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에 다녀왔다.

마트가 아니고 시장엘.

요즘은 마트에서 장보는게 훨씬 더 쉽다. 인터넷으로 장보기가 가능하기 때문에 집 밖으로 나가지 않아도 되고, 무거운 짐을 들고 오지 않아도 된다.

어제 굳이 버스, 지하철 갈아타면서 시장에 간 이유는 명절을 이틀 앞두고 있어서라기 보다 아들 때문이었다.

차려준 점심을 먹다 말고 자기가 해달라는 걸 안들어준다고 하자 화를 내며 수저를 식탁위에 탁 내려놓고 일어나 방으로 들어간 아들. 그렇다고 쫓아 들어가 점심이나 다 먹으라고 다독거리는 그런 엄마도 아니다 보니 혼자 삭이는 수 밖에.

상을 다 치우도록 울적하고 속상한 마음이 가시지 않아 나선 길이었다. 시장으로!

 

 

 

 

 

 

 

처음 가보는 시장은 아니었지만 명절을 앞두고 가보긴 처음이다.

사람이 제법 많은 걸 보니, 다니기는 좀 불편했지만 한산한 시장을 보는 것 보다 마음이 좋았다.

 

 

 

 

 

 

세상에, 차례 음식 만들지 않아도 되겠네. 각종 전은 물론이고 어적, 산적까지, 위에 고명까지 얹어놓아서, 그대로 가져다가 접시로 옮겨놓기만 하면 되게 포장된 음식들이 널려있었다.

 

난 아직은 괜찮지만 혹시 모르지. 몇 년 후면 이런 방법을 택할지. 처음엔 하나부터 열까지 다 내가 직접 만들어야 되는 줄 알고 식혜까지 인터넷에서 레시피 찾아가며, 없는 솜씨로 만들어오다가 요즘은 그냥 만들어진 식혜를 사고 있지 않나. 자신있게 말할 일이 아니다.

 

 

 

 

 

 

 

이런 한복 집도 정말 오랜만에 본다.

우리 아들 키울때 저렇게 한복을 사서 입힌 적이 있던가 기억을 더듬어 보았더니, 사서 입힌 적이 없다. 물려준 것 고맙게 받아서 입힌 적은 있다.

 

 

 

 

 

 

 

 

겨우 밤, 대추, 약과, 차례상과 상관없는 미역, 김, 이런 것들만 좀 샀는데도 가방이 꽉 찼다. 과일도 사고 싶었지만 무거워서 들고 올 자신이 없어 참았다.

그런데 밤과 대추를 kg당 얼마, 이렇게 파는게 아니라 한 됫박에 얼마, 이렇게 팔고 있었다. 얼마만인가. 됫박으로 무언가를 사보는게.

 

'모두들 사느라고 애쓰고 있구나. 파는 사람도, 사는 사람도...'

 

버스 정류장에 내려 터벅터벅 집으로 걸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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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ule 2017-01-27 14: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맨 위에 시장 사진은 묘하게 따뜻하네요. 찍는 사람의 시선이 그랬나. 맨 아래 가방도 정말 예뻐요. 꽤 커 보이는데 또 별로 커 보이지 않아서. 보면 여자들은 큰 가방 긴 치마 좋아하고 남자들은 여자들이 작은 핸드백, 짧은 치마 입는 거 좋아하고 그러더라고요.

hnine 2017-01-27 15:46   좋아요 0 | URL
Joule님, 안녕하세요. 시장은 따뜻하면서도 치열한 곳이더라고요.
할일은 20% 정도만 마쳤는데 너무 일찍 설 준비를 마치게 될까봐 (!), 슬슬 걸어서 동네 서점에 다녀왔답니다. 의도하지 않고 골랐는데 사온 책이 한권은 <어떻게 살 것인가>, 또 한권은 <어떻게 죽을 것인가>네요. 참나...^^ 요즘 저를 자주 멍때리게 하는 생각이 바로 저 제목들과 같기 때문인가봐요.
여자들 큰 가방 좋아하는 것은 얼굴이 작아보이기 때문이라면서요? 남자들이 작은 핸드백, 짧은 치마 좋아하는건 뭐, 두말할 필요가 없겠고요.
사실 오늘도 기분이 별로였는데 Joule님 댓글이라는 비타민 먹고 힘이 납니다.
부디 편안한 연휴 보내시길 바랄께요.
(저 가방은 아른님께서 만드신 가방이어요)
 
플루언트 - 영어 유창성의 비밀
조승연 지음 / 와이즈베리 / 2016년 10월
평점 :
품절


이 책을 다 읽고 보니 제목도 다시 보게 된다. 플루언트 (Fluent).

책의 내용으로 보아 유창하다는 뜻으로 붙인 제목일것이다. 흐른다는 뜻의 flow와 모양새가 비슷하다. 말이나 글을 물 흐르듯이 한다는 것은 곧 유창하다는 뜻이 될테니까. 동종 계열의 단어로 fluid를 떠올린다. 확인겸 그가 책 속에서 권해주기도 한 Oxford dictionary 사이트에 들어가서 fluent라고 쳐본다. 이 사이트에 들어가면 마지막 줄에 그 단어의 어원이 나온다고 했기 때문이다.

과연. 16세기 후반, 라틴어에서 유래한 단어로서 라틴 동사는 fluere.

