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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상 17:8-16 하나님 제일주의

여론조사 기관인 한국갤럽이 2004년 5월 13일부터 29일까지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 만 15세 이상 남녀 1,728명을 대상으로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40가지를 조사한 적이 있었습니다.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가수는 이미자, 탤런트는 최불암, 영화배우는 안성기 등등 ... 저는 그것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가장 좋아하시는 것은 무엇일까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좋아하시는 것은 십계명 중에서 제1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출20:3) 하나님은 우리가 다른 신들을 섬기지 않는 것을 가장 좋아하십니다. 하나님은 다른 신들을 섬기지 않은 사람에게는 후손 수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출20:6)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것은 무엇일까요? 십계명 중에서 제1계명을 어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다른 신들을 섬기는 것을 가장 싫어하십니다. 하나님은 다른 신들을 섬긴 사람에게는 후손 삼사 대까지 죄를 갚겠다고 경고하셨습니다.(출20:5)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것을 행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북 왕국 이스라엘의 제7대 왕 아합이었습니다. 아합 왕은 이스라엘의 북쪽에 있는 시돈 왕국과 동맹을 맺고 동맹을 공고히 하기 위하여 시돈 왕국의 공주 이세벨을 왕비로 맞이하였습니다. 정략결혼을 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은 시돈 왕국과 동맹을 맺었기 때문에 정치적으로는 전쟁이 없이 평화를 누리게 되었고 경제적으로는 교역을 통하여 번영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신앙적으로는 문제가 생겼습니다. 아합 왕은 이세벨과 결혼하자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을 섬겼습니다. 아합 왕은 이세벨을 위하여 바알 신전을 짓고 신전 안에 바알 제단을 쌓고 바알의 아내인 아세라 목상도 만들었습니다. 아합 왕은 이전의 이스라엘 왕들보다 더 심하게 다른 신들을 섬겼고 하나님을 더 진노하시게 만들었습니다.(왕상16:30-33) 

하나님은 엘리야 선지자를 아합 왕에게 보내셨습니다. “내가 섬기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 말이 없으면 수 년 동안 비도 이슬도 있지 아니하리라.”(왕상17:1) 엘리야 선지자는 아합 왕이 다른 신들을 섬겼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가뭄을 주셨다고 선언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야고보서 5장 17절을 통해 3년 6개월 동안 비가 오지 않았다고 말씀합니다. 저는 어린 시절에 가뭄을 경험해 보았습니다. 몇 달 동안 비가 오지 않자 논이 거북이 등처럼 쩍쩍 갈라졌고 밭작물이 누렇게 타들어 갔습니다. 먹을 물이 없어 소방차에서 물을 실어 오면 물지게를 지고 날랐습니다. 우리나라에 비가 오지 않는다면 농사를 지을 수 없지만 사막인 이스라엘에 비가 오지 않는다면 농사를 지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사람과 짐승이 굶어 죽게 됩니다. 이스라엘은 10월부터 3월까지는 우기라 비가 내렸고 나머지 건기에는 바다에서 올라온 습기가 이슬을 만들어냈습니다. 비가 오지 않더라도 이슬이라도 내린다면 농작물이 살아남을 수 있으나 비도 이슬도 내리지 않았습니다. 몇 달 동안 내리지 않았다면 견뎌볼 수 있으나 몇 년이라 살아남기가 힘들었습니다. 이스라엘은 황폐화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아합 왕이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겼기 때문이었습니다. 아합 왕이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는 것을 행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합 왕 시절에 바알과 아세라는 풍요를 가져다주는 신이었습니다. 그래서 아합 왕이 바알과 아세라를 섬겼습니다. 오늘날은 시간과 물질이 풍요를 가져다주는 신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시간에 쫓기고 물질에 얽매입니다. 하나님은 아합 왕이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자 가뭄을 주셨듯이 우리들이 시간과 물질을 섬긴다면 인생을 실패하게 만드십니다. 하나님이 가뭄을 내려서 아합 왕을 굴복시키셨듯이 우리들에게 사랑의 매를 드셔서 회개시키십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좋아하시는 것을 행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시돈 왕국의 사르밧 과부였습니다. 하나님은 엘리야 선지자를 그릿 시냇가로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유랑할 때 아침에는 만나를 저녁에는 메추라기를 내려주셨듯이 엘리야 선지자에게 아침과 저녁으로 까마귀들을 보내셔서 떡과 고기를 날라다 주셨습니다. 가뭄이 얼마나 극심한 지 그릿 시냇가가 마르자 하나님은 엘리야 선지자를 시돈 왕국에 있는 사르밧으로 보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야 선지자를 시돈 왕국으로 보내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시돈 왕국은 북 이스라엘을 우상 숭배로 물들게 한 이세벨 왕비의 고향이었습니다.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속에 들어가야 한다는 속담처럼 하나님은 우상을 없애기 위해서 엘리야 선지자를 우상 숭배의 본고장으로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르밧에 사는 과부가 엘리야 선지자에게 음식을 제공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야 선지자를 과부에게 보내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당시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는 가장 가난한 계층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가난한 과부에게 복을 주시려고 엘리야 선지자를 보내셨습니다. 과부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복을 받을 수도 있었고 받지 않을 수도 있었습니다.

