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찍고 싶었던 것은

햇빛

죽은 것을 살려내는

햇빛

그 기운

눈에 안보이는 그 기운을 찍느라

햇빛의 흔적이 나타나는 곳을 대신 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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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5-17 15: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5-17 15: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stella.K 2015-05-17 15: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우, 그동안 사진 찍는 실력이 일취월장하셨습니다.
아주 선명하고 멋져요. 부럽삼.^^

hnine 2015-05-17 15:45   좋아요 0 | URL
저도 인물을 좀 넣어서 찍고 싶은데 (그래야 덜 심심하다고 바로 전에 읽은 책에서 그러더라고요), 워낙 제가 사는 곳 주위만 뱅뱅 돌다 찍다보니 매번 찍는 것만 찍고 있어요.
진짜 일취월장 할때까지 기다려주세요~~ 고맙습니다.

프레이야 2015-05-17 15: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꽃들은 언제나 어쩜 이리 좋은지요. 요샌 특히 담장마다 줄장미가 한없이 마음을 끌어당겨요^^ 아, 햇살 좋다!

hnine 2015-05-18 15:47   좋아요 1 | URL
꽃이 활짝 피었을 때도 아름답지만 저는 꽃이 지고난 자리, 할일을 다 하고 떨어진 낙엽, 죽은 것 같은데서 다시 시작되는 생명, 그런 모습을 더 눈여겨 보고 싶어요. 제가 더 안목이 있다면 멋진 사진을 많이 찍을텐데, 그냥 제 멋에, 심심풀이 재미로 사진을 찍고 있어요.
세번째 사진은 철쭉인데 꽃잎 다 떨어지고 수술만 저렇게 남아있더라고요. 초록색 열매중 위의 것은 매실이고 아래것은 살구라네요 (이름표에 써있었어요). 제가 보기엔 똑같이 생겼는데...^^

프레이야 2015-05-18 22:45   좋아요 0 | URL
매실과 살구는 진짜 구분하기 어렵네요. 살구는 땅에 떨어진 게 진짜 맛난데ㅎㅎ 철쭉 꽃 진 자리에 애정 담는 나인님의 눈이 참 좋아요. 완경이면 그런 셈일까요? 저는 아직이지만‥

2015-05-17 16: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hnine 2015-05-18 15:49   좋아요 0 | URL
결국 우리가 눈을 통해 형체로 인식하는 것은 빛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맞는 말씀이네요 (끄덕끄덕~)

세실 2015-05-18 2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꽃양귀비가 참 예뻐요~~
고고하면서 화려한^^
내일 도서관 주변 서성거려야겠어요.

hnine 2015-05-18 22:42   좋아요 0 | URL
예, 멀리서도 눈에 확 들어오더라고요.
저렇게 몇 송이 피어도 예쁜데 꽃양귀비가 꽃밭을 이루어피어있는 것을 본적있는데 정말 장관이었어요.
도서관 주변 서성거리시면서 사진도 담아오시면 좋을텐데...^^

Jeanne_Hebuterne 2015-05-22 03: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양귀비는 정말 불같이 활활 타오르는군요. 맹수의 꽃 같아요. 저는 요즘 포식자의 이빨과 발톱이 멋지다는 생각을 하며 살고 있어서 그런지 양귀비가 아름다워 보여요.

hnine 2015-05-22 07:29   좋아요 0 | URL
절대 숨어서 필 수 없는 꽃이지요.
양귀비에서 포식자의 이빨과 발톱을 연상하신 에뷔테른님! 역시 남다르세요. ^^
 
바람이 멈추지 않네 - 어머니와 함께한 10년간의 꽃마실 이야기
안재인 글.사진, 정영자 사진 / 쌤앤파커스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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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대 후반 결혼하지 않은 아들이 어머니와 함께 전국의 절터를 찾아다니며 꽃 사진을 찍었다.

다 큰 아들이 굳이 어머니와 동행한 이유는 처음에 불목하니, 즉 절에서 밥 짓고 물 긷는 일을 하는 사람들의 도움이 필요해서였다고 한다. 불교 방송 PD였으니 불교와 전혀 연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넉살 좋은 편 아닌 아들에게 있어 절집을 방문하고 허락을 구하고 사진을 찍는 작업을 하는데 평소에 절에 꾸준히 다니시는 어머니와 함께 다니는게 더 편했으리라.

이렇게 다니길 10년. 400여 곳의 절터를 다녔다고 한다. 처음엔 절과 그 주위의 자연을 찍었으나 언제부터인가 그 속에 어머니를 넣고 찍기 시작했다고 한다. 꽃을 매만지는 어머니, 기도하는 어머니, 걷고 있는 어머니, 절 앞마당을 비로 쓸고 있는 어머니, 낙엽을 줍고 있는 어머니, 등등 자연스런 어머니가 자연 속에 어우러져 있는 모습이 들어가자 사진의 화면이 덜 심심해보였다고 한다. 내가 보기엔 덜 심심해보이는 정도를 넘어서 사진에 감동이 몇배 더해지지 않았나 생각된다. 사진 속 어머니의 모습은 때로 숨은 그림 찾기를 하는 기분이 들 정도로 아주 작다. 있는 듯 없는 듯 자연 속에 한 점으로 들어가 있을 뿐이다.