어릴 때 누구나 읽는 동화 신데렐라 이야기가 나 어릴 때 집에 가지고 있던 동화책에는 제목이 재투성이 아가씨라고 되어 있었다. 신데렐라가 왜 재투성이일까, 어릴 때 무심코 가졌던 궁금증은 나중에 대학에 가서 Vocabulary 공부를 하다가 신데렐라 (cinderella)의 cinder가 재(ash)를 뜻한다는 것을 알고서 풀리게 되었다. 단어는 그냥 외워서 알아가는데 아니라 이렇게 알아가는 재미가 있구나, 그때 처음 느꼈던 것 같다. 그래서 처음 보는 영어 명칭이나 길을 지나다 가게 이름을 보고도 저 이름은 무슨 의미일까, 어디서 유래한 것일까, 왜 저런 이름이 붙었을까, 생각해보는 버릇이 생겼는데, 나는 그냥 궁금해 했을 뿐이지 이 책의 저자처럼 체계있게 찾아보고 공부를 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고보면 몇 개국어를 할 수 있느니, 언어의 천재니 하는 꼬리표는 방송에서 붙였다 하더라도 이 책의 저자는 원래 언어를 전공한 것도 아니면서 확실히 언어에 남다른 흥미와 능력을 가진 것은 맞는 것 같다. 저자에게는 몇개국어를 할 줄 안다는 것이 목표가 아니었고 언어의 기원과 관계, 역사를 파헤쳐 나가다보니 자연히 관련있는 언어들에 능통하게 된 것 같고, 타 지역 언어는 어떻게 다를까 관심이 가다보니 중국어까지 배우게 되었으리라고 본다.

 

구글 번역기의 등장은 언어 학습의 필요성을 감소시킬 것인가?

장기적인 언어 학습 계획을 세우고 공부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구글번역기 등의 기계적 통역 기술이 발달하면 오히려 기계가 따라 올 수 없는 감정 소통까지 가능한 수준의 영어 능력자를 필요로 하는 곳은 더욱 늘어날 것이다. (32쪽)

그러면서 영어로 감정 소통까지 하려면 적어도 매일 1-2시간씩 5-7년의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고 했다. 외국어 공부는 감성투자라는 점에서 연애와 비슷하다나.

 

 

언어 능숙도로는 부족하다

촘스키에 의하면 언어 능숙도란 한 언어의 문법으로 표현 가능한 모든 문장을 만들어낼 줄 아는 문장 생산 능력이라고 했다. 그런데 힘스라는 언어학자는 촘스키의 이론으로만은 부족한데, 언어 능숙도와 함께 소통 능숙도가 합쳐져야만 언어를 제대로 사용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51쪽)

 

만약 하루에 1시간 정도 영어 공부를 한다고 치면 미국인이 유튜브에 올린 동영상, 블로그에 게재한 글, 신문기사, 영미 영화 감상에 30분 정도를 투자해야 한다. 왜냐하면 문법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그 사람이 왜 그렇게 말을 하는지 알려주는 것이므로 저 사람이 왜 이런 상황에서 저렇게 말을 하지? 라는 의문을 많이 품어보지 않은 사람은 문법 이해가 어려울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56쪽)

 

영어는 휘어쓰는 언어 (굴곡형태론, infectional morphology)

한문이 단어를 다루는 방법을 블록 쌓기에 비유하면, 영어는 철사 구부리기에 비유할 수 있다. 영어는 단어를 철사처럼 휘어쓰는데 고수다.

broad (넓다)- breath (넓이)- broaden (넓게 하다) (111쪽)

 

그 언어에 대한 이해가 깊어질수록 문장이 길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짧아진다. (151쪽)

 

Stick (삐죽하고 가는 막대기)와 Style (글씨체, 그사람안의 독특한 무엇)이 무슨 관계?

영어 단어 가계도를 그려보면 그 단어의 비밀을 알 수 있다 (199쪽)

 

형태소 (morphem): 어떤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가장 작은 소리의 단위. 대부분 한 음절로 이루어져 있다. (203쪽)

 

저자가 권장하는 외국어 공부 방법

마치 다이어트의 진정한 만고불변의 진리는 덜 먹고 더 움직여라인 것처럼, 언어 공부의 만고불변의 진리는 명작, 특히 시를 많이 낭독하는 것이다. (254쪽)

1. 시어는 그 언어의 원초적 소리를 귀에 잘 담을 수 있게 해주어 특유의 음감을 쉽게 익힐 수 있기 때문이다.

 

2. 영어 특유의 표현법을 저절로 익힐 수 있기 때문이다.

 

문화독해력에 가장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시는 소네트라는 형태의 영시로, 길이가 13줄 밖에 안 된다. 만약 셰익스피어의 소네트 100편 정도를 골라서 낭독하고 제대로 해석하는 훈련을 해보면 그 안에서 영문법의 거의 모든 형태와 구어체적 변형을 접할 수 있고, 영어에서 가장 흔한 비유법, 그리고 영어의 근본이 된 중세 영국의 우주관과 인생관, 세계관까지 이해할 수 있으므로 영어 공부가 좀더 쉬워질 것이다. 이것은 영어 중급자가 고급으로 넘어갈 수 있는 가장 빠른 지름길이다. 물론 지름길인 만큼 조금은 험난하다. 그러나 요즘에는 인터넷으로 셰익스피어 소네트의 한 구절을 치면 현대 영어로 풀어서 한단어 한단어 주석을 달아놓은 영어 웹사이트를 쉽게 찾을 수 있어 옛날 처럼 꼭 문학에 능통한 스승이 없어도 혼자 집에서도 쉽게 공부할 수 있다.  (266쪽)

 

영어 작문 실력을 늘리는데 저자가 사용한 방법

1.영미권 문학자가 쓴 시나 간단한 소설 문단을 읽고 마음에 드는 몇 문장을 골라 힙합 버전, 텍사스 농민 버전, 신문 기사 버전, 학교 리포트 버전 등으로 바꾸어 써보는 연습을 했다.

  • To be or not to be, that is the question. - Shakespeare
  • Should I keep on livin' or should I blast myself. - 2PAC (미국 힙합가수)

 

2. Copychange 방법

좋은 글을 골라 골격은 그대로 두고 단어만 바꿔보는 방식

  • The winter kept us warm. - T.S. Eliot의 <황무지> 중에 나오는 표현
  • The blanket kept us warm.
  • The fire kept us warm.
  • The ramen kept us warm.
  • The stove kept us warm.
  • The socks kept us warm.

