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 5:5 온유한 자

 

1950년 미국 위스콘신 대학교의 심리학자 해리 할로우 교수는 갓 태어난 새끼 원숭이가 터치(Touch, 접촉)에 어떻게 반응하는지 알아보기 위해 가짜 어미 원숭이 인형을 만들었습니다. 하나는 부드러운 보풀이 있는 따뜻한 천으로 만들었고, 다른 하나는 차갑고 딱딱한 철사를 감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두 개 만들어 새끼 원숭이 4마리씩을 넣었습니다. 첫 번째 우리에서는 부드러운 천으로 만든 어미 원숭이에게 우유가 나오게 하고, 철사로 만든 어미 원숭이에게는 우유가 나오지 않게 했습니다. 두 번째 우리에서는 철사로 만든 어미 원숭이에게서 우유가 나오게 하고, 천으로 만든 부드러운 어미 원숭이에게는 우유가 나오지 않게 했습니다. 실험 결과 두 우리의 새끼 원숭이들은 한결 같이 부드러운 천으로 만든 어미 원숭이를 더 좋아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두 번째 우리인데 새끼 원숭이들은 하루 종일 부드러운 천으로 만든 어미 원숭이에게 매달려 놀다가 배가 고프면 잠깐 철사로 만든 어미 원숭이에게 가서 우유만 먹고 얼른 천으로 만든 어미 원숭이에게로 돌아왔습니다. 할로우 교수는 원숭이가 철사로 만든 딱딱한 어미 원숭이보다 천으로 만든 부드러운 어미 원숭이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밝혀냈습니다. 이것을 할로우 실험이라고 합니다. 원숭이뿐만 아니라 사람도 까칠한 사람보다 부드러운 사람을 더 좋아합니다. 여러분도 그렇죠?

 

예수님은 온유한 자는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온유한 자는 부드러운 자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기 때문에 예의도 바르고 겸손하고 부드러운 자입니다. 모세를 생각해 보십시오. 모세는 처음에는 다혈질이었으나 나중에 온유해졌습니다. 하나님은 민수기 12장 3절을 통해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에 있는 사람들 중에서 모세가 가장 온유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모세는 젊은 시절 히브리 사람을 채찍질하는 애굽 관리를 보고 의분이 생겨 그 관리를 쳐 죽였던 사람입니다.(출2:12) 그런 모세가 어떻게 부드러운 사람이라고 칭찬을 받았을까요? 자신을 비방하는 사람을 위해 기도해주었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구스 여자를 아내로 맞았습니다.(민12:1) 여기서 구스가 미디안이라면 모세의 아내 십보라가 구스 사람이거나(출18:1) 아니면 구스가 에티오피아라면 모세가 아프리카 여자를 첩으로 맞아들인 겁니다. 그러자 모세의 누나 미리암과 형 아론이 모세를 비난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와 아론과 미리암을 성막으로 불러 아론과 미리암을 나무라셨습니다. 하나님이 꾸짖으시자 미리암이 나병에 걸렸습니다. 히브리 사람들은(아직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다.) 나병에 걸리면 다른 사람들에게 전염될까봐 그리고 종교적으로 부정하다고 여겨 마을에서도 추방하였고 예배에도 참석할 수 없었습니다. 나병은 천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모세는 “누나와 형이 나를 비방하더니 천벌을 받았네. 그것 참 깨소금 맛이다.” 라고 고소해하지 않았습니다. 모세는 안타까워서 “하나님이여, 원하건대 그를 고쳐 주옵소서.” 라고 부르짖었습니다.(민12:13) 모세가 간절히 기도하자 하나님은 미리암을 고쳐주셨습니다. 온유한 자는 하나님을 신뢰하기 때문에 자신을 대적하거나 모함하는 자에게 복수하지 않는 자입니다. 우리가 살다보면 사람과 부딪히게 됩니다. 일하는 것보다 사람과 지내는 것이 더 신경 쓰입니다. 솔직히 인간관계가 힘들잖아요. 하나님은 우리와 부딪히는 사람이 있더라도 우리가 복수하지 말고 하나님께 맡기길 바라십니다. 그런 사람이 온유한 사람입니다. 여러분도 온유한 사람이 되십시오.