서산 개심사, 공주 마곡사, 부안 내소사, 부여 궁남지, 예산 수덕사, 양산 통도사 등, 내가 가본 절도 있지만 아직 못가본 절의 사진이 더 많다. 특히 절이라기 보다 암자라고 해야할 오대산 염불암의 모습은 몇번을 다시 들여다보아야 했는데 저자의 어머니도 처음에 아들 혼자 가서 찍어온 사진을 보고 나와 같은 생각을 하셨나보다. "우리나라에 이런 절도 있나?" 하며 신기해하셨다가 어느 날 그러시더란다. "그 좋은 데는 맨날 혼자만 다니나? 나도 같이 가면 안 되겠나?"

이 책을 구입하지 않더라도 이 절집의 모습, 가을 수목에 들러싸여 소꼽장난 집처럼 놓여있는 염불암과 댓돌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 어머니의 모습이 있는 사진을 한번 보아주시라 아는 분들에게 권하고 싶다. 무슨 말이 필요하랴. 나무에 둘러싸여 세월 가는 것을 겪어내며 낡아가는 절집, 그리고 사람. 결국 사는게 그런거 아니던가.

꽃, 나무가 있는 자연 풍경, 절집 사진을 한 두번 보았던게 아닌데 왜 이 책의 사진들은 특히 더 뭉클한가. 잘 모르겠다. 최근에 보았기 때문에? 가장 나이가 들어 보았기 때문에? 가까이서 찍지 않고 멀리서 조용한 모습을 찍었다. 아름다움을 느끼는 순간 그곳을 향해 한 발짝 다가가는 것이 본능일텐데 이 사진을 찍은 사람은 그러지 않았다. 마치 내가 아주 멀리서 그 풍경을 바라보고 서 있는 느낌이다. 제목처럼 바람 소리만 들릴 뿐 아무 소음 없는 조용하고 솔직하고 무던한 자연 앞에 마치 내가 말을 잃고 바라보고 있는 느낌이다. 아무 이유 없이 눈물이 맺힐 것 같은 그런 느낌이다.

 

바람이 멈추지 않네라는 제목. 그래, 바람이 멈추기를 기대하지 말자. 한두번이면 몰라도 바람을 피할 수만은 없을 것이다. 바람이 들고 남을 느낄 뿐이지.

거의 매일 고속버스를 타야할 일이 생긴 요즘, 책 읽을 시간도 많아졌다.

어딘가 길을 나서게 하고  더불어 나의 생각을 남기는데 사진이 얼마나 좋은 수단이 될 수 있는지, 기록이 될 수 있는지, 다시 한번 확인시켜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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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실 2015-05-16 07: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니와 아들이 모습을, 대화를 상상해봅니다. 참 바람직한 모자사이네요.
나인님은 고속버스타고 공부하러 가실까?
응원합니다!

hnine 2015-05-16 20:44   좋아요 0 | URL
세실님, 공부하러가는거 아니어요 ㅠㅠ
친정아버지께서 입원해계셔서 매일도 아니고 하루 걸러 병원 다녀오느라고요.
아무튼 응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sslmo 2015-05-16 07: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 아침에 제대로 바람들었어요.
전에 언젠가 지하철에서 신발 한짝 떨구셨다던 날 생각났어요. 요즘도 열심이시네요~^^

hnine 2015-05-16 20:46   좋아요 0 | URL
양철나무꾼님 기억력 대단 대단! ^^
그날 왜 서울에 갔었는지 저 자신도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그 사건을 기억해주시네요. 아마 돈벌러 갔거나 한참 그림 배우러 다닐때이거나 둘 중 하나일것 같아요.
오늘 이 책 친정엄마께 드리고 왔어요 사진 구경이라도 하시라고요. 마음 짠한 사진들이 가득이더군요.

해피북 2015-05-16 1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두 양철나무꾼님 따라쟁이 아~~~ 나인님의 글의 마음이 진하게 전해졌어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울컥한 기분... 이 책 살펴봐야겠어요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hnine 2015-05-16 20:48   좋아요 0 | URL
해피북님, 맞아요. 어딘가 모르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울컥한 기분이 드는 내용, 그리고 사진이 들어있는 책이었어요. 구입하지 않으시더라도 도서관 같은데서 혹시 이 책 보시면 한번 눈여겨 봐주세요. 특히 오대산 염불암 나오는 부분이요.
 

 

 

 

"What is your definition of happiness?"

 

설문지 스무 문항 중 하나였다.

지난 주말, 올해 중학교 1학년 조카가 영어 숙제라면서 설문지를 들고 외할머니, 즉 내 엄마를 인터뷰하는 것을 보게 되었다.

가족 중 한 사람을 택하여 자기가 만든 스무 문항의 질문에 대한 답을 듣고 정리하여 제출하는 것이라는데, 조카가 만든 문항 중에 "당신은 행복을 뭐라고 정의합니까?" 라는 저 질문을 보았다.

가족이 모두 모인 자리였으므로 문득 다들 행복을 어떻게 정의할까 궁금해졌다.

 

몸과 마음이 건강한 것, 목표를 달성하는 것, 가지고 싶은 것을 가지는 것 등등, 비슷하면서도 다른 여러 가지 답이 나왔지만 모두 이렇게 말했다 저렇게 말했다 하는 것으로 보아 한마디로 정의하기 어렵기는 마찬가지이다 싶었다.

 

목표를 달성하는 것이라는 답은 우리 엄마의 답. 우리 엄마 다우신 답이다.

"엄마, 그럼 목표를 이루지 못하면 행복하지 않은건가요?"