엘리야 선지자가 사르밧에 도착해 보니 한 과부가 나뭇가지를 줍고 있었습니다. 과부는 가난에 쪄들어 몰골이 형편없었습니다. 얼굴은 새까맣게 탔고 의복은 갈기갈기 헤어졌습니다. 엘리야 선지자가 과부를 불렀습니다. “그릇에 물을 조금 가져다가 내가 마시게 하라.”(왕상17:10) 엘리야 선지자는 물을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과부는 아무 말 없이 물을 뜨러갔습니다. 가뭄이 심하게 들어 물도 귀했으나 과부는 형편은 어려워도 인심은 후했습니다. 엘리야 선지자가 한 술 더 떴습니다. “네 손의 떡 한 조각을 내게로 가져오라.”(왕상17:11) 엘리야 선지자는 밥을 가져오라고 요구하였습니다. 과부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한숨을 쉬었습니다.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가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떡이 없고 다만 통에 가루 한 움큼과 병에 기름 조금 뿐이라. 내가 나뭇가지 둘을 주워 다가 나와 내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들어 먹고 그 후에는 죽으리라.”(왕상17:12) 과부는 마지막 음식을 만들어 먹으려 한다고 대답하였습니다. 엘리야 선지자가 대담하게 요구하였습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가서 네 말대로 하려니와 먼저 그것으로 나를 위하여 작은 떡 한 개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오고 그 후에 너와 네 아들을 위하여 만들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나 여호와가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리라.”(왕상17:14) 엘리야 선지자는 마지막 식사를 자신에게 먼저 가져오고 과부와 아들은 나중에 먹으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 가뭄이 끝날 때가지 밀가루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않고 올리브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않는다고 약속하였습니다. 엘리야 선지자는 벼룩의 간을 먹는다 는 속담처럼 가난한 과부의 마지막 식사를 요구하였습니다. 과부는 마지막 식사를 자신과 아들이 먹을 것이냐 하나님의 선지자를 줄 것이냐 망설였습니다. 과부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마지막 식사를 엘리야 선지자에게 주었습니다. 과부는 밀가루를 반죽하여 프라이팬에 기름을 붓고 나뭇가지를 지펴서 부침개같이 얇고 둥근 빵을 만들어 엘리야를 대접하였습니다. 엘리야는 ‘여호와는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과부는 마지막 식사를 하나님께 대접하였습니다. 그러자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처럼 밀가루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않았고 올리브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가난한 과부에게 있어 마지막 음식인 가루와 기름은 가장 귀중했습니다. 과부는 가장 귀중한 것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하나님을 제일로 여겼습니다. 우리에게 있어 시간과 물질이 가장 귀중합니다. 우리가 시간이 가장 귀중할 때 너무 바빠서 주일을 지킬 수 없는 상황에서도 주일을 거룩하게 지킨다면 하나님께서 주일에 복을 주시고 거룩하게 만드십니다. 우리가 물질이 가장 귀중할 때 너무 쪼들려서 십일조를 드릴 수 없는 상황에서도 십일조를 구별하여 드린다면 하나님께서 하늘 문을 열고서 쌓을 곳이 없도록 복을 부어 주십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연초가 되면 덕담을 나눕니다. 가장 흔하게 사용하는 인사가 ‘부자 되세요.’이고 새해 소원도 돈을 많이 버는 겁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황금만능주의에 빠졌습니다. 그러나 교인들은 하나님 제일주의에 빠져야 합니다. 하나님을 인생의 최우선 순위로 둬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제일로 여겨주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내가 내 인생을 살아보려면 고단하기 짝이 없지만 하나님께서 내 인생을 살아주시면 모든 일이 수월해 집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하나님께 맡겨보십시오. 자유 해 질 겁니다. 아합 왕을 보십시오. 하나님을 나중으로 밀쳐놓았더니 가뭄을 만나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사르밧 과부를 보십시오. 하나님께 우선순위를 뒀더니 기척을 체험하지 않았습니까? 새해에는 우리 교인들도 하나님을 제일로 여겨 하나님의 놀라운 복을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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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2:22-40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우리나라는 아기를 낳으면 병원에서 발급한 출생증명서를 가지고 동사무소에 가서 출생신고를 해야 합니다. 집에서 낳으면 보증인의 도장 날인이 필요합니다. 아기를 낳고 한 달 이내에 출생신고를 하지 않으면 과태료를 물게 됩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남자 아기를 낳으면 8일째 되는 날에 할례를 하고 이름을 지었습니다.(레12:3) 아기가 장남인 경우 모든 장자는 하나님께 구별하여 돌려야 하기 때문에(출13:2) 한 달이 되면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고 아기를 되사는 의식을 행했습니다.(출13:11-16) 산모는 남자 아기를 낳으면 40일 동안, 여자 아기를 낳으면 80일 동안 의식적으로 부정했습니다./

