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고독 흰 고독
라인홀트 메스너 지음, 김영도 옮김 / 이레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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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산은 모든 사람에 대한 대답을 가지고 있다.

그곳에는 매일 새로운 해답이 있다.

 

 

-라인홀트 메스너-

 

 

자식을 둔 엄마로서 나중에 그 아이가 무엇을 직업으로 택하든 존중하겠지만 두 가지만 안해주었으면 하는 직업이 있었는데 화이터와 산악인이었다. 취미가 아니라 직업이란 평생 해야하는 일인데, 조마조마함은 둘째 치고 너무 고독하고 처절해보였기 때문이다.

이 책의 저자 라인홀트 메스너는 1944년 이탈리아 남부 티롤 태생의 산악인이지만 여러 권의 책을 낸 문필가이기도 하다.

어릴 때 엄격한 아버지로부터 등산을 배웠고 아홉 형제중 동생 귄터 역시 산악인이 되었다.

1970년, 히말라야 8,000 미터 급 14좌 중 하나인 낭가파르바트 (Nanga Parbat, '벌거벗은 산'이라는 뜻)에 동생 귄터와 함께 도전하였고, 정상을 정복하고 내려오던 중 눈사태로 동생 귄터가 실종되는 사고를 당한다 (이때의 이야기는 '벌거벗은 산'이라는 제목의 다른 책으로 나와있다.)

이 책은 그렇게 동생을 잃고 8년 후 이혼의 아픔까지 겪고 난 라인홀트가 낭가파르바트를 단독등반으로 도전하며 쓴 기록이다. 단독등반!

8,000 미터가 넘고, 깎아지른 수직의 빙벽 높이가 수백 미터에 이르는 루트를 산소 호흡기 없이 (무산소), 피켈과 아이젠 외에 별도의 다른 특수 도구 없이 (알파인 스타일), 혼자서 (단독등반), 이 세가지 조건으로 도전한 것이다.

 

나는 산을 정복하려고 이곳에 온 게 아니다. 또 영웅이 되어 돌아가기 위해서도 아니다.

나는 두려움을 통해서 이 세계를 새롭게 알고 싶고 느끼고 싶다.

물론 지금은 혼자 있는 것도 두렵지 않다. 이 높은 곳에서는 아무도 만날 수 없다는 사실이 오히려 나를 지탱해 준다.

고독이 더 이상 파멸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 고독 속에서 분명 나는 새로운 자신을 얻게 되었다.

고독이 정녕 이토록 달라질 수 있단 말인가.

지난 날 그렇게도 슬프던 이별이 이제는 눈부신 자유를 뜻한다는 걸 알았다.

그것은 내 인 생에서 처음으로 체험한 흰 고독이었다. 이제 고독은 더 이상 두려움이 아닌 나의 힘이다. (165쪽)

 

 

하지만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물론 그의 옆에는 아무도 없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지만 상상의 누군가와 계속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책의 곳곳에 등장한다. 그 상상 속 파트너는 수시로 라인홀트 앞에 나타나 그의 말에 대답해주기도 하고 라인홀트에게 질문도 던져주기도 한다.

삶과 죽음의 문제가 인간이 할 수 있는 궁극적인 문제인 줄 알았는데 고독의 문제가 오히려 삶과 죽음의 문제보다 더 심오한 주제가 되는 경우도 있다는 생각을 이 책을 읽으며 처음 해보게 되었다. 그 고독은 대부분 우리가 일상에서 경험하는 고독의 차원이 아니라 8,000 미터 산을 오르기로 혼자 결정하고, 혼자 실행하면서 혼자 경험하는 절대고독을 말한다. 모든 문제에 대한 답이 내 안에 있다는 것을 발견하는 과정이다.

 

어떤 일이든 완전히 혼자 힘으로 해내겠다는, 마지막까지 혼자서 해내겠다는, 그리고 나 자신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싶다는 그러한 갈망은 낭가파르바트 단독 등반을 마친 후 더 강해졌다. 이것은 모든 능력을 가지고 싶다든가 어떤 일이건 반드시 해내겠다든가 하는 욕구라기보다는 오히려 스스로 완전히 홀로 서고자 하는 강한 열망이었다. 나는 내 안에서 안식을 찾고 그 안에 있고 싶었다.

나는 때때로 명상에 잠기곤 했는데, 수수께끼로 가득한 이 세상의 모든 신비가 내 안에 있다는- 모든 비밀에 대한 물음과 대답이 내게 있다는- 생각이 마음속 깊이 자리 잡았다.