엄마의 답을 듣고 나는 또 지극히 나 다운 질문을 했고.

 

오늘 아침, 저 질문을 받는다면 나는 뭐라고 대답할까 생각해보았다.

 

나눌 것이 있고, 나눌 사람이 있는 상태

 

행복에 대한 사적인 정의.

나눌 것이란 꼭 물질적인 것을 말하지 않는다.

나눌 사람이라고 했지만 꼭 사람이 아닐 수도 있으리라. 동물, 식물 포함.

 

나중엔 어떻게 바뀔지 몰라 적어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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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실 2015-05-12 12: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나눌 것이 있고, 나눌 사람이 있는 상태......좋은데요.
저는 요즘 햇살 가득한 카페에 앉아 아이스 커피 마시면 이런 저런 얘기하고 있노라면 행복합니다^^
소박하지요? 매일 매일 하고 싶은 일상중 하나. ㅎㅎㅎ

hnine 2015-05-12 13:05   좋아요 0 | URL
나눌 것 (얘기)이 있고, 그것을 나눌 사람이 있는 것 --> 제가 생각하는 행복, 맞네요 ^^
매일 매일 누리시길 바랍니다. 마음에 조금만 여유가 있으면 가능할 것 같아요.

다락방 2015-05-13 09: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어제 나인님의 이 글을 읽고, 그러게, 나도 종종 행복하다고 생각하지만 행복에 대한 정의는 내릴 수가 없네, 라는 생각을 했거든요. 그러다가 올리브 키터리지가 생각났어요.

<올리브는 생이 그녀가 `큰 기쁨`과 `작은 기쁨`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에 달려 있다고 생각했다. 큰 기쁨은 결혼이나 아이처럼 인생이라는 바다에서 삶을 지탱하게 해주는 일이지만 여기에는 위험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해류가 있다. 바로 그 때문에 작은 기쁨도 필요한 것이다. 브래들리스의 친절한 점원이나, 내 커피 취향을 알고 있는 던킨 도너츠의 여종업원처럼. 정말 어려운 게 삶이다.>

어쩐지 나인님의 이 페이퍼가, 올리브 키터리지의 이 구절과 통한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hnine 2015-05-13 09:55   좋아요 0 | URL
음...다락방님의 인용구절을 읽고 또 생각해봅니다. 작은 기쁨과 큰 기쁨에 대해서요. 작은 기쁨은 자주 누리는 반면, 큰 기쁨을 떠올려보자니, 그건 별로 자신있게 말할 수 없네요. 작은 기쁨만으로, 모자란 큰 기쁨을 대체하려면 에효...^^
올리브 키터리지를 보관함에 담아놓은지 어언 몇년 째인지. 이젠 정말 읽어봐야겠어요.

순오기 2015-05-14 02: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좋아요~~~~ ^^
요즘의 내 행복은 `숲에서 놀고 돌아갈 때 꽃처럼 화알짝 피어난 아이들 얼굴을 보는 것`이라 할 수 있죠!
그런데 동행한 선생님들 때문에 마음 상하는 일도 종종 있어요.ㅠ

hnine 2015-05-15 17:40   좋아요 0 | URL
순오기님, 숲해설가 정말 잘 선택하신거예요. 최근 마루야먀 겐지 에세이 읽으면서 또한번 생각했답니다. 저도 만약 기회가 된다면 나무와 꽃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에 더해서 그들이 하는 말을 들을 수도 있게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도 했어요. 시작도 안하고 꿈은 원대하지요? ^^
 
그렇지 않다면 석양이 이토록 아름다울 리 없다
마루야마 겐지 지음, 이영희 옮김 / 바다출판사 / 2015년 5월
평점 :
절판


삶과 문학에 대해 독설에 가까울 정도로 분명한 생각과 목소리, 글소리때문에 이름을 기억하고 있는 작가 마루야마 겐지.

그의 새로운 에세이가 출간된 것을 보고 바로 구입하여, 읽던 책 미뤄놓고 이것부터 읽었다. <달에 울다>, <여름의 흐름>, <인생 따위 엿이나 먹어라>, <나는 길들지 않는다> 에 이어 다섯 번째 읽는 마루야마 겐지의 책.

해발 750미터 아즈미노현. 주위에 무논과 비닐하우스와 농가뿐인, 자극이라고는 극단적일 정도로 없는 분위기에 둘러 싸인 그런 곳으로 귀향하여 정원 가꾸기와 글 쓰기로 축약된 일상을 보내고 있는 그의 열두달 정원 일기이다. 그래서 목차도 1월, 2월, ..., 12월의 식으로 되어 있다.

 

이 목차에 붙은 한 줄짜리 제목들에서 촌철살인의 의미를 읽어낼 수 있다.

