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를 에듀아르 잔느레"라는 본명보다 "르 코르뷔지에"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있는 그가 현대건축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것에 대해 의의를 가질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밤새 내린 눈으로 고속도로가 괜찮을까 잠시 염려를 했지만 늘 그렇듯이 다녀올때는 가길 잘했다는 뿌듯함으로 돌아올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리고 날씨가 이런 날은 오히려 평상시보다 도로에 차가 적을지도 모른다는 생각하고 나선 길이다. 정말 그랬다. 더구나 낮이 되니 해까지 쨍하고 나서 전시를 보는 동안은 겉옷을 벗어 손에 들고 다녀야했으니까.

예술의 전당 한가람디자인미술관에서 르 코르뷔지에 전이 열리고 있다.
코르뷔지에의 건축물 17개가 2016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것을 기념하기 위한 특별기념전답게, 8개 방으로 나뉜 전시장이 꽉 찬 느낌이었다.
평일엔 모든 전시물의 사진 촬영이 허용된다는데 주말인 어제는 첫번째방과 마지막방에서만 사진 촬영이 허용되었다.
전시장에 들어가자 그의 연대표와 함께 천장에 국기가 매달려있는데,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17개 건물이 소재한 일곱개 국가의 국기라고 한다.
코르뷔지에는 1887년 스위스에서 시계장인 아버지와 음악을 하는 어머니 사이에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를 이어, 그리고 스위스에서 발달한 산업이기도 해서 처음엔 시계 만드는 일을 하기도 했으나 그가 정말 좋아하는 것은 그림을 그리는 것이었다. 화가가 되고 싶어하는 그가 그림을 그리는 것을 보고 너는 건축을 해보는게 어떻겠냐고 그의 건축가로서의 자질을 처음 알아보고 권유한 사람은 학교 선생님 레플라트니였다. 그 단서가 되는 숲을 그린 그림이 전시장에 있었는데 크지 않은 그림이지만 금방 보기에도 과연 숲을 풍경으로서가 아니라 도식화 하여 그린 것을 읽어낼 수 있었다.
학교를 졸업하고 그 당시 문화, 예술의 중심지라고 할 수 있는 파리로 이주하여 건축설계사무소에 들어가지만 건축을 배워본 적이 없는 그에게, 더구나 파리에서의 생활은 적응하는데 무척 힘들었다.
그러던 중 친구와 함께 떠난 동방으로의 첫 여행은 그에게 건축가로서 눈을 뜨게 하는 계기가 된다. 터키 이스탄불, 세르비아, 루마니아, 불가리아 등을 여행하며 그는 "천상이 이렇게 화려할까" 라고 표현했듯이 건축이 태양아래 벌어지는 찬란한 유희이자 영혼의 긴밀한 체계임을 느낀다. 그리스 파르테논 신전에서는 거의 한달 동안 머물며 그림을 그렸으며 박물관에서는 건축의 모티브를 연구했다. 그러나 과거의 건축물에서 받은 감동과 느낌을 그대로 재현하고자 했다면 오늘날의 코르뷔지에는 없었을 것이다. 오히려 그는 콘크리트를 재료로 하였고 "집은 살기 위한 기계다"라는 말에서 보여지듯이 인간을 위한 건축을 지향했다. 그것은 그때까지 지켜져오던 신을 위한 건축, 신을 염두에 둔 건축 양식에 익숙한 그 당시 사람들의 많은 반발을 사기도 했다.
전시장에는 그가 여행중 직접 촬영한 사진과 많은 스케치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는데, 그는 늘 10x17cm 크기의 크로키 수첩을 분신처럼 가지고 다니며 80여가지 색깔의 색연필로 그림을 그리고 기록을 하고 관찰과 사고를 축적해나갔고 이것이 그를 거장으로 이끈 습관 중 하나라고도 한다.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17개 건축물은 모두 콘크리트 건축물이다.
이게 세계문화유산? 이란 생각이 들 수도 있는 이 작고 소박한 바닷가의 집은 코르뷔지에가 말년에 자기 어머니를 위해 지어드린 집인데 그래서 이름도 작은 집. 하지만 그의 건축물에서 눈을 돌려 주위의 빛이 어떻게 들어오는지, 어떤 조경, 어떤 배경위에 집이 들어앉아 있는지를 봐야 한다. 이 집의 경우에도 집의 크기를 압도하고 남을 바다를 바로 앞에 두고 있으며, 집으로 들어오는 빛의 방향이 단순한 우연이 빚어낸 것이 아님을.