이런 훈련은 매일 영어로 A4 반 페이지 정도의 글을 쓰고, MS워드의 문법 체크 기능을 이용하면 더욱 쉽고 빠르게 영어 글쓰기 실력을 높일 수 있다. (268쪽)

 

고전의 의미와 의의

흔히 문화인이란 고전에 능통한 사람을 말한다. 노래 가사, 드라마, 영화 등 문화의 산물은 여러 매체를 통해 현재진행형으로 쉬지 않고 생성되고, 유행이 지나면 사라진다. 그중 어떤 것은 소멸되지 않고 축적되는데, 이렇게 축적된 문화의 산물은 언어를 떠받치는 공통 문화 지식이 된다. 그것을 우리가 '고전'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 문화권 안에 축적된 공통 문화 지식이 많을수록 복잡하고 추상적이며 이론적인 이야기를 더 함축적으로 할 수 있다. 그래서 고전에 대한 지식은 문화인의 척도로 여겨져 왔던 것이다. (270쪽)

한 언어 개념의 공통적인 레퍼런스가 되어 주는 것이 고전의 가장 중요한 역할이다. (271쪽)

 

 

유치원에서 이미 외국어 공부를 시작하여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에 들어가서까지 우리가 영어에 투자하는 돈, 시간, 노력을 생각하면 도대체 우리가 왜 이렇게 남의 나라 언어에 과소비 해야하나 하는 생각을 안해본 사람 없을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글을 몰라도 사는데는 지장이 없지만 불편을 감수하고 살아야 하듯이 영어에 자신이 없으니 불편하다는 것은 일상에서 쉽게, 그리고 자주 마주치는 현실이라는 것이다.

 

영어를 잘해야할 필요가 있는 사람 보다는, 영어라는 언어를 알고자 하는 관심이 있는 사람에게 더 권해주고 싶은 책이다. 후자의 경우 이 책을 더 재미있게 읽을 것 같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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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7-01-24 15: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승연 정말 똑똑한 사람 같아요.
오늘도 <어쩌다 어른> 지난 재방송 받는데
제가 원래 영어는 영 잼병이거든요.
이런 사람이 가르쳐 주는 영어라면 꽤 흥미를 갖고 공부했을 텐데
우리나라 영어 교육은 정말 한심하단 생각이 들더군요.
뭐 남 탓 해 봤자지만 말입니다.ㅠ

hnine 2017-01-24 16:11   좋아요 0 | URL
어딘가 특출한데가 있다 싶어 저도 좀 일찍부터 관심있게 보아왔는데 어머니가 보통 한국의 어머니들의 교육 방식과 좀 다르게, 개방적이면서 개성적으로 형제를 키운 것 같더라고요.
<어쩌다 어른> 조승연편 저도 재미있게 봤어요.
이 책의 내용을 읽어보니, 이런 얘기들을 그동안 하고 싶어서 얼마나 참았을까 싶을 정도로, 자기가 자신있는 분야의 얘기를 그야말로 유창하게, 유감없이 풀어놓았더라고요. 감탄했습니다.

해피북 2017-01-24 2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조승연씨를 비밀독서단에서 처음 봤는데 그때는 그 멤버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있구나 싶은 생각을 했던 기억이납니다. 외국생활을 오래해서 우리나라의 정서와는 약간 다른 사고방식이라고 멤버들이 이야기할때 좀 안타까웠는데, 저두 어쩌다어른을 보고 언어의 기원을 찾아 공부한다는 이야기에 놀라기도했고 대단한 사람이구나 싶은 생각도 했어요. 이분 책 읽고싶었는데 좋은정보 얻고 갑니다^~^

hnine 2017-01-24 21:57   좋아요 0 | URL
고등학교떄 미국에 건너갔으니 외국 생활을 오래하긴 했죠. 조승연 출연 여부와 상관없이 저도 비밀독서단 참 재미있게 봤었어요. 안 읽은 책 소개하는걸 듣고 있어도 어찌나 머리에 쏙쏙 들어오던지.
필요에 의해서, 시험을 위해서 공부하는 사람과는 말할 때 눈빛이 다르다고 느껴지지요.
이 책, 읽어보시라고 추천드릴만 합니다.

세실 2017-01-26 09: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셰익스피어의 소네트 기억할게요^^
유창하게, 유감없이...저도 장바구니에 담아 봅니다.

hnine 2017-01-26 11:10   좋아요 0 | URL
공부를 하다보면 자기 만의 방법을 찾게 되기도 하는데 그때가 바로 어떤 경지? 수준?에 오르는 시점이 되는 것 같아요. 예전에 실험실에 있을 때 보면, 처음엔 다른 사람이 해서 인정받은 방법을 사용해서 익숙대로 실험을 하다가 논문 쓸 때 쯤 되면 자기만의 노하우가 생겨나게 되고, 그러다가 지금까지 그 누구도 하지 않은 방법을 찾아내면 그때 논문을 쓰게 되는 경우 처럼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남이 해서 인정받은 방법대로 잘 따라하는 것만으로도 어느 정도 목적을 달성하게 되는데 그것도 쉽지 않아요. 셰익스피어 소네트 저도 검색해보고 있는 중이랍니다.

서니데이 2017-01-26 14: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hnine님, 즐거운 설연휴 보내세요.
새해엔 소망하시는 일 이루는 한 해 되시길 기원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hnine 2017-01-27 05:53   좋아요 0 | URL
복 많이 받으세요~
 

 

"샤를 에듀아르 잔느레"라는 본명보다 "르 코르뷔지에"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있는 그가 현대건축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것에 대해 의의를 가질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밤새 내린 눈으로 고속도로가 괜찮을까 잠시 염려를 했지만 늘 그렇듯이 다녀올때는 가길 잘했다는 뿌듯함으로 돌아올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리고 날씨가 이런 날은 오히려 평상시보다 도로에 차가 적을지도 모른다는 생각하고 나선 길이다. 정말 그랬다. 더구나 낮이 되니 해까지 쨍하고 나서 전시를 보는 동안은 겉옷을 벗어 손에 들고 다녀야했으니까.