 

예수님은 온유하신 분의 대명사입니다. 마태복음에는 온유라는 단어 ‘프라위스’ 가 2번 나오는데 2번 다 예수님의 성품을 나타낼 때 사용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온유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마태복음 11장 29절을 통해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나의 멍에는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유대교 종교지도자들의 가르침은 부담이 되지만 예수님의 가르침은 마음이 가볍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신뢰하기 때문에 예수님의 가르침에는 평안이 있습니다. 온유한 사람은 다른 사람을 편안하게 해줍니다. 우리가 온유한지 아닌지를 제가 정리해주겠습니다. 내가 왔을 때 다른 사람들이 긴장한다면 나는 온유한 사람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이 편안해 하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마태복음 21장 5절을 통해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겸손이라고 번역된 단어가 온유입니다. 옛날에 왕들은 백마를 탔습니다. 북한의 김정은도 백마를 탄 사진이 나오더라고요. 예수님은 만왕의 왕이지만 백마를 타시지 않고 나귀 그것도 새끼 나귀를 타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신뢰하기 때문에 겸손하십니다. 온유한 사람은 자기를 드러내지 않고 겸손합니다. 자신이 겸손하면 하나님이 세워주십니ㅏ. 여러분도 다른 사람을 편안하게 해주시고 자신을 드러내지 마십시오.

 

예수님은 우리에게도 온유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온유하시니 예수님의 제자인 우리도 온유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베드로전서 3장 4절을 통해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내들에게 겉 사람을 아름답게 꾸미지 말고 속사람을 부드럽게 가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속사람이 부드러우면 겉 사람도 부드러워 집니다. 우리교회의 경우 교회학교 어린이들이 설교 시간에 떠들면 “야, 너희들 때문에 예배 망쳤잖아!” 라고 소리치지 않고 “너희들이 떠들면 예배가 방해된다.” 라고 조용히 타이르게 됩니다. 강하게 나무라면 반발하지만 부드럽게 타이르면 반성합니다. 부드러움은 강함을 이깁니다. 다이아몬드는 단단한 물질입니다. 다이아몬드를 자를 때 다이아몬드로 자르거나, 빛으로 자르거나, 초고수압의 물을 분사시켜 자릅니다. 물로 다이아몬드를 자릅니다. 그 기계가 워터젯입니다. 떨어지는 물방울이 커다란 바위를 뚫듯이 물이 다이아몬드를 자릅니다. 활활 타오르는 불도 시원한 물을 만나면 힘을 쓰지 못합니다. 부드러움으로 강함을 이기십시오.

 

예수님은 온유한 자에게 땅을 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땅 하면 가나안 땅을 생각했는데 여기서 땅은 천국을 상징합니다. 하나님은 온유한 자에게 천국을 주십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 땅의 땅을 차지하기 위해 치열하게 살지만 우리는 하늘나라의 땅을 차지하기 위해 부드럽게 살아야 합니다. 이 땅의 땅을 차지하려고 남의 눈물을 빼면 내 눈에서 피눈물이 납니다. 하늘나라 땅을 잃어버립니다.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이고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자녀가 부모를 믿고 의지하듯이 우리도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면서 부드럽게 살아가야 합니다.

 

세계 2차 대전을 일으킨 독일의 히틀러와 이태리의 무솔리니가 영국의 처칠과 연못에서 물고기를 잡는 시합을 했습니다. 과격한 히틀러는 물고기를 향해 권총을 쐈습니다. 그러나 작고 날렵한 물고기를 맞출 수가 없었습니다. 히틀러는 포기했습니다. 다혈질인 무솔리니는 연못으로 뛰어들었습니다. 무솔리니는 텀벙거리며 물고기를 쫓아다녔지만 물고기는 약을 올리며 도망 다녔습니다. 무솔리니도 포기했습니다. 부드러운 처칠이 그릇을 가져와 물을 조금씩 푸기 시작했습니다. 한참을 퍼내자 물이 줄어들었고 물고기가 파닥거렸습니다. 처칠은 손으로 물고기를 잡았습니다. 바람에 맞서는 나무는 뿌리 채 뽑히지만 바람에 흔들리는 작은 갈대는 그대로 있습니다. 바다는 계절에 따라 색깔이 달라지는데 여름 바다는 순한 양처럼 부드럽게 출렁이고 겨울 바다는 성난 사자처럼 거칠게 출렁입니다. 사람들은 여름 바다에 몰려들어 몸을 담급니다. 진정한 강자는 까칠한 자가 아니라 부드러운 자입니다. 청소년들은 부모에게는 대들더라도 일진에게는 꼼짝 못합니다. 그렇다고 일진을 좋아하지는 않잖아요? 사람들은 부드러운 자를 좋아합니다. 올해는 부드러운 자가 됩시다. 온유로 분노를 잠재웁시다. 하늘나라는 마음이 부드러운 자가 차지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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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5:1-2 산에 올라가

 