일본 소재 <서양근대미술관> 건물. 나중에 설명할 필로티 양식이 여기에도 드러나고 있다.

코르뷔지에 건축을 얘기할 때 꼭 기억해야 할 <사보아 저택>
1928년 지어졌는데 지금으로부터 거의 90년 전 건물이 지금 봐도 "현대 건축"이라고 부르기에 어색함이 없다.
1921년부터는 그의 그림에도 나타나듯이 장식을 최대한 없애고 사물의 본질에 도달하려는 그의 노력이 건축에도 나타나서, 권위와 지배를 위한 건축 양식이었던 것이 오직 인간 중심, 인간이 살기 위한 건축으로 개념을 새롭게 창안하였고 이것이 현대 건축의 5원칙으로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 현대 건축의 5원칙
1. 필로티 (Pilotis): 지면에서 건물을 띄우는 방식이다. 건물의 1층을 비움으로써 1층을 도시적 공간, 공적 공간으로 활용할 수 있게 된다.
2. 옥상정원 (Roof garden): 필로티로 띄워서 생긴 1층의 면적 손실을 옥상정원을 통해 휴식 공간으로 만회한다.
3. 자유로운 파사드 (Free facade, 건축적 산책로): 과거의 벽돌을 쌓아서 올리는 조적식 건축물은 외벽 (파사드)이 건물을 지지하는 목적으로 사용되기 때문에 파사드 디자인에 한계가 있었다. 하지만 철근 콘크리트 기둥을 사용하면서 건물의 하중을 분산하는 건축방식이 가능해졌다. 건축가가 파사드, 즉 건물 전면의 원하는 곳 어디에나 문과 창을 자유롭게 그려넣게 된 것이다.
4. 자유로운 평면 (Free plan): 두운 벽으로 공간을 막아버려야만 했던 과거의 건축 패러다임을 얇은 철근콘크리트 기둥으로 혁신시킨 돔-이노 이론으로 인해 벽면의 하중 부담은 사라졌고 벽이 필요치 않은 공간은 자유가 넘쳐났다. 기존의 벽 구조에 연속성과 개방성을 부여.
5. 가로로 긴 창 (Horizontal window): 조적식 건축방식에서는 창문을 수직으로만 확장할 수 있었다. 돔-이노 방식을 적용하면 창문을 수평으로 확장하는 것이 가능해져 빛을 실내로 더 많이 들일 수 있게 되었다. 이는 일조량이 부족한 서유럽의 기후적 단점을 기능적으로 풀어냄과 동시에 파노라마적 풍경을 즐길 수 있다는 디자인적인 강점을 지닌다.

자신은 카톨릭 교도가 아니라는 이유로 처음엔 이 성당 건축 제안을 거절했었다는, 그 유명한 롱샹 성당이다. 1955년 건축.
여기서 보기 전에도 사진으로 낯익은 성당이고 전시장에서 역시 사진으로 보고 있음에도, 인간의 머리에서 저런 건축물이 또 나올 수 있을까, 감동을 넘어서 경외감 마저 들었다.

