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 좋은 토요일,
무료하게 집에만 있던 아이에게
여기 저기 대면서 나가자고 해도 싫단다.
이미 질리도록 많이 가보았던 만만한 곳만 내가 댔으므로.
나중엔 내가 답답해서 먼저 나섰더니
어디 가는지 묻지도 않고 따라나서는 아이. 

'어디 특별히 가려는게 아냐.
아무 목적 없이 집을 나서볼 때도 있어야 한단 말이지.
나서서 걷다 보면 나무도, 태양도, 길도, 사람도 눈에 들어오거든.
평상시에 지나치면서 그냥 보이는대로 보는 것 말고, 일부러 대상으로서 보는 것 말야.'

 




 

 

 

 

 

 

 

 

 

 

 

 

 

 

 

 

 

어슬렁 거리다가 동네 놀이터로 발길이 갔다.
우리 아이보다 훨씬 어린 꼬마들이 맨발인 채로 놀고 있었다. 

그 중에 한 아이에게 내가 먼저 말을 걸었다.
(나)             "와, 너 몇살인데 미끄럼틀을 그렇게 잘 올라가니?"
(동네 아이)   "나요? 다섯살이요. 나 덤블링도 할수 있는데요? 해볼까요?"
(나)             "정말? 와, 한번 해볼래?"
그걸 아이 말 대로 덤블링이라고 하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지만, 두 손으로 땅 바닥을 집고 거꾸로 뱅그르 돌아서 다시 제자리에 서는 방법이었다.
(나)             "와~ 진짜 잘한다. 어디서 배웠어?"
아이가 딩동댕 번개 어쩌구 라고 하는데 나는 처음에 무슨 소리인지 잘 못 알아들었다. 번개교실이라는 줄 알고,
(나)             "번개교실에서 배웠어?"
(동네 아이)   "딩동댕 번개맨이 하는 것 보고 나 혼자 따라해본거예요."

다섯 살 녀석이 아주 말을 잘 한다. 예전에 나 어릴 때 TV에서 하던 만화 영화 <요술 공주 새리>에 나오던 새리의 친구 콩순이였나? 그 콩순이의 세쌍동이 남동생들 처럼 생겼다. 적은 머리 숱에 앞짱구, 뒷짱구.
(동네 아이)   " 저 형은 몇살이어요?"
우리 집 아이를 가리키며 아이가 묻길래 아홉살이라고 했더니,
(동네 아이)   "으아~ 아홉살!"
이 아이에게는 아홉살이 아주 많은 나이인거다 ㅋㅋ

그 아이를 계속 보고 있던 중, 놀이 기구 위에서 발을 잠깐 잘못 디디는 것을 보고, 떨어지는 줄 알고 나도 모르게 "어!" 그랬더니 요 녀석 하는 말,
(동네 아이)     "아줌마, 놀랬어요?"
(나)               "응!"
(동네 아이)     "나 떨어지는 줄 알고요?" 
ㅋㅋ 

어릴 때엔 저렇게 처음 보는 사람하고도 말을 잘 하나보다. 낯을 가리지 않는다는 것이겠지.
그러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점차 이것 저것 가리는 것이 생기게 된다. 일부러 의식하고 노력하지 않으면 나이들어가면서 가리는 것이 점점 더 많아진다. 아이 때보다 아는 것이 더 많아지는 것 같지만 마음은 더 편협해지는지도 모르겠다. 