예수님도 유대인으로 나셨기 때문에 8일째 되는 날 할례를 하였고 천사의 지시에 따라(눅1:31) 이름을 ‘예수’라고 지었습니다. 예수는 그리스어이고 히브리어로는 여호수아입니다. ‘여호와께서 구원하신다.’는 뜻으로 그 당시 흔한 이름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부모님인 요셉과 마리아는 정결기간이 끝나자 아기 예수님을 데리고 예루살렘 성전으로 올라갔습니다.(눅2:22) 예수님은 장남이셨기 때문에 은 다섯 세겔로 대속하기 위해서였습니다.(눅2:23) 사람이나 짐승이나 장자는 하나님의 것으로 부모나 주인은 속전을 드리고 되사왔는데(민18:15-16) 이 의식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종살이를 할 때에 바로가 완악하여 이스라엘을 보내주지 않자 하나님께서 애굽의 모든 처음 난 것을 사람이나 짐승이나 다 죽이셨으나 이스라엘의 장자는 다 살려주시고 하나님의 것으로 삼으셨던데 기인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아기를 낳은 여인이 정결하게 되는 예식을 위해서였습니다. 보통 사람의 경우 번제로 양을, 속죄제로 비둘기를 드려야 했지만(레12:6-8), 예수님의 부모님은 가난했기 때문에 산비둘기 한 쌍과 집비둘기 두 마리로 제물을 드렸습니다.(눅2:24) 예수님의 부모님은 율법을 준수하는 신실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부모님은 해마다 유월절이 되면 예루살렘 성전으로 올라갔고(눅2:41), 예수님이 12살이 되어 율법의 일정 부분을 지켜야 할 때가 되자 예수님도 데리고 성전으로 올라갔습니다.(눅2:42) 요셉과 마리아가 아기 예수님을 데리고 성전으로 갔듯이 우리도 자녀들을 성전으로 데리고 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잠언서 22장 6절을 통해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고, 에베소서 6장 4절을 통해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납니다. 부모가 신앙의 모범을 보여주어야 자녀들도 신앙을 계승하지 시험기간이라고 학원으로 보내면 신앙을 취미정도로 여깁니다. 우리는 신앙을 인생의 최고의 가치로 삼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부모님인 요셉과 마리아는 성전에서 시므온 할아버지를 만났습니다. 시므온은 의롭고 경건한 사람으로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사람이었습니다.(눅2:25) 메시야를 기다리는 사람이었습니다. 시므온은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않는다는 성령님의 지시를 받았습니다.(눅2:26) 시므온은 성령님의 감동으로 성전으로 들어갔고 마리아의 품에 안겨있는 아기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시므온은 그 아기가 그토록 기다리던 그리스도임을 직감하고 아기를 받아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였습니다.(눅2:27-28)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 도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 이다.”(눅2:29-32) 시므온은 그리스도를 만났으니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이 아기는 만민에게 구원을 베푸실 아기입니다. 이방인에게는 주님의 길을 비추는 빛이요 유대인에게는 하나님의 완전한 현현이었습니다. 시므온은 아기 예수님이 유대인에게 뿐만 아니라 이방인에게도 구원을 주실 분이라고 찬송하였습니다. 시므온이 성전에서 예수님을 만났듯이 우리도 성전에서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하나님은 고린도 전서 3장 16절을 통해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 말씀하셨고, 고린도 후서 6장 16절을 통해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도 바울을 통해 모든 교회가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어디서나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어디서든지 만날 수 있지만 특히 성전은 하나님의 영이 강력하게 역사하시는 거룩한 장소입니다. 자녀들이 인생의 문제가 생기면 부모님은 조금 도와줄 수 있지만 하나님은 해결해 주실 수 있습니다. 우리도 우리의 자녀들도 성전에서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예수님의 부모님인 요셉과 마리아는 성전에서 안나 할머니를 만났습니다. 안나는 히브리어로는 한나입니다. 안나는 여 선지자로 84세였습니다. 안나는 성전을 떠나지 않고 주야로 금식하면서 기도하였습니다.(눅2:36-37) 안나도 아기 예수님이 메시야임을 알아봤습니다. 안나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예루살렘이 속량될 날을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아기 예수님에 대하여 이야기하였습니다. 메시야를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에 대해 이야기하였습니다. 안나는 성전에서 아기 예수님을 알아보고 그리스도가 오셨다고 전하였습니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는 예수님의 12 제자를 사도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사도행전 2장 32절과 3장 15절과 4장 33절을 통해 사도들은 예수님이 아무 죄도 없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다고 증언하였습니다. 사도들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증언하기 위해 목숨을 걸었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증언해야 할까요? 예수님의 재림을 전해야 합니다. 안나가 그리스도가 오셨다고 전했듯이 우리는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고 전해야 합니다. 신약성경에는 예수님이 재림하신다는 말씀이 318번 나옵니다. 예수님이 한 번만 말씀하셔도 믿을 텐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말씀하신 이유는 임신한 여자가 반드시 해산의 고통을 겪듯이 반드시 재림하시기 때문입니다.(살전5:3) 밤에 도둑이 갑자기 들어오듯이 갑자기 재림하시기 때문입니다.(살전5:2)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영적으로 잠자지 말고 깨어서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살전5:5) 우리도 성전으로 가서 하나님을 만나고 세상으로 나가 우리가 만난 하나님을 전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우리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시고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셨다가 다시 오신다고 전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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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2:8-20 구주가 나셨으니

