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조나단 에드워즈
데이비드 보건 지음, 김은홍 옮김 / 기독신문사 / 2004년 3월
평점 :
조나단 에드워즈와 존 웨슬리는 교회사에서 만나는 영적 거인들이다. 에드워즈는 미국에서 제1차 영적 대각성 운동을 주도하였고, 웨슬리는 영국에서 메도디스트 부흥운동을 일으켰다. 두 사람은 흥미롭게도 같은 해에 태어났다.(1703년) 그래서 에드워즈와 웨슬리의 삶을 간단하게나마 비교해 보려 한다. [Jonathan Edwards] (David Vaughan, 2000)와 [소설 존 웨슬리]를 참조하였다.
에드워즈와 웨슬리는 둘 다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웨슬리(7월 17일)가 웨드워즈(10월 5일)보다 조금 먼저 태어났다. 두 사람은 어린 시절 신비한 체험을 하였다. 에드워즈는 1708년(또는 1709년) 부흥회에서 신앙 체험을 하였고, 웨슬리는 1709년 목사관의 화재로부터 극적으로 구출되었다.
대학은 에드워즈가 먼저 입학하였다. 1716년에 코네티컷 대학(예일의 전신)에 입학하여 1720년에 학사학위를 받았고 1723년에는 석사학위를 받았다. 웨슬리는 1720년 옥스퍼드 대학에 입학하여 1724년에 학사학위를 받았고 1727년에는 석사학위를 받았다.
목회도 에드워즈가 먼저 시작하였다. 1722년에 뉴욕에서 몇 달간 목회를 하다가 1724부터 1726년까지 강사로 활동하였고 1727년부터 노샘프턴교회에서 외조부를 도와 본격적으로 목회를 하였고 1729년에는 담임목사가 되었다. 웨슬리는 1727년에 아버지를 도와 몇 년간 목회를 하다가 1729년에 다시 강사로 복귀하여 신성클럽 멤버로 활동하다가 1735년부터 미국 조지아 주 선교사로 파송되어 사역하다가 실패를 경험하고 1738년에 영국으로 귀국하였다.
회심도 에드워즈가 먼저 하였다. 1721년 봄에 딤전 1장 17절을 일고 구원의 기쁨과 평화를 느꼈다. 웨슬리는 1738년 윌리암 홀랜드가 루터의 로마서 주석 서문을 읽는 것을 듣고 마음이 뜨거워지는 경험을 하였다.
결혼도 에드워즈가 먼저 하였다. 1727년 사라 피에르폰트와 결혼하여 11명의 자녀를 두었다. 웨슬리는 1751년 과부 메어리 버자일과 결혼하였고 자녀를 얻지는 못했으나 메도디스트의 아버지가 되었다.
부흥도 에드워즈가 먼저 경험하였다. 1734년부터 1735년까지 그리고 1741년부터 1742년까지 노샘프턴에서 놀라운 부흥을 맛보았다. 웨슬리는 1739년에 조지 휘트필드의 뒤를 이어 브리스톨에서 야외설교를 시작하면서 엄청난 군중을 몰고 다녔다.
시련도 에드워즈가 심하게 겪었다. 몸도 약했고 교인들도 악했다. 여러 차례 질병으로 고생을 하였고 1744년에 교인들과 갈등을 시작하여 1750년에 담임목사직에서 해임되었다. 그러나 오히려 전화위복이 되었다. 1751년부터 스톡브리지 선교사로 활동하면서 중요한 신학작품들을 저술할 수 있었다. 웨슬리는 영국 국교회의 반대에 부디 치자 메도디스트 부흥운동을 더욱 조직적으로 확대해 나갔다. 새로운 교파 탄생의 계기가 됐다.
천국도 에드워즈가 먼저 갔다. 1758년에 사위의 뒤를 이어 프린스턴의 총장으로 취임하였으나 1주일 뒤 천연두 예방 접종을 받고 감염되어 한달 후 프린스턴에서 잠들고 말았다. 웨슬리는 메도디스트의 지경을 더욱 넓혀가다가 1791년 런던의 씨티로드 채플에서 행복하게 잠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