아이가 피아노 레슨 갈 시간이 되어 집으로 돌아오는 길.
하늘은 더할 수 없이 푸르고,
아파트 앞 감나무에는 감이 초록과 주황색이 어우러져 익어가고 있었다. 
놀이터에서 잠깐 놀았는데도 얼굴이 땀 범벅이 된 아이에게 말했다.
"다린아, 밖에 나와보니 좋지?"
"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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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양물감 2009-09-19 22: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솔이는 오늘 아빠따라 밖에 나갔다가 눈물범벅이 되어 들어왔더라구요. 학교운동장에 갔는데, 아이들이 한솔이가 어리다고 같이 안놀아줬나봐요^^ 나라면 한솔이랑 둘이서 잘 놀다 들어왔을텐데, 애 아빠는 애를 달래지 못해 결국은 울려서 들어온거 있죠^^

hnine 2009-09-20 12:28   좋아요 0 | URL
조금 큰 아이들은 자기보다 어려 보이는 아이는 안 끼워줄 때가 많더라고요. 한솔이 맘 상한 것 당연하지요. 한솔이 아빠께서는 어서 엄마에게 데려가자는 것이 해결 방법이셨나봐요 ^^

무스탕 2009-09-19 22: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진만 보면 가을이 아니고 한여름 같습니다 ^^
저도 무턱대고 돌아다니고 싶어지네요..

hnine 2009-09-20 04:44   좋아요 0 | URL
무스탕님 말씀처럼 나뭇잎 사진 보면 정말 신록 우거진 여름이지요? 곧 저 나뭇잎 색깔도 모르는 새에 노랗게 변할 것 같아 그러기 전에 한번 사진으로 남겨봤어요.
딱히 계획이 없었으면서도 어제 남편이 일해야한다고 하루 종일 집을 비우니 갑자기 무료해지고 심심해지더라구요. 아이는 더 했겠지요.

세실 2009-09-20 17: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또박또박 말 잘하는 아이 보면 귀여워요~~ 붙임성이 좋으네요.
가을은 여행하기 참 좋은 계절이죠. 문득 떠나고 싶어요.

hnine 2009-09-20 12:29   좋아요 0 | URL
그렇게 꾸밈없이 자기 표현을 잘 하는 아이들 보면 기분이 좋아져요. 그 엄마도 다시 보이고요. 또 제가 꼬마들에게 말시키기를 좋아해서요. 저 아이 동생도 함께 있었는데 찡그리는 표정이 귀여워서 "어이구, 무서워라~ 호랑이 같다, 호랑이~" 했더니 계속 그 표정을 지으면서 저를 따라오더라구요 ㅋㅋ

프레이야 2009-09-20 0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초록잎사귀가 눈부셔요.
정겨운 대화에 웃음이 나요.
아홉살, 되게 나이 많게 느껴졌나 봐요.
그 아이 귀엽네요. 그렇게 본 나인님 시선이 더 좋구요.^^

hnine 2009-09-20 04:49   좋아요 0 | URL
다섯살과 아홉살 차이, 웃기지요?
그 아이 아홉살 되어서도 지금처럼 또박또박, 해맑은 모습이었으면 좋겠어요.
아이들과 얘기해보면 저도 어려지는 것 같아요 ^^

상미 2009-09-20 19: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너와 대화한 애가 사진에서 봉에 매달린 아이니?
애들한테 다섯살과 아홉살 차이는 큰 차이지.ㅋㅋ
4살 차이 나는 남편이랑 살아보니 별 차이 아니더만 ...

hnine 2009-09-20 20:27   좋아요 0 | URL
ㅋㅋ 나도 네살 차이~ ^^
봉에 매달린 아이 맞아. 오늘도 혹시 나왔나 놀이터 가봤는데 오늘은 못봤어.

순오기 2009-09-21 08: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뻐요~ 초록잎도 놀이터의 덤블링 소년도~
무작정 나서는 엄마 따라 동행한 다린군도!^^

hnine 2009-09-21 13:29   좋아요 0 | URL
사실 매우 무료한 주말이었어요. 순오기님은 아이들 어릴 때 그런 날 뭘 하셨나요? 형제들이 있으니 그렇게 무료하지는 않았을 것 같기도 하고요.

2009-09-21 10: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9-21 13: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꿈꾸는섬 2009-09-22 23: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놀이터 놀이기구가 너무 좋아보이는데요. 울 동네랑 너무 차이나요.^^

hnine 2009-09-23 06:02   좋아요 0 | URL
지은지 오래 된 아파트라서 놀이터 시설도 별로 대단하진 않아요. 사진으로는 혹시 그렇게 보이나요? 저것도 2년 전인가 새로 들여놓은 것이고 그 이전엔 더 초라했었지요. 그래도 아이들은 모래흙만 있으면 잘 뛰어노느 것 같지만요.
 

