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ss로 부터 환영받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예상 못했던 것은 아니었다. 이제 한창 일에 박차를 가해야 할 중요한 시기에 임신이라니. 도대체 뭘 하자는 말인가 이해를 못 할 것이라고 생각은 했다. 하지만 그때 내 나이 서른 다섯. 언제 끝날지 모르는 코스에 있으면서 아이를 마냥 미루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더구나 한국에서는 학위가 아직 끝나지도 않은 남편을 당장 들어오게 하려는 압력이 계속해서 들어오고 있었다. 장남이기 때문에 져야할 짐이라고나 할까. 보다못한 남편의 지인 한분이 우리 부부에게 어서 아기를 가지는 수 밖에 없겠다고 슬쩍 지나가는 말처럼 던지시기도 했다.
우물쭈물 하다가 Boss 에게 결국 임신했음을 알린 것은 임신 7개월째 되어서였다. 7개월 되었어도 내가 말 안하면 사람들은 임신한지도 모를 정도로 배가 안 나와 있었다. 얼마나 망설이다 말을 꺼냈는지. 고민에 또 고민. Boss의 반응은 뭐, 예상하던 대로였고.
별다른 입덧을 하지는 않았으나 평소에 좋아하던 음식을 앞에 놓고도 전혀 식욕이 당기지 않을 때가 많았다. 그렇다고 안 먹은 적은 없다. 집에 돌아오면 남편이 나름대로 손수 끓여 놓은 국과 밥을 맛있게 먹었다. 자다가 화장실 가느라고 자주 잠에서 깨어나는 것이 불편했으나 책에서 읽으니 다 이런 거래, 생각했으며, 일하다가도 잠이 얼마나 쏟아지던지. 그럴 땐 할 수 없이 화장실에 가서 변기에 앉아 고개를 앞으로 푹 숙이고 눈을 붙이고 나오곤 했다. 엄마께서 한국에서 붙여 주신 예쁜 원피스형 임신복은 한번도 입어보질 못했다. 나의 일터는 실험실. 가만히 자리에 앉아서 하는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활동하기 편리한 복장을 하다보니 나의 임신복은 남편의 셔츠, 그리고 동네 수퍼마켓에서 산 고무줄 처리된 바지가 대신 했고, 한국에서 보내온 그 촉감 좋고 따스한 임신복은 새것인채 그대로 다른 사람에게 물려주고 왔다. 정기 검진 받을 때마다 병원에서는 아기가 너무 작다고 했고, 출산 예정일 다가와서는 그 이유 때문에 일주일에 두번씩 병원에 가야했다. 그렇게 병원에 다녀온 날은 남편은 입을 꾹 다물고 한마디도 말을 하지 않았다. 태어날 아기에 대한 걱정으로 기분이 안좋았던 때문이겠지만 그래서 나는 더 마음이 무거웠다.
출산예정일을 2주 앞두고. 그때까지 나의 몸무게는 6kg이 늘었을 뿐이었다. 실험실일은 몸도 마음도 힘들게 했다. 그날도 아는 이웃 집에 가서 저녁을 배불리 얻어 먹고 잘 자고 있다가 양수가 터졌다. 그게 양수가 터진 것이라는 것도 책을 찾아보고 내가 내린 판단이다. 한국의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여쭤보았더니 엄마도 모르신단다. 한밤중에 병원으로 전화했더니, 간단히 짐 챙겨서 병원으로 오란다. 짐? 아무 것도 준비해놓은 것이 없었던 나는 대충 나의 옷 몇 가지와 책, 뭐 그런 것을 가지고 병원으로 가서 그날 저녁에 아이를 낳았다. 낳자마자 보았더니 아이는 그때 남편이 입고 있던 옷의 주머니에 넣어도 될 정도로 작았다. 2.5kg. 한국의 가족들에게 전화하고, 다음으로 실험실에 전화해서 내일부터 몇 주 못나가겠노라고 얘기하고, 내가 하던 실험 뒷 처리를 다른 사람에게 부탁하느라 한참 통화를 해야했다. 4주후엔 학회가 예정되어 있었으므로 아이 낳고 3주후부터 학회 발표 자료를 만들고 실험실에 다시 나가기 시작했으며 4주째에는 비행기를 타고 학회에 참석하느라 갓난쟁이 아이를 며칠 동안 남편 혼자서 돌보느라 애를 먹기도 했다.
뒤돌아보면 참 여러 가지 감정이 물밀듯 밀려오는 시절이다.
아이를 낳고서 2년 후 한국으로 돌아오기 까지의 얘기는 이보다 더 구구절절이니...웃음도 나오고 그러다가 가슴이 먹먹해지기도 하고, 뭐, 그렇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