별 말 없이 나란히 앉아 서로의 존재에 기뻐 눈물을 흘리고 흐뭇해하기만 한다. 
인간이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게 되는 최종적인 근원지, 가족이란, 핏줄이란, 바로 그런 것 아닐지. 

 

  

(영화 사진은 네이버에서 퍼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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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9-10-12 0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따뜻한 영화 같아요.
저 노배우의 눈빛이 무척 깊어보여요. 노배우들은 확실히 그런 것 같아요.
나인님 말씀대로 그렇게, 눈빛과 얼굴의 미세한 근육, 목소리 그런 것으로 말해요.

hnine 2009-10-12 05:13   좋아요 0 | URL
보려고 본 영화도 아니고, 다림질 하는 동안 심심해서 본 영화인데 참 좋았어요. 어떤 식으로든 파격이나 충격 없이는 감동도 없다는 강박관념이 있는 듯한 요즘 영화들에 조금 몸을 사리고 있었는데, 오랜 만에 마음 놓고 푹 빠져서 본 영화네요.
이 영화 마지막도 원 위크에서처럼 책이 나오는 장면으로 끝나요.

혜덕화 2009-10-12 19: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어제 ebs에서 "사랑을 위하여"라는 영화를 봤어요.
케빈 코스트너가 주연인데- 배우이름이 맞는지 모르겠어요.- 야구장에서의 게임과 인생을 엇갈려서 보여주는데 참 감동적이었답니다.
은퇴를 앞둔 마지막 게임에서 퍼펙트게임으로 이기는데도 주인공이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 무척 공감 되었답니다. 무엇을 이루든, 사랑하는 사람이 없다면 의미가 없다는 것을 깊이 느끼게 해주는 영화였어요.
나인님.
사경은 잘 되어가시는지요?
행복한 가을 되시기 바랍니다.

hnine 2009-10-13 05:46   좋아요 0 | URL
혜덕화님, 안그래도 어제 '슬픔'이란 글 올리신 것 보고 저도 마음이 뭉클하고 뭐라 드릴 말씀이 없어 조용히 추천만 누르고 나왔더랬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제 서재를 찾아주셨네요. 이 영화를 보며 우리에게 형제, 자매의 의미, 소중함을 다시 생각했었어요. 어떤 성공도 함께 그 기쁨을 나눠줄 사람이 없다면 의미가 없다는 말씀 공감합니다. 인간은 강한 듯 하지만 결국 이렇게 약하고 의지가 필요한 존재이어요.
'사랑을 위하여'는 제목이 비슷하여 예전에 제가 본 영화인가 했는데 쓰신 내용을 보니 안본 영화군요. 기회가 되면 저도 한번 봐야겠어요.
사경은 어머니의 당부이시다보니 매일 하고있기는 해요.
가을, 아직 내 옆에 있는 가족들을 생각해서 너무 쓸쓸해하지 말고 잘 보내기로 해요.
 

 

지난 여름 방학 동안 아이 데리고서 같이 볼수 있는 영화는 거의 다 섭렵하고 다닌 이후,
정말 오랜 만에 영화를 보았다.  아래의 이 영화.

 



 

 

 

 

 

 

 

 

 

 

 

 

말기 암으로 시한부 선고를 받으며 남자가 제일 먼저 떠올린 생각은, 결혼을 취소해야겠다는 것과 영어 시험 답안지 채점을 안해도 되겠다는 것.
당장 치료받는 일부터 시작하자는 약혼녀의 말을 뒤로 하고 남자는 오토바이를 타고 혼자서 캐나다 횡단 여행에 들어간다. 유명한 관광 포인트마다 들려서 사진도 찍고 이런 저런 사람들과도 마주 치면서.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그에게 제일 절실했던 것은, 당장 암환자가 되어 희망도 불투명한 독한 치료를 받는 것이 아니라, 혼자만의 시간 이었나 보다. 죽음을 가까이 둔 사람의 눈에 보이는 세상은 그 이전과 달랐다. 당연하게 생각하던 것들이 당연하지 않은 것이 많았다. 그렇게 보낸 남자의 일주일을 그린 영화이다.
 