우리나라 사람들은 새해가 되면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라고 인사합니다.(김정은이 BC카드 광고에서 ‘여러분 부~자 되세요.’ 라고 한 이후 달라졌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은 복(福)을 좋아합니다. 복을 좋아해서 숟가락에도 젓가락에도 밥그릇에도 국그릇에도 그리고 밥상에도 복자를 새겼습니다. 밥을 먹기 위해 쌀을 이는 용기를 복조리라고 불렀지요. 우리가 성경을 외우기 위해 성경구절을 여기저기에 붙여놓듯이 우리나라 사람들은 복을 받기 위해 여기저기에 복자를 새겼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복 중에서 오복을 좋아했습니다. 오복을 좋아해 오복 치약까지 나왔잖아요. 오복은 중국의 고전인 [서경]에 나오는 다섯 가지 복인데 수(壽) 오래 사는 복과 부(富) 부유한 복과 강녕(康寧) 건강하게 사는 복과 유호덕(攸好德) 덕을 좋아하고 베푸는 복과 고종명(考終命) 깨끗한 죽음을 맞이하는 복을 말합니다. 여러분도 오복을 좋아하십니까? 오복은 ‘사람’이 ‘현세’에서 누리는 ‘물질’적인 복입니다. 성경에도 복이 나옵니다. 성경의 복은 오복과 다릅니다. 성경의 복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 옵니다. 현세만이 아니라 ‘내세’까지를 포함합니다. 물질이 아니라 ‘신앙’적인 복입니다.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복은 팔복입니다.

 

팔복은 산상수훈(마 5~7장)의 서두(마 5:1~12)에 나옵니다. 산상수훈은 예수님의 가르침 중에서 가장 중요한 가르침입니다. 그 가르침 중에서 가장 핵심적인 가르침이 팔복입니다. 어떤 사람은 마태복음을 산으로 비유한다면 산상수훈은 산봉우리요 팔복은 정상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번 주부터 마태복음의 엑기스인 팔복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오늘은 5장 1~2절입니다. 1~2절은 산상수훈이라는 산봉우리와 팔복이라는 정상에 오르기 위한 매표소입니다. 매표소에서 표를 사야 입장할 수 있듯이 1~2절을 이해해야 팔복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성경을 읽을 때는 전후문맥을 살펴봐야 하는데 예수님은 마태복음 4장 23절을 통해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고, 백성들의 병과 약함을 고치셨습니다. 그러자 각종 병으로 고생하는 백성들이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몰려들었습니다. 병자들이 예수님께 왔듯이 우리도 문제가 있으면 예수님께로 나와야 합니다. 예수님 안에 해답이 있습니다.

 

(어디에) 예수님은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오르셨습니다. 산상수훈(팔복)은 산에서 하신 말씀입니다. 산이 공간적인 배경이죠. 여러분은 산을 좋아하십니까? 저도 산을 좋아합니다. 성경에서 산은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입니다. 아브라함은 모리아 산에서 이삭을 번제로 바치려고 하였습니다. 모세는 시내 산에서 십계명을 받았습니다. 여호수아는 그리심 산을 보고 축복을 선포하고 에발 산을 보고 저주를 선포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갈보리 산에서 우리의 죄를 대신해 십자가에 못 박혀 피 흘리고 돌아가셨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드리려한 장소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힌 바로 그 장소입니다. 하나님은 이삭 대신에 숫양을 예비하셔서 그것으로 번제를 삼으셨지만 예수님은 어린양이 되시어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화목제물이 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은 살리셨지만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죽이셨습니다. 예루살렘에는 성전이 있는데 천정에 아브라함이 이삭을 죽이려는 그림과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그림이 그려져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아들도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에게 내주셨습니다. 아들도 아끼지 않으셨는데 우리에게 무엇을 아끼시겠습니까? 우리가 문제를 가지고 나오면 하나님이 반드시 해결해 주십니다. 세월이 흘러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을 시온 산이라고 불렀습니다. 시온 산은 예루살렘 성전 중에서 다윗의 문 밖에 있는 산인데 예수님이 최후의 만찬을 가지셨던 마가의 다락방이 시온 산에 있었습니다. 오늘날에는 다윗의 무덤이 있고 베드로 통곡교회가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메시야가 시온 산으로 온다고 생각해 시온 산 방향으로 시신을 묻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시온 산을 거룩한 장소로 생각했습니다. 유대인들이 산을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로 생각했듯이 우리도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가 있어야 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광야를 유랑할 때 ‘성막’이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였고 가나안 땅에 정착하고는 ‘성전’이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였습니다. 하나님은 어디서나 계시기 때문에 예배하는 자리가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입니다. 기도하는 자리가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입니다. 가정도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지만 교회는 하나님을 만나는 강력한 장소입니다. 저는 이 자리에서 하나님을 만납니다. 이 자리에서 기도하면 기도가 잘 됩니다. 이 자리에서 여러분들을 위해 축복 기도하고 이 자리에서 말씀을 선포합니다. 그리고 옥상에서도 하나님을 만납니다. 여러분은 어디에서 하나님을 만나십니까? 어디에서 기도해야 기도가 잘 됩니까? 그곳이 여러분의 ‘산’입니다. 그곳이 성막이고 그곳이 성전입니다. 사람은 공기를 마셔야 살 수 있듯이 교인은 하나님을 만나야 살 수 있습니다. 휴대폰도 충전해야 통화할 수 있듯이 교인도 신앙을 충전해야 교회 다닐 수 있습니다. 휴대폰도 충전하고 신앙도 충전하십시오. 하나님과 만나는 장소를 가지십시오.

