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추석 차례상엔 내가 직접 만든 송편을 놓지 못하고 말았다. 쌀가루 빻아 오고, 송편 속 만들고 하려면 좀 미리부터 준비했어야 하는데 내가 그럴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남편에게 양해를 구하고 만들어놓은 송편을 샀다. 송편을 사면서 식혜도 사자고 했다. 식혜를 매번 실패하기 때문이다. 친정에서 빌려온 전기밥솥을 이용했을 때엔 정말 쉽게 잘 되던 것이, 전기밥솥 없이 온도를 짐작으로 맞춰 하려니 매번 실패하는 것이다. 그런데 남편이 식혜를 사는 것은 반대란다. 내가 안하면 자기라도 하겠다면서. 내가 '안하겠다'는 것이 아니었는데.
추석, 어머님 기일, 아버님 기일, 그리고 설. 이렇게 일년에 네 번 상을 준비하는데 이젠 많이 익숙해져서 혼자 준비하면서도 별 스트레스 없이 한다. 더구나 이번 추석엔 날씨도 좋았고, 산소 가는 동안 황금색으로 익어가는 벼 구경을 제대로 할 수 있어 그것도 좋았다. 수고했다는 남편의 말 같은 것은 이제 기대도 안하고, 없이도 살 수 있다.
물론 가족들이 모인 자리에서 잠깐씩 내 마음을 서운하게 했던 일, 그리고 말들이 오가지 않았던 것은 아니나, 나도 이제 웬만한 정도는 내색 안하고 넘어갈 수 있을 정도는 되었으니까. 아파트 경비 아저씨 두분께 작년 까지는 선물로 드렸었는데 현금을 제일 좋아하신다는 말을 어디서 듣고는 올해는 현금을 준비해서 봉투에 넣어 드렸다. 추석 때 여기 저기서 들어온 선물들은 추석날 동서와 나눠가지고, 와인과 홍삼은 그냥 포장 째 들려 보냈다.
추석을 무사히 잘 보내고 난 그날 저녁, 추석과 무관한 다른 작은 일로 남편에게 서운해져서는 어제 낮엔 12시까지 누워있었다. 그냥 다 귀찮았다. 냉장고에 먹을 것도 그득하겠다, 밥상 차리는 일에도 손을 놓았다. 그러기로 작정하고 나니 하루가 얼마나 여유롭던지. 하루 종일 그야말로 방콕 하면서 덕분에 밀린 책 다 읽고 다음 날 수업 준비도 다 했다.
오늘 오전, 수업하러 집을 나서면서 생각했다.
'대단한 일은 아닐지라도, 집안 일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는 나의 일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나를 살리는구나.'
열심히 강의하고, 학생들의 질문에 최선을 다해 대답해주고, 그러고 나오는데 기분이 조금 나아져 있었다.
연휴 끝에 출근하는 발걸음이 어떤지 나도 경험해보아 모르는 바 아니지만, 그렇게 연휴를 마무리 하고 생각을 돌릴 수 있는 나의 일이 있다는 것이 다행스럽게 생각될 때도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던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