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께서 워낙 재미있고 머리에 쏙쏙 들어오게 가르치시기 때문일까, 아니면 누군가와 함께 나란히 앉아 배우는 재미일까. 요즘 영어 공부하는 시간은 하루 중 그 어느 시간보다 재미있는 시간이 되고 있다. 오늘은 음식과 관련된 단어와 표현들을 공부하던 중이었는데 'mushroom' 이라는 단어가 나왔다.
"성운이 mushroom 이 뭔지 아니?"
아빠께서는 일단 성운이를 향해 물으셨다.
성운이는 잘 모르겠는지 고개를 갸우뚱하기만 했다.
'아, 난 알 것 같은데.' 생각하는 순간 아빠께서 이번엔 내게 물으셨다.
"겨운인 혹시 알아?" 
나는 성운이가 모르고 있다는 것에 약간 자만심을 가지며 대답했다.
"방향제요!"
그때 아빠의 그 어이없어 하시는 모습이란.
"방향제?"
'앗, 아닌가?'  분명히 우리집 욕실에 있는 방향제에는 'mushroom' 이라고 써있는데, 이상하다.
 아빠께서는 mushroom은  버섯이라는 뜻이라고 알려주시며, 어떻게 방향제라는 대답이 나왔냐고 의아해 하셨다. 그러고보니 욕실의 방향제 용기가 버섯 모양을 하고 있다는 것이 문득 떠올랐다. 버섯 기둥에 해당하는 부분에 방향성분의 액체가 들어 있는. 그러니까 그 방향제 상품의 이름이 mushroom이었던 것을, 매일 욕실을 드나들며 나는 mushroom이 방향제를 뜻하는 말인 줄 알았던 것이다. 나중에 공부가 끝나고 성운이에게 이 얘기를 들려주었더니, 별로 소리내어 웃는 일이 없는 성운이에게서 박장대소가 쏟아져 나왔다. 내가 무색해질 정도로.
"겨운이 너 참 재미있다."
나는 다른 사람을 잘 웃기는 타입이 아니었기 때문에, 뜻밖에 성운이가 이렇게 크게 웃는 모습을 보니 어쩐지 나도 기분이 좋았다.
가끔 우리는 내가 즐겨듣는 팝송에 대한 얘기를 나누기도 했는데, 성운이는 클래식만 듣는다더라고 예전에 아빠로부터 전해들은 말과 달리 팝송에도 상당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필 콜린즈 좋아하니?"
공부를 마친 후 내 책상 옆에 와서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던 성운이가 어느 날 물었다.
"필 콜린즈? 왜 갑자기?"
아마 어제 라디오를 들으며 끄적거렸나보다. 펼쳐져 있는 내 연습장 한 귀퉁이에 필 콜린즈라고 흘려 적어 놓은 것을 성운이가 가리켰다.
"어제 라디오에서 필 콜린즈 신곡이 나왔다고 하길래. 제목이 뭐더라"
"솔로 앨범이니?" 성운이가 물었다.
"당연하지. 필 콜린즈가 원래 솔로 가수잖아." 그것도 모르냐는 투로 내가 대답했다.
"아냐, 원래 그룹 출신이야. 제네시스라는." 나는 처음 듣는 얘기를 하는 것이다. 이래봐도 팝송은 내가 너보다 많이 알고 있다고 속으로 뻐기고 있던 나는, 네가 뭘 착각하고 있는 거라고 끝까지 우겼다. 그런데 성운이는 같이 우기지도 않는다.
"나중에 한번 알아봐." 그러면서 그냥 웃고 마는 것이다.
성운이가 방에서 나간 후 바로 가지고 있던 팝가수 인명 사전을 뒤적거렸다. 지난 달 월간 팝송 부록으로 받은 것인데 그리 자세하진 않지만 웬만한 팝스타들은 다 나와 있다.
그런데 아, 성운이가 맞았다. '그룹 제네시스 출신의 필 콜린즈'.
도대체 성운이는 모르는게 뭐람. 잘 모르면서 맞다고 우겨댄 나의 모습과, 제대로 알고 있으면서도 우기지 않고 웃어 넘기던 성운이의 모습이 겹쳐지면서 창피하기도 하고, 성운이라는 아이에게 더욱 호감이 가기도 하는, 이상스런 감정이 몽글몽글 피어나는 것을 느꼈다.