 

(어떻게) 예수님은 산에서 앉으셨습니다. 유대인들은 랍비는 앉아서 가르치고 학생은 서서 들었습니다. 랍비가 앉았다는 무언가 중요한 것을 가르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입을 열어 가르치셨습니다. 입을 열었다는 중요한 말씀을 시작한다는 의미입니다. 가르치다는 동사는 미완료 시제로 예수님은 반복해서 가르치셨습니다. (신약성경에는 입을 연다는 표현이 4번 나옵니다. 예수님이 입을 열어 산상수훈을 가르치셨습니다. 입을 열어 천국을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빌립 집사는 입을 열어 에티오피아 내시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베드로는 입을 열어 백부장 고넬료의 집에게 설교했습니다.)

 

(누구에게) 예수님은 제자들과 무리들에게 가르치셨습니다. 제자들은 12 제자들입니다. 제자는 십자가를 지는 사람입니다. 무리는 병을 고치려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을 따라다니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무리가 되기보다 제자가 되기를 바라십니다. 십자가를 구경하기보다 십자가를 지고 가길 바라십니다. (이단들은 이단숫자가 144,000명이 되면 예수님이 재림한다고 말하는데 144,000은 실제숫자가 아니라 상징숫자입니다. 구약 12지파에 신약 12 제자를 곱하면 144가 나옵니다. 여기에 완전수인 1,000을 곱하면 144,000이 됩니다. 144,000은 하나님의 완전한 백성들의 수입니다.)

 

(무엇을) 예수님은 천국을 가르치셨습니다. 팔복의 첫 번째는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마5:3) 라고 말씀하셨고 여덟 번째는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마5:10) 고 말씀하셨습니다. 팔복의 처음도 끝도 천국을 말씀합니다. 이것을 수미상관이라고 하는데 천국이 팔복의 핵심이라는 말씀입니다. 마태복음의 핵심은 천국 다시 말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팔복을 가르치신 예수님은 천국의 왕입니다. 동방박사들은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마2:2) 고 물었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 ‘유대인의 왕 예수’(마27:37) 란 죄패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천국의 왕으로서 천국 다시 말해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천국처럼 살려면 팔복을 알아야 합니다. 팔복에는 천국의 비밀이 담겨 있습니다. 팔복의 세계로 들어오십시오. 우리 팔복을 배워 이 땅을 천국처럼 살아가십시다. 진정한 행복을 누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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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5:4 애통하는 자

 