 

"Why does it matter to you?" I asked, irritated. (...)
"That's a very good question," he muttered, so quietly that I wondered if he was talking to himself. (...)
I sighed, scowling at the blackboard.
"Am I annoying you?" he asked. He sounded amused.
I glanced at him without thinking... and told the truth again. "Not exactly, I'm more annoyed at myself. My face is so easy to read --- my mother always calls me her open book." I frowned.
"On the contrary, I find you very difficult to read." (...)
"You must be a good reader then," I replied. 
"Usually." He smiled widely, flashing a set of perfect, ultrawhite teeth.

 

"그게 너랑 무슨 상관이야?" 나는 짜증이 나서 물었다. (...)
"거 참 좋은 질문인걸." 중얼거리는 그의 목소리가 너무 낮아서 나는 그가 혼잣말을 하고 있나 했다. (...)
나는 한숨을 쉬며 칠판을 노려보았다.
"나 때문에 화났니?" 그가 물었다. 재미있다는 투로.
나는 아무 생각없이 그를 흘끔 쳐다보고는 다시 한번 속마음을 얘기해주었다. "꼭 그렇다기보다는 내 자신에게 더 화가 나. 내 얼굴에는 내 감정이 너무나 쉽게 드러나지. 그런 나를 보고 우리 엄마는 늘 펼쳐져 있는 책 같다고 하셨어." 그러면서 나는 못마땅한 얼굴을 했다.
"난 그 반대로 네 마음 읽어내기가 무척 어렵던데." (...)
"그렇담 너는 다른 사람 마음을 제대로 읽는 사람임에 틀림없겠구나." 나는 대답했다.
"보통은 그렇지." 그는 눈부실 정도로 하얗게 빛나는 이를 드러내보이며 활짝 웃었다. 

-- Stephenie Meyer의 'Twilight' 중에서 (해석은 내 멋대로 함 ^^) --  

 

  

Twilight. 이 책을 읽기 시작한지 얼마 안되어 Bella 와 Edward 사이에 특별한 감정이 형성되기 시작한 것을 내가 처음 느끼게 된 부분이다. 확실한 어떤 관계로 굳어지기 이전, 둘 사이의 감정이 최고에 달하기 훨씬 이전의, 이렇게 서로에 대한 관심이 엿보이기 시작하는 순간, 긴가민가 하는 순간, 이런 단계가 나는 더 애틋하고 각별하고 감동적이더라. 물론 그 상황에 있는 당사자들은 혼돈과 불안 속에 머리가 아플지라도. 지나고 나면 잘 기억이 나지 않는 순간이기도 하고 그래서 나에게는 더욱 더 기억하고 싶은 순간이기도 해서 옮겨 적어보았다.

Twilight. 영화로 할때 놓치고, 아니 놓쳤다기 보다 그때는 특별히 보고 싶다는 생각도 안했다가, 지금 책으로 읽어보고 있다. 책 표지를 보더니 아이가 대뜸 자기 이거 안다고 아는 척을 했다. 드라큐라랑 어떤 여자 아이가 나오는거라나. 나는 사실 영화로 상영했었다는 것만 알뿐 내용에 대해선 아무것도 모르는 채 읽기 시작했는데, 읽다보니 어디서 얻어들었는지 모르지만 아이말이 맞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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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미 2009-09-15 19: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남편 취미가 영어 소설 읽기...존그리샴, 댄 브라운 열심히 읽고...
저 책 시리즈로 읽더니, 뱀파이어 나오는 유사한 소설 읽더라고.

hnine 2009-09-15 20:09   좋아요 0 | URL
이 책은 생각보다 안 어렵더라구. 영화로 봤어도 재미있었을 것 같아.
댄 브라운은 그 신부님 나오는 추리 소설, 그건가?