무거울 수 있는 내용을, 그리 무겁지도, 그리 가볍지도 않게 그려놓았다. 
영화에서처럼 그렇게만 죽음을 받아들일 수만 있어도 얼마나 좋을까. 그리 무겁지도, 그리 가볍지도 않게 말이다. 생각을 정리하는데 겨우 일주일이라는 시간으로 충분하다면 말이다. 

소극장이라서, 지난 번 여름에 갔을 때에는 냉방시설이 신통치 않아 옆에 앉은 아이에게 수시로 부채질을 해줘가며 영화를 보았었는데, 오늘은 옷을 얇게 입고 간 때문인지 으슬으슬해서, 들고 간 캔버스 천 가방을 가슴에 꼭 끌어안고 봐야했다.  

 

(솔직히 말하면 이런 영화 말고,
좀 웃을 수 있는 영화 없냐고요.
그야말로 가슴이 따뜻해지는,
인생은 아름답다고 팍팍 느끼게 해주는,
그런 영화가 필요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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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09-10-09 2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은 종영했겠지만 <국가대표>도 괜찮던데...
<정승필 실종사건>도 좋을 것 같구요.
일본 영화 같네요. 멋있을 것 같은데...흠.

hnine 2009-10-11 05:43   좋아요 0 | URL
국가대표, 저희 동네에선 아직 하는군요.
정승필 실종 사건은 우리 영화인데, stella님 댓글보고 얼른 가서 알아봤더니, 아니 이거 본 사람들 평점이 왜 이리 안 좋은가요, 오히려 저라도 가서 봐주어야 하는 거 아닌지 ㅋㅋ

같은하늘 2009-10-10 1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와 함께 영화를 많이 보셨다니 1학년 저희 아이와 볼 만한 영화 추천좀 부탁드려요~~
전 극장에 가본지 너무 오래되서 이제 좀 가볼까 한답니다.^^

hnine 2009-10-10 17:19   좋아요 0 | URL
지난 여름 방학때 보러 다녔으니 그 영화들은 이미 종영한지 오래이고, 요즘은 아이들과 볼 영화들 마땅한 것이 없더라구요.

세실 2009-10-10 15: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최근에 본 '내사랑 내곁에'도 참 칙칙했습니다.
저두 가슴이 따뜻해지는 영화 그리워요. '오만과 편견' 같은 영화~~~

hnine 2009-10-10 17:20   좋아요 0 | URL
세실님, 요즘 우리 마음이 시려운가봐요, 그치요? ^^

프레이야 2009-10-12 02: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호우시절, 권해드리고 싶어요.
참 맑고 담백하게 그린 영화에요.
이번엔 허진호 감독 무척 맘에 들었어요.
지난번 '행복'에 실망했거든요. 그렇게 질질 짜고 청승 부리는 게
마뜩지 않아서요.

근데, 참, 원위크, 마지막에 책이 나오던 장면은 맘에 들었어요.
살면서 쉽게 포기해버렸던 것들을 되살려 성공(주관적정서로)으로 이끈 점,
그게 맘에 들었어요. 아직 뭔가 포기하기엔 이른 것이겠죠, 우리도.

hnine 2009-10-12 05:14   좋아요 0 | URL
아, 권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호우시절 봐야겠어요.
 
나쁜 피 민음 경장편 1
김이설 지음 / 민음사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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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을 하면서 학생들에게 가끔 묻는다. A형과 B형, O형, AB형 이렇게 분류되는 피는 과연 무슨 차이가 있을까요 하고.

