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처럼 설교하라
제임스 W. 톰슨 지음, 이우제 옮김 / 크리스챤출판사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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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의 관광도시 바르셀로나에는 프랑스의 건축가 쟝 누벨이 설계한 지상 34층, 지하 4층, 높이 144.4미터의 타워가 있다. 이 건물은 4만 개의 붉은 색과 푸른색과 오렌지 색  유리로 만들어져 보는 각도와 거리에 따라 색깔이 달라진다고 한다. 이 건물이 카멜레온처럼 색깔이 달라지듯이 사도 바울도 보는 각도에 따라 정체성이 달라진다. 어떤 사람은 그가 3차례나 세계를 여행하면서 복음을 전했다고 하여 선교사라고 부른다. 또 어떤 사람은 그가 로마서와 같은 신학적인 주제를 담은 책을 저술했다고 하여 신학자라고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그러나 저자는 그의 이름으로 기록된 편지는 그의 입으로 선포됐던 설교였다고 주장한다.

저자는 바울의 설교는 개종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한 복음전도 설교였으며, 새로운 개종자들에게 파라클레시스(권면)를 통하여 공동체를 형성하기 위한 목회 설교였다고 주장한다. 바울의 설교에는 케리그마(Kerygma)와 디다케(didache)가 포함되어 있었다. 저자는 사도 바울은 이교 문화에 점령당했던 전 기독교 사회(pre-Christian society)에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전하여 개종을 촉구했듯이, 다원주의에 물들어 버린 후 기독교 사회(post-Christian society)에 사는 설교자들도 예수님의 구원 사건을 다시 전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저자는 전통적인 설교학의 대안으로 등장한 신 설교학은 공동체를 형성하는데 무능하고 목회적인 돌봄을 제공하는데 미약하지만 바울은 전도와 양육을 효과적으로 수행했다고 평가한다.

저자는 신약신학 교수답게 본문을 세밀히 연구하여, 바울 설교의 3가지 특징을 논한다. 그의 설교는 고대 수사학에 영향을 받았지만 재판관의 모임이나 자유시민의 모임이 아닌 기독교 공동체에서 선포되었기 때문에 교회 수사학(church rhetoric)이라고 인용한다. 그의 설교는 이성적인 방법으로 설득하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권위에 사로잡혀 선포하기 때문에 구약시대 예언자와 유사하다고 설명한다. 프레드 크레독은 설교자는 권위가 없어야 한다고 말했지만 바울은 하나님의 대사(ambassador)였고 설교자는 하나님이 주신 권위를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그의 설교는 순간적으로 감흥을 일으키기도 하지만 지속적으로 공동체에게 행동의 변화를 호소한다. 그는 믿음의 응답으로서 복음에 합당한 생활을 요구한다.

저자는 바울의 설교가 언제나 교회론 적이었다고 논증한다. 그의 복음전도 설교가 기독교 공동체를 건설하고 그의 목회 설교가 교회의 변화를 추구했듯이 설교의 목적은 개인의 변화와 아울러 공동체의 변화에 있다고 역설한다. 그러나 우리시대는 어떤가? 기독교의 침체와 맞물려 복음전도를 하는 야전사령관은 감소하고 신앙성장을 가르치는 교육사령관은 증가하는 추세다. 저자는 복음전도 설교는 목회 설교로 귀결돼야 하듯이 한국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비교인들에게 전하여 회심하게 하고 또한 교인들에게도 십자가와 부활을 상기시켜 신앙을 성장시켜야 한다고 조언한다. 그런 면에서 바울은 아버지였고(살전2:11-12) 어머니였으며(갈4:19), 농부였고(고전3:5-9a) 건축가였다(고전3:9b-15). 바울을 통해 당신도 두 날개로 힘차게 날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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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 - 적용을 도와주는 LAB 주석 시리즈