성운이가 얼마나 더 우리 집에 머물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미국으로 떠나고 나면 그 빈자리가 참 크겠구나 나는 벌써부터 그 걱정을 조금씩 하고 있는 중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마노아 2009-07-11 2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이야기의 배경은 몇 년도일까요? 요새 아이들도 팝송을 들을까 생각했어요.
성운이는 그저 엄친아가 아니라 성품도 차분하고 예의가 바른 듯해요.
여자 아이들이 많이 좋아하겠어요.^^

hnine 2009-07-11 21:15   좋아요 0 | URL
무릎팍도사에 나온 배철수의 고민이 바로 요즘 청소년들이 팝송을 안 듣는 것이라고 하더군요. 제가 중학교 다닐 때, 그러니까 1980년대 초만해도 팝송을 참 많이 들었거든요.
성운이는 엄친아 맞는데 나중에 <착한 아이의 비극>을 겪게 되어요. 제가 엄친아를 별로 바람직하게 안 보는 이유이기도 하지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비가 억수 같이 쏟아지는 날 나가서  보고 온 영화는 바로 이것
<아더와 미니모이 (Arthur and the minimoys)>

   

 

포스터에 영화에 관한 웬만한 정보가 다 나와나 있다. 뤽 베쏭이란 이름은 얼마나 오랜만에 들어보는 이름인지.   

'아더 (Arthur)'는 주인공인 열살 난 남자 아이 이름인데, 영화 <스파이더위크가의 비밀>에 나왔던 배우란다. 이 영화도 재미있게 봤었는데. 

'미니모이 (Minimoys)' 란, 키가 2mm 정도 밖에 안되는 작은 사람들의 왕국.  
아더는 실종된 할아버지의 보물을 찾아내고자 2mm 꼬마로 변신하여 미니모이 세계로 들어가게 된다.

이 영화의 다른 포스터에는 제목이 <Arthur and the invisibles> 으로 되어 있는 것도 있었다.

  스틸이미지

  

다른 포스터들도 한번 올려볼까. 

스틸이미지 

스틸이미지 

  

미아 패로우 (Mia Farrow)가 주인공 아더의 할머니로 나온다. 나이가 많이 들었지만 그녀의 분위기는 여전했다. 

스틸이미지

  

마돈나, 데이빗 보위, 로버트 드니로의 목소리가 숨어 있는, 실사와 CG가  결합된 또하나의 환타지 영화인데, 픽사의 수준에는 못미친다는 평도 받았다지만, 나 같은 비전문가의 눈에는 충분히 재미있었던 작품. 

2006년에 만들어진 영화인데 국내에선 뒤늦게 개봉된 셈이다.  

이 영화는 오늘 개봉했는데 이외에도 방학을 며칠 앞두고 개봉을 기다리고 있는초등학생들 대상의 영화들이 몇편 더 있는 것 같다.  

비바람이 제대로 몰아치고 있음에도, 영화보러 가자니까 두말 않고 따라나선 아이.
오늘 아침, 키우던 소라게 두마리중 한마리가 죽었다고 나에게 얼굴을 묻고 한동안 엉엉 울더니 이제는 기분이 좀 나아졌을까. 

 

 


댓글(2)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비로그인 2009-07-09 21: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생각보다 훨씬 괜찮은 영화지요? 그래픽이 어떻건 상관없이요. 이런 날씨에 영화 보러 가는 것도 나름 재미? 있었겠어요.

hnine 2009-07-09 22:14   좋아요 0 | URL
manci님도 보셨어요?
이런 날씨에 영화 보러 가는 것, 나름 재미있는 것 맞아요 ^^
 

오늘 아침 어느 분 서재에 갔다가 듣고 옮겨왔다. 
Schubert 전집을 사놓고서 알던 곡 몇개만 골라듣고는 아직 한번도 여유있게 다른 곡들도 들어볼 기회가 없었는데 오늘은 이 곡을 한번 찾아서 들어봐야겠다.

