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둑 일기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84
장 주네 지음, 박형섭 옮김 / 민음사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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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부터 혼란스럽기 시작하여 마지막 페이지에 이를 때까지 이 모든 내용은 문학으로서 쓰여진 것이다, 문학으로서 받아들여야 한다고, 스스로 상기하며 읽어야했던 책이다.

작가가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라 작가의 실제 생활 (그렇다. '경험'이라는 단어보다 '생활'이라는 단어가 어울린다. 경험이라고 하면 웬지 단기간, 끝이 정해져 있는, 단발성의 의미가 떠올려지기 때문이다)을 그린, 제목 처럼 '일기'인데 결코 평범한 일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책 표지에 보이는 저 에곤 쉴레 그림 속 두 남자의 포즈로부터 짐작이 될까?

프랑스 파리에서 사생아로 태어난 장 주네. 그는 태어난지 일곱달만에 어머니로부터 버려졌고 파리 빈민 구제국을 거쳐 다른 집에 위탁되어 성장한다 (그 후 어머니는 주네가 아홉살때 세상을 떠난다). 초등학교를 수석 졸업하고 직업학교에 들어갔으나  절도, 무임승차 등으로 교도소에 수감되었고, 교도소에서 시를 쓰기 시작한다. 탈영, 도둑, 남창 생활 하며 유럽 전지역을 방랑 생활. 다시 교도소에 수감되어 소설과 시를 집필했는데 그의 작품이 어떻게 싸르트르의 인정을 받게 되었고, 장 콕토, 시몬 드 보봐르, 자코메티 같은 유명 작가와 예술가와의 친분으로 이어져서 장 주네의 창작 활동에 중요한 영향과 도움을 주게 된다.

이 책 <도둑일기>를 그의 나이 서른 여덟, 1949년에 발표하였다. 절도죄로 종신형 선고, 문인들의 탄원 덕분에 특별사면, 자살 시도, 전쟁 반대 시위 참여, 인권 운동 단체 투쟁 가담 등, 참으로 순탄치 못한 생활을 하였는데 그러던 중 후두암 증상이 나타났고 7년 후 1986년 파리 방문차 왔다가 파리의 허름한 호텔방에서 숨을 거두었으며 평소 유언에 따라 죽기 전까지 머물던 모로코의 산기슭에 묻혔다. 

작가이기 전에 도둑 생활부터 시작하였고, 그래서 교도소에 수감되었으며, 교도소라는 제한되고 생계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밀폐된 장소 (작품속에서 그는 교도소를 성소(聖所)라고 부르기도 했으며 그곳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 꿈이라고도 했다) 에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

감옥은 내게 최초의 위안을, 최초의 평화를, 최초의 친근감을 주었다. 그것은 바로 불결한 세상 속이었다. 그처럼 고독했기 때문에 나로서는 스스로를 벗으로 삼을 수  밖에 없었다. 나의 외부 세계. 그 무한성, 밤이면 한층 더 완벽해지는 혼란에 직면함으로써, 나는 그것을 신의 경지로 받아들일 정도였다. 그것은 신이 선택한 방법인 시련, 절망의 기슭에서 방황하는 괴롭고 기진맥진한 시련을 통한 것이기는 했지만, 특별히 고려하여 인도된 수많은 주의와 경계의 대상, 사랑받는 구실이 되었을 뿐 아니라 그 수많은 일들의 유일한 목적이기도 했다. (121쪽)

그가 처음 교도소에서 쓴 시 제목이 <사형수>이다. 차라리 교도소에 계속 있었으면 그의 인생이 달라졌을까? 탈영과 절도를 반복하고 불법과 반도덕, 반윤리적인 생활을 일삼았다. 특히 그는 남창으로서 같은 남자들에게 인기있는 여자 역할을 한 사람이었고, 남자들끼리의 사랑, 질투, 성적 행위 등을 책 속에 숨김없이 묘사해놓았다. 이 책은 다름아닌 그러한 그의 생활의 기록이다.