그랜트 오스본 엮음, 김진선 옮김 / 성서유니온선교회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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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나에게 최고의 주석을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전문가들이 추천한 주석을 단권으로 사라고 권할 것이다. 그러나 최고 주석으로 인정받는 주석이 아직 국내에 번역되지 않은 경우가 많다. 그렇다면 최고의 주석과 더불어 반드시 참고할 주석이 어떤 것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망설이지 않고 LAB 주석이라고 답할 것이다. LAB 주석은 매튜 헨리와 바클레이 주석처럼 복음적이다. 독자들은 구절 풀이를 통해 하나님의 숨결을 느낄 수 있다. LAB 주석은 호크마와 그랜드 주석처럼 종합적이다. 독자들은 위인들의 명언과 감동적인 예화를 만날 수 있다. LAB 주석은 NICOT(NT)와 WBC처럼 신학적이다. 독자들은 본문의 문화적인 배경과 신학적인 메시지를 들을 수 있다. LAB 주석은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랩 주석의 서론은 간단하면서도 심오한 것이 특징이다. 다른 주석들은 서론이 너무 방대해 신학생 때는 읽지만 목회자가 되면서부터 건너뛰기 일쑤였다. 랩 주석의 주해는 장을 최대한 존중하면서 문단을 나누고 구절을 풀이하고 있다. 본문의 이해를 위해 지도를 삽입하고 삶으로 실천하기 위해 적용도 실어 준다. 그러나 내가 가장 좋아하는 부분은 교수 노트와 설교 아이디어다. 본문 28쪽을 보면 바울은 율법에 대한 유대인들의 태도가 2가지 형태로 나타난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하나는 율법주의다. 율법주의는 우리 자신의 헌신과 순종이라는 자기 의지적인 노력을 통해 하나님의 인정을 받고자 시도하는 태도이다. 또 하나는 우월주의다. 우월주의는 올바른 종교를 소유했다는 교만의 발로다. 편집자들은 율법주의와 우월주의의 과거의 모습과 현재의 모습을 조명하고, 그것을 통해 나타난 결과를 보면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을 이끌어낸다. 랩 주석처럼 명쾌한 주석은 많지 않았다. 랩 주석의 참고문헌은 빈약하지만 본문의 엑기스를 추출하는데 부족함이 없다. 랩 주석은 최고 주석은 아니지만 최고 주석과 더불어 참고할 주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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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14:6(1-14)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지금으로부터 약 2천 3백 년 전에 동양과 서양에서 대규모 토목공사가 벌어졌습니다. 중국은 이민족을 방어하기 위해 5천 킬로미터에 이르는 만리장성을 쌓았습니다. 중국은 길을 막고 이민족과의 왕래를 차단했습니다. 그러나 로마는 이민족을 공격하기 위해 15만 킬로미터에 이르는 도로를 건설했습니다. 로마는 길을 닦고 이민족과의 왕래를 촉진했습니다. 중국은 패쇄적이었고 로마는 개방적이었습니다. 그 결과는 어떠했을까요? 길을 차단한 중국은 오히려 이민족의 침략에 시달렸지만 길을 건설한 로마는 오랫동안 세계를 제패했습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격언은 피가 심장에서 혈관을 타고 흐르듯이 모든 길은 로마로부터 시작해서 로마의 속국으로까지 연결된다는 말입니다.