hnine 2009-09-17 14:41   좋아요 0 | URL
아니구나~ ^^ 다빈치 코드의 그 댄 브라운이지? 브라운 신부 나오는 추리 소설이 또 있거든 ^^

상미 2009-09-17 22:49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브라운 신부 나오는 추리 소설 우리집에도 있어.
한참 경은이가 황금 가지에서 나온 홈즈시리즈로 시작해서
애거서 크리스티 시리즈로 읽고,
지금은 용의자x의헌신 쓴 히가시노 게이고 쓴 책에 꽂혀 있어.
 
어른으로 산다는 것
김혜남 지음 / 갤리온 / 2006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행복은 오히려 덜어냄으로써 찾아온다. 가지지 못한 것들에 대한 욕심을 덜어내는 것, 나에 대한 지나친 이상화를 포기하는 것, 세상은 이래야 하고 나는 이래야 된다는 규정으로부터 벗어나는 것.(...) 나를 짓누르는 과거의 무게를 조금 덜어내고 나 자신에 대한 지나친 기대를 조금 덜어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 아마 이책에 대한 리뷰는 인용문이 대부분을 차지할 것 같다. 밑줄긋기 형식으로 남길까 하다가, 내 의견도 덧붙여 남기고 싶을 것 같아 리뷰로 쓰기로 했다. )

이 책을 읽기 시작하고서 제일 처음 밑줄을 그은 부분이다. 행복은 무언가를 하나 더 가질 때 생기는 것이 아니라, 덜어낼 때, 벗어날 때 찾아온다는 말이 와닿아서이다.
  

 

   
  그대의 기쁨은 가면을 벗은 그대의 슬픔.
그대의 웃음이 떠오르는 바로 그 우물이
때로는 그대의 눈물로 채워지는 것

...
그대들 중의 어떤 이는 말한다.
기쁨은 슬픔보다 위대하다.
그러나 또 어떤 이는 말한다.
아니, 슬픔이야말로 위대한 것.
하지만 내 그대들에게 말하노라.
이들은 결코 떨어질 수 없는 것.
이들은 언제나 함께 오는 것.

 
   

 슬픔을 억누르지 말고 흘려보내라는 글에서는 칼릴 지브란의 시 <예언자>중 일부가 인용되고 있었다.
슬픔은 머물지  않는단다. 머무는 것은 슬픔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라고. 영원히 헤어나지 못할 것만 같은 그 순간에조차 슬픔은 조금씩 흘러가고 있는데 우리는 그것을 못 참는다고 한다.
슬픔이 찾아 오면 충분히 슬퍼하고, 그리고 놓아줄 것. 인생에는 슬퍼할 수 밖에 없는 요소가 구석구석 너무나 많으니까.

   
  아랫목에 모인
아홉 마리의 강아지야.
강아지 같은 것들아.
굴욕과 굶주림과 추운 길을 걸어
내가 왔다.
아버지가 왔다.
아니 십구 문 반의 신발이 왔다.

 
   

박 목월 시인의 <가정>이라는 시의 일부이다.
부모 노릇이 힘들다는 사람들에게 주는 저자의 조언은 '너무 좋은 부모가 되려고 애쓰지 마라'가 그 한가지였고, '아이는 아이의 길을 걷게 하라'가 또 한가지였다. 이 세상에 완벽한 부모는 없으며이상적인 부모는 상상 속에서나 가능하다. 부모가 아이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은, 줄수 있는 만큼의 사랑과, 할 수 있는 만큼의 최선을 다하면 그 뿐, 머리 속에 꿈꾸는 부모처럼 되지 않는다고 해서 속상해할 것 없다는 말이다. 또한, 언젠가 자식은 부모 곁을 떠나게 되어 있고 이때 상처를 받는 쪽은 부모이기 마련이라고, 마치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해놓으라는 듯이 쓰고 있다. 그러니 아이를 부모 뜻대로 끌고 가려고 하지 말라고. 부모와 아이 사이의 거리는, 키에르 케고르가 말한 어머니의 역할에 대한 글에서 말하는 딱 이 정도가 아닐까.

