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루 청소를 하는 동안 잠시 TV를 켰더니, 치유로서의 그림 감상이라는 주제로 책을 내오고 있는 어느 저자를 인터뷰하는 프로그램이 방송되고 있었다.
미술 치료란 어떤 사람으로 하여금 직접 그림을 그려보게 하여 그 그림으로부터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그 사람의 어떤 내면을 찾아내는 것이라면, 치유로서의 그림 감상이란 꼭 어디에 문제가 있는지 찾아내어 풀어주기 위함이라기 보다, 그저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위로가 필요하고 지친 마음을 다른 사람들의 그림을 보면서 위로 받고 격려를 받는, 즉 스스로를 일으켜세우는데 도움이 되는 방법에 해당한다고 저자가 뜻을 분명히 구별해준다. '치료'와 '치유'란 그렇게 다른 것이구나, 손으로는 걸레질을 하느라 처음부터 끝까지 집중해서 시청하진 못했지만 귀로 들어오는 말들이 있었다.
그러고 보니 '마음의 치유'라는 말은 현대에 와서 많이 듣게 되는 주제 중의 하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의 치유를 위한 그림, 마음의 치유를 위한 음악, 그리고 마음의 치유를 위한 책읽기에 이르기까지. 도대체 우리는 언제부터 이렇게 치유가 필요한 상태로 살아오게 되었단말인가.
어떤 의미에서 보면 우린 모두 경증의 환자인 것이다. 치유가 필요하고, 위로가 필요한.
왜일까. 왜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자기도 알게 모르게 상처를 입고, 또 상처 입었다고 생각하며 힘들어하고, 치유될 방법을 찾아 그림을 보고, 음악을 듣고, 책을 찾는 것일까.
그러던 중 언젠가 사회학 수업시간에 들은 '소외'라는 말이 떠올랐다. 관계가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alienation 이라고 했던가? 아마 Durkeim 의 자살에 대한 이론을 배우며 들었던 것 같은데, 자그마치 20년 전에 교양으로 들은 수업이었으니.
아주 마음을 잘 다스리는 사람, 쉽게 말하면 도 통한 사람이던가, 아니면 그야말로 단순 무식하던가,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모두 치유가 필요한 상태로 살아갈 수 밖에 없는지도 모르겠다. 이도 저도 아닌 나 같은 사람은 특히 더.
소외라든가 치유가 필요한 마음의 상처 등은 모두 나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비롯되는 것임은 분명하니, 내 마음 살핌과 동시에, 다른 사람 마음에 상처 주는 일도 없이 살고 싶은데 내가 과연 그런 말 할 자격이 되는 사람인지,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고 끊이질 않는다.
그러게, 걸레질 할 때에는 걸레질만 할 일이다. 괜한 TV는 왜 틀어가지고는.
그래도 스스로를 치유하고자 이것 저것 찾는 상태만 되어도 그리 심각한 상태는 아니지, 거기까지 생각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