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오고 있기 때문인지, 태풍의 영향인지.

바람이 선들선들한데다 비도 뿌리니 긴 소매 옷을 하나 더 걸치고 나갔다와야했다.

남편은 일본 여행가서 없고, 아들은 서울로 미술 학원 가느라 아침 일찍 나가 밤 늦게 돌아오는 날이라서

거의 하루 종일 나 혼자 집에 있는 날이었다. 이게 어쩌다 한번이면 좋을텐데 하루 종일 집에 혼자 있는 날이 자주 있다보니

이제 홀가분한 정도를 넘어서 자꾸 머리에 잡념이 들려고 한다. 잡념과 생각을 구별하는 나의 기준은 생산적인가 그렇지 않은가 하는데 있다. 아무 결론 없이 되풀이된다면, 그건 생각이 아니라 잡념. 그럴땐 웬만하면 몸을 움직이려고 한다. 제자리에서 마음을 돌이키기란 무척 어렵기 때문에 일단 몸의 위치를 바꿔주는 것이다.

(그마저 귀찮아서 에라 모르겠다, 우울모드에 잡아 먹히는 때도 많지만.)

 

집에서 나갈땐 바람만 불더니 우산 안가져갔더라면 어쩔 뻔 했나. 돌아올땐 빗줄기가 제법 굵었다.

수련을 보면 언제나 초등학교때 한 친구 생각이 난다. 여름 방학 숙제로 커다란 도화지에 수련을 그려왔는데 이건 도저히 초등학생이 그렸다고 할 수 없는 그림이었다. 분명히 지금 내가 봐도 흰색으로만 보이는 저 수련을, 보라색 명암까지 넣고 연필 스케치 다 보이게, 그러니까 투명수채화를, '수련'이라는 이름이 너무나 잘 어울리게 그려온 것이다. 나중에 커서 유명한 화가의 그림을 미술관에 가서 직접 눈앞에서 볼때도 그처럼 충격받진 않았던 것 같다.

 

바람은 연못에 동심원을 만들고 빗방울은 수련 잎 위에 물방울로 머물러 있다.

밤송이 토실토실. 작년 밤송이가 아직 바닥에 떨어진채 남아있는 것도 있는데 새내기 밤송이들은 초록이 선명하다.

 

지금도 비가 계속 온다.

3시 3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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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30 17: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hnine 2018-08-31 12:23   좋아요 0 | URL
시야가 온통 초록 가득이었어요.
제가 아주 자주 가는 산책로 끝에 저 연못이 있는데 봄엔 수선화가 만발이지요.
분위기 공감해주시니 감사합니다. (방긋^^)

순오기 2018-08-31 09: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진 멋져요~♥
생각과 잡념의 구별에 공감해요!^^

hnine 2018-08-31 12:25   좋아요 0 | URL
시간이 많으니 잡념이 많아져요. 대부분 쓸데 없는 걱정이고, 마음을 더 가라앉히기 일쑤이니, 안하는게 낫겠죠? 몸을 움직이니 건강도 건강이지만 잡념이 없어져서 좋더라고요.
 
토지 6 - 2부 2권 박경리 대하소설 토지 (마로니에북스) 6
박경리 지음 / 마로니에북스 / 2012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바로 전권에서 서희가 길상에게 결혼을 제안했지만 이권이 끝나도록 길상은 뚜렷하게 답을 못하고 마음만 어지럽다. 적극적이고 목표의식이 뚜렷한 여자, 그리고 신중하고 의리있지만 우유부단한 남자이다. 그당시 길상은 옥이네에게 마음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서희의 청혼을 거절할 수도 있었지만 그게 쉽지 않았던 때문이기도 하고, 서희와 길상의 관계는 결혼하여 부부가 된다고 한들 이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으리라는 것을 적어도 길상은 알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서희가 길상에게 결혼을 제안한데는 그동안 서희를 제일 가까이서 지지해주었고 앞으로도 그럴거라는 기대, 그래달라는 부탁으로서가 아닌가, 나 같아도 고민했겠다.