마태복음을 산으로 비유한다면 산상수훈(마5~7장)은 산봉우리이고 팔복(마5:1~12)은 산정상입니다. 팔복은 예수님의 설교 중에서 핵심입니다. 엑기스죠. 오늘은 4절입니다. 4절은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을 헬라어 성경으로 직역하면 “복이 있도다. 애통하는 자들이여, 그들이 위로를 받기 때문이다.” 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에게 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동양에서는 5복을 말하고 성경에서는 8복을 말하는데 5복은 사람이 중심이지만 8복은 하나님이 중심입니다. 하나님은 복의 근원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과 좋은 관계를 맺고 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5복은 현세가 중요하지만 8복은 현세만이 아니라 내세까지를 포함합니다. 여러분은 이 세상에서도 복을 받고 하늘나라에서도 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5복은 물질적인 복이지만 8복은 영적인 복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면 하나님은 모든 것을 더해주십니다. 여러분은 영적인 복을 받고 물질적인 복도 받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애통하는 자는 누구일까요? 눈물을 흘리는 자입니다. 무엇 때문에 눈물을 흘리는 자일까요? 슬퍼서? 아파서? 억울해서? 아니면 신세를 한탄해서? 애통하는 자는 슬퍼서도 아파서도 억울해서도 신세를 한탄해서도가 아니라 자신의 죄를 회개하며 눈물을 흘리는 자입니다. 여러분도 죄를 지었으면 회개의 눈물을 흘리십시오. 베드로를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날 밤에 제자들과 유월절 저녁식사를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식사를 최후의 만찬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저녁 식사를 하시면서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고 충격적인 말씀을 하셨습니다.(마26:31) 베드로는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 라고 펄쩍뛰었습니다.(마26:33) 예수님은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고 재차 말씀하셨습니다.(마26:34) 베드로는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라고 호언장담했습니다.(마26:35) 예수님은 저녁 식사를 마치시고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서 기도하셨습니다. 가룟 사람 유다는 기회는 이 때다 싶어 종교지도자들이 보낸 군병들을 데리고 왔습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이 누군지 알려줬고 군병들이 달려들었습니다. 베드로는 칼을 빼서 저항했지만 예수님은 만류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선선히 끌려가셨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어찌 됐는지 궁금해 대제사장의 집으로 찾아갔습니다. 베드로가 바깥뜰에 앉았더니 한 여종이 “너도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라고 말했습니다.(마26:69 이하) 베드로는 깜짝 놀라 “나는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겠노라.” 고 부인했습니다. 베드로가 앞문으로 나가니 다른 여종이 거기 있는 사람들에게 “이 사람은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라고 말했습니다. 베드로는 그 자리를 벗어나려고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고 맹세하면서 부인했습니다. 베드로 곁에 섰던 사람들이 “너도 진실로 그 도당이라. 네 말소리가 너를 표명한다.” 고 갈릴리 사투리를 문제 삼았습니다. 베드로는 화를 모면하려고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고 저주하면서 맹세했습니다. 베드로가 부인하고, 맹세하며 부인하고, 저주하면서 부인하자 주변에 있는 사람들도 더 이상은 추궁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나라는 더도 덜도 말고 삼세판이라고 하는데 유대인은 세 번 말하면 사실이라고 믿었습니다. 베드로가 세 번 부인한 것은 예수님을 완전히 모른다는 의미였습니다. 그때 새벽닭이 울었습니다. 베드로는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신 말씀이 생각나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했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죄를 철저하게 회개하면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회개의 눈물은 신앙을 회복시키는 특효약입니다. 하나님은 시편 51편 17절을 통해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애통하는 자를 버리지 않으십니다. 다시 회복시켜 주십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피 흘리고 돌아가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은 갈릴리 호수로 돌아가 고기를 잡고 있는 베드로에게 찾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이 물으셨습니다.(요21:15 이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했습니다. “주님, 그러하나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내 어린 양을 먹이라.” 예수님이 다시 물으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했습니다. “주님, 그러하나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내 양을 치라.” 예수님이 또 다시 물으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했습니다.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네 양을 먹이라.”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사랑한다는 것은 예수님을 정말로 사랑한다는 의미였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 부인해서 제자로서의 지위를 잃었지만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세 번 시인해서 제자로서의 지위를 다시 찾았습니다. 베드로는 열심히 복음을 전하다가 네로 황제에 의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습니다. 전승에 의하면 베드로는 거꾸로 못 박혀서 죽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죄를 회개하며 흘리는 눈물을 받으십니다. 그리고 회개한 자를 다시 사용하십니다. 여러분도 용서받고 다시 쓰임 받으시기 바랍니다.

 