 

 

 

 

 

 

예술의 전당 한가람디자인미술관에서 르 코르뷔지에 전이 열리고 있다.

코르뷔지에의 건축물 17개가 2016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것을 기념하기 위한 특별기념전답게, 8개 방으로 나뉜 전시장이 꽉 찬 느낌이었다.

평일엔 모든 전시물의 사진 촬영이 허용된다는데 주말인 어제는 첫번째방과 마지막방에서만 사진 촬영이 허용되었다.

전시장에 들어가자 그의 연대표와 함께 천장에 국기가 매달려있는데,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17개 건물이 소재한 일곱개 국가의 국기라고 한다.

 

 

코르뷔지에는 1887년 스위스에서 시계장인 아버지와 음악을 하는 어머니 사이에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를 이어, 그리고 스위스에서 발달한 산업이기도 해서 처음엔 시계 만드는 일을 하기도 했으나 그가 정말 좋아하는 것은 그림을 그리는 것이었다. 화가가 되고 싶어하는 그가 그림을 그리는 것을 보고 너는 건축을 해보는게 어떻겠냐고 그의 건축가로서의 자질을 처음 알아보고 권유한 사람은 학교 선생님 레플라트니였다. 그 단서가 되는 숲을 그린 그림이 전시장에 있었는데 크지 않은 그림이지만 금방 보기에도 과연 숲을 풍경으로서가 아니라 도식화 하여 그린 것을 읽어낼 수 있었다.

 

학교를 졸업하고 그 당시 문화, 예술의 중심지라고 할 수 있는 파리로 이주하여 건축설계사무소에 들어가지만 건축을 배워본 적이 없는 그에게, 더구나 파리에서의 생활은 적응하는데 무척 힘들었다.

그러던 중 친구와 함께 떠난 동방으로의 첫 여행은 그에게 건축가로서 눈을 뜨게 하는 계기가 된다. 터키 이스탄불, 세르비아, 루마니아, 불가리아 등을 여행하며 그는 "천상이 이렇게 화려할까" 라고 표현했듯이 건축이 태양아래 벌어지는 찬란한 유희이자 영혼의 긴밀한 체계임을 느낀다. 그리스 파르테논 신전에서는 거의 한달 동안 머물며 그림을 그렸으며 박물관에서는 건축의 모티브를 연구했다. 그러나 과거의 건축물에서 받은 감동과 느낌을 그대로 재현하고자 했다면 오늘날의 코르뷔지에는 없었을 것이다. 오히려 그는 콘크리트를 재료로 하였고 "집은 살기 위한 기계다"라는 말에서 보여지듯이 인간을 위한 건축을 지향했다. 그것은 그때까지 지켜져오던 신을 위한 건축, 신을 염두에 둔 건축 양식에 익숙한 그 당시 사람들의 많은 반발을 사기도 했다.

 

전시장에는 그가 여행중 직접 촬영한 사진과 많은 스케치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는데, 그는 늘 10x17cm 크기의 크로키 수첩을 분신처럼 가지고 다니며 80여가지 색깔의 색연필로 그림을 그리고 기록을 하고 관찰과 사고를 축적해나갔고 이것이 그를 거장으로 이끈 습관 중 하나라고도 한다.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17개 건축물은 모두 콘크리트 건축물이다.

이게 세계문화유산? 이란 생각이 들 수도 있는 이 작고 소박한 바닷가의 집은 코르뷔지에가 말년에 자기 어머니를 위해 지어드린 집인데 그래서 이름도 작은 집. 하지만 그의 건축물에서 눈을 돌려 주위의 빛이 어떻게 들어오는지, 어떤 조경, 어떤 배경위에 집이 들어앉아 있는지를 봐야 한다. 이 집의 경우에도 집의 크기를 압도하고 남을 바다를 바로 앞에 두고 있으며, 집으로 들어오는 빛의 방향이 단순한 우연이 빚어낸 것이 아님을.

 

 

 

 

 

일본 소재 <서양근대미술관> 건물. 나중에 설명할 필로티 양식이 여기에도 드러나고 있다.

 

 

 

 

코르뷔지에 건축을 얘기할 때 꼭 기억해야 할 <사보아 저택>

1928년 지어졌는데 지금으로부터 거의 90년 전 건물이 지금 봐도 "현대 건축"이라고 부르기에 어색함이 없다.

1921년부터는 그의 그림에도 나타나듯이 장식을 최대한 없애고 사물의 본질에 도달하려는 그의 노력이 건축에도 나타나서, 권위와 지배를 위한 건축 양식이었던 것이 오직 인간 중심, 인간이 살기 위한 건축으로 개념을 새롭게 창안하였고 이것이 현대 건축의 5원칙으로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 현대 건축의 5원칙

1. 필로티 (Pilotis): 지면에서 건물을 띄우는 방식이다. 건물의 1층을 비움으로써 1층을 도시적 공간, 공적 공간으로 활용할 수 있게 된다.

 

2. 옥상정원 (Roof garden): 필로티로 띄워서 생긴 1층의 면적 손실을 옥상정원을 통해 휴식 공간으로 만회한다.

 

3. 자유로운 파사드 (Free facade, 건축적 산책로): 과거의 벽돌을 쌓아서 올리는 조적식 건축물은 외벽 (파사드)이 건물을 지지하는 목적으로 사용되기 때문에 파사드 디자인에 한계가 있었다. 하지만 철근 콘크리트 기둥을 사용하면서 건물의 하중을 분산하는 건축방식이 가능해졌다. 건축가가 파사드, 즉 건물 전면의 원하는 곳 어디에나 문과 창을 자유롭게 그려넣게 된 것이다.

 

4. 자유로운 평면 (Free plan): 두운 벽으로 공간을 막아버려야만 했던 과거의 건축 패러다임을 얇은 철근콘크리트 기둥으로 혁신시킨 돔-이노 이론으로 인해 벽면의 하중 부담은 사라졌고 벽이 필요치 않은 공간은 자유가 넘쳐났다. 기존의 벽 구조에 연속성과 개방성을 부여.