로마 제국은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고 생각했으나 예수님은 나는 아버지께로 통하는 유일한 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로마는 여러 갈래 길을 통해 들어갈 수 있었으나 천국은 한 길을 통해서만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날 밤에 제자들과 마지막 저녁 식사를 하시면서 두 가지를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4장 1절에서 2절까지를 함께 읽겠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아멘. 예수님은 엄마가 아이에게 시장에 다녀올 테니 옆집에서 놀고 있어라 말하듯이 제자들을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14:2) ‘거처’는 ‘하늘나라’라는 장소적 개념도 있고, ‘하나님 안에서’라는 관계적 개념도 있습니다. 장소적 개념으로 생각하면 예수님은 제자들을 위해 하늘나라에서 거처할 방(rooms, NIV)을 마련하러 가신다는 의미가 됩니다. 관계적 개념으로 생각하면 예수님은 제자들을 위해 하나님 안에서 사는 길을 마련하여 주신다는 의미가 됩니다. 두 개념을 종합하면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하여 지금 하나님 안에서 살고 있으며 나중에 하늘나라에서 살게 될 것입니다./ 3절을 읽겠습니다.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너희가 아느니라.” 아멘. 예수님은 엄마가 아이에게 시장에 다녀와서 집으로 데려가겠다고 약속하듯이 제자들에게 다시 와서 너희를 영접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14:3)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과 재림을 통하여 하늘나라로 가서 하나님 안에서 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아이는 엄마가 왜 자신을 떼놓고 시장에 가는지 모르듯이 도마는 예수님께서 왜 아버지께로 가신다고 말씀하는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14:5)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 도마는 예수님께서 아버지께로 가는 장소도 몰랐고 아버지께로 가는 방향도 몰랐습니다. 예수님은 엄마가 아이에게 시장에 다녀와야 한다고 설명해 주듯이 도마에게 아버지께로 가는 길을 알려주셨습니다. 그 목적지는 어떤 장소가 아니라 하나님이며, 그 목적지에 이르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아니라 예수님입니다. 6절을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아멘. 예수님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로 가는 길입니다. 하나님께로 가는 다른 길은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께로 갈 수 있습니다. 종교 다원주의자들은 산으로 올라가는 여러 길이 있듯이 천국으로 가는 여러 길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동차가 일방통행로를 달리듯이 천국은 한 길을 통해서 들어갈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한 길이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진리’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알려주는 진리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절대적인 진리는 없고 상대적인 진리가 있다고 말합니다. 이것에는 이것이 옳고 저것에는 저것이 옳다고 합니다. 그러나 프란시스 쉐퍼는 성경은 종교적인 진리가 아니라 총체적인 진리라고 말합니다. 성경은 교회에서만 사용되는 진리가 아니라 세상에서도 통용되는 진리라고 말합니다. 그 보편타당한 진리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생명’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죽여 우리를 살리셨습니다. 예수님은 영원한 삶을 주시는 생명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가톨릭 신학자 칼 라너는 ‘익명의 그리스도인’라는 말을 통해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이 신실하게 신앙 생활한다면 기독교인으로 포용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만 생명을 얻을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지만 세상 사람들은 어떻게 반응합니까? 길이신 예수님을 거부하는 사람도 있고 영접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고린도전서 1장 18절을 통해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멸망당할 사람들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어리석게 보고 거부하지만 구원받을 사람들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능력으로 보고 영접합니다. 하나님은 누가복음 23장을 통해서 예수님과 두 명의 행악 자가 십자가에 달렸을 때 하나는 예수님에게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고 비방했으나(거부했으나), 다른 하나는 비방한 행악 자를 꾸짖고 예수님에게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하고 영접하였습니다.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예수님께서 행악 자에게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축복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한 행악 자는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늘나라로 가는 유일한 길입니다. 그 길로 들어가면 진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 진리를 발견하면 생명을 얻게 됩니다. 길을 막았던 중국이 쇠퇴했듯이 하나님께로 가는 길을 막는다면 멸망하게 됩니다. 길을 열었던 로마가 흥왕했듯이 하나님께로 가는 길을 열어둔다면 생명을 얻게 됩니다. 저와 여러분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통해 천국에 이르러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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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용을 도와주는 베드로전.후서 유다서 LAB 주석 시리즈