다시 말해서 내 안에 삶과 죽음의 시작과 끝이 함께 있는 것같이 느껴졌다. (244, 245쪽)

 

 

그동안 나는 고독이란 말을 너무 흔하게 쓰지 않았던가?

이 책의 키워드는 산도 아니고, 정복도 아니고, '고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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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0-08-10 14: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메스너. 어려서 많이 듣고 자란 이름입니다. 저희 집(이라기보다 외가집)이 그 염병할 산악인을 좀 배출했습니다. 그들을 보고 전 산에 안 다니기로 했고요. 어찌 그리 다 사회부적응자들인지....
그래도 정말정말 오랜만에 듣는 이름이라 반갑습니다. 추억은 언제나 그렇게 조금은 누추한 것인가 봅니다. ^^;;

hnine 2020-08-10 21:14   좋아요 0 | URL
와, Falstaff님. 메스너란 이름을 어려서 많이 듣고 자라셨다니 분위기가 짐작되네요. 듣고 자라셨으니 그 분야를 미워하면서 안보이게 정도 깊겠어요.
댓글의 마지막 문장을 자꾸 읽어보게 됩니다. 추억은 언제나 그렇게 조금은 누추한 것. 멋진 말씀입니다!
 
콘클라베 - 신의 선택을 받은 자
로버트 해리스 지음, 조영학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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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한 단어에 이끌려 읽게 된 책이다. 콘클라베.

사전에서 찾아보기 전 무슨 뜻일까 상상부터 해본다. 미술 용어? 건축 용어? 고악기 이름? 다 틀렸다. 콘클라베 (Conclave)는 원래 비밀의 장소라는 뜻으로, 로마 카톨릭 교회에서 새로운 교황을 선출하기 위해 모이는 추기경들의 회의, 그리고 이 동안 추기경들이 엄격히 외부로부터 격리되는 방식을 일컫는 말이다.

저자 로버트 해리스는 1957년 영국 태생으로 기자와 칼럼니스트 출신이다. 1992년에 작가로 데뷔했는데 이때부터 큰 호평을 얻어 히스토리 팩션의 새 장을 열었다는 찬사를 받았다고 한다. 그의 작품중 <당신들의 천국>, <에지그마>, <아크엔젤> 등은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책 표지엔 제목 콘클라베 아래 '신의 선택을 받은 자'라는 부연제목이 달려있고, 금장의 열쇠, 열쇠구멍으로 보이는 바티칸의 성당 그림이 눈길을 끈다. 몇장 넘기면 찬사와 호평으로 가득 찬 각종 미디어의 평이 실려있다. 대박! 도저히 책을 덮을 수 없다 (가디언), 고품격 스릴러 (리더스 다이제스트), 기발하고 긴박한 스릴러 (데일리 익스프레스), 악마의 시의 천주교판 (뉴욕 타임스) 등, 읽기 전 기대감을 잔뜩 채워놓는다. 페이지를 넘기면 등장 인물 소개가 이어지는데, 이렇게 등장 인물 소개가 따로 나오는 소설들은 내용이 매우 얽히고 섥혀 있나보다 하는 긴장감을 주기도 하는데 바로 뒷 페이지에 로마 교황청 지도까지 실려 있는 것을 보고 나니 이거 상당히 복잡한 구성으로 내용이 되어 있나보다 하고 확실하게 긴장하며 읽기 시작하게 된다. 결과는? 꼭 그럴 필요 없었다.

이야기는 갑작스런 교황의 죽음 소식을 듣고 추기경단장직을 맡고 있는 로멜리 추기경이 바티칸으로 향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교황의 사인 (死因)은 심장 발작. 이날 저녁 식사까지 정상적으로 일상 업무를 하였는데 밤에 갑작스런 이상 증세를 보여 응급처치를 시행했으나 끝내 죽음을 맞게 된 것이다. 이로써 교황직은 공석이 되었고 전 세계118명의 추기경 대표단들이 모여 새로운 교황을 선출하는 일 ('콘클라베') 이 진행되는데 추기경단장을 맡고 있는 로멜리 추기경이 이 행사를 주관하여 새로운 교황이 선출되기까지가 이 책의 내용이다. 교회도 사회인지라 교황의 자리를 놓고 야심을 가지고 있는 몇몇 후보가 있고 경쟁이 일어나기 마련인데, 교황을 선출하는 방식은 특이해서 투표단 2/3의 동의를 얻을때까지 최다 30회까지 투표를 진행할수 있다. 여기서는 여덟번의 투표를 거쳐 새로운 교황이 선출된다.