 

5. 가로로 긴 창 (Horizontal window): 조적식 건축방식에서는 창문을 수직으로만 확장할 수 있었다. 돔-이노 방식을 적용하면 창문을 수평으로 확장하는 것이 가능해져 빛을 실내로 더 많이 들일 수 있게 되었다. 이는 일조량이 부족한 서유럽의 기후적 단점을 기능적으로 풀어냄과 동시에 파노라마적 풍경을 즐길 수 있다는 디자인적인 강점을 지닌다.

 

 

 

 

자신은 카톨릭 교도가 아니라는 이유로 처음엔 이 성당 건축 제안을 거절했었다는, 그 유명한 롱샹 성당이다. 1955년 건축.

여기서 보기 전에도 사진으로 낯익은 성당이고 전시장에서 역시 사진으로 보고 있음에도, 인간의 머리에서 저런 건축물이 또 나올 수 있을까, 감동을 넘어서 경외감 마저 들었다.

 

 

 

 

3D 화면으로 보여주는 영상자료를 보니, 어느 방향에서 보느냐에 따라 수녀의 모자쓴 뒷모습이기도 하고, 열린 손이기도 하고, 안아주는 모습이기도 하며 여객선의 형태이기도 했다.

저 랜덤하게 뚫어 놓은 듯한 창으로 들어오는 빛은 인공 조명이 주는 밝기나 화려함과 비교가 되지 않는, 숭고함과 환상의 퍼포먼스를 하고 있었다. 사진과 영상물로 보는데도 눈물이 핑 돌 정도였는데 그런 느낌을 받는 사람이 어디 나뿐일까. 유명한 건축가 프랭크 게리도 "나는 롱샹 성당을 방문할 때마다 눈물이 난다..."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이 전시물을 조금 지나면 그가 평소에 모아두었다는 솔방울, 조개, 게 껍데기 등이 유리 상자안에 전시 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 성당의 지붕은 그중 게 껍데기의 형태를 응용한 것이라고 한다.

 

 

 

전쟁과 산업혁명의 영향으로 도시로 몰려든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작은 공간이라도 편안하게 살 수 있는 집이라고 생각한 코르뷔지에는 콘크리트를 이용한, 간편하고도 실용적인 새로운 건축 방식을 구축하게 되는데 이것이 위에 말한 현대건축 5원칙의 바탕이 된다.

 

집은 살기 위한 기계라고 생각한 (여기서 기계는 부정적이고 차가운 의미의 기계가 아니라 "도구"의 개념에 가깝다) 그의 생각은 모듈러 (Modulor) 이론과 돔-이노 (Dome-ino) 시스템을 창안하기에 이른다.

 

* 모듈러 이론: 사람이 팔을 들어올린 높이, 즉 사람이 몸을 기준으로한 수치들이 건축의 핵심이 된다는 이론. 좁은 공간에서 사람이 움직이기에 불편함이 없는 최적의 황금 수치를 건축에 도입하고자 하는 것으로 그 당시 많은 사람들의 반발을 샀으나 아인슈타인의 지지를 얻어 밀고 나갈 수 있었다.

 

* 돔-이노 시스템: 집을 뜻하는 돔 (Dome)과 이노베이션 (Innovation)의 합성어로서 적은 돈으로 빨리 짓는다는 기획. 전쟁 직후 새로운 건축 방식의 필요성을 절감하여 얇은 바닥판과 그것을 지탱하는 기둥, 오르내릴 수 있는 계단을 집의 구조로 고안한 것이다.

 

 

 

이런 그의 생각이 반영된 <유니테 다비타시옹>이다. 쉽게 말하면 최초의 현대식 아파트, 주상 복합 공동 주택이라고 보면 되는데, 1945년 건축이지만 적은 비용으로 실용적으로 살 수 있는 주거 공간을 목적으로 지어진 건축물임을 눈으로 봐도 알수 있으며, 지금까지도 전 세계, 인구가 많은 도시에 구현되고 있는 주거형태이다.

이 건물은 프랑스 마르세이유에 있는데, 위에서 말한 현대건축 5가지 요소가 역시 반영되어 있고, 이곳을 방문할 계획이 있는 여행객이라면 미리 인터넷으로 예약을 하면 실제 이곳에서 투숙이 가능하다고 한다.

 

참고로 우리 나라 최초의 주상복합 건물은 1968년 건축가 김수근이 코르뷔지에의 필로티 양식을 적용해서 건축한 세운 상가이다.

 

 

 

 

인도의 찬디가르에 조형물로 세우고자 그가 그린 그림 <열린 손>

 

 

 

 

 

 

 

 

 

 

 

 

이 열린 손 상징물이 세워지기를 바라는 마음은 코르뷔지에가 죽기 한달 전, 앙드레 말로에게 남긴 유언에 나타나있다.

"친애하는 앙드레 말로에게,

내 동료들과 친구들이 이 세상 사람들 모두에게...

이 열린 손 상징물이 평화로운 찬디가르의 하늘 아래 건립될 수 있도록 저 르 코르뷔지에가 마지막 간절한 도움을 청합니다"

 

 

그는 43세라는 늦은 나이에 모델 출신 이본느와 결혼하여 평행 자식 없이 살았는데, 그의 그림과 편지에는 부인에 대한 사랑이 숨김없이 드러나고 있다. 말년에는 바다를 앞에 두고 4평짜리 통나무집을 짓고 부인과 함께 살다가 부인이 먼저 세상을 떠나자 여든 가까운 나이까지 이곳에서 혼자 살다가 의사의 권고에도 불구하고 늘 즐기던 대로 바다에서 수영을 하다가 1965년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말년을 보낸 통나무집을 이번 전시에 그대로 재현시켜 놓아서 관람객이 실제로 그 안에 들어가 볼 수 있게 해놓았다.

 

 

 

 

 

 

 

 "르 코르뷔지에 부부는 이곳을 작은 궁전이라고 불렀다"

4평짜리  통나무집이지만.