오늘은 성탄절입니다. 예수님이 탄생하신 날이죠. 예수님의 탄생을 기자가 사건을 취재하듯이 조목조목 알아보려고 합니다. 예수님은 12월 25일에 태어나셨을까요? 예수님이 태어나신 정확한 날짜는 모릅니다. 예수님이 처녀의 몸을 빌어 신비스럽게 태어났듯이 예수님이 태어나신 정확한 날도 신비롭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서 12월 25일이 성탄절로 지정되었을까요? 성탄절은 로마제국의 태양신 탄생일에서 유래했습니다. 로마제국은 12월 말경에 태양신의 탄생을 축하하며 1주일가량 동짓날 축제를 벌였습니다. 그러다 주후 4세기에 기독교가 공인되면서 우상을 숭배하는 태양신 탄생일이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는 성탄절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주후 16세기에는 로마 가톨릭의 그레고리 교황이 새로운 달력을 만들었습니다. 그레고리력이라고 합니다. 그레고리력으로 태양신이 탄생한 날은 12월 25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서유럽에서는 12월 25일을 성탄절로 지냅니다./ 그러나 동방정교회에서는 그전에 있었던 달력을 사용하였습니다. 율리우스력이라고 합니다. 율리우스력으로 태양신이 탄생한 날은 1월 7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동유럽에선 성탄절을 1월 7일로 지냅니다. 사실 성탄절이 언제인가가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성탄절이 무슨 날이냐가 중요합니다. 성탄절은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는 날입니다.