읽기 시작할때의 긴장감과 기대감에 비해 이야기의 진행은 그 정도가 아니었다는 아쉬움으로 읽기를 마쳤다. 예상하지 못한 사건도 있고, 예상하지 못한 결말도 있지만 긴박할 정도는 아니고 그마저 없었다면 너무 밋밋할 것 같다는 느낌이랄까. 나와있는 평 처럼 지적 스릴감, 기발하고 긴박함까지는 아니지 않나 하는 개인적인 소감이다.

요즘 우리가 하도 기발하고 예상못한 일이 빈번히 일어나는 세상에 살고있기 때문일까 하기엔 이 책이 나온 것이 그리 오래전이 아니다. 2016년에 출판되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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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갈래 길

하나 선택하느라 가지 못한 길

아쉬워하며 가지 못한 길

 

그런데

 

두 갈래 길이

한참 가다보면

하나로 다시 만나는 경우를 본다 

 

그러니

아쉬워하지 말고

그저

걷기를 계속할 일이다

 

 

 

 

걸어보기 전엔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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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밤의 공대생 만화
맹기완 지음 / 뿌리와이파리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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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특성을 단순하게 일반화 하거나 카테고리화하지 않으려고 일부러 노력해야할만큼 우리는 참 쉽게 사람을 분류하기 좋아한다. 이과생과 문과생, 맏이와 막내, 음대생, 공대생, 시인, 공무원, 선생님 등등. 벌써 단어와 함께 어떤 이미지를 떠올릴 정도로 우리는 이미 이것에 익숙해있다. '공대생이 만화를?' 하는 호기심을, 만화를 전공으로 하지 않은, 전문 만화가가 아닌 학생이 그렸다는 정도로 제한하고 보려고 했다.

아이패드 산 기념으로 만화를 그려보았고 (이미 이쪽에 재능이 있었다는 얘기) 그것을 스누라이프 (SNULife) 라는 서울대 생활정보 사이트에 연재하기 시작한 것이 이 만화책의 탄생 경로이다. 내용은 과학, 공학 분야의 유명한 학자들과 그들의 업적을 간단히, 이해하기 쉽게 담은 것인데 케플러, 보어, 패러데이 같은 수백년 전 사람도 있고 빌 게이츠, 제임스 와트슨 같이 현존하는 인물도 있다. 다른데서 들어본 일화도 있지만 이 책에서 처음 보는 내용들이 대부분이라서 재미있게 읽었다. 인물들의 특이한 성격, 괴벽, 일화 중심인 것 같지만 잘 읽어보면 평소에 많이 들어봤어도 설명하라면 잘 못하겠는 개념들에 대한 설명들도 깨알처럼 책 여기 저기 박혀있었다. 특히, 슈레딩거 편에서 슈레딩거의 고양이로 예시되는 슈레딩거 방정식에 대한 설명은 아인슈타인의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는 반론과 더불어, 관측하기 이전에는 물리량이 결정되지 않는다는 의미의 알쏭달쏭함으로, 이어서 그 분야에 대한 관심의 증폭으로 안내하는 역할을 했다.

인물 그림도 나름 그들의 특징을 살려 그리려 노력한 흔적이 보인다. 표지의 저자 사진에 보면 사진 옆에 그림으로 매달려 있는 두 인물이 있다. 트랜지스터를 발명한 쇼클리와 수학자 푸엥카레인데 쇼클리는 우연히 그렇게 되었다고 저자가 설명해놓았지만 푸엥카레는 특별히 저자가 존경하는 인물일까?

만화로 연재할때 댓글로 달렸던 것으로 보이는 독자의 의견들도 페이지 한쪽에 기재했는데 이것 읽으며 더 많이 웃은 듯 하다. 가장 기발하다고 생각한 것은 과학자 한 사람과 저자의 1:1 대화창이었다. 우문우답 처럼 보이지만 현문현답이라 할만큼 질문도 대답도 기발했고, 대답하는 방식도 설명한 과학자에 따라 다 달랐다.

재미있는 시도에 박수를 보낸다.

개인적으로 몇가지 덧붙이고 싶은 것이 있다면, 첫째, 아무래도 일화 중심이 되기 쉬운 함정이라는 것인데, 예를 들어 패러데이 과학 자체에 대해 알고 싶다면 이 책과 더불어 패러데이의 <촛불의 과학>도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으면 좋겠다. 둘째, 아무리 만화라지만 참고 문헌이 몇권이라도 명시되었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점이다.