3D 화면으로 보여주는 영상자료를 보니, 어느 방향에서 보느냐에 따라 수녀의 모자쓴 뒷모습이기도 하고, 열린 손이기도 하고, 안아주는 모습이기도 하며 여객선의 형태이기도 했다.
저 랜덤하게 뚫어 놓은 듯한 창으로 들어오는 빛은 인공 조명이 주는 밝기나 화려함과 비교가 되지 않는, 숭고함과 환상의 퍼포먼스를 하고 있었다. 사진과 영상물로 보는데도 눈물이 핑 돌 정도였는데 그런 느낌을 받는 사람이 어디 나뿐일까. 유명한 건축가 프랭크 게리도 "나는 롱샹 성당을 방문할 때마다 눈물이 난다..."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이 전시물을 조금 지나면 그가 평소에 모아두었다는 솔방울, 조개, 게 껍데기 등이 유리 상자안에 전시 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 성당의 지붕은 그중 게 껍데기의 형태를 응용한 것이라고 한다.
전쟁과 산업혁명의 영향으로 도시로 몰려든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작은 공간이라도 편안하게 살 수 있는 집이라고 생각한 코르뷔지에는 콘크리트를 이용한, 간편하고도 실용적인 새로운 건축 방식을 구축하게 되는데 이것이 위에 말한 현대건축 5원칙의 바탕이 된다.
집은 살기 위한 기계라고 생각한 (여기서 기계는 부정적이고 차가운 의미의 기계가 아니라 "도구"의 개념에 가깝다) 그의 생각은 모듈러 (Modulor) 이론과 돔-이노 (Dome-ino) 시스템을 창안하기에 이른다.
* 모듈러 이론: 사람이 팔을 들어올린 높이, 즉 사람이 몸을 기준으로한 수치들이 건축의 핵심이 된다는 이론. 좁은 공간에서 사람이 움직이기에 불편함이 없는 최적의 황금 수치를 건축에 도입하고자 하는 것으로 그 당시 많은 사람들의 반발을 샀으나 아인슈타인의 지지를 얻어 밀고 나갈 수 있었다.
* 돔-이노 시스템: 집을 뜻하는 돔 (Dome)과 이노베이션 (Innovation)의 합성어로서 적은 돈으로 빨리 짓는다는 기획. 전쟁 직후 새로운 건축 방식의 필요성을 절감하여 얇은 바닥판과 그것을 지탱하는 기둥, 오르내릴 수 있는 계단을 집의 구조로 고안한 것이다.

이런 그의 생각이 반영된 <유니테 다비타시옹>이다. 쉽게 말하면 최초의 현대식 아파트, 주상 복합 공동 주택이라고 보면 되는데, 1945년 건축이지만 적은 비용으로 실용적으로 살 수 있는 주거 공간을 목적으로 지어진 건축물임을 눈으로 봐도 알수 있으며, 지금까지도 전 세계, 인구가 많은 도시에 구현되고 있는 주거형태이다.
이 건물은 프랑스 마르세이유에 있는데, 위에서 말한 현대건축 5가지 요소가 역시 반영되어 있고, 이곳을 방문할 계획이 있는 여행객이라면 미리 인터넷으로 예약을 하면 실제 이곳에서 투숙이 가능하다고 한다.
참고로 우리 나라 최초의 주상복합 건물은 1968년 건축가 김수근이 코르뷔지에의 필로티 양식을 적용해서 건축한 세운 상가이다.

인도의 찬디가르에 조형물로 세우고자 그가 그린 그림 <열린 손>



이 열린 손 상징물이 세워지기를 바라는 마음은 코르뷔지에가 죽기 한달 전, 앙드레 말로에게 남긴 유언에 나타나있다.
"친애하는 앙드레 말로에게,
내 동료들과 친구들이 이 세상 사람들 모두에게...
이 열린 손 상징물이 평화로운 찬디가르의 하늘 아래 건립될 수 있도록 저 르 코르뷔지에가 마지막 간절한 도움을 청합니다"
그는 43세라는 늦은 나이에 모델 출신 이본느와 결혼하여 평행 자식 없이 살았는데, 그의 그림과 편지에는 부인에 대한 사랑이 숨김없이 드러나고 있다. 말년에는 바다를 앞에 두고 4평짜리 통나무집을 짓고 부인과 함께 살다가 부인이 먼저 세상을 떠나자 여든 가까운 나이까지 이곳에서 혼자 살다가 의사의 권고에도 불구하고 늘 즐기던 대로 바다에서 수영을 하다가 1965년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말년을 보낸 통나무집을 이번 전시에 그대로 재현시켜 놓아서 관람객이 실제로 그 안에 들어가 볼 수 있게 해놓았다.