1월 버릴 수 없다면 정원사가 되지 마라

2월 사철 내내 꽃을 피울 수는 없다

3월 한 마리 새도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별별 일을 다 겪는다

4월 성장하고 싶다면 가지를 쳐내라

5월 봄의 들놀이가 수만 권을 읽는 것보다 낫다

6월 존재하는 것들의 유일한 명제는 오로지 살아남는 것이다

7월 꽃을 돌아보지 마라

8월 당신을 타락시키는 유혹은 언제나 당신으로부터 시작된다

9월 예술의 진정한 힘의 원천은 생명체 간의 투쟁 그 자체다

10월 단풍에 취한 찰나로도 충분하다

11월 현실과의 투쟁을 피할 수 있는 생명체는 없다

12월 가장 아름다운 장미는 바람에 단련된 것이다

 

사람이 아닌, 꽃과 나무들에 보살핌과 애정과 땀을 쏟으며 그는 책과 생각만으로 도달할 수 없는 그 너머를 체험하고 있는 듯 했다. 정원이 그에게 문학가로서의 명성을 가져다 주는 것도 아니고 물질적인 풍요를 가져다 주는 것도 아닌데, 책 속의 지식이나 생각의 깊이를 주는 것도 아닌데, 그렇게 서슬 퍼렇던 그의 주관과 삶의 태도를 다소 말랑하게 만드는 비밀은 정원의 어디에서 비롯되었을까. 아마도 정원 자체가 아니라 정원 '가꾸기'에 그 비밀이 있지 않을까?

 

내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손수 가꾼 정원이란, 특별히 사계절 내내 꽃이 가득 찬 공간이 아니다. 하늘에 들어찬 별처럼 찬란한 만개의 순간을 일 년에 며칠 정도만 엿볼 수 있게 해 준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어디까지나 사적인 소우주에 다름 아닌 것이다. 즉, 불특정 다수의 눈을 의식한 게 아니라 나 스스로를 어디까지 감동시킬 수 있을까에 의해 승부가 결정되는, 극히 개인적으로 사랑하는 창조 공간이다. (9쪽)

 

사적인 우주, 개인적 사랑의 창조 공간이라는 정원. 책의 이 첫 단락부터 매혹되어 단숨에 읽어갔다.

 

겨울이란 계절을 '지성의 시간'이라는 근사한 표현을 한 사람이 또 있던가? 식물들이 새로운 생명을 위해 안보이게 준비하는 겨울에 그는 집중적으로 집필 활동을 하기 때문에 붙인 이름이다.

 

위대한 철학자들이 만약 정원 꾸미기에 정신을 쏟을 수 있었다면, 그들은 진정 기뻐하며 위대한 범인으로서 생애를 장식할 수 있지 않았을까. 즉, 철학자들의 이런저런 고민은 육체를 너무 등한시한, 무서울 정도로 단순한 데 기인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땅을 일구고 돌을 나르고 좋아하는 초목을 심어 기르는 등의 생활을 체험했다면 살아가는 의미 등의 복잡하고 까다로운 문제에 대해 그토록 고민하지 않아도 되지 않았을까. 현세의 생명체에 대해 어떠한 의혹도 끼어들 여지가 없지 않았을까. 그들에게 부족했던 것은 척추동물로서 당연히 흘려야 하는 땀과, 꾀죄죄한 현실 속에 엄연히 존재하는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것은 아니었을까. 사실은 겨우 그런 것들을 하지 않아 고민에 휩싸였던 것은 아닐까. (126쪽)

그래서 정원을 가꾼다는 것은 수백 권의 책을 읽고, 그 속에서 위대한 철학자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이 이미 해놓은 말, 깨달음들을 이해하고 그대로 습득하는 것과 다른, 사적인 소우주이고 창조 공간이라고 했구나.

 

이 책의 마지막은 다음과 같은 단락으로 맺고 있다.

많은 정원이 겉모습의 화려함에 지배당해 내용은 죽은 정원이 되어 가고 있다. 정신의 죽음을 폭로하는 것이 목적인 듯한 정원과 문학이 횡행하는 현실에서, 내가 목표로 해야 할 것은 그 정반대에 위치하는 것이리라. 내게는 큰 야심이 있다. 정원과 소설을 통해, 도달할 수 없는 세계에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다가가는 것이다. 그 꿈을 실현하려면 음과 양을 상징하는 바람과 장미의 나날을 지날 수밖에 없다. 바람은 장미를 단련시켜 진정한 아름다움을 부여하고, 장미는 바람에 향기를 실어 보낸다. 그리고 언어는 안정되지 못한 인간계를 바람처럼, 장미 향기처럼 관통하면서 형언할 수 없는 매력으로 감성과 지성을 격렬하게 불타오르게 할 것이다. (132쪽)

바람과 장미로 비유된 그의 삶의 축이면서 동시에 삶의 도구를 어떻게 조화시켜나가는가 하는 것은 그의 몫일 것이고 독자는 기대하며 지켜볼 것이다.

 

굳이 책의 평점으로 별 네개만 준 것은 책이 너무 얇은 것이 아쉬워 심통이 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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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5-11 09: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hnine 2015-05-11 14:20   좋아요 0 | URL
일년이 열두달 뿐이다보니 책 두께가 이 정도 될 수 밖에 없는지도 모르지요.
아쉬우면 한번 더 읽으면 될 일인데 제가 심통을 부렸어요.
님도 읽으셨군요? 소설은 소설대로, 에세이는 에세이대로, 괜찮은 작가임에는 의심이 없는 것 같아요.