그랜트 오스본 엮음, 류호영 옮김 / 성서유니온선교회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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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마다 강단에 서는 설교자라면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하게 해석할까에 관심을 많이 가집니다. 설교자의 서재에 가 보면 한편에 주석이 빼곡히 꽂혀 있습니다. 설교자가 얼마나 본문과 씨름하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석이 많다고 본문이 쉽게 다가오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주석은 바티칸 교황청처럼 엄청난 크기로 상대를 압도하여 본문을 펼치지도 못하게 합니다. 또 어떤 주석은 영국 런던탑에 진열되어 있는 컬리넌 1번처럼 엄청난 가격으로 상대를 기죽여 서점에 전시되는 것으로 만족합니다. 그러나 이 주석은 커피를 마시면서 읽을 수 있는 분량의 서론에, 헬라어를 낙제했어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주해에, 한 눈에 들어오는 참고문헌으로 구성되었습니다.(베드로전후서는 참고문헌이 빠졌네요.) 또 이 주석은 딸 아이와 롯데리아에 가서 요기를 할 수 있을 정도로 저렴합니다. 그렇다고 얄팍한 해설로 실망시키거나 부실한 제본으로 반품하지 않아도 됩니다. 이 주석은 성경에 대한 문화적 배경을 설명하는 깊이와 교회 지도자들의 통찰력을 인용한 넓이가 돋보이며 난시라도 피곤하지 않는 인쇄가 매력입니다. 그리고 설교 아이디어는 환상적입니다. 시련 가운데서 기뻐해야 할 이유들을 보면 1. 시련은 우리의 믿음을 강화한다. 2. 시련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회복시키기 위해 오실 그때에 우리가 경험하게 될 영광을 고대하게 도와준다. 3. 시련은 우리 안에 깊이 내재되어 있는 인내를 드러낸다. 4. 시련은 우리가 세상적인 욕망들을 거부하게 도와준다. 5. 시련을 통해 시련과 고난은 예수께 상급을 받는다.(55쪽) 한 번 이 주석에 맛들이면 저처럼 다른 주석은 눈길도 주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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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사학과 성경 내러티브 - 실제 지침서
D. F. 톨미 지음, 이상규 옮김 / 기독교문서선교회(CLC)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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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신학대학을 다니던 9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역사적인 성경해석 방법을 주로 배웠으나 신학대학원을 다니던 90년대 중반부터는 문학적인 성경해석 방법을 전공한 교수님들이 하나둘씩 늘어나더니 최근에 구약학에서는 문학적 접근(트렘퍼 롱맨3세)으로, 신약학에서는 서사비평(마크 포웰)으로, 국내 학자 중에서 이 분야의 선구자인 이형원 교수는 문학비평으로, 뒤늦게 등장한 오덕호 교수는 문학-역사비평으로, 조금 다르면서도 비슷한 성경해석 방법론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서사비평에 대한 번역 작업도 활발하여 신약학에서는 서사비평을 종합적으로 정리한 [서사비평이란 무엇인가]를 시작으로, [요한복음 해부]와 [이야기 마태복음]이 번역되더니, 서사비평의 원조랄 수 있는 [이야기 마가]가 잇달아 소개되었고, 구약학에서는 구약성경을 문학적으로 분석한 [최신구약개론]과 본문에 대한 문학적 구조를 분석한 [구약의 문학적 구조]와 트렘퍼 롱맨의 초기작인 [문학적 성경해석]도 소개되었습니다.

이 책은 서사비평 개론서라는 측면에서 보면 서사비평이란 무엇인가와 비슷합니다. 그렇지만 내용은 이 책이 어렵습니다. 만약 서사비평에 관심을 가진 독자라면 신약성경을 전체적으로 바라보는 마크 포웰의 저작을 먼저 읽고, 개별 복음서를 보여주는 컬페퍼와 킹스베리와 로즈 등의 작품을 읽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러나 이 책은 일반 문학계에서 고안한 서사비평을 무비판적으로 원용한 다른 작품과는 달리 신약성경 내러티브의 독특성을 탐색하였고(10-11쪽), 서사비평(Narrative Criticism)이란 용어를 사용하는 다른 작품과는 달리 고대부터 현대까지의 모든 내러티브 본문에서 전형적인 특징이 발견된다는 전제로 서사학(Narratology)이란 용어를 선호하고 있으며(23-24쪽), 다른 작품은 관점(point of view)이란 개념을 사용하지만 내레이터가 바뀌거나 인지의 위치가 변하는 경우가 있어‘초점 맞추기’라는 개념을 도입하였습니다.(51-52쪽) 저자의 말대로 구약성경의 3분의 1과 신약성경의 2분의 1이 내러티브로 구성되어 있습니다.(13-14쪽)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인간의 언어로 기록되었습니다. 서사학을 도입하여 성경을 읽는다면 그동안 간과했던 또 하나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으리라 확신합니다. 그 개론서로 힘찬 출발을 해보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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