   
  아이를 사랑하는 엄마는 아이가 혼자 서는 법을 가르친다. 엄마는 아이로부터 떨어져서 언제라도 팔을 뻗을 준비가 되어 있지만 아이를 붙들어 주지는 않는다. 아이가 넘어질 듯이 뒤뚱거리면 엄마는 마치 아이를 잡아 주는 것처럼 허리를 구부린다. 그러면 아이는 자신이 혼자 걷는 게 아니라는 믿음을 갖게 된다. 게다가 자신을 보고 있는 엄마의 얼굴에서 아이는 격려와 칭찬을 읽는다. 아이는 엄마의 얼굴을 바라보며 별 어려움 없이 자신의 길을 가게 된다. 아이는 자신을 잡아 주지는 않지만 곁에 있는 엄마의 손을 의지하여 걷는다. 아이는 언제라도 필요하다면 엄마의 품이라는 피난처로 뛰어들 수 있다. 아이는 자신이 엄마를 필요로 한다는 것을 의심치 않지만, 엄마 없이도 혼자 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 보인다. 왜냐하면 그는 지금 혼자 걷고 있기 때문이다.  
   

 아이를 주시하되 간섭하지 않기란, 스스로 자기의 길을 가게 하되 방관하지 않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좀더 유쾌하게 나이들기 위해서는 자기를 초월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 그것은 나 이외의 남에게 관심을 갖고 이 세상을 향한 시선을 돌리는 것을 말한다.   
   

저자는 나이들면서 느끼는 의기소침과 외로움, 쓸쓸함, 허무한 감정들에 대해 부정하지 않는다. 다른 주제들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자기 내부에서 생기는 감정을 억누르거나 부정하지 말고, 그냥 주시하고 흘러가게 두라고 한다. 그나마 '좀더' 유쾌하게 나이들기 위한 조언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지 그 누구에게도 나이 들어감을 느껴가는 것은 유쾌한 감정은 아닌 것이다. 이 다음에 나오는 죽음에 관한 글에서도 본인 역시 죽음이 두려움을 숨기지 않는다. 하지만 그 감정을 시인한 후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생각한다. 죽음이 현재를 잠식하면 안되므로.
또한, 용서는 그 대상을 사랑하는 것까지 포함하지는 않는다는 말로서, 어른으로 산다는 것은 용서할 일이 마음 속에 쌓여가는 것임을 말하고 있다. 용서하기 힘든 대상을 사랑할 수 있는 것은 신만이 할 수 있는 용서이고, 인간이 할 수 있는 용서란 내 마음에서 분노와 미움을 떠나보내는 작업이라고 한다. 그래서 내 마음이 다시 고요를 되찾게 하는 작업 말이다. 그래서 더 이상 과거에 얽매여 나의 현재와 미래를 사장시키는 일이 진행되지 않도록 하는 것. 그러니까 결국 나 자신을 위한 일이면서도 쉽지 않게 생각되는 과정
.  

강력한 주장으로 어떤 교훈적인 얘기를 하고 있다는 느낌이 아니라, 담담한 마음으로, 저자 자신 역시 흔들림 많고, 남에게 상처도 많이 주고 또 받는 사람임을 드러내보이며 상당히 관조적으로 글을 써나갔다. 극복해라, 희망을 가져라, 목표를 가져라, 앞으로 나아가라, 뭐 이런 분위기라기 보다는, 기대를 덜어내라, 감정을 인정하고 그리고 지켜 보아라,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여라, 혼자의 시간을 가지고 생각해보라고 말한다.
그러고 보면 어른으로서 산다는 것은, 산 넘어 산이 아닌지. 높은 봉우리를 만나더라도 크게 호들갑을 떨지 않으며, 평평한 평지를 만나더라도, 다시 곧 오르막길에 부닥칠 것을 아는 것. 그렇게 한발 한발 나아가는 것. 
크게 기뻐할 일도 크게 절망할 일도, 알고 보면 없는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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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파걸들에게 주눅 든 내 아들을 지켜라 - 자신감 없고 의욕도 없는 우리 아들 '기 살리기' 프로젝트
레너드 삭스 지음, 김보영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8년 3월
평점 :
절판