예수님의 부모님인 요셉과 마리아는 이스라엘의 북부인 갈릴리 지방 나사렛 마을에서 사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남부인 유대지방 베들레헴 마을에서 태어나셨습니다. 나사렛에서 베들레헴까지는 140Km 나 떨어져 있었습니다. 걸어서 사나흘 정도 걸립니다. 예수님은 어찌하여 나사렛에서 태어나지 않고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을까요? 인구조사 때문이었습니다. 유대 나라를 지배하던 로마 정부는 세금을 징수할 목적으로 모든 남자는 고향으로 돌아가서 인구조사를 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요셉은 나사렛에 살았지만 고향은 베들레헴이었습니다. 요셉은 인구조사를 하러 만삭이 된 마리아를 나귀에 태우고 나사렛에서 베들레헴까지 걸어갔습니다. 이 속에는 하나님의 섭리가 숨겨져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미가서 5장 2절을 통해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고 예언하셨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나사렛에서 태어나셨다면 구약성경의 예언이 실현되지 않았습니다. 메시야는 다윗의 고향인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약성경의 예언을 실현하시려고 로마 정부를 이용하셔서 나사렛에 사는 요셉과 마리아를 베들레헴으로 보내셨습니다. 로마 정부가 아니었다면 요셉이 만삭이 된 마리아를 데리고 유산될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나사렛에서 베들레헴까지 걸어가지 않았을 겁니다. 하나님은 악한 정부를 사용하셔서도 선한 일을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어찌하여 방에서 태어나지 않고 마구간에서 태어나셨을까요? 여관방(손님 방 또는 남는 방)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요셉과 마리아가 천신만고 끝에 베들레헴에 도착해 보니 인구조사를 하러 사람들이 한꺼번에 몰려드는 바람에 여관방이 가득 찼습니다. 1월 1일이 되면 동해안에는 해돋이를 보려고 관광객이 몰려들잖아요. 설상가상으로 마리아가 산통을 시작하였습니다. 방은 없지 마리아는 몸을 풀려하지 난감하였습니다. 요셉과 마리아의 딱한 사정을 보고 누군가 마구간을 내 주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시골집은 방 하나를 나누어 사람과 짐승이 함께 살았습니다. 우리나라의 시골집도 부엌을 반으로 나누어 한쪽은 부엌으로 사용하고 한쪽은 외양간으로 사용하였습니다. 마리아는 짐승들이 사는 마구간에서 아기를 낳아 포대기에 싸서 구유(여물통)에 눕혔습니다. 이 속에도 하나님의 섭리가 숨겨져 있습니다.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은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님을 보내실 때 화려한 왕궁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이 짐승과 더불어 사는 마구간으로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이 왕궁에서 태어나셨다면 가난한 사람들의 형편을 이해하지 못하셨을 겁니다. 마구간에서 태어나셨기 때문에 헐벗고 굶주리는 사람들의 처지를 너무도 잘 아십니다. 예수님은 사람으로 오셨기 때문에 우리의 어려운 처지를 이해하십니다. 또한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 주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 소식은 누구에게 가장 먼저 알려졌을까요? 목자들에게 가장 먼저 알려졌습니다. 천사들은 예수님의 탄생 소식을 율법을 연구하는 유대교 종교지도자들이 아니라 밤을 새워가며 양떼를 지키던 목자들에게 가장 먼저 알려주었습니다. 이 속에도 하나님의 섭리가 숨겨져 있습니다. 목자들은 이스라엘에서 가장 비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목자들은 양떼들을 지키기 위해 깨어 있었습니다. 마가복음 13장 33절에서 37절을 통해 예수님은 재림하실 때 까지 우리에게 ‘깨어있어라’ 고 당부하셨습니다. 부유하고 유식하고 고귀한 종교지도자들은 메시야의 탄생을 기다리지 않았습니다. 자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가난하고 무식하고 비천한 목자들은 메시야의 탄생을 기다렸습니다. 깨어 있었습니다. 우리는 지금 종교지도자들처럼 현실에 안주하면서 영적으로 자고 있습니까? 아니면 목자들처럼 양떼를 지키려고 비바람을 무릅쓰며 깨어 있습니까? 우리는 깨어서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성탄절을 맞아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는 것으로 그치기보다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다려야 합니다. 우리는 목자들이 양떼들을 돌보기 위해 깨어 있었듯이 다시 오실 예수님을 맞이하기 위해 영적으로 깨어 있어야 합니다. 깨어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명을 충성스럽게 감당하는 겁니다. 그러면 천사들이 깨어 있는 목자들에게 성탄의 기쁜 소식을 가장 먼저 알려주었듯이 우리들에게 예수님의 재림 소식을 가장 먼저 알려주실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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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1:26-38 말씀대로 이루어지이다.

예수님의 어머니 이름은 마리아입니다. 가톨릭에서는 성모 마리아 또는 천상모후(天上母后)라고도 부르며 공경합니다. 마리아의 조각상을 성모상(聖母像)이라 하고, 마리아에게 바치는 기도를 성모송(聖母誦)이라 하고, 마리아를 공경하는 호칭을 부르며 드리는 탄원기도를 성모호칭기도(聖母呼稱祈禱)라고 하고, 마리아가 보여준 신앙의 모범을 따르고자 성모 마리아와 관련된 사건들을 기념하기 위해 마리아 축일[Marian Feasts]을 만들었습니다. 가톨릭에서는 마리아가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중재하는 하늘의 여왕이라고 떠받들지만, 개신교에서는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연약한 인간이라고 여깁니다. 마리아를 바라보는 시각은 다르지만 마리아의 숭고한 신앙은 본받을 만합니다.

마리아는 하나님의 은혜로 선택되었다.

마리아는 유대 나라의 북부인 갈릴리 지방 나사렛 마을에서 살았습니다. 나사렛은 인구가 2천 명 정도인 시골 마을로 나사렛 사람들은 양을 치거나 농사를 지었습니다. 그 당시 목자나 농부는 가난했습니다./ 마리아의 나이는 12살에서 14살 정도로 다윗의 자손인 요셉이란 청년과 약혼한 사이였습니다. 그 당시는 약혼을 하고 1년 동안 각자의 집에서 따로 살다가 결혼을 하고나서 함께 살았습니다. 오늘날로 보면 중학생이지만 평균 수명이 짧았던 2천 년 전에는 결혼적령기였습니다./ 마리아는 시골에서 살았기 때문에 가난했고, 성인 남자만을 사람으로 여겼던 시대에 살았기 때문에 미천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마리아에게 천사장 가브리엘을 보내셨습니다.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인사를 건넸습니다.(28절)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 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 도다.” 천사는 마리아에게 은혜를 받은 자라고 인사했습니다. 마리아는 천사를 보고 놀랐다기보다 인사를 듣고 놀랐습니다.(29절) 마리아가 인사를 받을 만한 신분이 아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가브리엘은 마리아를 안심시키며 기절초풍할 소리를 전했습니다.(30-31절) “마리아여 무서워하지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느니라.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하나님은 예수님의 어머니로 마리아를 선택하셨습니다. 마리아가 사회적인 신분이 높아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선택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마리아에게만 은혜를 베푸신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도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하나님은 로마서 3장 23절-24절을 통해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마땅한 죄인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어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롬3:21-26,고후5:14-21,갈2:15-21,딤후1:9,딛3:3-7) 우리는 구원받을 만한 아무런 자격도 없지만 하나님은 아무런 대가도 요구하지 않으시고 호의를 베푸셨습니다.