6권의 주 내용은 간도 지역에서 독립운동의 전개, 그리고 조선땅을 벗어난 그곳에서 조선 사람들이 생존해가는 모습이다. 등장 인물들이 많은 만큼 그들이 제각기 사는 모습, 살아가려고 분투하는 모습만으로도 나 같은 사람은 충분히 재미있더라만 그게 또 지루하게 느껴지는 독자도 없진 않을 것 같다. 앞권에서 어린 아이들로 나오던 홍이, 두만, 봉순, 두메, 거복, 석이 등은 이제 성인이 되어 각기 자기들의 앞날을 결정해가는 행보를 보여준다. 부모의 인생이 어떤 방식으로든 자식 인생에 영향을 미치는 것을 보며 새삼 오싹하기도 했다. 부모의 행적을 그대로 닮아가는 삶도 있고 부모의 삶에서 벗어나려 몸부림치는 삶도 있다. 이래 저래 누구도 부모가 만들어놓은 길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없는 듯 하다.

길상과 연이 이어지지 못함에 절망한 봉순은 결국 명기의 길로 들어섰고, 시국을 걱정하여 일을 도모하는 남자들은 많이 등장하나 종교가 다르고 이념이 다르고 신분이 다른 그들의 뜻이 하나의 일치된 행동으로 모아지진 않는다.

길상에게서 답이 나오지 않는 이유가 마음에 두고 있는 여인네가 따로 있기 때문이라는 걸 안 서희는 길상을 대동하고 그 여인네가 사는 곳을 찾아가는 적극성을 보인다. 최치수를 교살한 죄로 처형된 김평산의 큰아들 거복은 일제 밀정노릇에다가 여성편력까지, 조준구 이래 또하나의 평사리 출신 악인으로 등장한다.

갈수록 임이네의 파렴치함이 더해가고 월선에 대한 면목은 더욱 없어지는 가운데 자책감에 괴로와하던 용이는 친구 영팔이 있는 퉁포슬로 벌목일을 하러 떠나 월선은 또 혼자가 된다.

 

'나 명년 봄까지 살 수 있을지....산에 진달래가 필텐데 말예요.'

음성은 진달래 꽃잎이 되고 꽃송이가 되고. 밤길 가는 노새의 요령같이 멀어져 간다.

진달래의 구름이 되고 진달래의 안개가 되고 숲이 되고 무덤이 되고 붉은 빗줄기 붉은 눈송이 붉은 구름바다, 핏빛 같은 붉은 비가 내린다. 칠흙 같은 검은 비가 내린다. 주럭주럭 내린다.

 

-별당아씨의 마지막 순간을 구천이 회상하는 대목 (377쪽)-

 

태어나고 죽는 일만큼 당연한 일이 있을까마는 이 세상에 숙연하지 않고 구슬프지 않은 죽음은 없는 것 같다. 아름다운 문장이라는 생각으로 옮겨 적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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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18-08-31 09: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렇게 정리해주어서 기억을 되살려보내요. 토지 10년 주기로 다시 읽어야지 했는데 실천을 못하네요.ㅠ

hnine 2018-08-31 20:19   좋아요 0 | URL
돌아서면 잊어버리는지라 저도 매권 읽을때마다 이렇게 간단하게라도 기록을 남겨두기로 했어요.
대화체가 많고 줄거리를 대강 알고 있는지라 생각보다 힘들지 않게 읽고 있답니다. 순오기님은 벌써 읽으셨을줄 알았어요 ^^
 

 

어떤 힘든 조건에서 버텨낼 수 있게 하고 싶으면 그 조건에서 있어보기를 여러번 반복하는 훈련보다는 그보다 좀 더 힘든 조건을 몇번 경험하게 하는게 훨씬 효과적인 것 같다.