'알파걸', '주눅든', '지켜라'
요즘 책의 제목에는 이렇게 자극적인 단어들이 들어가지 않으면 안되는지. 누군가의 아킬레스건을 건드리고도 남을 이런 단어들로 이루어진 책의 제목. 원제는 'Boys adrift' 이다. 그대로 번역하자면 '방황하는 남자아이들'이라고 할까? 책을 다 읽고서 보니 '남자가 되지 못하는 아들' 혹은 '남자로 크지 못하는 아들' 이렇게 의역을 해도 될 것 같다.
갈수록 여자 아이들은 남성화되어가고, 반대로 남자 아이들은 여성화되어간다는 얘기를 종종 듣는다. 야먕과 추진력으로 특징지워지던 남성성의 한 단면이 무너져 가고, 학습에 점점 더 무관해지며 성취동기가 부족해가는 남학생들에 대한 이야기를 여자 아이들의 문제와는 별개로 다루겠다고 서문에서 밝히고 있음에도 이 책의 우리말 제목에는 '알파걸들에게 주눈든'이라는 어구를 집어 넣음으로써 마치 남자 아이들의 이런 문제가 여자 아이들로 인해 생긴 것 같은 뉘앙스를 풍기고 있다.

가정의학과 의사이자 심리학자인 저자는, 남자 아이들이 예전의 남성성을 갖추며 자라지 못하고 의욕과 열정을 잃게 되는 요인으로서 다섯 가지를 들고 있다.

첫째, 지나친 조기 교육, 경험적 지식이 아닌 가르쳐서 획득되는 지식으로의 전환 등 남자 아이들의 특성을 고려하지 않는 교육 방식으로의 전환으로 인해 남자 아이들이 학교 생활에 예전보다 흥미를 잃고 있다는 점.

둘째, 게임의 영향이다. 남자 아이들이 특히 몰입하는 게임은 현실 세계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세째, ADHD에 처방되는 약물을 과도하게 사용한 나머지 아이들의 동기와 관련된 뇌 영역이 손상을 입고 있다.

네째, 플라스틱 병과 화학물질들로부터 유출되어 나오는 환경 호르몬의 영향이다. 알게 모르게 남자 아이들의 테스토스테론 수치를 저하시켜 뼈를 약하게 하고 성장을 둔화시키고 있다.

다섯째, 폭력적이고 자극적인 대중문화가 남성다움의 이미지를 왜곡시키고 있다.