'나쁜 피'. 이 제목에서의 피는 절망적이고 암담한 가족사를 의미하는 것일텐데, 무슨 의미이건 '피'라는 단어는 일단 긴장을 주고 이목을 끈다. 이 소설의 내용을 한 마디로 잘 나타내주고 있지 않나 생각 된다.
여러 인물들이 등장하고 그 대부분의 등장 인물들이 이렇게 저렇게 혈연으로 얽히고 섥힌 관계이지만 혈연이기 때문에 지켜져야 할 것들이 무참히 깨어지는 패륜이 대를 이어 계속되어 가는 내용으로 말미암아, 읽기 시작하여 마지막 페이지에 이를 때 까지 다른 일에 몰두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이건 분명히 인간이 보여줄 수 있는 어떤 악한 면의 일색인 스토리임에도, 읽어가면서 참 이상한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각 등장 인물들에 대해 이유를 알 수 없는 애틋한 감정이 생겨나는 것이다. 동정이라고 해야하나, 측은지심이라고 해야하나. 이유가 무엇일까? 사실 이 소설의 대강의 줄거리를 처음 대했을 때, 혹시 비극적인 가족사를 내세워 읽는 사람에게 충격인지 재미인지 감동인지 모를 그런 애매한 감상만 남겨주는 그런 내용인 것은 아닐까 염려도 했었다. 요즘 워낙 그런 류의, 나같이 평범한 상상력을 지닌 사람에게 지나친 충격외엔 아무것도 주지 않는, 영화나 소설들이 많이 나오고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굳이 그런 것을을 읽거나 보지 않으려고 하는 편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소설의 인물들에게 생기는 이 감정은 무엇이란 말인가. 주인공 화숙 부터 그렇다. 정신 지체인 엄마, 외삼촌의 불륜, 이 남자 저 남자에게 아무 힘 없이 당하는 엄마를 보며 자란 어린 시절 등으로, 상처를 입을 대로 입고, 깊어질 대로 깊어진 사람이다. 자신이 입은 그 상처의 보복으로서 또 하나의 인물인 수연을 대상으로 일부러 고통과 상처를 입히고. 수연의 핏줄인 어린 혜주는 말을 잃는다. 이렇게 나쁜 피, 즉 가족의 운명은 대물림을 하는 것인지.

저자는 이 소설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좋든 싫든 운명을 공유할 수 밖에 없는, 운명이 공유될 수 밖에 없는 '가족' 이라는 것의 의미를 다시 되짚어서 보여주고 싶었던 것일까? 21세기가 되어서도 우리는 그 가족이라는 운명공동체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라고. 그 관계가 얼마나 끈끈하게 이어져 있든 그렇지 않든 우리가 태어난 이상 핏줄로 얽힌 관계도 함께 탄생하는 것이기 때문에 말이다. 여러 인물들이 각자의 사연을 가지고 등장함에도 그 관계들이 잘 얽혀들어가며 이야기가 전개되어 자연스럽게 읽혀질 수 있었던 것은 작가의 노고, 그리고 역량이라고 본다. 인물들의 심리를 직접적으로 설명하지 않으면서 읽는 사람이 충분히 느낄 수 있도록 쓰는 것 역시.
다만, 후반부에서 수연의 연인인 재형이 그동안 수연을 상습적으로 구타해온 것으로 설정한 것과, 수연의 마지막 극단적인 행동은, 그녀의 무기력과 나쁜 운명을 강조하며 마무리 하기 위한 약간의 무리한 설정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내가 문학평론을 하는 사람도 아니고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느낌이다.

책 속의 소개글에 써있기를, '박완서와 이혜경과 신경숙의 뒤를 잇는' 이라고 나와 있는데, 이 세분 작가와는 또 다른 그녀의 분위기가 있다고 생각된다. 한 작품을 읽어보고 나서 말할 수 있는 사항은 아니지만 말이다. 나는 오히려 읽으면서 이 현수 작가의 작품을 자주 떠올렸다. 이 현수 작가의 글 보다는 덜 감상적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
글은 아무나 쓰는 것이 아니구나, 즉 쉽게 쓰여지는 것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을 새삼 하게 된 것은 이 소설이 아주 긴 장편은 아님에도 작가가 참 공들여 구성하고 써나갔다는 느낌을 받아서이다.
다음 작품에도 기꺼이 기대를 걸어본다. 

 

(오자 신고:  95쪽 여섯째 줄의 '적인' 은 '적힌'의 잘못된 표기인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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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실 2009-10-07 14: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읽으면서 글쓰기의 위대함이랄까? 어려움 새삼 느꼈습니다.

hnine 2009-10-07 18:57   좋아요 0 | URL
모든 일이 그렇겠지만, 갈고 닦는 수련의 기간이 필요하겠지요.
전 이 책, 생각하던 것 보다도 더 좋았습니다.
올해 동인문학상 후보로 올라있는 것 같던데...