불과 일주일 전에 낮 최고 39.4도까지 경험하고 나니 어제처럼 32도 정도 날씨는 더운게 아니라 선선하다는 생각까지 드니 말이다. 운동 선수들이 평소에 모래주머니를 차고 훈련을 받는 것도 비슷한 원리 아닐까.

올 여름 온 국민이 든든한 모래주머니 훈련을 받았다.

아직 여름이 끝난 것은 아니지만 곧 맞게될 가을이 얼마나 고맙고 반가울까.

 

 

 

 

 

 

 

 

 

추위는 오기로, 깡으로 라도 버티겠는데 더위는 정말 맥을 못추겠다. 집 밖에 나가면 일단 호흡이 턱 막히고, 뛰는 것도 아니고 최저속으로 걷고 있는데도 숨이 찼다. 동네 산책은 나갈 엄두도 못내고 그저 책 몇권 들고 아파트 단지내 독서실에 가서 에어컨 혜택을 받고 오는 날이 대부분이었다.

위의 나무 사진도 아파트 단지내 어린이집 앞에서 찍은 것들. 복숭아가 탐스럽게 익어가고 있었다.

 

 

 

 

나무보다 새에 대해서는 더 모른다. 그런데 요즘 들어 새에 관심이 간다. 아마도 새벽에 듣는 새소리에 귀를 기울이고부터였을 것이다.

우리 아파트 단지에 완전 우점종인 저 새.

이름이 뭔지 한참을 도감을 뒤적인 끝에 <물까치>라고 자체 동정 (틀릴지도 모른다).

날아다니고 있을 때는 사진 찍기가 어려워 매번 기회를 놓쳤는데, 어느 날 내 방 창문을 열고 내다보니 저렇게 앉아있는 모습이 포착되어 얼른 찍었다. 저 푸른 색 때문에 물까치라는 이름이 붙었을까?

 

 

 

 

 

 

 

 

얘는 국립중앙박물관 뒷길에서 찍은, 우리가 흔히 아는 그 까치.

 

 

 

 

<토지>를 읽다가 가끔 다른 책도 기웃거린다. 현재는 코니 윌리스의 <개는 말할 것도 없고>.

시간여행에 관한 책인데 책 제목만큼이나 특이하고 재미있다.

예전엔 동시에 3권까지도 돌려가며 읽을 수 있었는데 요즘은 두권도 겨우 읽는다. switching이 예전만큼 제깍제깍 안되어서 ㅠㅠ.

 

 

 

 

 

 

책만 읽는 것이 지루했던 어느 날.

사온 가지를 보고 뭘해먹을까 생각하다가 그렸나보다.

가지가 통통하고 예뻣다.

 

가지를 미국에선 egg plant 라고 하는데 영국에선 aubergine이라고 한다.

가지무침을 해먹었는데 물 끓여 찌는게 덥고 귀찮아서 그냥 전자렌지에 돌렸더니 확실히 더 퍽퍽하고 맛이 없었다.

다음엔 귀찮아도 쪄서 무치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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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8-08-26 11: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올 여름 온 국민이 든든한 모래주머니 훈련을 받았다.˝는 훌륭한 글에 박수를...
가지를 그리신 훌륭한 그림에 박수를... 짝짝짝 칩니다.
덕분에 좋은 감상 시간을 가졌습니다.

hnine 2018-08-26 13:57   좋아요 0 | URL
오늘도 방금 산책을 다녀왔는데 선들선들해진 날씨에 긴팔 셔츠를 하나 더 입고 나갔다왔어요. 돌아올땐 비까지 마구 쏟아지더군요.
자연의 힘보다 더 무서운게 있을까 싶어요.
잘 보아주시니 감사드려요. 울적했던 기분이 반짝 개입니다.
 
토지 5 - 2부 1권 박경리 대하소설 토지 (마로니에북스) 5
박경리 지음 / 마로니에북스 / 2012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희망을 가진다는 것은 인간에게 있어 얼마나 큰 약점인가. 절망에서의 탈출 뒤에 온 희열이란 또 얼마나 서글픈 찰나인가.