 

 

 

 

 

통나무집 안의 그의 책상.

 

 

 

 

침대.

 

 

 

 

 

 벽에 붙어있는 편지와 그림들

 

 

 

 

 

 

 

 

 

 

 

 

 

 

 

사진을 올리지 못했지만 사실 전시장에는 거의 건축물보다 그의 그림이 더 많이 전시되어 있다. 그가 처음에 되고 싶어했던 것도 화가이고, 죽을 때까지 글쓰기와 더불어 그림을 손에서 놓지 않았기 때문이고, 그의 그림을 보면 건축하는 사람이면 어느 정도 갖추고 있는 정도의 그림 실력이 아니라 진정 화가 코르뷔지에라고 할 수 있는 정도로 뛰어나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는 "내 예술적 창조의 비결은 1918년 부터 날마다 그린 회화 작품에 있다"고 했다.

 

초기의 그림은 밑그림이 다 비치는 수채화였다가, 당시 한창 유행하던 입체파의 큐비즘 성격이 드러난 그림이 많은 시기를 거쳐 1921년 부터는 병, 물주전자 등을 대상으로 정물을 즐겨 그렸는데 장식을 없애고 사물의 본질에 도달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볼 수 있겠다. 악기중에서는 바이올린의 모습도 많이 보이는데 바이올린이라는 악기의 곡선 형태가 그의 건축적 영감에 기여한 바 있을 거라는 생각이다.

 

회화와 건축을 따로 보지 않은 그는 회화나 건축이나 모두 공간으로 보았다. 화면은 표면이 아니라 공간이라면서, 마치 건축물의 평면을 다루듯이 회화적 공간을 통제했고 "설계했다". 실제 <흰사발에 대한 연구>라는 그림을 보면 사발이 마치 공간에 떠있는 것처럼 보인다.

 

코르뷔지에는 오장팡이라는 사람과 입체파에서 더 진화된 미술로서 장식을 거둬내고 본질만 표현하자는 "순수주의"라는 사조를 만들기도 했고, 이러한 생각은 그의 건축과 일맥상통한다.

 

1930년대 오면서 그는 스위스에서 프랑스 국적으로 귀화하였고, 그림과 건축에 대한 비평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그의 본명 대신 아버지와 외할아버지의 이름을 딴 르 꼬르뷔지에라는 이름을 쓰기 시작하였다.

 

 

 

 

 

 

 

 

전시장내에서 그의 그림 대부분은 사진 촬영을 할 수 없었으므로 전시장을 나와 기념품 샵에서 팔고 있는 그림으로 대신한다.

 

 

 

 

 

 

 

 

 

 

 

 

 

 

 

 

 

 

결국엔 "본질"만 남는다고 한 코르뷔지에.

이 천재적인 건축가의 전시 제목이 "4평의 기적" 이다.

내 인생의 본질과 만날 수 있는 더 할 것 없는 완전한 공간으로서 4평이면 충분히 행복하다고 했다.

명상과 성찰의 공간.

 

나이 들면서는 오히려 꼭 셔츠에 넥타이, 모자를 단정하게 차려입었다는, 예민하고 까탈스러운 화가, 그리고 건축가, 그리고 철학자.

 

"사유가 없으면 건축도 없다" - 르 코르뷔지에 -

 

 

어디 건축 뿐일까. 사유가 빠진 채 무엇인들 제대로 존재한다고 할 수 있을까.

사유는 없고 욕망과 잡념만 가득한 삶을 살고 있는 우리.

 

집에 돌아와 남편과 아이에게도 가서 보고오라는 말을 열번은 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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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아의서재 2017-01-24 08: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너무 잘 읽었습니다. ^^

hnine 2017-01-24 10:28   좋아요 0 | URL
너무 길다 싶으면서도 열심히 적어온게 아까와서 긴~ 페이퍼를 쓰고 말았어요. 그런데도 잘 읽어주셨다니 정말 감사합니다. 코르뷔지에는 학교에서 건축이라는 교육을 따로 받아본 적이 없대요. 하지만 미술 시간에 선생님이 그의 자질을 알아봐주셨다는 것이 중요한 출발점이 되었던 것 같고, 그가 모듈러 이론을 발표하고 누구의 동의나 지지도 받지 못할때 뜻밖에 아인슈타인이라는 유명인의 인정을 받을 수 있었던 것도 행운이었고요.
달걀부인님도 혹시 그의 건축물을 직접 보신 적이 있으신지...롱샹 성당은 저도 꼭 한번 직접 가서 보고 싶어요.

새아의서재 2017-01-24 1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여행을 다니면서 자연스럽게 건축물에 관심을 갖게 되긴 하는데 아직 문외한이라서...롱샹성당은 못 가봤어요. 사실 처음 들어봤는데... 이 글 읽고 찾아봐야지 하고 있던 차었어요
^^

디와이밤비 2017-02-02 2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용 중 돔 이노 시스템의 돔은 dome이 아닌 domus의 약자입니다.

hnine 2017-02-02 23:58   좋아요 0 | URL
아, 그렇군요.

에프알 2023-05-20 1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감동적인 글입니다. 고맙습니다.

_ 일본에 소재한 건축물은 서양근대미술관입니다.

hnine 2023-05-20 13:59   좋아요 0 | URL
오래전에 쓴 글인데 읽어주시고 바로잡아주셔서 감사합니다.
내용에 반영하였습니다.
 
라요하네의 우산
김살로메 지음 / 문학의문학 / 2016년 1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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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소설을 좋아해서 편식하듯 읽어온 날들에 비하면, 한동안 읽지 않고 지냈다고 해도 그 기간은 잠깐일지 모른다. 그래도 이 책을 앞에 두고 보니 참으로 오랜만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이 한국 소설과 떨어져 지내온 나를 다시 흔들어 깨워줄 것인가.

표지 안쪽의 저자 소개글을 읽어본다. '안동에서 태어나 열두해를 살고 대구로 터전을 옮겨...'