첫번째 요인과 관련하여 저자는 경우에 따라서 남녀 공학보다 남자 아이들만 다니는 학교로 옮겨 보는 것도 효과가 있다는 예를 제시하고 있으며, 두번째, 게임에 관해서는 비디오 게임은 현실이 아닌 시뮬레이션에 불과하다는 것은 아이로 하여금 깨닫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현실 세계는 그렇게 강한 만족감을 주거나 마음대로 좌지우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자신이 일으킨 문제로부터 무작정 도망쳐 나올 수도 없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해야 한다는 것이다. 세번째 약물의 남용에 대해서는 저자가 의사라는 자격으로 쓴 것이라는 점에서 더 주목할만 하다. 부모는 자기 아이의 문제점을 버릇이 잘못 들었다거나 행동 방식에 문제가 있다고 설명되어지는 것보다 어떤 이름의 병명으로 설명되는 것에 더 안심한다는 것이다. 즉 책임 소재가 부모가 아닌 제 3자의 설명으로 대체되는 쪽으로 귀를 기울이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당장 약물로서 치료를 받게 하는데 주저하지 않게 된다. 또한 놀라운 점은 ADHD를 가진 아이들이 약을 복용했을 때 성적이 향상되었듯이, 평범한 아이들도 ADHD약을 복용하니 똑같이 성적 향상이 나타난 것이다. 약물 아닌 다른 해결책에 대한 관심을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주로 처방되고 있는 약물로 리탈린, 애더럴, 콘체르타 같은 것들이 있는데, 놀라운 것은 비디오 게임을 오래 하게 되면 이런 약물을 복용했을 때 나타나는 부작용, 즉 뇌의 전전두엽 피질로 가는 혈류가 방해를 받게 되는 결과를 나타낸다는 것이다. 아무튼 비디오 게임은 지금까지 읽은 육아, 교육과 관련된 어느 책에서도 긍정적으로 허용해주자는 내용을 본 일이 없는 것 같다. 네번째, 환경호르몬의 영향에 대해서는 여자 아이들의 조숙화를 가져오는 환경 호르몬이 남자 아이들의 성 발달 지연 혹은 교란을 불러올 수 있다는 상당수의 증거들이 있다고 한다. 페트병 음료, 아기들의 고무젖꼭지 사용을 피하라는 충고와 함께.
갈수록 여자들은 무능한 남자와 사느니 혼자 사는 것을 택하고 있고, 남자들은 실제 여자들, 즉 자신의 주장을 가지고 때로 듣기 싫은 말도 내뱉곤 하는 현실 속 여자들보다 컴퓨터 스크린에 나타난 여성적 이미지에 빠져드는 것에서 더 큰 만족을 얻고 있다고 하니, 전체 사회 구조에도 서서히 변화가 오지 않을까. 인생의 낙, 즐거움을 우리는 너무나 가깝고 쉬운데서 찾으려고 하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 보게 한다. 그리고 그런 삶이 마지막까지도 만족감을 가져다 줄지에 대해서도.
끝으로 저자는 남자 아이가 진정한 남자가 되기 위해서는 건강한 남성성을 가진 남자들을 보고 역할 모델로 삼을 수 있는 기회가 제공되어야 한다는데, 예전에는 대개 아버지가 바로 그런 대상이었으나 꼭 그 남자가 아버지일 필요는 없다고 한다. 또한 그 사람이 아버지뿐이어서도 안 된다고. 즉 남자 아이에게는 건강한 남성에 대한 다양한 역할 모델을 제공해줄 수 있는 많은 어른들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런 역할 모델을 찾지 못하는 남자 아이들은 TV, 영화, 심지어 비디오 게임 같은 대중 문화속에서 불건전한 역할 모델을 선택할 수도 있게 됨을 지적하면서, 아이들이 올바른 선택을 하도록 이끌어주는 것이 부모의 몫, 어른들의 역할이 아니겠느냐고 강조한다.

이 책 역시 밑줄을 많이 그으면서 읽은 책이다. 남자 아이들의 문제는 개인적인 차원에서뿐 아니라 제시된 사회적 변화의 관점에서도 보아야 함을, 이런 책을 통해서가 아니면 어떻게 알 수 있었을까. 아이를 키우는데는 온 마을이 필요하다고 했던 어느 책의 제목을 다시 떠올리게 한다.
맞는 말이었다.   

 

* 책 내용 중, 69쪽의 '편도선'이라는 용어는 글의 앞뒤 문맥으로 봐서 뇌의 한 부분인 amygdala를 번역한 것으로 짐작되는데, amygdala는 보통 우리말로 '편도체' 라고 번역된다. '편도선'이라고 하면 우리는 보통 목구멍의 tonsil을 떠올리기 때문에 편도선보다는 편도체라고 표기하는 것이 나을 것 같다.  

** 133쪽의 '투프츠 대학'이란 Tufts대학을 말하는 것 같은데, 보통 터프츠 대학으로 발음하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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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미 2009-09-11 22: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책 읽으면서, 이게 미국 얘기라는 생각이 안들더라고...
나도 <편도선>그 부분 보면서 ?? 했는데.

hnine 2009-09-12 03:53   좋아요 0 | URL
네 덕분에 알게 된 책이다.
모르던 것을 많이 알게 되었어.