 

이 책에 실린 인물들이 과학자이다보니 유난히 과학 분야에 천재가 많은 것 같지만 천재는 어느 분야에나 존재한다. 작곡, 연주, 그림, 조각, 건축 뿐 아니라 문학, 역사, 철학 등등.

이응노 미술관 입구 돌에 새겨져 있는 말이 생각났다.

"이 세상의 천재는 노력이 이긴다."

그런데 이런 말을 한 사람들도 대부분 천재 소리를 듣던 사람이라는 것이 더욱 범인을 슬프게 한다. 노력도 안 하면서.

 

 

(저자의 사진을 보니 얼굴이 어딘지 낯익어 알고보니 한때 TV에 종종 출연하던 맹기열 셰프가 저자의 형. 형제가 얼굴이 많이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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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난 그대 서랍을 열고
민혜 지음 / 해드림출판사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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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pek님 서재에서 보았지만 전혀 아는 분 아니고 pek님으로부터 읽기를 따로 권유받은 것도 아니다. 그런데 웬지 읽어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아직 많이 알려지지 않은 수필가의 책이라면 강한 주장이나 의견보다는 친숙하고 정겨운 내용이지 않을까 기대를 했나보다. 꼭 그러리란 법도 없는데 이것도 선입견이나 편견이겠지만 말이다.

책 제목도 소박하고, 표지도 소박하게 만들어졌다. 떠난 그대 서랍을 열고라는 제목은 몇 년전 먼저 세상을 떠난 저자의 남편때문인 것 같다.

저자 소개를 읽은 다음 작가의 말을 읽으면서 이 책이 어떻게 나오게 되었는지 알게 된다. 수필가로는 1992년에 등단했고 단행본 수필집도 오래 전에 낸 적이 있지만 후속은 주저하고 있는 가운데 출판사에서 기획수필집 원고 공모를 하는데 응모하여 당선되어 책이 나오게 되었단다.

<키스에 관한 고찰> 첫 글 제목부터 눈길을 끈다. 사랑의 행위의 최고는 본격 성행위보다 키스라는 것이다. 다음 글 <마늘 까던 남자>를 읽으며 책 제목의 '떠난 그대'가 1년 전 세상을 떠난 남편을 뜻함을 알게 된다. 평범한 일상의 이야기를 재미있게 쓰는구나 생각이 들기 시작한다. 멈추지 않고 계속 페이지를 넘기게 한다. 지금의 나이를 <간신히 아무도 그립지 않을 무렵>이라고 표현했다. 어떻게 이런 표현을 만들어낼 수 있지?

'그들을 한 형제라 불러주겠다'라고 시작한 글은 대화와 수다를 비교한 글의 첫 문장이다 <대화와 수다 그리고 위트>. 말이라는 한 어미로부터 태어난 형제 같은 대화와 수다중에 형뻘인 대화가 진중한 데가 있는 반면 수다는 체면 분수 내던지고 촐랑대길 좋아하는 아우라고 한 비교가 재미있다.

카톨릭교도인 저자의 세례명을 따서 카페 안나를 차린 얘기 <카페 안나>, 육십대 중반을 넘긴 나이지만 '끼'없는 사람에게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는 얘기 <끼>, 책의 뒷부분에 실린 글들 중에 공감가는 내용들이 많다. <썸데이>라는 제목의 글은 가상의 인공지능 휴머노이드 남편에 대한 이야기라서 깜짝 놀랐고 (가까운 미래에 가능하다는 생각에), 고양이 눈빛은 고독하다고 시작한 <고양이를 좋아하세요?>, 부부가 나이 들어가면 화도 낼 수 없다는 얘기를 읽으면서 벌써 공감이 되면 어떡하니, 나 자신에게 묻기도 했다. 얼마나 대단한 글을 쓴다고 돈도 안 되는 글을 쓰며 그렇게 유세를 떠느냐는 남편 말에 발끈하여 어떻게 복수를 해줄까 째려보던 저자,

그때 언뜻 들어온 남편의 얼굴, 고개를 숙여 더욱 탄력 없이 보이는 볼과 눈두덩, 그 추레한 모습을 대하는 순간 시퍼렇게 날이 섰던 내 감정은 파김치가 되고 말았다. 남편의 얼굴엔 그가 겪고 있는 심경이 그래프처럼 드러나 있었다. 희망과 즐거움은 하향 곡선, 좌절과 허무감은 상향 곡선. 코브라 같은 마누라가 노려보는 줄도 모르는 그의 얼굴은 영락없이 무서운 엄마에게 꾸지람을 받은 어린이의 표정이었다. 순간 내 전의와 살의는 바닥으로 무참하게 주저앉고 말았다. (281쪽)

 

구십을 목전에 둔 친정어머니의 이야기는 책에 몇번을 등장하는데 모두 가슴을 아프게 한다.