글 쓸때 들으면 좋을 것 같은 곡이다. 이 제목으로 리스트를 한번 만들어볼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성운이가 당분간 우리집에 와서 지내기로 했단다. 이모의 자랑스런 아들 성운이는 나와 동갑내기, 공부도 잘하고 예의도 바르고, 키도 크고 얼굴도 잘 생긴, 성운이를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칭찬하지 않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나무랄데 없는 아이였다. 이모 가족은 몇달 후 모두 미국으로 이민을 갈 예정이다. 다른 가족들도 그랬겠지만 특히 이모 가족 중 가장 나이가 어린 성운이는 아직 영어 회화 능력이 부족하여 영어 선생님인 우리 아빠에게 단기간 집중적으로 영어 특별 교육을 받기 위해 우리 집에서 당분간 지내기로 했다는 것이다. 그게 누구였든 늘 또래 말상대가 그리웠던 나는 내색은 안했지만 속으로 환호를 질렀다.

일요일 오전, 이모와 함께 짐가방을 들고 성운이가 왔다. 현관을 들어오면서 깍듯이 고개 숙여 인사를 하는 성운이는 내 또래라고는 하나 어딘지 모르게 아이같지 않은 아이같았다. 나와 새운이에게는 짧게 "잘 있었니?" 인사를 하고는 곧 할머니께 인사를 드리기 위해 어디에 계신지를 물었다. 거하게 점심 상이 차려지고, 일하시는 아주머니에게도 " 잘 먹겠습니다." 라는 인사를 잊지 않더니 밥을 한톨도 남기지 않고 싹싹 비우는 성운이는 그저 어른들 마음에 쏙 드는 그 자체였다.  
성운이를 남겨 두고 이모께서는 댁으로 돌아가시고, 특별히 할일이 없는 주말 오후, 아빠의 첫 영어 수업이 시작되었다. 나이와 학년이 같다는 이유로 성운이와 아빠의 영어 공부에 나도 특별히 함께 할 수 있도록 허락이 떨어졌다. 하지만 나는 그저 그 자리에 참석자로서 있을 뿐이고 아빠의 수업은 어디까지나 성운이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아빠께서는 학교에서 배우는 영어 교과서가 아닌, 회화 책을 준비하셔서 상황에 따라 이루어지는 대화를 중심으로 가르쳐 주셨다. 교과서 영어보다 훨씬 재미있는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수업이 끝나고 성운이와 과일을 먹으며 물었다.
"너, 책을 그렇게 많이 읽는다면서?"
"응."
"무슨 책 읽어?"
"난 고전이 좋아. 세익스피어의 비극, 그리스 신화, 오딧세이는 여러 번 읽었고, 지와 사랑, 데미안, 아, 그리고 지금 읽고 있는 책은 '수레바퀴 아래서'인데, 혹시 읽었니?"
읽다니, 지금 성운이가 말한 것들 중에 내가 읽은 것은 단 한 권도 없었다.
"제목은 들어봤어. 아직 읽지는 못했고." 
아직 읽지 못했을 뿐 아니라, 앞으로도 읽을 것 같지 않은 책들을, 여러 번 읽었다는 성운이는 도대체 어떤 아이일까.

잠을 자려고 누웠는데 새운이가 묻는다.
"언니, 성운이 오빠랑 영어 공부 재미있어? 성운이 오빠 영어 잘 해?"
"뭐, 나야 들러리지 뭐. 영어 발음이 아주 나쁘진 않더라."
나는 시큰둥하게 대답했지만, 웬지 다음 영어 공부 시간이 기다려지고 있는 것은 왜일까? 건넌방에 짐을 풀어놓은 성운이도 지금 자려고 누웠을까? 아무리 남자 아이라지만 가족과 떨어져서 집생각이 나지는 않을까?  나는 잠이 오기는 커녕 눈이 더 말똥말똥해지면서 이 생각 저 생각을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마노아 2009-07-08 1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엄친아 성운이군요!^^

hnine 2009-07-08 12:03   좋아요 0 | URL
딱 어울리는 단어인데, 겨운이 싯점에서 쓰느라 사용하지 않았지요 ^^
 

조용하고 천천히 흘러가는 일상을 상징하는 것인가? 헨델의 라르고 (Largo)가 배경 음악으로 천천히, 낮게 깔리면서 시작되는 영화 <요시노 이발관>

마치 성직자의 가운을 연상시키는 이발 가운을 걸친 아이들이 합창하는 '할렐루야' 역시, 그냥 선곡된 음악은 아닌 듯 하다. 