희망이 일렁이는 금녀 가슴에는 뜻하지 않았던 조바심이 아프게 저 바다의 파도가 방천을 치듯 쉴 새 없이 밀려오고 있는 것이다. 빼앗길 그 아무것도 없는 사람에겐 불안이 없다. 지금 금녀가 가져보는 앞으로의 자기 운명에 대한 기대와 흥미가 과연 희망적인 것인지 그 어떤 실마리도 잡아보지 못한 채 방향도 알지 못한 채 악몽 속에 허덕여온 여자는 희망 그 자체를 겁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354쪽)

 

5권부터 이야기 배경이 하동 평사리에서 간도 용정으로 바뀌면서 책 속에 등장하는 인물에도 들고 남이 있다. 평사리에 남아있는 사람 (조준구 가족), 서희 일행으로 함께 용정으로 이주한 사람 (길상, 용이, 임이네, 월선, 김훈장), 이전부터 용정에 살고 있던 사람 (공노인, 옥이네, 심금녀 등) 이 등장한다.

평사리에서 소작을 부쳐 부와 권세를 유지하던 최참판가였다면 용정으로 와서 서희는 공노인의 조언과 길상의 도움으로 새로이 장사에 뛰어든다. 서희 자신이 살 거처를 새 터전에 새로 짓고 논을 부치는 대신 가게들을 지어 적당한 자들에게 장사를 하게 한다. 그러니까 요즘으로 치면 상가임대업이랄까. 어찌 양반가의 혈통으로서 장사로 치부할수 있냐며 김훈장은 노하지만 서희의 목표는 무슨 일을 해서든 다시 일어서서 고향에 돌아가 최참판가의 주인 자리를 되찾는 것이라는게 5권에서도 확실히 드러난다.

혼기에 이른 서희는 아버지 최치수와 친구 사이였던 이동진의 아들 상현이 서희를 마음에 두고 있음을 알고 있지만 그의 구애는 의남매 사이를 맺자는 요청으로 돌려버리고 대신 지금까지도 그래왔고 앞으로도 자신의 목표를 향한 삶에 동반자로서 적격자라고 생각, 길상에게 먼저 결혼하자고 제안한다. 오히려 길상은 과수댁 옥이네에 마음을 품고 있던 차, 윤씨부인의 은혜를 떠올리고 오로지 자기 의지대로 자기 앞날을 결정할 수 없는 자신의 입장과 상황에 혼자 답답해하며 울분을 터뜨린다.

5권에 처음 등장하는 인물중 한 사람 심금녀. 무책임한 아버지때문에 야비한 김두수에 팔렸다가 도망쳤지만 사랑했던 윤이병에게서도 배신을 당하고 인질로 잡히기도 하는 고난의 여정을 걷는 처자이다. 맨 위 인용문장은 그 금녀를 묘사한 부분이다. 희망이 절망으로 반복되는 삶을 경험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생각, 이해할 수 있는 심정이다. 작가는 과연 앞으로 금녀의 앞날을 어떻게 보여줄지 궁금하다. 희망 자체에 겁을 먹는 지경까지 그녀가 걸어왔을 삶이 상상만으로도 애처롭다. 

토지의 중심 인물은 꼭 서희가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목표가 뚜렷하고 그것을 이루기 위한 삶을 살아가려는 의지가 확고한 그녀의 캐릭터는 단순히 착한 사람이냐 악한 사람이냐 라는 단순하고 일률적인 잣대로 분류할 수 없을 것 같다. 본보기가 될만하고 존경받을 만한 인품을 가진 인물을 소설의 중심 인물로 내세우기 보다는 기존의 다른 소설에서 보여지지 않는 독특하고 뚜렷한 성격의 인물을 내세우고 싶은 것이 작가의 의도가 아니었을까 짐작해본다. 그래서 서희라는 인물은 토지의 대표 인물이지 꼭 중심 인물은 아닐 수도 있지 않을까. 개인적인 생각일지 모르나 작가의 애정이 토지에 등장하는 다른 인물들에서도 골고루 느껴지지 서희에게서 특별히 더 느껴지는 것 같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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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 4 - 1부 4권 박경리 대하소설 토지 (마로니에북스) 4
박경리 지음 / 마로니에북스 / 2012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한곳을 꿋꿋하게 지키며 평생을 사는 일은 현실에서도 드물다. 하물며 소설에서야.