마리아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잉태되었다.

마리아는 임신했다는 소리를 듣고 어이가 없어 가브리엘에게 물었습니다.(34절)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하나님은 27절과 29절을 통해 마리아가 순결한 처녀라고 말씀합니다. 마리아도 남자와의 관계를 부인합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요? 미생물 특히 단세포 세균은 하나의 세포가 2개나 여러 개로 분열되어 무성생식을 하지만 생물은 정자와 난자가 결합하여 새로운 개체를 만드는 유성생식을 합니다. 사람도 생물인데 마리아가 남자 없이 임신할 수는 없었습니다. 가브리엘이 대답했습니다.(35절)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이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리라.” 가브리엘은 마리아가 성령님의 능력으로 임신했다고 알려주었습니다. 가브리엘은 계속하여 “보라. 네 친족 엘리사벳도 늙어서 아들을 배었느니라. 본래 임신하지 못한다고 알려진 이가 이미 여섯 달이 되었나니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고 말했습니다. 가브리엘은 불임 여성인 마리아의 친족 엘리사벳도 하나님의 능력으로 임신하여 벌써 여섯 달이나 되었다고 알려주었습니다. 하나님은 하지 못하시는 일이 아무것도 없으십니다. 성경에는 불임 여성들이 아이를 낳은 말씀이 여러 번 나옵니다.(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는 90세에 아들 이삭을 낳았습니다. 아브라함의 나이는 100세였습니다.(창21:1-7) 이삭의 아내 리브가는 남편의 간구를 하나님이 들으시고 쌍둥이 아들 에서와 야곱을 낳았습니다.(창25:21-26) 야곱의 아내 라헬은 하나님이 불쌍히 보시고 소원을 들어주셔서 아들 요셉을 낳았습니다.(창30:22-24) 마노아의 아내는 여호와의 사자가 아들을 낳으리니 나실인으로 바치라고 하고 아들 삼손을 낳았습니다. (삿13:2-25) 엘가나의 아내 한나는 아들을 낳으면 하나님께 봉헌하겠다고 약속하고 아들 사무엘을 낳았습니다.(삼상1:19-20))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입니다. 모든 것이 가능한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마태복음 19장 26절을 통해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막10:27) 전능하신 하나님은 우리도 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마가복음 9장 23절을 통해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고 말씀하셨고, 빌립보서 4장 13절을 통해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을 믿으면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불가능하지만 하나님의 능력을 덧입으면 모든 것이 가능해 집니다.

마리아는 믿음으로 순종하였다.

마리아는 성령님의 능력으로 임신했다는 소리를 듣고 믿음으로 순종했습니다.(38절)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 지이다.” 성경에는 불임 여성에게 아들을 주겠다고 말했을 때에 여러 가지 반응이 나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는 그 말씀을 듣고 피식 웃었습니다.(창18:9-15) 그래서 아들의 이름을 ‘그가 웃다.’라는 뜻으로 ‘이삭’이라고 지었습니다. 제사장 사가랴는 그 말씀을 의심하였습니다.(눅1;18) 그래서 벙어리가 되었다가 아들을 낳고 천사의 말대로 이름을 요한이라고 지어 주자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렸습니다. 그러나 미천한 시골 처녀 마리아는 목숨을 걸고 믿음으로 순종했습니다. 그 당시 약혼한 여자가 다른 사람의 아이를 가진다면 엄청난 시련이 따랐습니다. 약혼자가 결혼을 거절하면 평생을 독신으로 살면서 여자가 직업을 가질 수도 없기 때문에 거지가 되거나 창녀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성령님의 능력으로 임신했다고 말한다면 미친 여자라고 취급당할 것이 뻔했습니다. 마리아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말씀을 믿고 모든 위험을 감수하고 순종하였습니다. 믿음은 전자계산기로 두드려서 수지타산을 맞춰보고 반응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약속을 믿고 모험을 감수하는 겁니다. 하나님은 마리아에게만이 아니라 우리에게도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쩔 수 없는 상황까지 내몰려서 할 수 없이 복종하는 것 보다는 위험을 감수해서 라고 자발적으로 순종하기를 바라십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마리아처럼 주님의 약속을 믿고 믿음으로 반응하십니까? 아니면 자신의 머리로 판단해 보고 결정하십니까? 하나님은 믿음을 가진 한 여인을 통해 하나님의 아들을 세상으로 보내셨습니다. 그렇듯이 하나님은 믿음을 가진 한 사람을 통해 세상을 놀랍게 변화시키기를 원하십니다. 그 사람이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의 믿음을 거름으로 삼아 하나님의 놀라운 일이라는 열매를 맺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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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1:19-28 주의 길을 곧게 하라.