안동이라. 글을 읽어보기도 전에 안동 출신이면서 내가 좋아하는 작가들 이름이 주루룩 떠오른다. 유안진, 권여선, 김서령... 나의 넘겨짚음일까. 이들의 글은 다르면서도 어딘지 공통점이 느껴졌었다. 뭐라고 분명하게 표현할 수 없는 그 분위기와 느낌. 김살로메의 이 책을 읽고나면 그 느낌이 혹시 더 선명해질까 아니면 그저 우연에 불과한 느낌이었다는 쪽으로 기울게 될까.

열개의 제목에서 처음 골라 읽은 것은 역시 책 제목과 같은 <라요하네의 우산>이었다. 나중에 다른 작품들을 읽고보니 이 작품 속 인물은 그래도 평범했다. 지미와 샌드리라는 이름도, 라요하네라는 특이한 여행지 이름도, 샌드리의 강박증도, 교도소 신세를 지고 있는 것으로도 모자라서 출소하는대로 다른 여자와 살기로 선포한 지미 남편도, 모모의 아르튀르라는 우산과 연결시켜 맺는 결말도. 극히 모범적이고 전형적인 단편을 읽었다는 느낌을 가지고 다음에 읽은 작품은 <알비노의 항아리>. 제목만 봐서는 어떤 내용인지 전혀 짐작이 가지 않는 소설 중에는 다 읽고 나면 그래서 더 좋은 작품이 있고, 제목에 비해 식상한 수준의 내용에 실망스러운 작품이 있는데, 억지스럽지 않으면서 참신한 내용이기가 쉬운가. 수백년이 흘러도 여전히 버티고 있는 가부장적 사고방식, 여자의 희생과 양보가 강요되는 사회의 한 풍경을 들여다보고 있는 나도 그 사회의 일원임을. <암흑식당>의 배경과 인물들은 또 얼마나 기발한지. 암흑식당이라는 아이디어의 출처가 어디든 상관없이, 배경과 주제와 인물 묘사가 딱 떨어진다는 느낌이었다. 개인의 내력은 곧 가족의 내력. 떨치려 몸부림치지 않는한 가족의 내력은 그대로 나의 몸과 정신에 자리잡고 내 인생 속에 되풀이된다. 좋아할 대상으로서 남자를 늘 옆에 두어야만 하는 주인공도, 도벽을 버리지 못하는 여동생도. 그래서 <귀휴>는 인정해야하는 쓸쓸함이었다. 적당히 추리 기법이 도입되어 궁금증에 끝까지 단번에 읽어야했던 <피의 일요일>. 작가는 뻔한 반전의 결말 대신 마지막 한줄에 해당하는 말은 비워둠으로써 이야기의 격이 살아있도록 했다. 이것은 <누가 빈지를 잠갔나>에서도 마찬가지. 누가 빈지를 잠갔을까? 빈지문이란 어떤 문을 말하는지 작품속에서 작가는 이렇게 저렇게 묘사하느라 애썼는데, 정확한 명칭은 몰랐어도 그게 어떤 문을 말하는지 나는 금방 떠오르더라. 지난 일을 기억하고 있다고 할때 과연 나의 기억은 얼마나 객관적일까. 무엇을 기억하고 있느냐보다 어떻게 기억하고 있느냐를 풀어나가다 보면 그 사람의 내면이 술술 드러나게 될 것이다. 빈지문이 무엇인지 금방 알아차렸듯이 <강 건너 데이지>에 나오는 듀란듀란의 리플렉스라는 노래를 일부러 검색해보지 않아도 알만한 세대인 나는 그 오래전의 그룹과 그들의 노래를 작품 속에 끌어다가 쓸 수 있는 작가의 솜씨가 부러웠다. <왼손엔 달강꽃>까지 읽으니 작가가 얼마나 자유자재로 작품 속 인물을 다양하게 설정하는지 탄복하게 되었다. 한지를 뜯어 인형을 만드는 일을 하는 여자. 그녀가 만들고 있는 인형은 단순히 장식품이 아니라 그 속에 이야기가 있고 그녀의 소망이 있고 상처가 있었다. 왼손에 달강꽃을 들려준다는, 인형 만들기의 마지막 단계를 남기고 이야기는 끝난다. 인형의 완성까지가 아니라 완성 이전 마지막 단계를 남기고 끝내는 것은 작가의 의도였을까? <아폴로를 씹었어>의 아폴로는 물론 우주선 아폴로가 아니라 나 어릴 적 구멍가게에서 팔던, 불량식품이라며 먹지 말라고 해서 쉽게 손이 안가던 추억의 주전부리 명칭이다. 글 쓰고 싶어하는 새터민 오희와 다른 새터민 사이의 갈등을 이렇게 의뭉스럽게 이야기 속에서 풀어내다니 작가가 다루지 못할 인물이란 없나보다 싶었다. <아빠는 시인이다>, 비교적 내용 예측 가능한 제목답게 장래 시인을 꿈꾸는 아들이 본 시인 아빠의 이야기이다. 요즘 같은 때 서사시를 주로 쓰는 아빠를 비록 삼류 시인이라고 단정할 수 밖에 없는 아들이지만, 그래서 시인이라는 자기의 꿈을 포기하는 대신 오히려 아빠를 위로하고 싶어하는, 자기의 꿈에 힘을 주고 싶어하는 따뜻한 아들이다.

 

작가는 열 편의 작품 속에서 다양한 인물 상을 그리고 있지만 그들이 딱히 우리 사회의 낮은 지대 인물을 대표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당신의 삶이고 나의 삶이기도 한, 겉으로 드러나는 직업이 무엇인가를 떠나서 우리가 과거에 걸어갔던 길일수도 있고 지금 걷는 길일수도 있는, 그런 인생들의 이야기로 받아들여진다. 그러니 일희일비 하지 말자고.