이 당시 상황은 조준구가 김훈장에게 설명해주는 부분에서 독자들에게 전달된다. 1905년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 조선과 만주에서 일본세력이 확장된다.

조준구가 일진회회원들과의 대화 중에 민영환, 이용익, 최익현, 김옥균, 손병희 등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인물들의 이름을 언급함으로써 친일, 수구, 동학을 아우르는 시대상황을 작가는 종합적으로 정리하여 독자들에게 알려주고자 한다.

마음속으로 서희를 좋아하는 조준구의 아들 병수. 자신의 신체적 조건, 자기 가족에 대한 떳떳지 못한 감정으로 병수는 자기 주제에 서희를 좋아하는 것 조차 수치스런 짓이라고 애써 억누른다. 혼자 지내는 시간이 많은 병수는 생각이 많은 인간. 부모를 닮지 않는 자식도 있을수 있구나 싶다.

"생각할수록 모르겠어. (...) 날마나 해는 동쪽에서 서쪽으로 가고, 그게 세월이란 말일까? 그래서 사람들은 늙어가고 죽고 또 아이가 태어나고 자라는걸까? 세월, 시간, 그게 뭐길래?

해가 뜨고 달이 뜨고 또 지고 사람이 죽고 아이가 태어나고, 알수 없군. (...) 세월은 바람일까? 바람이 사람들을, 이 세상에 있는 것을 어디로 자꾸 몰고 가는걸까?" (171쪽)

상대해주는 사람이 없으니 혼자서 이런 생각에 빠지기 좋아하는 병수. 다분히 시인이나 철학자의 소양이 있어보이지 않는가.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이 책에 나오는 많은 인물들중 유일하게 순수한 '사고'를 하는 인물이다. 여기엔 어려서부터 어머니 홍씨로부터의 정신적 학대가 큰 몫을 했다고 보면 슬픈 일이긴 하지만 말이다. 특별히 조준구와 홍씨 사이에 이런 성향을 가진 자식을 설정하여 넣은 작가의 심중을 헤아려보고 앞으로 병수가 어떤 길을 가게 될것인지 궁금해졌다.

부모, 할미 모두 곁을 떠난 서희를 지켜주던 수동이도 죽자 서희는 슬퍼하는 대신 집안을 지켜내겠다는 각오를 다진다.

"모조리, 다아 잡아가라지. 하지만 나는 안될걸. 우리집은 망하지 않아. 여긴 최씨, 최참판 댁이야! 홍가 것도 조가 것도 아냐! 아니란 말이야! 만의 일이라도 그리 된다면 봉순아? 땅이든 집이든 다 물속에 처넣어버릴테야. 알겠니? 난 그렇게 할 수 있어. 내 원한으로 불살라서 죽여버릴테야. 난 그렇게 할 수 있어. 찢어 죽이고 말리어 죽일테야. 내가 받은 수모를 하난들 잊을줄 아느냐?"(152쪽)

할머니 윤씨부인의 카리스마와는 다른 급의 카리스마이다. TV드라마에서도 찢어 죽이고 말리어 죽일거라는 저 대사 그대로였다.

나라 정세가 을사보호조약까지 맺어지는 지경에 이르자 마을에서 가장 먼저 가장 심하게 분개한 김훈장은 가만 있을 수 없다며 마을을 떠나 일을 도모해보려 하지만 별 성과없이 돌아오고, 마을 분위기가 흉흉해진 가운데 용이는 월선에게 전에 한동안 살다왔다던 간도는 어떤 곳이더냐고 묻는 대목이 나온다. 작가는 이렇게 복선을 깔고 있다.