애통하는 자는 자신의 죄를 회개하며 눈물을 흘리는 자일뿐만 아니라 죽어가는 영혼을 안타까워하며 눈물을 흘리는 자입니다. 여러분도 죽어가는 영혼을 보면 안타까움의 눈물을 흘리십시오. 예레미야를 생각해 보십시오. 예레미야는 남 유다가 멸망하기 직전에 선지자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유다 백성들이 우상숭배를 회개하지 않으면 심판하시겠다고 말경고하셨습니다. 예레미야는 회개하라고 선포했지만 백성들은 듣기는커녕 예레미야를 감옥에 가두고 죽이려고까지 하였습니다. 예레미야는 이에 굴복하지 않고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라고 말했습니다.(렘 20:9) 예레미야는 아무리 박해를 받더라도 하나님을 전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남 유다는 예레미야의 경고를 듣지 않아 주전 587(6?)년에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에게 멸망하여 성전은 파괴되고 백성들은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예레미야는 나라가 멸망하자 눈물을 흘리면서 예레미야 애가를 지었습니다. 예수님을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을 보시고 우셨습니다.(눅19:41) 예수님이 왜 우셨습니까? 유대인들은 죄를 짓고도 회개하지 않아 주후 70년에 로마제국의 디도(티투스) 장군에게 멸망당해 성전은 파괴되고 백성들은 흩어집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미리 아셨기에 우셨습니다. 미국의 유명한 부흥사인 찰스 피니 목사님은 어느 날 시카고에 왔다가 교차로에서 많은 사람들이 물밀 듯 지나가는 모습을 보면서 갑자기 눈물을 흘렸습니다. 곁에 있는 사람이 “목사님 왜 그러세요?” 라고 묻자 “저 사람들이 지옥으로 가고 있잖아. 복음을 듣지 못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하고, 지옥으로 가고 있잖아.” 라면서 울었다고 합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받고 믿지 않으면 멸망을 당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라고 복음을 전해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거절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고집 센 양처럼 제 마음대로 갑니다. 사람들은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의 말도 듣지 않았고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의 말씀도 듣지 않았습니다. 우리말도 듣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렇다고 무관심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듣든지 아니 듣든지 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겔2:5,7;3:11) 전하지 않는 것은 우리의 책임이요 듣지 않는 것은 그들의 책임입니다. 우리는 듣든지 듣지 않든지 전해야 합니다. 듣지 않는다면 안타까워서 눈물을 흘려야 합니다. 눈물은 힘이 셉니다. 눈물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죽어가는 영혼을 안타깝게 여기며 흘리는 눈물을 기뻐 받으십니다. 그리고 그 눈물로 그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십니다. 여러분도 눈물로 사람을 살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애통하는 자는 위로를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헬라어로 ‘위로’ 라는 단어는 ‘곁에’ 라는 전치사와 ‘부르다’ 는 동사의 합성어입니다. 위로는 하나님이 우리를 곁으로 부르시는 겁니다. 우리가 사이가 나쁘면 고개를 돌리지만 사이가 좋으면 곁으로 다가가잖아요? 하나님은 눈물을 흘리는 사람과 가까이 하십니다. 여러분은 죄를 회개하며 눈물을 흘리십시오. 죽어가는 영혼을 안타까워하며 눈물을 흘리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가까이 하십니다. 올해는 그 어느 해보다 하나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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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5:3 심령이 가난한 자

 

오늘은 2012년의 첫 번째 날이자 첫 번째 주일입니다. 첫 번째 주일부터 팔복을 설교하게 돼 기쁩니다. 어떤 사람은 마태복음을 산으로 비유한다면 산상수훈(마5~7장)은 산봉우리이고 팔복(마5:1~12)은 정상이라고 말했습니다. 팔복은 예수님의 설교 중에서 핵심입니다. 엑기스입니다. 우리는 지지난주에 산상수훈의 입구인 마태복음 5장 1~2절을 살펴봤습니다. 산에 오르기 위해 매표소에서 표를 구입했죠. 오늘은 3절입니다. 3절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이 것임이요” 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을 헬라어 성경으로 직역하면 “복이 있도다. 심령이 가난한 자들이여, 천국이 그들에게 있기 때문이다.” 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에게 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동양에서는 5복을 말하고 성경에서는 8복을 말하는데 동양에서 말하는 5복은 사람이 현세에 누리는 물질적인 복을 말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현세적인 복을 제일로 알고 ‘부자 되세요.’ ‘대박나세요.’ 라고 인사하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8복은 사람이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이 중심입니다. 하나님은 복의 근원이십니다. 복을 주시는 분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신년 해돋이를 보며 소원을 빌지만 복은 하나님이 주십니다. 하나님과 사이가 좋으면 복을 받게 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과 좋은 관계를 맺고 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5복은 현세가 중요하나 8복은 현세만이 아니라 내세까지를 포함합니다. 복을 말할 때 현재시제와 미래시제가 쓰였습니다. 여러분은 이 세상에서도 복을 받고 하늘나라에서도 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5복은 물질적인 복이나 8복은 영적인 복입니다. 우리가 영적인 복을 받으면 물질적인 복도 덩달아 받게 됩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면 필요한 모든 것을 더해주십니다. 여러분은 영적인 복을 받고 물질적인 복도 받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심령은 무엇일까요? 새번역과 공동번역에는 ‘마음’으로 나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물질이 가난한 자가 아니라 마음이 가난한 자입니다. 마음이 가난해 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회개하면 됩니다. 우리가 세상에 살다보면 알게 모르게 죄를 짓게 됩니다. 마음이 더러워지게 됩니다. 운전하다가도 욕하고 뉴스 보면서도 욕하잖아요. 그러나 회개하면 마음이 깨끗해집니다. 마음이 가난해집니다. 다시 말해 죄를 회개하는 자가 마음이 가난한 자입니다. 물질이 적어도 회개하지 않는 자는 마음이 더러운 자입니다. 그러나 물질이 많아도 회개하는 자는 마음이 깨끗한 자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생각해 보십시오. 아브라함은 가축과 은과 금이 풍부하였습니다.(창13:2) 아브라함은 조카 롯이 납치되자 집에서 기르고 훈련한 사병 318명을 이끌고 쫓아가서 조카를 구해낼 정도로 부자였고 강했습니다.(창1414) 아브라함은 엄청난 부자였지만 하나님이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말씀하시자 주저하지 않고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을 번제로 드릴 정도로 마음이 가난했습니다.(창22:10) 애굽의 국무총리였던 요셉을 생각해 보십시오. 요셉은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할 정도로 막강한 권세를 가졌지만 자신을 죽이려한 이복형제들을 용서할 만큼 마음이 가난했습니다.(창50:20) 이스라엘을 강대국으로 만든 다윗 왕을 생각해 보십시오. 다윗 왕은 밧세바와 간음을 하고 은폐하려 했다가 나단 선지자가 호통을 치자 죄를 인정하고 회개할 만큼 마음이 가난했습니다.(삼하12:13) 여러분도 마음이 깨끗해져서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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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24:36-51(42) 반드시 그리고 갑자기