2009-10-08 01: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10-08 18: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나는 런던의 수학선생님 - 런던 아줌마 김은영의 페어플레이한 영국도전
김은영 지음 / 브레인스토어 / 2009년 3월
평점 :
절판


저자의 약력을 보자. 한국의 대학에서 수학을 전공했으나 영어에 관심이 많았던 듯 하다. 통역대학원 시험을 여러번 응시했었다는 것을 보면. 결국 통역대학원에 진학은 못했지만 통역관련일로 회사에 근무하던 중 영국에서 한국으로 파견나와있는 지금의 영국인 남편을 만나 결혼, 영국으로 이주한다. 영국에 가서 그동안의 영어 실력을 바탕으로 다시 자신의 원래 전공을 살려 영국의 대학에서 수학과 학부과정, 그리고 PGCE (Post Graduate Certificate of Education), 즉 대학원 수업과 실습을 병행하는 1년 코스를 마치고, 보조 교사 과정을 거쳐 중학교 수학 교사가 된다. 그러면서 아이도 낳아 키우고.
2002년에 영국으로 이주하여 그동안 그녀가 경험한 이야기 속에는 영국의 교육 제도, 영국이라는 나라의 문화와 사람들의 살아가는 방식, 그리고 영국에서 아이 키우는 이야기등, 나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하길래 읽어보게 되었다.
그녀의 경력에서도 엿보이듯이 작은 체구이지만 소신있게 선택, 결정하고, 그 자리에 안주하지 않으며 자기 개발을 위해 한시도 쉼없이 정진하고자 하는 삶에 대한 에너지가 느껴졌다. 글도 꽤 꼼꼼하게 비교하여 쓴 내용들이 많았고, 경험을 바탕으로 한 자신의 생각을 주관있게 펼쳐나갔다.
영국의 모든 제도가 우리 나라에 비해 좋다, 혹은 나쁘다 식으로 단정짓지 않고 객관성을 지키려 한 점도 마음에 들었다.
이론에만 치우치는 것이 아니라 실습을 병행시키며, 교사가 학생 개개인의 가정 생활이나 특수 상황 등을 일일이 신경쓰며 배려해주는 분위기, 교사로 하여금 학생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것 조차도 허용하지 않음으로써 신체적인 벌칙이나 불미스러운 일을 미리 방지하자는 방침, 안전에 대해 지나치다 싶을 만큼 신경쓰는 것 등, 우리 나라와 다른 점을 조목조목 잘 짚어 놓았다. 학제부터 우리와는 많이 다른 영국이 아니던가. 실습을 중시한다는 것은 영국에서 대학 2년을 마치면 1년은 학교를 떠나 현장 실습 기간으로 하는 것을 보며 익히 짐작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비단 학부과정에서뿐만 아니라 대학원 과정에서도 그렇고, 보조 교사 기간을 따로 두어 충분한 실습을 경험하게 한 후 다시 자격 시험을 통과한 후에야 정식 교사가 되게 하는 제도에서도 엿볼 수 있었다. 또한 영국은 멘토 제도가 활성화 되어 있는 나라이다. 저자가 보조 교사 수습 기간을 밟을 때에도 그 학교에서 그녀를 위한 멘토를 지정받아 그녀가 학교에서 겪는 모든 일들에 관심을 가지고 지도하여 주었다고 한다.
영국의 교육 제도를 말하면서 저자가 가장 흥분하며 우리 나라의 교육 제도에 대해 비판 했던 것은 과중한 학습량도, 지난친 사교육에 대한 것이 아니었다. 공부를 못하면 사람 대접 못 받는 사회 분위기, 그것도 둘째 사항이었고, 문제는 열 몇살에 문과, 이과 나누는 것으로 시작해서 아직 미래에 대해 정확하게 고민하고 설계할 수 있는 능력이 부족할 시기에 벌써 진로를 정해야 하고, 한번 진로를 정하면 거기서 그 방향을 수정하기가 너무나 어려운 우리 나라의 교육 제도, 그것이었다. 열 몇 과목을 하루에 다 치뤄서 그 점수 가지고 대학엘 가야하는 대학 입학 시험에 대해 말하자 그 말을 들은 영국 사람들은 믿기 어렵다는 표정을 지었다고 한다. 모든 학생들이 열 몇 과목을 전부 시험 과목으로 공부를 해야한다는 것도 이해가 어렵거니와 하루에 몽땅 시험을 봐버리면 혹시 그날 몸이 아프거나 컨디션이 좋지 않아 실력 발휘를 못하는 경우라면? 하면서 말이다. 이렇게 대학엘 들어가고 나니 대학생들은 졸업할 무렵이 되어 다시 고민에 빠진다. 이제 무엇을 해야하나, 내가 좋아하는 일은 무엇일까 하고 말이다. 이게 무슨 시간과 인력의 낭비인지. 내가 평소에 하던 생각과 같아서 무척 공감이 하며 읽었다.