요한이 등장하였다.

저는 성경에 나오는 인물 중에서 세례자 요한을 가장 좋아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흔히 세례 요한이라 부르지만 표준새번역과 공동번역에는 세례자 요한이라고 나옵니다. 세례를 주는 사람 요한이라는 뜻이죠. 제가 요한을 좋아하는 이유는 요한이 예수님의 오실 길을 준비했듯이, 저도 다시 오실 예수님을 준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구약성경에 나오는 말라기 선지자 이후 400년 만에 등장한 선지자였습니다. 선지자가 나타나지 않자 유대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굶주렸습니다. 우리도 예배를 참석하지 않으면 영적으로 갈급해 지잖아요? 유대 백성들은 죄를 지적해주고 바른 길로 인도해줄 선지자를 고대했습니다. 그때 요한이 유대 광야에 등장했습니다.(유대 광야는 사막이라기보다는 사람이 살지 않는 외진 곳입니다.) 요한은 구약성경에 나오는 엘리야 선지자를 연상시켰습니다.(왕하1:8) 요한은 낙타털로 짠 거친 옷을 입었고 허리에는 옷이 내려가지 않도록 가죽 띠를 띠었습니다./ 메뚜기를 구워 먹고 광야에서 흔한 석청(야생 들꿀)을 채취해서 먹었습니다.(막1:6) / 하늘을 이불 삼고 땅을 요 삼아 길에서 잠 잤습니다./ 요한의 행색은 초라했지만 눈은 사막의 태양처럼 이글거렸고 입에서는 폭포수와 같은 말씀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요한은 회개를 설교하였다.

요한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3:2)고 설교하였습니다. 요한의 설교는 잔잔한 물가에 떨어진 바위가 물을 뒤집어 놓듯이, 말씀에 굶주려 있는 유대 백성들의 영혼을 뒤집어 놓았습니다. 요한이 설교한 ‘회개’는 죄에서 떠나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겁니다. 유대 백성들은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에게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니요? 유대 백성들은 입으로 하나님을 믿었지 행동으로는 떠나 살았습니다. 유대 백성들은 ‘언행심사’란 화살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이라는 과녁에 쏘았을 때 자꾸만 빗나갔습니다. 말과 행동과 마음가짐과 생각이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은 어떨까요? 오늘날의 교인들도 말로는 하나님을 믿는다면서 행동으로는 세상을 향하고 있습니다. 교회에서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지만 세상에서는 맘몬(돈)을 할아버지로 여기고 살아갑니다. 교회에서만 교인이지 세상에서는 이방인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교회의 사회적 신인도가 C_밖에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요한이 유대 백성들에게 오실 예수님을 맞이하기 위해 회개하라고 촉구했듯이,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다시 오실 예수님을 맞이하기 위해서 회개하라고 부르짖고 있습니다.

유대 백성들은 회개하였고 종교지도자들은 진상조사단을 파견하였다.

요한의 설교를 듣고 유대 백성들은 눈물을 글썽거렸습니다. 유대 백성들은 죄에서 떠나 하나님께로 돌아오기 시작했습니다. 유대 백성들은 예루살렘과 온 유대 지방과 요단 강 사방에서 요한에게 나아와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회개의 세례를 받았습니다(마3:5)(유대광야에서 요단강까지는 가깝습니다.) 이방인이 유대인이 되려면 죄를 회개하고 세례를 받았듯이, 요한은 오실 예수님을 맞이하기 위해 죄를 회개하고 세례를 받으라고 설교했습니다./ 인기 가수가 콘서트를 열면 팬들이 몰려들듯이, 요한이 설교하면 백성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요한의 인기가 하늘을 찌르자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교 종교지도자들은 요한이 백성들의 지지를 등에 업고 종교지도자들에게 대항할까 봐 바짝 긴장했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은 요한의 설교를 듣고 은혜를 받으려 하지 않고 요한의 정체를 밝혀내려고 진상조사단을 파견했습니다. 오늘날도 말씀을 아멘으로 받는 교인은 은혜의 강물이 흐르지만, 말씀의 꼬투리를 잡는 교인은 영혼의 우물이 말라버립니다.

요한은 자신의 정체성을 알았다.