 

오늘은 묵은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는 날입니다. 새해를 맞아 우리교인들이 어떻게 신앙생활하면 좋을까를 기도하다 재림에 관한 말씀을 준비하게 되었습니다. 신약성경에는 ‘예수님께서 다시 오신다.(재림하신다.)’는 말씀이 318번 나옵니다.(어떤 책에서 읽었는데 기억이 나지 않네요.) 1년은 365일입니다. 주일은 52일이고 평일은 313일이죠. 예수님은 하루에 한번 꼴로 재림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한 번만 말씀하셔도 믿을 텐데 귀에 못이 박히도록 재림하신다고 말씀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반드시 재림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데살로니가 전서 5장 3절을 통해 “그들이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임신한 여자에게 해산의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갑자기 그들에게 이르리니 결코 피하지 못하리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재림을 해산의 고통에 비유하셨습니다. 여자분들 중에 아이를 낳을 때에 아프지 않았던 분이 있습니까? 모두 아프셨죠? 요즘은 무통주사가 있어 산통을 거의 느끼지 않는다지만 자연 분만하는 경우 산모는 초죽음이 되고 아기를 낳듯이 예수님은 반드시 재림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반드시 재림하신다고 말씀하셨는데 어떻게 재림하실까요? 하나님께서는 마태복음 24장 30절-31절을 통해 “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그가 큰 나팔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그의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재림하실 때 사람의 눈으로 보입니다. 예수님은 구름을 타고 승천하셨듯이 구름을 타고 능력을 떨치고 영광에 싸여서 재림하십니다./ 예수님은 재림하실 때 사람의 귀로도 들립니다. 하나님께서는 데살로니가 전서 4장 16-17절을 통해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대통령이 입장할 때 팡파르가 울려 퍼지듯이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에 주님의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소리가 울려 퍼집니다. (이 소리가 하나의 소리인지 여러 소리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천사들을 보내서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선택 받은 백성들을 모으십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신앙 생활하다가 죽은 성도들이 다시 살아나고 다시 살아난 성도들은 살아있는 성도들과 함께 구름을 타고 공중으로 들리어 올라갑니다. 공중으로 올라가서 주님을 만나고 주님과 함께 삽니다. 얼마나 신납니까? 주님이 어서 오셨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하늘에서 소리가 들린다고 했는데 땅에서도 소리가 들립니다. 무슨 소리가 들릴까요? 통곡하는 소리가 들립니다. 두 남자가 밭에서 일하다가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지게 됩니다.(40절) 두 여자가 맷돌을 갈다가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지게 됩니다.(41절) 두 사람이 똑같이 일하고 있었지만 하나는 하늘로 올라가고 하나는 버려지게 됩니다. 올라간 사람은 교인이고 버려진 사람은 비교인입니다. 버려진 사람은 그제서 가슴을 치며 통곡합니다. 만약 사랑하는 가족이 울부짖는다면 공중으로 올라가더라도 마음이 편치 않을 겁니다. 더 늦기 전에 하늘나라 리무진에 태워야겠습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시각을 알 수 있을까요? 알 수 없습니다. 만약 시간을 알려 주신다면 우리는 실컷 놀다가 막차를 타려고 할 겁니다. 예수님은 그럴 줄 알고 시간을 알려주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릅니다. 하늘의 천사들도 모르고, 예수님 자신도 모르고, 오직 하나님 아버지만 아십니다.(36절) 예수님도 모르시는데 사람이 안다면 뭔가 잘못된 거겠죠? 하나님께서는 데살로니가 전서 5장 2절을 통해 “주의 날이 밤에 도둑 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알기 때문이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재림을 밤중에 찾아오는 도둑으로 비유하셨습니다. 도둑이 갑자기 들어오듯이 예수님도 갑자기 재림하시기 때문입니다. 도둑이 몇 월 며칠에 집을 털겠다고 통보하고 옵니까? 괴도 루팽도 아니고 몰래 들어오잖아요. 집주인은 언제 도둑이 들지 몰라 늘 집단속을 하듯이 예수님도 갑자기 재림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늘 깨어 있어야 합니다.(42절)