어머니와 함께 장에 갔다가 채소 파는 할머니와 어머니가 얘기하며 웃는 모습을 보고 쓴 대목,

인생의 마지막 고지를 가고 있는 등 굽은 저들은 삶의 백전노장들일 터, 그들이 살아냈을 평생의 파노라마가 상상으로 눈앞에 어른거렸다. 산다는 건 괴물의 잔등에다 꽃을 피우라는 임무를 부여받는게 아니겠는지. 저마다의 보따리를 풀어놓으면 그들은 모두가 아홉 대가리 괴물 히드라를 쳐 죽여야 했던 영웅 헤라클레스의 작은 분신들일 것이다.

젖은 눈매 비비며 어머니를 바라본다. 따가운 6월 햇살이 어머니 머리칼 위에서 반짝반짝 은광을 반사하고 있다. 나는 그 은광을 모아 내 어머니의 머리 위에 은관 하나 얹어드린다. (290쪽)

산다는 건 괴물의 잔등에다 꽃을 피우라는 임무를 부여받는 것. 인생을 이렇게 정의할 수 있다니.

<훈장>이라는 제목의 글 중 한 부분이고 책에 실린 글 들 중 제일 맘에 든 글 중 하나이다.

 

사회성 없고 덕은 더구나 모자라 친구가 별로 없는 나. 그나마 가끔 만나는 친구마저 코로나 때문에 못보고 있어 대화가 그리웠던 차이다. 이 책을 손에서 못놓고 읽은 것은 그런 친구를 만난 기분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술술 넘어간다. 정말 재미있고 말 잘 하고 예리하고 아는 것 많은 친구와 얘기를 나누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르듯이.

살아온 흔적은 이렇게 남을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이 새삼 들기도 했고 이렇게 다른 사람의 글을 읽고 소감을 남길 수 있는 소박한 행복도 다시 확인할 수 있어 좋았다. 이런 책 또 없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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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0-07-24 21: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인 님, 책 사시겠다고 하시더니 벌써 사시고 리뷰까지 쓰시다니 멋지십니다.
저는 수필의 리뷰는 어떻게 쓰는 건지 몰라 머릿속에서 헤매고 있었답니다.(여기서 실력 차이가 나네요.ㅋ)
역쉬 리뷰를 많이 써 보신 분은 다르네요.

저자께서 이 글 보시면 기쁘시겠습니다. 저는 바쁜 일이 생겨 이 책의 리뷰를 지금은 쓸 수 없는 형편이에요.
저는 좀 천천히 쓰려 합니다.
잘 쓰신 리뷰, 아주 잘 읽었습니다.

hnine 2020-07-25 04:32   좋아요 0 | URL
글을 유려하게 잘 쓰셔서 금방 읽을 수 있었어요. 리뷰에도 썼듯이 페이지 넘기는 손이 멈춰지지가 않더라고요. 어려운 얘기도 아니고 일상의 이야기를 식상하지 않게, 저자의 성격이 드러나게, 솔직하게, 잘 쓰셨더라고요. 배울 점도 많았고요.
시기적절하게 읽을만한 책 pek님 덕분에 알게 되어서 제가 덕 봤습니다.

자희 2020-07-29 1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요즘 트롯트가 대세이다. 한 때 뽕짝으로 홀대받던 음악 장르가 이토록 인기를 얻는 비결은? 트롯트나 국악은 우리의 무의식에 각인된 흥과 한을 흔들어 깨운다. 트롯트가 국민 음악으로 흥하는 이유이다. 수필도 이와 유사하다. 우리네 삶의 현 주소를 이토록 잘 반영할 수 있는 문학 장르는 없다. 쉽고 감동적이면서도 문학적이다. 수필은 탈권위주의 국민 문학이기도 하다. 책이 팔리지 않는 시대, 그러나 텍스트가 범람하는 시대에, 민혜의 <떠난 그대 서랍을 열고>(해드림출판사, 이승훈 대표)라는 수필집은 살아남는 수필의 전범을 보여주었다. 그녀의 글이 독자들에게 사랑받는 이유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