영국의 의료 제도에 대해서도 재미있게 읽었는데, 영국의 의료 제도는 전국민 무료를 원칙으로 하고 있다. 그래서 병원에 수납창구가 없다. 거기까지는 좋은데, 그렇다 보니 제대로 한번 진찰 받고 치료 받기 위해 소요되는 시간이 우리 나라에서는 상상도 못할 정도로 길다는 것이다. 또한 연봉 4,000만원 정도 되는 사람이라면 한달에 의료보험비가 20만원이 넘는다니, 무료가 사실 따지고 보면 무료가 아닌 것이다. 대신 집 없고, 소득이 없는 사람이 아플 경우 결코 돈이 없어서 병원 문 앞에도 못가보는 일은 없다고 한다. 다른 세금과 마찬가지로 의료 보험 제도도 역시,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에게도 공평하게 기회가 돌아가도록 하는 것에 촛점을 둔다는 것이다. 그 정도로 형편이 어렵지는 않은 사람들에게 부담이 좀 되더라도 말이다.
영국의 고질병, 절대 버리지 않는 것이란다. 이 대목을 읽으며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앞으로 전혀 쓸 일이 없는 물건 조차 꽁꽁 싸놓고 절대 버리지를 않는단다. 침대를 주문하고서 도착하기까지 몇달을 기다려야 하는 것을 참다 못해 집에서 문짝 가지고 침대를 직접 만들어서 사용했다는 얘기도. 그러니까 한국이 그리운 경우도 많다는 것이다.
읽으며 제일 부러웠던 것은 역시 육아 제도. 영국에서는 아이를 봐주는 사람을 childminder 라고 하는데, 우리 나라 처럼 이웃에서 알음 알음으로 구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에서 교육을 받고 정식 직업으로 등록되어 있어  세금까지 내는 사람들이 childminder 라고 한다. 아이가 학교 또는 유치원에서 끝날 무렵이면 가서 아이를 자기 집으로 데리고 와서 먹여 주고, 숙제도 봐주고, 함께 놀이도 하다가, 5~6시 쯤 부모가 퇴근하면서 집으로 데리고 가는데, 나라에서 가끔 childminder집을 방문하여 안전 시설이라든가, 아이를 제대로 돌보고 있는지를 조사까지 한다고 하니. 이건 확실히 영국이 우리 보다 낫지 않은가? 하긴, 육아 정책에 있어 우리 나라보다 낫지 않은 나라가 몇이나 될까.

얄팍한 두께에, 별 기대를 안하고 읽기 시작했는데, 꽤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던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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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섬 2009-10-07 0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와는 너무도 다른 세상이에요.

hnine 2009-10-07 11:52   좋아요 0 | URL
영국이라고 다 좋은 것은 아니더라구요. 하지만 육아 정책에 있어서만큼은 우리 나라가 확실히 많이 뒤쳐져있음은 분명한 것 같아요.

같은하늘 2009-10-07 13: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쓴분의 이력도 눈에 들어오고 영국의 사는 모습을 살짝 엿보니 완전 딴 세상이군요.

hnine 2009-10-07 18:58   좋아요 0 | URL
우리와 정말 많이 다르지요. 그런데 생각해보니 비슷한 점도 있어요. 영국 사람들도 '체면' 중요시하고, 모르는 사람에게 먼저 말 시키는 것 잘 못하고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