 

예수님이 반드시 그리고 갑자기 재림하시기 때문에 깨어 있어라 고 말씀하셨는데 어떻게 하면 깨어 있는 거고 어떻게 하면 자고 있는 걸까요? 깨어 있는 거는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이 맡겨주신 사람들에게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주는 겁니다.(45절) 맡겨주신 직분을 감당하는 겁니다. 주님께서 속장을 맡겨 주셨으면 속 회원을 잘 보살핍니다. 교사를 맡겨 주셨으면 어린이들을 잘 돌보아줍니다. 찬양대원을 맡겨 주셨으면 찬양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립니다. 선교회 회장을 맡겨 주셨으면 교회를 내 집처럼 섬깁니다. 장로님들은 하나님께서 베드로 전서 5장 3절을 통해 “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주장한다는 지배한다는 의미입니다. 장로님들은 교회를 지배하려 하지 말고 교인들의 모범이 돼야 합니다.

 

주님이 반드시 그리고 갑자기 다시 오셔서 깨어 있는 성도를 보시면 어떠실까요? 흐뭇해하십니다. 주님은 깨어있는 성도를 칭찬하시고 더 많은 사명을 맡겨주십니다.(47절) 여러분이 주인이라고 가정해 보십시오. 참을 가지고 들에 가보니 일꾼들이 땀을 뻘뻘 흘리며 일하고 있습니다. 주인의 마음이 흐뭇해집니다. 다음에 또 쓰고 싶어집니다. 그러나 자고 있으면 상황은 달라집니다. 자고 있는 거는 악하고 어리석어서 주님이 더디 오려니 생각하고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주지 않고 동료를 때리고 술친구들과 어울리는 겁니다.(49절) 동료를 때리는 것은 맡겨주신 사명은 감당하지 않으면서 성도를 비난하는 겁니다. 술친구들과 더불어 먹고 마시는 것은 직분은 감당하지 않으면서 세상 친구들과 어울려 세월을 허송하는 겁니다. 주님은 생각지도 않은 날, 짐작도 못한 시간에 반드시 그리고 갑자기 다시 오셔서 자고 있는 성도를 꾸중하시고 벌을 내리십니다. 여러분이 주인이라고 가정해 보십시오. 참을 주려고 들에 가보니 일꾼들이 농땡이를 치다가 주인이 오니 그제서 일하는 척 합니다. 주인의 마음이 탐탁지 않습니다. 다음에는 쓰고 싶지 않아집니다. 예수님의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자, 그렇다면 여러분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깨어 있습니까? 아니면 자고 있습니까? 예수님은 목이 터져라 재림하신다고 말씀하셨는데 혹시 재림불감증에 걸리지는 않았습니까? 재림불감증에 걸리면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주지 않고(맡겨주신 사명을 감당하지 않고) 동료를 때리고(성도를 비난하고) 술친구들과 더불어 먹고 마십니다.(세상 친구들과 어울려 시간을 낭비합니다.) 청년 시절엔 열심히 봉사했는데, 재림불감증이 걸려 직분을 맡고도 쉬지는 않습니까? 과거에 아무리 열심히 일했어도 주님이 다시 오실 때 놀고 있으면 허사입니다. 과거의 수고가 감안될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신앙은 사골 곰탕이 아닙니다. 사골 곰탕도 어지간히 우려야 국물 맛이 진하지 너무 우리면 맹탕이 됩니다. 우리 과거를 더 이상 우려먹지 말고 현재에 충실 합시다.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맡겨주신 직분을 충성으로 감당합시다. 그리하여 하늘나라에서 이 땅에서보다 더 많은 소유를 맡읍시다.

 

주님, 오늘 말씀을 통해 주님께서 다시 오신다는 경각심을 갖게 하소서. 오실 때까지 직분을 감당하게 하소서. 그리하여 오실 때에 기쁘게 맞이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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