그래도 이 책은 읽을 가치가 있는가, 싸르트르나 장 콕토, 시몬느 드 보봐르의 인정을 받았다는 것이 그렇게 결정적인가, 읽으며 이런 생각들을 안 할 수 없었다. 문학이니까. 논픽션으로 읽지 말고 문학으로서 읽어야지, 하고 생각하려니 그럼 문학이 무엇인데? 라는 물음이 생기기까지 했다.

그가 사용하는 비유나 표현들이 수월하게 읽히지도 않는다. 번역도 의심을 해본다. 자기 세계를 확인하면서도 바깥세계와의 단절을 힘들어하기도 한다. 더럽고 소외된 생활이라고 하면서도 그 생활에 만족하기도 한다. 도둑질을 하면서도 배반을 거부한다. 불법적 생활을 하면서도 신과 신성함에 대해 생각한다.

그럼에도 이 혼란과 이해 안됨 속에서 가끔씩 가슴을 쿵 울리는 문장들이 나타난다. 자기의 감정, 행동, 본질에 대해 사유하고 의미를 붙이고 가치를 찾는 그의 끊임없는 노력의 흔적이 느껴지는 문장들이다.

신성성 (神聖性), 그것은 바로 고통을 유익하게 사용하는 데 있다. 5년 전부터 나는 여러 권의 책을 펴냈다. 나는 그 일을 즐겁게 해 왔지만 이제는 끝을 낼 것이다. 나는 글쓰기를 통해서 내가 추구하고 있던 바를 얻었다. 나에게 가르침을 주고 내 삶을 이끌어 온 것은 나의 체험이 아니라 그 체험을 이야기하는 태도였다. 즉 다양한 일화들이 아니라 예술 작품들이었던 것이다. 삶이 아니라 그 삶의 해석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삶을 환기시키고 그것에 대해 말하고 표현하기 위해 언어가 내게 제공해 주는 것이다. (297)

 

나 같은 독자들을 위해 말해주는 것 같다. 그의 글은 그의 체험으로서가 아니라 체험을 이야기하는 태도로서 읽어달라고. 다양한 일화들이 아니라 예술 작품들이었다고.

더불어, 엉뚱하지만 전혀 무관하지 않은 혼자만의 생각이 결론을 대신한다. 작가이든 아니든, 살아있는 동안 글을 쓴다는 것은 의미있는 작업이라고. 그것은 내 삶을 해석하고 환기시키는 행위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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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봄 관련 사진 모아보기

 

 

 

 

 

 

 

▶ 겨울 동안 스케이트장으로 사용되었던 곳, 철거 작업중

 

 

 

 

 

▶ 브라운과 그린의 선명한 대비

 

 

 

 

▶ 봄 맞이 공연 관람. 서울 가야하나 싶었는데 마침 대전에서도 공연을 한다기에 어제 다녀왔다. 특별히 맘 먹고 남편도 데리고과 함께.

 

 

 

 

 

 

▶  LED 이용한 무대 장치와 연출, 러시아 뮤지컬이라는 점이 돋보였던 공연 <안나 카레니나>

 

 

 

 

 

 

 

 

▶ 물에 담가놓아준 것 밖에 없는데 당근에서 잎이 쑥쑥 잘 자라고 있다. 바로 옆에는 무도 질세라 잘 크고 있는데 그건 아직 사진을 못 찍어놓았다.

 

 

 

 

 

 

이제, 나만 봄 맞으면 된다. 내 마음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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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예산 추사 고택은 추사 김정희가 태어나서 여덟살때 서울 큰아버지 댁으로 양자로 가기까지 자라던 곳이다.

고택 건물은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지만 그 안에 있는 그림 한장은 국보 180호. 바로 세한도이다.

옆에는 추사기념관 건물도 따로 지어져 있다.

바로 위의 사진은 추사기념관에 그의 글씨가 새겨져 있는 연필통이 있길래 그 밑둥을 찍은 것이다.

