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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피 예찬
앙리 라보리 지음, 서희정 옮김 / 황소걸음 / 2024년 11월
평점 :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도망은 실패일까요, 지혜일까요? 앙리 라보리의 《도피 예찬》은 우리가 일상에서 흔히 느끼는 딜레마를 새로운 시각으로 풀어냅니다.
우리는 흔히 도피를 나약함이나 회피로 간주합니다. 하지만 앙리 라보리는 도피는 회피가 아니라 선택이며, 생존 본능의 발현이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도피를 더 이상 부끄러운 행동이 아니라, 고통을 줄이고 삶의 균형을 회복하기 위한 지혜로운 전략으로 바라봅니다.
최초의 신경안정제 클로르프로마진을 개발한 신경생물학자이자 철학자인 앙리 라보리는 인간 행동을 투쟁, 억제, 도피라는 세 가지 선택지로 나눕니다. 그리고 제목으로부터 짐작할 수 있듯 그는 도피의 미학을 이야기합니다. 억압적인 사회적 구조 속에서 도피가 오히려 건강한 선택일 수 있음을 역설하는 겁니다.
앙리 라보리는 신경생물학을 통해 인간이 직면하는 갈등과 스트레스를 설명하며, 생물학적 발견을 바탕으로 자유 의지와 인격에 관한 흥미로운 질문을 던집니다. 자신의 연구를 《도피 예찬》이라는 책으로 풀어냈는데, 자기계발서로 쉽게 생각하고 펼치면 꽤 당황할 수 있습니다.
단순한 실용서가 아니라 깊이 있는 교양 인문서입니다. ‘도피’라는 개념을 철학적, 생물학적 그리고 사회학적으로 분석합니다. 제목은 비교적 가벼워 보일 수 있지만, 책의 내용은 오히려 인간의 본능과 현대사회의 구조적 문제를 날카롭게 파헤칩니다.
도피도 그냥 단순한 도피가 아니었습니다. 앙리 라보리는 도피의 세 가지 얼굴을 짚어줍니다.
(1) 물리적 도피: 억압적 환경으로부터의 탈출
회사를 그만두거나, 이혼을 결심하거나, 새로운 도시로 떠나는 물리적 행위의 도피입니다. 직장 생활 중 번아웃에 직면했을 때 퇴사나 긴 휴가를 선택함으로써 자신을 보호하려 하는 것처럼요.
(2) 심리적 도피: 억제의 대안으로서의 탈출
심리적 도피는 억압적인 환경에서 마음의 평화를 찾기 위한 전략입니다. 억제는 스트레스와 불안을 몸으로 흡수하게 만들어 위궤양, 두통 같은 병적 증상을 초래할 수 있다고 합니다. 반면, 도피는 이를 완화시켜 생존 본능을 충족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3) 상상계로의 도피: 창의력의 원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상상계로의 도피입니다.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이 책을 읽으며 "상상을 통해 도피함으로써 자신을 지켰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예술가, 작가와 같은 창작자들은 종종 이 상상적 도피를 통해 고난을 극복하고 새로운 세계를 창조합니다.
도피는 투쟁과 억제와는 다르다고 합니다. 투쟁은 자멸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고 주장합니다. 현대사회는 물리적 폭력을 금지하고 있지만, 치열한 경쟁과 적대감 속에서 정신적 투쟁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습니다.
억제는 외부 갈등을 내부로 삼키는 행위입니다. 억눌린 분노나 불안은 신체적인 질병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라보리는 이를 두고 "몸이 내리는 벌"이라고 묘사합니다.
《도피 예찬》은 도피를 통해 자유를 찾고, 행복을 추구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의 삶은 얽히고설킨 관계와 구조에 의해 구속되지만, 도피를 통해 이러한 억압을 벗어날 수 있다고 합니다.
어떻게 도피해야 할까요? 단순히 불행에서 벗어나기 위한 도피가 아닌, 적극적으로 행복을 추구하는 방식으로 도피를 제안합니다. 행복은 다른 이들의 평가에서 벗어나 자기 자신과의 대화를 시작하는 순간 시작된다고 강조합니다.
물론 저자도 도피가 궁극적인 해결책이 아니라는 점을 인정합니다. 그럼에도 억압과 투쟁을 강요하지 않는 구조 속에서, 인간들이 도피할 필요 없이 자유롭게 성장할 수 있는 이상적인 사회, 도피가 필요 없는 세상을 희망합니다.
이 책은 철학적 성찰뿐만 아니라, 신경생물학적 연구를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도피라는 행동의 본질을 생물학적으로도 잘 짚어줍니다. 동시에 사회 구조가 인간 행동에 미치는 영향을 통해 단순히 개인의 문제로만 치부되지 않도록 주제를 확장합니다.
끊임없는 경쟁과 억압 속에서 우리는 도피라는 선택지를 외면하도록 강요받았습니다. 하지만 앙리 라보리의 통찰은 도피는 패배가 아니라 새로운 시작의 가능성임을 일깨웁니다. 《도피 예찬》은 현대인을 위한 생존 매뉴얼인 셈입니다.
도망을 부끄러워했던 우리의 고정관념을 완전히 뒤집는 책입니다. 이제는 도피의 미학을 재발견할 때입니다. 《도피 예찬》을 통해 내 삶을 억압하는 요소를 재평가하고, 진정한 자유와 행복의 가능성을 탐구하는 시간입니다.
투쟁은 고통을 부르고, 억제는 병을 낳지만, 도피는 상상력과 자유를 선사한다는 그의 메시지는 깊은 울림을 줍니다. 무겁지만 매혹적이고, 읽어볼 가치가 있는 인문교양서입니다.
도피라는 단어가 가진 부정적 이미지를 잠시 내려놓고, 도피가 어떻게 나의 삶에 긍정적 역할을 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던지며 읽어보세요. 앙리 라보리가 다루는 철학적, 생물학적 배경을 번아웃과 워라밸, 심리적 회복과 같은 현재의 트렌드와 연결해서 읽으면 더욱 흥미로울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