첫 소설집이라는데 이렇게 문장이 자연스럽고 원숙하고 넘침도 모자람도 없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오래 공들이고 가꾸어온 시간들이 작가에게 주는 보상일까. <아폴로를 씹었어>에서 화자가 새터민 오희에게 그러지 않던가. 쓸 사람은 누가 뭐래도 쓰고 만다고. 쓰지 않고는 못배기기 때문에 쓰는거라고.

 

근래 주로 번역된 소설을 읽으면서 우리말임에도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야, 신경을 곤두세워 어색한 문장을 반복해서 읽어야했다면, 우리말로 우리말답게, 우리 정서에 맞게 잘 쓰여진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대단한 만족이었다. 저자가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문장 여기 저기서 느껴지는 한국적인 정서, 민중의 삶, 우리 전통의 음과 양. 피부를 찌르고 지나가는 짧고 통렬한 재미가 아니라, 낮고 깊게, 서서히 퍼져나가는 재미. 오랜만에 한국 소설 읽는 재미를 만끽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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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22 09: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hnine 2017-02-05 00:36   좋아요 0 | URL
아이쿠, 아닙니다. 그렇게 봐주시니 고맙습니다만 ^^
객관적으로 쓴다고 썼는데 모르겠네요. 저는 아주 재미있게 읽었답니다.

세실 2017-01-22 12: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당신의 삶이고, 나의 삶이기도 한.......우리 주변의 이야기일듯한.
벌써 읽으셨군요.
공들여 쓴 소설, 맛있게 익었죠. 참 멋진 팜므님^^

hnine 2017-01-22 19:33   좋아요 0 | URL
읽던 책이 있었는데 안그래도 진도가 안나가고 있던터라 결국 집어던지고 이 책 부터 읽었답니다. 가독성있더라고요. 다음 소설도 계속 내실게 틀림없다고, 저는 믿습니다!

2017-01-23 00: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1-23 05: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살균제는 꼭 살균제라는 이름표를 따로 달고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쓰는 비누, 주방세제, 화장품, 청소할때 쓰는 세정제 등에 소량씩 들어가있으니까.

 

2017년 1월 11일자 New Scientist에 살균제 관련 기사가 나와있어 읽어보았다.

 

 

What are antibacterial agents and should we avoid using them?

(살균제란 무엇인가. 사용하지 말아야하나?)

=New Scientist 11 Jan 2017=

기사 링크 https://www.newscientist.com/article/2116448-what-are-antibacterial-agents-and-should-we-avoid-using-them/

 

 

살균제란 무엇인가?

 

살균제란 균의 생장과 번식을 방해하는 화학물질을 말한다. 사실 비누 자체는 균이 물에 씻겨 나가도록 도와주는 화학물질일뿐이고 이것으로도 우리를 균으로부터 보호하기에 충분하다. 그래서 손을 씻을때 두 손을 서로 비벼주는 것이 중요한데 균이 손에서 떨어져나가게 하기 때문이다.

 

 

항생제와 살균제는 같은 것인가?

 

그렇지 않다. 항생제도 균을 죽이긴 하지만 사람이나 동물을 치료하는 약물로서만 사용된다.

 

 

어떤 화학물질이 살균제 역할을 하는가?

 

균을 죽인다고 하는 상품이라면 어떤 것이든 모두 살균제를 포함하고 있다. 살균제는 두 그룹으로 나뉠 수 있는데 잔기를 남기지 않는 살균제 (non-residue)와 잔기를 남기는 살균제 (residue)이다. 비잔기 살균제는 알콜이나 염소, 과산화물 같이 우리에게 친숙한 소독제제들이 포함되는데 언제부터인가 트리클로산 (triclosan)이나 트리클로카반 (triclocarban) 같은 화합물이 살균제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이것들은 알콜이나 염소와 달리 잔기를 남긴다. 이론적으로는 이 잔기가 살균제의 효과를 연장시켜 균으로부터 보호 효과가 더 오래 지속되게 한다고 알려져 있다.

 

 

미국 FDA에서 19종류의 살균제 사용 금지 결정 (2016년)

 

2016년 9월 미국 FDA에서는 19종류의 살균제 사용을 금지시키기로 결정했는데 여기에는 위에서 말한 triclosan이나 triclocarban 도 포함된다.

 

 

이유는?

 

이런 살균제를 오래 사용할수록 이런 화합물에 내성을 가지는 균이 출현할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이런 살균제가 계속 사용되어온 일부 지역에서 이미 내성균이 발견되었다.

더욱 염려스러운 것은 이런 살균제 사용이 항생제에 대한 내성균의 출현도 부추긴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살균제 사용을 피해도 균으로부터 안전할까?

 

살균제는 병원이라든가 면역기능이 약화된 가족이 있는 집 (화학요법 치료를 받고 있다든가 기관 이식을 받았다든가) 의 경우처럼 감염균 농도가 높은 장소에서 유용하다. 하지만 일반적인 집안 청소라든가, 손을 씼을 때는 평범한 비누 (normal soap, not an antibacterial kind) 와 물로 씻고 완전히 말리는 것으로 충분하다.

 

 

잘 모르고 무의식중에 살균제를 사는 일이 없도록 하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잔기를 남기는 살균제 (내성균의 출현을 부추키는) 사용을 피하고 싶다면 표백제와 과산화수소 사용으로 전환하는 방법이 있다. 이들은 효과는 있으면서 잔기를 남기지 않는다. 단, 사용할때는 사용방법을 잘 읽어보고 안전하게 사용해야한다.

 

※ 이상은 위에 링크된 기사 내용 중 발췌하여 정리한 것입니다.

 

 

가습기 살균제 사건, 치약속의 살균제 관련 보도로 한동안 시끄러웠다.

하지만 우리가 쓰는 비누, 화장품, 치약 성분 어디에도 "살균제"란 이름으로 표시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구입하는 소비자는 모른다.

Triclosan, Triclocarban. 이 두 성분이라도 기억해놓아야겠다. 하긴, 데x이라는 손세정제는 아예 이 성분 표시마저 숨기고 팔았다고 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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