2015-05-11 09: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hnine 2015-05-11 14:23   좋아요 0 | URL
외국에 계시니 책 좋아하시는 분에겐 우리 음식보다 우리글 책이 더 아쉬울 때가 많으시지요. 이 책의 내용을 제가 잘 전달하도록 리뷰를 썼는지 모르겠습니다. 마루야마 겐지가 정원에서 소우주를 보았듯이 저는 제 주위에서 무엇을 그리 볼 수 있을까, 그것이 꼭 정원일 필요는 없지않나, 그런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2015-05-11 09: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hnine 2015-05-11 23:58   좋아요 0 | URL
저도 공감이요. 몸은 마음이 가르치고, 마음은 몸이 가르치며 균형을 이루어간다고 생각하는데 모든게 기계화되어가다보니 몸은 안쓰려고 하고 마음만으로 모든 것을 조절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쪽으로 가는 것 같아요.
다음 책 제목으로 추천하신 것 멋진데요! 아마 마루야마 겐지 식으로 좀 더 세게(!) 표현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요 ^^

프레이야 2015-05-11 09: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헤세의 정원일의 즐거움,이 동시에 생각납니다. 12장 소제목, 바람과 장미의 나날‥^^

hnine 2015-05-11 14:31   좋아요 0 | URL
읽지 않고 제목만 들었음에도 저도 헤세의 그 책 제목을 떠올렸답니다.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했고요.
말씀하신 제목은 위의 다른 분께서도 추천하신 제목이랍니다. 와우...마음이 통했어요.

세실 2015-05-11 09: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인님 굿모닝~~~~~
`한 마리 새도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별별 일을 다 겪는다.`
강한 한마디네요.
하물며 사람일진대........

`당신을 타락시키는 유혹은 언제나 당신으로부터 시작된다`
명심해야겠습니다.


hnine 2015-05-11 14:36   좋아요 0 | URL
세실님, 우리 이제 어느 정도 나이를 먹었다고 생각하는데도 여전히 평범해보이는 한 줄 글로도 일깨워지며 살고 있지요. 한 마리 새도 별별 일을 다 겪는데 힘든 순간과 힘든 일 앞에서 너무 호들갑 떨며 절망하지 않나 저도 다시 볼아보게 되어요.
나 외에 다른 생명체를 키우고 보살피며 그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관찰하는 일은 인간을 겸손하게 하고 고개 수그리게 해주는 것 같아요.

stella.K 2015-05-11 13: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루야마 겐지 참 괜찮은 작가로 기억하고 있는데
마지막 문장에서 허걱했습니다. 어쩌자고...ㅠ
다음엔 글 좀 길게 쓰라고 마루야마에게 말해 놓겠습니다.ㅋㅋ

hnine 2015-05-11 14:37   좋아요 0 | URL
ㅋㅋ 사실 두께가 얇아도 용서가 되는 책이랍니다. 내용이 괜찮아서요.
정원일을 하면서도 여전히 글 쓰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고 있다니까 소설이든 에세이든 계속 그의 작품이 나오겠지요. 기다리는 수 밖에요.
 
참외는 참 외롭다
김서령 지음 / 나남출판 / 2014년 8월
평점 :
품절


산문, 혹은 수필을 읽거나 쓰기를 즐기는 사람들에게 읽어보기를 권하는 책이다. 나는 그래서 이 책을 고르지는 않았지만.

수년전 김서령의 <家>라는 인터뷰집을 읽은 후 나는 그녀를, 일단 읽고보는 작가들 목록에 합류 시켰다. 사회 각층에 걸쳐 유명한 사람, 덜 유명한 사람의 집을 찾아가, 그 집과 집주인의 얘기를 담아 한편 한편 글을 지어 담은 책 <家>는, 인터뷰집이라기 보다는 공들여 잘 쓴 수필집이었음을 일찌기 알아차렸다. 그렇게 다른 사람들의 얘기를 담은 책들을 주로 펴내던 저자가 자기의 얘기로 채운 산문집을 냈다니 안 읽어볼 수 없었다.

그녀의 우리말 사랑과 재치는 책 제목에서도 돋보인다 <참외는 참 외롭다>.

자신의 얘기를 담은 글이라고는 하지만 구구절절 자기의 경험을 위주로 늘어놓은, 퍼진 글이 아니다. 자연, 사물, 현상, 시간, 사회, 우리것, 우리말, 사람 등, 다양한 것들에 대해 저자의 관심과 생각을 담았다는 것이지 자기가 겪은 경험담이 주가 아니라는 뜻이다. 자기의 얘기라면 어린 시절의 얘기가 자주 등장하긴 하는데 자기 경험담 차원이라기 보다 저자는 우리가 지나온, 이제는 볼 수 없는 우리 것을 소개하고 싶어했다고 생각된다. 임하댐 건설로 이제는 물속으로 사라진 마을 안동을 고향으로 가진 그녀이니 그곳의 정겨운 사투리를 비롯해서 사라져가는 우리 것 얘기가 들을만하다.

50쪽의 '좌판에 앉아'라는 제목의 글은 이 책을 도서관에 반납하기 전에 어디에 통째로 옮겨 적어 놓으려고 한다. 말도 문장도 내용도 한번 읽고 말게 아닌 것 같아서.

114쪽의 한구절은 짧게 한번 여기 옮겨볼까? 저자의 글 분위기가 이렇다고 소개하기 위해서.

 

별이 뜬 가을밤 나는 혼자 분꽃 곁에 쪼그리고 앉아 조금 울다가 조금 웃었다. 울음이 원인불명이어서 우스웠고 웃음이 허술하고 엉성해서 눈물이 났다. 이전에도 그것들이 명백하게 분리되는 감정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았으련만 드디어 나는 더 이상 젊지 않음을 인정하기로 했다. 감정이 명료해지지 않는 것, 희로애락이 범벅되어 등장하는 것, 시비와 선악의 분별기준이 느슨해지는 것, 이런 혼동과 당황을 '노화'라는 말 말고 무슨 수로 해명하고 납득시킬 수 있으랴. (114쪽)

 

'분꽃'이라는 제목의 글 일부이다. '조금 울고 조금 웃었다'라는 말이 마음에 들어 외워두고 싶었다.