 

추사고택은 들어가자 마자 사랑채, 그리고 안으로 들어가면 안채, 더 들어가면 그를 모시는 사당 이렇게 세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건물이 주춧돌로부터 충분한 높이를 두고 세워져 있고, 너른 마당, 화려하지 않고 차분한 느낌때문에 몇백년 전 건물임에도 친근하고 또 오고 싶어지는, 편안한 느낌을 주는 곳이다. 그래서 나도 두번째 오지 않았나. 이번엔 기와를 유심히 보긴 했다. 글자가 새겨져 있는 것도 있고 봉황, 도깨비도 새겨져 있는, 우리 나라 특유의 기와.

기와만 모아서 박물관을 만드셨다는 분 생각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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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산 수덕사에 다녀왔다.

나도 이번이 처음 방문은 아니고

워낙 다 알만한 건물들이기 때문에

사진만 올린다.

수덕사 입구 <수덕사 선(禪) 미술관>은 예전 방문때엔 없었던 것 같은데,

이응노 작품들이 주 소장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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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8-03-02 13: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옛날에 문인들 자주 머물렀다던 수덕여관을 다녀오셨군요.
타임머신이 있으면 이곳을 한 번 들러보고 싶어요.ㅠ

hnine 2018-03-02 13:54   좋아요 0 | URL
수덕사에 들어가기 전에 미술관이 먼저 나오고, 수덕여관이 먼저 나오거든요.
다 들러보기 좋은 곳이랍니다.
아래에서 네번째 사진 수덕사 대웅전은 우리 나라 대표적인 목조건물중 하나라고 하고, 대웅전 측면 사진 (아래에서 두번째)은 우리 나라 고건축 양식에 많이 예시되는 사진이기도 해요.
종교와 무관하게 저는 절집 보러 다니는걸 좋아합니다 ^^
 

 

 

 

 

 

 

 

 

 

 

 

 

 

 

무쇠 같은 꿈을 단념시킬 수는 없어서

구멍난 속옷 하나밖에 없는 커다란 여행가방처럼

종자로 쓸 녹두자루 하나밖에 아무것도 없는 뒤주처럼

그믐 달빛만 잠깐 가슴에 걸렸다 빠져나가는 동그란 문고리처럼

나는 공허한 장식을 안팎으로 빛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이 모두 외롭다는 것은 알았어도

밥을 먹고, 걸음을 걷고, 산을 보곤 하는 것이 모두 외롭다는 것은 알았어도

저 빈 잔디밭을 굴러가는 비닐봉지같이

비닐봉지를 밀고 가는 바람같이 외로운 줄은 알았어도

알았어도

다시 외로운,

새로 모종한 들깨처럼 풀없이 흔들리는

외로운 삶

 

 

은하수야 새털구름아 어디만큼 가느냐

배거번드 (vagabond) 처럼 함께 흐르고 싶다

만돌린처럼 외로운 삶

고드름처럼 외로운 삶

 

 

 

 

= 장석남 시 <자화상> 전문 =

 

 

 

 

 

 

 

 

 

 

 

 

(서른 넷에 이런 시를 쓰다니

사람 마음이 꼭 생물학적인 나이대로 익어가는 것은 아닌가보다.

 

첫째연 굵은 글씨체 부분은 시인 자신을 비유했다고 생각되어 표시해본 것이다.

저 구절을 위해 시인은 언어의 바다 속을 짧지 않은 시간 헤엄쳐 다니지 않았을까?

여행가방. 그 안엔 속옷만 그것도 구멍난 속옷만 들어있는, 텅 비다시피 한 가방이고,

뒤주. 쌀이 가득 들어있는 뒤주가 아니라 밑천 종자로 쓸 녹두만 겨우 들어있는 뒤주이고,

문고리. 안이 비어있어 형체없는 달빛만 가끔 잠시 (겨우 그믐에만) 지나가고 마는 문고리이다.

 

단념시키지 못할 무쇠같은 꽃이

사람들 마음속 저마다 있을텐데

잊고 사는 경우가 대부분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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