내가 어릴 때, 그러니까 1970년대 우리 나라 풍경이 비슷하게 펼쳐지는 마을.
이 마을 모든 아이들의 똑같은 머리 스타일은 전통이라는 이름의 획일성, 통일성을 상징하는데,  영화나 책에서 일본 사람들의 이런 전통, 습성을 발견할 때마다 나는 좀 소름이 돋을 때가 있다. 개성과 일탈을 허락하지 않고, 규격화된 집단의 일원으로서만 의미가 있는 개인의 존재. 우리 사회에도 여전히 남아 있는 이런 사고 방식은, 우리가 일제 치하에서 강요되었던 많은 것들중의 하나가 아닐까. 잔재라고 하기엔 아직도 너무나 영향력이 큰.
영화 곳곳에서  마치 우리 얘기 같은 느낌이 들때마다 섬찟섬찟 해야했던 내가 너무 예민한 것인지. 

 

 

 스틸이미지

 

1972년생, 오기가미 나오코 감독의 첫번째 장편 데뷔작으로서 우리 나라에 먼저 알려진 <카모메 식당>보다 2년 일찍 만들어진 영화이다. 

 

상영 시간 1시간 35분.
아홉살 아이도 지루해하지 않으며 보는게 의외였다. 나중엔 손부채질까지 하며 보아야 했던 낡은 영화관이었음에도 말이다. 덧붙여, 영화 중에 초등 5학년 남자 아이들이 여자의 벗은 몸 사진이 실린 잡지들을 몰래 돌려 보며 신나하는 장면이 나올 때마다 이 엄마는 옆에서 조마조마 했음에도 말이다. 

바가지 머리로 상징되는 전통과 관습, 이에 대응 구조로 등장하는 전학온 아이의 반항, 그리고 핑크색 가운에 검은 우산을 들고 혼자 알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며 돌아다니는 마을의 그 이상한 남자가 가끔 미친 척 던지는 말들.
더하고 뺄것도 없이, 영화의 의도가 아주 딱 떨어지게 전달되는, 그래서 깔끔함과 동시에 싱겁다는 느낌도 함께 받았던 영화였다. 

  

--- 빗소리가 음악을 대신하는 새벽에 ---

 

 


댓글(6)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무해한모리군 2009-07-07 08: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깔끔함과 동시에 싱겁다' 어쩜 딱 제 느낌과 같네요.

hnine 2009-07-07 09:48   좋아요 0 | URL
휘모리님도 그러셨군요 ^^ 하지만 뭐 나쁘진 않은 영화였어요.

프레이야 2009-07-07 08: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5학년 작은딸이랑 봤어요.
주제가 너무 드러나니까 싱거운 것 같기도 하구요.
요시노 여사장 아줌마의 그 배우, 과장된 연기가 그 역할에 오히려 딱 맞아
더 공포스럽더군요. 텐구신보다 더요..ㅎㅎ
중학교 때 귀밑 1센티 단발머리로 교문앞에서 단속 받던 기억이 나요.

hnine 2009-07-07 09:51   좋아요 0 | URL
ㅋㅋ 저는 어릴 때 저희 집이 일종의 요시노이발관 같았지 뭡니까. 저희 엄마께서 저랑 제 여동생을 무조건 바가지 머리로 자르게 하셨으니까요. 미장원도 아니고 엄마께서 집에서 직접 자르시는거예요 흑흑... 나중에 제 동생은 반항하느라 말 안듣고 길게 기르기 시작했는데 저는 그냥 하라는대로 하고 다녔답니다.

무스탕 2009-07-07 09: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영화를 보고싶은데 가까운곳에서 하는 극장이 없어요 -_-
이거 보려면 서울까지 가야한다구요!! (<= 이건 나름 화난 표시..)
깔끔해서 산뜻했다 라는 느낌이었으면 좋았을텐데 말이에요..
근데요, 생각했던거랑 다른 의견을 내놓으시니 또 그것도 궁금하네요 ^^

hnine 2009-07-07 09:53   좋아요 0 | URL
음...무스탕님, 저도 간신히 찾아간 곳이 그야말로 70년대 극장을 방불케 하는, 아주 작고 낡은 극장이었어요. 못찾고 그냥 지나칠 뻔 했지요.
영화가 재미없거나 나쁘진 않았는데 뭐랄까, 보는 사람 몫으로 남겨진 것이 없을 정도로 깔끔하다고 해야할까요? 생각할 거리가 따로 없는 내용이었어요. 제 개인적인 생각이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