 

 

나이 들면서 차츰 알게 되는 것이 있다. 그중 하나가 완성으로 나아가는 길은 결코 까다로운 단련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평이하고 사소한 일의 진지한 반복이 바로 삶의 완성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193쪽)

 

위의 인용문처럼, 평범한 문장 속에서 글쓴이가 오랜 세월을 살아내며 알아낸 깨달음이 숨어있는걸 찾아가며 읽기. 산문을 읽는 재미 중 하나 아닌가.

 

어딘가 작고하신 박완서님의 수필을 읽을 때 느낌이 나기도 하지만 분명한 김서령 스타일이 읽는 나의 눈에, 그리고 마음에 발견된다.

근래 읽은 가장 좋은 수필.

살아있는 동안 이런 참하고 (화려하지 않다) 예쁘고 (저자가 직접 그린 우리 풀 그림이 삽화로 들어가있다) 실한 (무색 투명하지만 마시면 톡쏘는 탄산수 같은 도드라짐이 있다)  한권 엮을 수 있다면 참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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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판에 앉아

연신내 시장 빛 안 드는 한구석, 좌판에 앉아 국수를 먹는다. 곁에는 열살짜리 새순 같은 딸을 앉혀두고 비닐봉지에 덕지덕지 싼 시장 본 물건들은 한켠에 세워두었다. 숱한 사람들이 김칫국물을 흘린 조붓한 나무판자 아래 뺑뺑 돌아가는 동그란 비닐의자를 곁들여둔 좌판, 거기 기대앉아 느긋하게 시장 안을 둘러보며, 이렇게나 세상과 분리된 나는 이제 막 내 곁을 스치고 달아나는 30대에 대한 조사를 쓰려고 한다. 30, 그렇다. 스물몇이었을 땐 턱없이 청춘이 괴로웠고, 어디로 한발 제겨디딜틈조차 없다는 불안에 시달렸고, 그 혼란을 타넘고 나와 비로소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이미 서른을 넘긴 두 아이의 어미가 되어 있었다. 아이 둘을 업고 안고 쩔쩔매다 그 아이가 엄마 죄송해요. 친구 집에 놀다 가도 되지요?” 물어올 때쯤 되니 나도 어느덧 서른의 막바지에 이르렀다.

전에는 혼자서는 이런 좌판에 퍼질러 앉을 수가 없었다. 곁에 앉은 노동자풍의 남자들이 풍기는 살냄새, 땀냄새를 역겨워했다. 더구나 뺨이 수밀도 같은 어린 딸애를 이런 지저분한 곳에 망설임 없이 앉히는 엄마가 될 줄은 몰랐다. 그러나 요새 나는 이런 좌판에 앉기를 즐기는 아줌마가 되었다. 이 집은 이영이와 함께 자주 온다. 별 약속도 일도 없는 오후, 스웨터 하나를 덧입고 슬리퍼를 꿰신고 어슬렁어슬렁, 쪄먹을 꽈리 고추 천 원어치, 고등어자반 한 손 25백 원, 파 한 단 5백원, 오이 한 무더기 천 원어치를 검정 비닐 봉다리에 담아들고 나는 좌판에 앉는다. 순전히 내 입맛의 호사를 위하여 들르는 집이다.

국수 한 그릇에 천이백 원, 김밥 한 줄에 팔백 원, 순대와 족발도 솥 안에서 김이 오르고 있다. 맞은 편 슈퍼마켓 이층 분식점은 이 집보다 값이 두 배로 비싸다.

좌판의 주인아줌마는 은은히 째보기가 있다. 위입술이 살짝 찢어졌어도 살성이 희고 육덕이 좋고 손길이 푼푼하다. 웃는 모습에 어딘지 수줍어하는 태도 있다. 그는 연신 김밥을 말고, 순대를 뒤적거리고, 설거지를 하고, 파를 다듬고 돈을 받느라 여념이 없다. 이 집에서 말아주는 국수가 나는 참 맛있다. 한 주일 한 군데씩 서울의 맛있는 집을 발굴, 소개하는 일을 두어 해 해왔기에 내로라하는 숙수가 내놓는 음식 맛을 모른달 수는 없다. 그러나 천이백 원짜리 이 집 국수, 미리 삶아 물을 빼뒀다가 뜨거운 멸치국물에 한 번 슬쩍 헹궈주는 이 집 국수 맛도 결코 거기 뒤질 게 없다는 게 나의 소박한 입맛이다. 얹어주는 양념이라야 별 것 없다. 파 몇 점과 김 부스러기 한 움큼, 플라스틱 접시에 담아주는 열무김치 몇 가닥. 이영이는 참기름을 바르고 볶은 깨를 솔솔 뿌린 김밥 한 줄을 먹는다.

먹으면서 나는 아까 비닐봉지에 넣어뒀던 책을 꺼낸다. 이영이도 헌 책방에서 사온 만화를 펼쳐든다. 아무도 우리에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오가는 사람 수백 명인 이런 북새통 속에서 손바닥에 알맞춤 갇히는 <창비시선>을 한 구절씩 읽어 내려가는 맛이 나는 예전부터 즐거웠다. 눈 밝은 사람이 보면 국수를 후루룩 빨아들이는 내 등 뒤로 엉거주춤한 나의 반생이 뜨뜻미지근하게 드리워져 있을까.