"르 코르뷔지에 부부는 이곳을 작은 궁전이라고 불렀다"
4평짜리 통나무집이지만.

통나무집 안의 그의 책상.

침대.

벽에 붙어있는 편지와 그림들



사진을 올리지 못했지만 사실 전시장에는 거의 건축물보다 그의 그림이 더 많이 전시되어 있다. 그가 처음에 되고 싶어했던 것도 화가이고, 죽을 때까지 글쓰기와 더불어 그림을 손에서 놓지 않았기 때문이고, 그의 그림을 보면 건축하는 사람이면 어느 정도 갖추고 있는 정도의 그림 실력이 아니라 진정 화가 코르뷔지에라고 할 수 있는 정도로 뛰어나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는 "내 예술적 창조의 비결은 1918년 부터 날마다 그린 회화 작품에 있다"고 했다.
초기의 그림은 밑그림이 다 비치는 수채화였다가, 당시 한창 유행하던 입체파의 큐비즘 성격이 드러난 그림이 많은 시기를 거쳐 1921년 부터는 병, 물주전자 등을 대상으로 정물을 즐겨 그렸는데 장식을 없애고 사물의 본질에 도달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볼 수 있겠다. 악기중에서는 바이올린의 모습도 많이 보이는데 바이올린이라는 악기의 곡선 형태가 그의 건축적 영감에 기여한 바 있을 거라는 생각이다.
회화와 건축을 따로 보지 않은 그는 회화나 건축이나 모두 공간으로 보았다. 화면은 표면이 아니라 공간이라면서, 마치 건축물의 평면을 다루듯이 회화적 공간을 통제했고 "설계했다". 실제 <흰사발에 대한 연구>라는 그림을 보면 사발이 마치 공간에 떠있는 것처럼 보인다.
코르뷔지에는 오장팡이라는 사람과 입체파에서 더 진화된 미술로서 장식을 거둬내고 본질만 표현하자는 "순수주의"라는 사조를 만들기도 했고, 이러한 생각은 그의 건축과 일맥상통한다.
1930년대 오면서 그는 스위스에서 프랑스 국적으로 귀화하였고, 그림과 건축에 대한 비평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그의 본명 대신 아버지와 외할아버지의 이름을 딴 르 꼬르뷔지에라는 이름을 쓰기 시작하였다.

전시장내에서 그의 그림 대부분은 사진 촬영을 할 수 없었으므로 전시장을 나와 기념품 샵에서 팔고 있는 그림으로 대신한다.





결국엔 "본질"만 남는다고 한 코르뷔지에.
이 천재적인 건축가의 전시 제목이 "4평의 기적" 이다.
내 인생의 본질과 만날 수 있는 더 할 것 없는 완전한 공간으로서 4평이면 충분히 행복하다고 했다.
명상과 성찰의 공간.
나이 들면서는 오히려 꼭 셔츠에 넥타이, 모자를 단정하게 차려입었다는, 예민하고 까탈스러운 화가, 그리고 건축가, 그리고 철학자.
"사유가 없으면 건축도 없다" - 르 코르뷔지에 -
어디 건축 뿐일까. 사유가 빠진 채 무엇인들 제대로 존재한다고 할 수 있을까.
사유는 없고 욕망과 잡념만 가득한 삶을 살고 있는 우리.
집에 돌아와 남편과 아이에게도 가서 보고오라는 말을 열번은 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