하양물감 2009-09-12 07: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꼼꼼한 리뷰면서 저도 관심가는 책이네요. 아들이 있다면 확실히 읽어야지 찜햇을텐데요..^^

hnine 2009-09-12 10:48   좋아요 0 | URL
아이쿠, 하양물감님. 감사합니다. 밑줄을 많이 그으며 읽은 책은 나중에 쓸데없이 리뷰가 길어지더라구요 ^^
 
너는 마녀야
오현종 지음 / 민음사 / 2005년 8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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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현종이라는 작가가 쓴 소설로서 관심이 가서 읽어보려고 했던 책은 이 책이 아니라 최근작 '외국어를 공부하는 시간'이었다. 어쩌다가 읽고 싶던 책은 빠지고 같은 저자의 이 책과 '본드걸 미미양의 모험', '세이렌' 세 권을 앞에 두고 어느 것을 먼저 읽을까 하다가 고른 것이 바로 이 책 '너는 마녀야'. 제목의 '마녀'라는 단어로부터 다소 엽기적인 성격의 여자가  주인공으로 나오지 않을까 짐작했다면 그 짐작은 빗나가고. 주인공 '김 율미'는 마녀라고 불리기에는 살면서 언제든 어디서든 마주칠 것 같은 그런 성격의 여자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제 막 등단하였으나 아직 이름이 크게 알려질만한 소설을 내지는 못한 신인작가인 그녀 김 율미. 저자 자신의 얘기인가 궁금해졌다. 주인공 율미가 그토록 집착하는 것 두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좋은 소설을 쓰고 싶다는 열망, 그리고 또한가지는, 사귀고는 있지만 결혼할 생각은 전혀 없어보이는 애인 '이 철수'이다. 나는 너와 결혼하고 싶은 생각이 조금도 없다는 말을 남자로부터 수차례 듣는데도 포기하지 않고 매달리는 이 여자에게 남자가 종종 하는 말이 바로 제목과 같은 '너는 마녀야'.

별다른 사건이 없으면서도 감동을 주는 소설들도 있기는 하다. 그러고 보니 내게 좋은 인상으로 남아있는 많은 소설들이 실제로 그렇지 않았나 싶을 정도로. 그런데 이 소설은 별다른 사건이 없으면서 특별한 감동이 남지도 않는다. 결혼은 자기의 야망에 걸림돌이 될뿐이라 생각하는 남자는 이 세상에 이 철수뿐 아니고, 남자가 그럴수록 더 그 남자에 매달리고 집착하는 여자 또한 김 율미 뿐 아니라 흔하디 흔하다. 소설이 되려면 최소한 좀 다른 방식으로 전개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헤어지자는 남자를 만나러 집으로 찾아가고, 받을 때까지 전화를 걸어대고, 투정하고, 단둘이 여행을 가고 하는 누구나 상상할 수 있는 방식을 아예 되집거나 아니면 최소한 뭔가를 덧붙여서 말이다.
또한, 책을 다 읽어갈 때까지 한번도 주인공 여자의 진심이 진지하게 느껴져 오질 않았다. 소설 속 인물들에게 쉽게 공감하고 감정이입 잘 하는 나인데도 말이다.
소설에 대한 그녀의 집착이 또다른 집착 대상인 남자와 동일 선상에서 보여져야 할지. 그것도 별로 마음에 안들고, 글의 초반부터 애완용 이구아나를 등장시킨 것은 과연 얼마나 효과적인지도 모호하다. 주인공의 직업과 경력이 작가와 비슷한 점이 많아 읽으면서 어디까지가 픽션일까 잠깐 궁금해지는 정도의 흥미와, 어렵지 않게 읽혀지는 문장 때문에 끝까지 마칠 수 있던 책.
기대하고 읽은 소설인데 좀 유감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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