내 손에 들린 것은 최영미의 시집이다. 책날개에 박힌 그의 하얀 블라우스를 입은 모습은 상당히 눈길을 끈다. 시집도 미인이 써야 더욱 독자를 혹하게 하는 모양이다. 최영미가 미인인 것이야 탓할 게 없지만 그의 시보다 그의 미모를 강조하여 책을 광고하는 듯한 인상을 나는 여러 번 받았다. 예쁜 여자가 자신의 욕망과 좌절에 대해 솔직하게 써놓은 시, 확실히 상품가치가 있겠지. 그러나 맥주 광고도 아닌 책 광고에 굳이 여자의 얼굴을 이렇게 두드러지게 키울 필요가 있었던가 라는 게 나의 불쾌함이다. 게다가 소위 민중과 진보를 표방하는, 다들 뒤도 안 돌아보고 돈을 향해 달려가는 시절에 한두 군데쯤 표방하는, 다들 되도 안 돌아보고 돈을 향해 달려가는 시절에 한두 군데쯤 순정하게 남아 있어 줬으면 싶었던 출판사가 이래도 되나? 싶은 배신감 비슷한 심사를 지우기 어렵다.

온 세상이, 모든 영역이, 젊음과 미를 붙잡으려 열병을 앓고 있다. 젊다는 것도, 아름답다는 것도 분명 좋은 것이에 틀림없겠지만 젊어서 죽지 않으면 사람이란 늙는 법이고 아름다움이야 어차피 제 눈에 안경일 터인데, 어쩌자고 모두들 이렇게 예쁜 것, 젊은 것만을 찾느라고 혈안들이 돼 있는 것이냐. 나는 실없이 좌판을 꽝꽝 친다.

내가 이미 젊은 여자가 아니고 예쁜 여자 축에도 끼기가 어려워서 질투와 시기에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이라고? 그래 그렇다고 치자. 절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자신은 없다 어쨌든 최영미의 시는 솔직하긴 하구나 솔직하다는 것이 정직으로 바로 이어지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괜히 고상한 척 굴지 않는 건 일단 맘에 들다. 그러나 이건 또 다른 기만일 수 있다. 그런 의심이 뭉게뭉게 인다.. 발문을 쓴 김용택은 피비린내가 나는 것 같은 자기와의 싸움이 짙게 배어 있다고 말하지만 내게는 별로 피비린내가 느껴지지는 않는구나. 피비린내라면 어젯밤 아이아빠와 크게 한바탕 육박전을 벌인 내게서 더 많이 풍기겠지. 컴퓨터와 X하고 싶다, 같은 과격한 언사가 얼굴선이 이렇게 고운 여자의 입에서 나았다고 다들 까무러친다는 건가.

물론 나 역시 시를 쓰고 싶었다. 최영미보다 거친 언어가 내 가슴 속에서 부글부글 끓덨다 그렇게 거친 것은 시가 되지 않는 줄 알았다. 소용돌이가 가랑ㄵ기를 기다려 고요한 날 고요하게 피워 올려야 하는 꽃송이인 줄 알았다, 그래서 대개 남의 글에 민망해하고 두드러기 돋아하면서 정작 시 쓰는 책상 앞엔 앉지도 못했다. 그러면서 젊음을 탕진하고 소모하고 말았다.

진달래가 이쁘다고 개나리는 안 이쁜가./ 내가 아는 어떤 부르주아는 연애시를 쓰려고 연애를 꿈꾸는데. 행을 가른다고/고통이 분담되나/ 연을 바꾼다고/ 사랑이 속아주나…’ , , 이렇게 나오는 대로 지껄여도 시가 되는구나. 국수발을 빨아올리는 척 나는 이빨로 입술을 아프게 깨문다

오늘 나는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딸은 귀족적으로 키워야한다는 미망에서도 헤어나서 허름한 좌판에 앉아 있다 곁에 앉은 사람이 먹다 남긴 김치조각을 유유히 씹으면서 끝내 시인이 될 수는  없었던 젊은 날의 끝자락을 바라본다 마음이 미어지게 아픈 것은 욕심일 것이다. 아무와도 껴안을 듯 너그러워지는 것은 허세일 것이다. 과로의 끝 같은 몸살기가 갑자기 나를 덮친다 나는 시 대신 아이를 낳았지 않느냐!! 최영미가 곁에 있다면 김밥을 씹고 있는 뺨이 복숭앗빛으로 물든 이영이를 들이밀며 으르릉 거렸을까/누가 뭐래? 홀로 머쓱해진 옷자락을 아이가 잡아당긴다. 엄마 떡볶이도 먹으면 안 돼요? 왜 안 돼 안 될리가?

나는 얼른 살성 흰 아줌마를 불러 여기 떡볶이 1인분 더 주세요, 젓가락 장단을 치듯 호기롭게 주문한다.