조준구가 최참판네를 차지하고 앉아 마을 소작인들에게 과도한 수곡을 요구하고  나라 정세마저 날이 갈수록 불안하니 평사리 사람들의 마음은 동요한다. 윤보와 용이를 포함한 마을 장정들은 마침내 날잡아 모여서 최참판 집을 습격하지만 삼수의 배신으로 이 정보를 듣고 미리 몸을 숨긴 조준구를 찾아내지 못하고 마을을 떠나 의병활동에 가담하러 갔다가 이제 앞으로 평사리에 붙어 살기는 틀렸다고 판단하고 몰래 평사리로 돌아와 남아있던 마을 사람들중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과 가족들을 데리고 간도로 떠난다. 여기에 서희와 길상은 동행했고 봉순이는 동행하지 않았다.

 

사람이 한 평생 사는 동안 익숙한 곳을 떠나는 일은 피해가기 어렵다. 아니, 피해갈 것이 아니라 뭔가를 이루기 위해서는 꼭 있어야 할 과정인 듯 보인다. 이렇게 집단으로 떠나는 일은 좀 더 특수한 경우라고 하겠다.

1권이 1897년 한가위날에서 시작했고 4권까지 내용은 1897년에서 1908년까지, 평사리를 중심으로 펼쳐졌다. 이제 5권부터는 간도가 배경이다. 이야기의 배경이 바뀌니 그동안의 경상도 지역말보다 더 난해한 지역말이 빈번히 등장한다.

"이기 뉘기요? 하동집으 길상이 앙입매 간방으 혼짝 났지비?" (31쪽) 이런 말투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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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8-08-13 17: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좋은 독서 시간을 가지고 여름을 보내시는군요. 저도 예전엔 이어지는 책을 쭉~ 읽곤 했는데
언제부턴가 긴 건 자신이 없어서 포기하게 됩니다.
소설 5부작 중 <일말의 희망>을 살까, 말까 하고 있답니다. 문장이 좋아요.
한 작가의 다섯 권 책이라는 게 유혹적입니다. 3권까지 나왔어요.

˝찢어 죽이고 말리어 죽일테야˝ - 이거 꽤 유명한 대사지요. ㅋ

hnine 2018-08-14 04:38   좋아요 1 | URL
저도 끈기가 없어서 3권짜리도 잘 못 읽는데 이번에는 무슨 맘이 들었는지 모르겠어요. 그런데 생각보다 페이지가 술술 넘어가서 아직은 끈기까지 동원하지 않고 있지만 앞으로 모르지요 20권까지 있다닌까요.
일말의 희망은 요즘 여기 저기 눈에 많이 띄더군요. 저도 관심 두고 있는 책인데 너무 아프고 절절한 이야기일 것 같아서 몸 사리고 있는, 아니 맘 사리고 있는 중이랍니다. 나이 먹을수록 더 멘탈이 약해지나봐요.
원제가 Some hope이던데 원제를 우리말로 절묘하게 잘 번역했구나 생각이 우선 들어요.

[그장소] 2018-08-13 2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게요~ 꽤 여행길이 길고 고단할텐데... 화이팅입니다~^^

hnine 2018-08-14 04:39   좋아요 1 | URL
그장소님, 어디 갔다 오셨어요??? 한동안 안 보여서 궁금했어요.
여행이 긴건 괜찮은데 고단하진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장소님은 이미 다녀오신 여행이지요? ^^

[그장소] 2018-08-19 01:43   좋아요 0 | URL
여름이 혹독해 지금 서울 친정집에 피서(?) 왔어요. ㅎㅎㅎ 날마다 일하느라 책 잡을 시간이 없네요. hnine님은 여름 잘 보내셨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