진상조사단이 요한에게 “네가 누구냐?”고 물었습니다.(요1:19) 혹시 그리스도냐는 물음이었습니다. 요한은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숨기지 않고 대답했습니다.(요1:20) 그리스도는 헬라어이고, 히브리어로는 메시야입니다. ‘기름부음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유대 백성들은 메시야(그리스도)가 오시기를 기다렸습니다.(기독교는 그리스도교를 음이 같은 한자로 옮긴 말입니다.(가차)/ 진상조사단은 “그러면 엘리야냐?”고 물었습니다. 엘리야는 회오리바람으로 휩싸여 하늘로 올라갔습니다.(왕하2:11) 유대 백성들은 엘리야가 다시 오리라고 기대했습니다.(말4:5-6) 요한은 “아니라.”고 대답했습니다.(요1:21/) 진상조사단은 “네가 그 선지자냐?”고 물었습니다. 그 선지자는 모세와 같은 선지자입니다.(신18:15,18) 유대 백성들은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나타나리라고 기대했습니다. 요한은 “아니라.”고 대답했습니다.(요1:21)/ 진상조사단은 그리스도냐, 엘리야냐, 그 선지자냐 고 물었고, 요한은 그 때마다 아니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당시 요한의 인기는 60년대 록 그룹인 비틀즈를 능가할 정도로 대단했습니다. 요한이 그리스도라고 주장한다면 유대 백성들은 신으로 떠받들 것이고 진상조사단은 굽실거릴지도 모릅니다. 요한이 아니라고 한다면 거짓 선지자로 의심받을 수도 있었습니다. 요한은 이런 유혹에 흔들리지 않고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고 단호하게 부인했습니다. 요한은 자신의 정체성(identity)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의 정체성은 무엇입니까? 나는 누구일까요? 하나님은 에베소서 2장 10절을 통해 우리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시이니라.”고 말씀합니다. 표준새번역을 통해서는 “우리는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선한 일을 하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만드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미리 준비하신 것은, 우리가 선한 일을 하며 살아가게 하시려는 것입니다.”라고 말씀하셨고, 공동번역을 통해서는 “우리는 하느님의 작품입니다. 곧 하느님께서 미리 마련하신 대로 선한 생활을 하도록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창조하신 작품입니다.”라고 말씀합니다. 성경은 우리는 하나님의 작품이라고 말씀합니다. LAB 주석을 보니 우리는 하나님이 만드신 걸작품이라고 말하더군요. 나도 걸작품, 너도 걸작품. 이 구절은 우리가 우리를 어떻게 보아야 하며, 다른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걸작품이기 때문에 자신감을 갖고 살아야 합니다. 만약 자신이 보잘 것 없는 인간이라고 자기비하를 한다면 하나님의 걸작품을 훼손하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을 볼품없는 인간이라고 평가절하 하는 것도 하나님의 걸작품을 손상시키는 겁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걸작품입니다. 잘났든 못났든 하나님이 독특하게 만드신 최고의 작품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을 존중할 줄 알아야 합니다.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면 다른 사람들도 사랑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자신의 사명을 알았다.

요한이 그리스도도, 엘리야도, 그 선지지도 아니라고 하자 진상조사단이 짜증을 내며 “누구냐? 우리를 보낸 이들에게 대답하게 하라. 너는 네게 대하여 무엇이라고 하느냐?” 고 추궁했습니다.(요1:22) 진상조사단은 혹시 거짓 선지자가 아닌 가 촉각을 곤두세웠습니다. 요한은 이사야서 40장 3절을 인용하여 “나는 이사야 선지자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 로라.”고 대답했습니다. 고대 근동에서는 왕이 행차하기 전에 사자(messenger)가 앞서 가서 왕이 오신다고 알리고 오실 길을 평평하게 닦았다고 합니다. 그렇듯이 요한은 오실 그리스도를 맞이하기 위해서 영적이고 도덕적인 타락상을 회개시키려고 광야에서 외쳤습니다. 요한은 자신의 사명(mission)알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의 사명은 무엇입니까? 자신의 정체성을 모르는 사람은 자신의 사명도 모르지만 자신의 정체성을 아는 사람은 자신의 사명도 압니다. 요한의 사명은 오실 그리스도를 준비하는 일이었습니다. 저의 사명도 다시 오실 그리스도를 준비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걸작품이란 자의식이 없을 때는 세상 사람들처럼 돈을 많이 벌어 잘 먹고 잘 사는 데 관심을 가졌을지 모릅니다. 그것은 세상 사람들의 관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선한 일을 하게 하시려고 만드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걸작품이란 자의식을 가져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돈을 벌고 써야겠다고 다짐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공부해야겠다고 결심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고 여러분의 앞길을 열어주실 겁니다.

요한이 자신의 정체성을 알았기에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부인했던 것처럼, 우리는 실수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걸작품이라는 자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요한이 자신의 사명을 알았기에 광야에서 회개하라고 외쳤던 것처럼,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야겠다고 결단하는 저와 여러분이 돼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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