빨강게 달콤하게 매웁게/ 이 따위 시구절보다 백 배는 강렬하게/ 쓸데 없는 허세일랑 한방에 쓸어버리게/ 명색이 엄마라고 내 손을 잡아 쥐는 어여쁜 우리 딸의 혓바닥이 살살 녹게/ 아프게 괴롭게 이유도 없이 눈물나게/ 지독하게 맛있는 떡뽂이 일인분 더 주세요// 여기서 내가 퍼질러 앉아 울어버리기 전에/ 서른에 하마 잔치가 끝나면 어쩌냐고 대들기 전에/ 아무렇게나 행과 연만 바꿔놓고 각운만 대충 맞추면 시가 되냐고 악 쓰기 전에/ 시를 저 높이 아득하게 밀어 올려놓은 놈 내려오라고 뻗대기 전에/ 후딱후딱 떡뽂이 일인분 더 주세요!! 아줌마!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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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reka01 2015-05-05 09: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고로 외로운 참외는 없습니다.ㅎㅎㅎ 다만 참외는 땀입니다. 비닐하우스에서 참외 따보면 알게 되죠..으학.....숨이 턱턱 막히는 곳에서 참외가 열리거든요. 이책 찜.!!!

hnine 2015-05-06 19:04   좋아요 1 | URL
아, 유레카님 참외가 어떻게 열리는지 과정을 아시는군요! 저는 먹을줄만 알아요 ^^ 참외의 ˝외˝자가 아시겠지만 혼자라는 뜻이라네요. 대개 쌍으로 꽃이 피어 열매도 쌍으로 달리는 다른 대부분의 식물에 비해 참외를 비롯한 박과 식물은 마디 하나에 꽃이 하나씩, 그래서 열매도 하나뿐이래요. 그렇게 저렇게 이어붙여 참외는 외롭다고 했더군요. 재미있는 발상이지요. 이런 연상력이 글 쓰는 사람에게 필요한것 같고요.
먹울 줄만 아는 사람으로서 참외는 땀이라는 말씀도 새삼 뭉클합니다.

yureka01 2015-05-05 12:28   좋아요 1 | URL
그러게요...외로운 건 가짜가 없지만 참 외롭다는 게 나의 외로움이 거짓이 아니란 진정성이란 말이겟지요.참외가 참 외롭다는 은유도 나오는 걸 보면 정말 외로운 시대이긴 하다는 증명은 아닐까 싶어요.^^.
시골 처가집에서 이맘때쯤 참외농사할때 참외따기 하면 ㅎㅎㅎ외로울 틈이 없던 생각 나요.진짜 힘들어서.ㅋㅋㅋ

hnine 2015-05-05 12:32   좋아요 1 | URL
댓글 마지막 문장에 YUREKA!를 외칩니다. 몸이 진짜 힘들땐 외로울 틈이 없다...

서니데이 2015-05-05 09: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분 책을 읽어본 것 같지는 않은데, 이름은 낯설지 않거든요. 여러 지면에서 가끔씩 이름이 나오는 분인가봐요. 괜찮다 하시니, 나중에 읽어보고 싶습니다. hnine님 즐거운 휴일 되세요.

hnine 2015-05-05 12:19   좋아요 2 | URL
저야 워낙 이분 팬이니 그렇지만 인터뷰글을 주로 쓰시는 분이기 때문에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대부분이라고 생각했는데 서니데이님은 아시는군요. 저는 못봤지만 신문에 연재글을 쓰신다고 하더라고요.
저희집엔 더 이상 어린이가 없는 관계로 어린이날이지만 아주 평범한 날이 되고 있답니다.

stella.K 2015-05-05 10: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나이가 드니 소설 보다 산문이 좋아지더라구요.
h님 그리 권하시니 급땡기는군요. 책도 도톰하니 마음에 들고.ㅎ

stella.K 2015-05-05 12:21   좋아요 0 | URL
헉, 근데 10% 디씨가 안 되요.ㅠ

hnine 2015-05-05 12:22   좋아요 2 | URL
저는 지금보다 어릴때부터 (10대부터) 워낙 산문을 좋아하는 편이었는데 지금도 여전히 좋아요. 저보다 나이가 많은 분들의 책은 더 믿음을 가지고 읽는데 이 책 저자는 가늠해보니 우리 (저와 stella님 ^^) 보다 딱 10살 연배이시더라고요.
400여쪽 되니 도톰한 두께 맞습니다.

hnine 2015-05-05 12:23   좋아요 0 | URL
웃! 동시 댓글!
저는 도서관에서 빌려 읽었어요.

yureka01 2015-05-05 12:29   좋아요 0 | URL
저도 산문을 무척 좋아합니다.ㅎㅎㅎ

해피북 2015-05-05 2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밥먹고 설거지 해야 하는데 글이 너무 좋아 설거지할수가 없었어요 김서령님을 소개해주셔서 감사해요^~^

hnine 2015-05-06 14:41   좋아요 0 | URL
그러시다면 이 책을 자신있게 추천해드립니다.
산문 읽기 뿐 아니라 쓰기에도 관심이 많으신 분이라면 더더욱 눈여겨 보실 구절이나 단어들, 표현들이 많으리라 생각되어요.

이야기부엌 2015-05-06 21: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앗! 저는 `참외는 참 외롭다`를 쓴 김서령이예요.
나인님... 어줍잖은 제 글에 공감해 주셔서 `참` 기쁩니다. ㅋ
사실 이딴 산문을 쓰는 일은 허공에 대고 말하는 것처럼 머쓱한 노릇인데
잘 읽었다는 얘기를 들으니 뭔지 안심이 되고 가슴이 쾅쾅 뛰는군요.ㅎㅎ

hnine 2015-05-06 21:48   좋아요 0 | URL
작가님, 영광입니다. 저 작가님의 오랜 팬이랍니다. 필사도 불사할정도로요 ^^

2015-05-07 09:46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