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의 삼중주 - 청중을 사로잡는
신성욱 지음 / 생명의말씀사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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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성경해석과 전달에 관심이 많다 보니 이런 분야의 책을 주로 읽는다. 만약 나와 생각이 비슷하다면 신성욱 교수를 주목하라. 그는 석사과정에서 구약과 신약을 전공하였고 설교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의 [설교의 삼중주]는 먼저 성경해석학을 다룬다. 그는 하나님 중식적인 해석과 인물 중심적인 해석이 있다고 말한다. 전자는 구속사적 관점에 후자는 교훈적인 관점에 초점을 맞춘다. 나는 그를 통해 내 설교는 생활의 교훈을 끄집어내려는 인물 중심적 관점이었음을 깨닫고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바라보는 하나님 중심적 관점으로 보완하게 되었다. 그는 전달전략도 제시한다. 나는 그를 통해 내 설교는 진부한 진행형이었음을 깨닫고 어떻게 하면 궁금 유발형으로 전환할까 고민하게 되었다. 그의 말처럼 해석은 요리이고 전달은 조미료이다. 무엇을 요리할 것인가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양념할 것인가는 더 중요하지 않을까? 양념이 잘못되면 요리도 맛을 잃기 때문이다. 이 책은 내가 읽었던 수십 권의 책 중에서도 기억에 남을 만한 책이다. 만약 올해 안에 설교학 책 한 권을 읽으려고 한다면 이 책을 읽으라고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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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일 2:12-14 영적 상승

우리가 잘 아는 내용입니다만 그리스 로마 신화를 보면, 테베에 스핑크스(Sphinx)라는 괴물이 나타나 지나가는 사람을 세워놓고 수수께끼를 냅니다. "아침에는 네 발, 낮에는 두 발, 밤에는 세 발로 걷는 것은 무엇이냐?" 스핑크스는 수수께끼를 맞히지 못하면 잡아먹었습니다. 테베는 발칵 뒤집혔습니다. 여왕은 수수께끼를 맞힌 사람에게 왕위를 주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오이디푸스(Oedipus)라는 청년이 테베를 구하기 위해 스핑크스를 찾아갔습니다. “그것은 사람이다. 어린아이 때는 팔다리로 기어 다니고, 좀 더 자라서는 두 다리로 걷고, 늙어 힘이 없어지면 지팡이를 짚고 다니기 때문이다.” 스핑크스는 부끄러운 나머지 골짜기에 몸을 던져 죽었다고 합니다. 스핑크스의 수수께끼에는 인간의 생애주기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아기가 네 발로 기는 것은 혼자서는 설 수 없으니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이고, 성인이 두 발로 걷는 것은 독립된 생활이 가능하다는 것이고, 늙어서 세 발로 걷는 것은 힘이 소진되어 무언가를 다시 의지해야 한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오늘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일곱 가지 길 중에서 마지막 일곱 번째 시간으로 영적 상승으로서의 영성을 다루려고 합니다.

스핑크스는 인간의 생애를 네 발, 두 발, 세 발로 묘사했지만 사도 요한은 신앙인의 생애를 아이, 청년, 아비로 묘사합니다. 요한은 12절을 통해 “자녀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받았음이요.” 라고 말합니다. 요한은 교인들을 ‘자녀들아’ 라고 친근하게 부릅니다. 유대인들은 제자를 자녀처럼 여겼는데 요한도 교인들을 자녀처럼 소중하고 친근하게 여겼습니다. 교인은 하나님의 자녀인데 하나님의 자녀는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죄를 용서 받은 사람들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구원받은 사람들입니다. 구원받은 사람들 중에는 이제 막 예수님을 영접한 아이도 있고, 신앙이 자라가는 청년도 있고, 신앙이 성숙한 아비도 있습니다./  

아기에게는 엄마가 필요하듯이 영적인 아이 단계에는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합니다. 아기가 걸음마를 뗄 때 엄마가 손을 붙잡아 주듯이 교회는 이제 막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한 새가족이 스스로 신앙생활 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우리 교회는 민서와 량헌이를 도와야 합니다. 사도 바울도 초신자 시절에 바나바가 도와주었기 때문에 신앙이 자라나 나중에는 그를 능가하는 선교사가 되었습니다. 요한은 14절 전반 절을 통해 영적인 아이가 신앙이 자라는 지름길을 알려줍니다. “아이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아버지를 알았음이요.” 영적인 아이는 하나님 아버지를 알면 신앙이 자라납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알려면 베드로 전서 2장 2절을 통해 “갓난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순전하고 신령한 젖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아기들이 엄마의 젖을 먹고 자라듯이 구원받은 사람들은 신령한 젖인 하나님의 말씀을 먹어야 자라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설교를 들으면 먹게 되지만 그것은 간접적인 방법이니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먹을 수 있는 최상의 방법은 큐티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큐티는 그 옛날 하나님께서 선지자에게 직접 말씀하셨듯이 우리에게 직접 들려주시는 직통계시입니다. 저도 큐티의 중요성을 뒤늦게 깨닫고 저 뿐만 아니라 가족 모두 매일성경으로 큐티를 하고 아침을 먹습니다. 영혼의 양식을 먹고 나서 육신의 양식을 먹습니다./  

이렇게 큐티를 하다보면 영적인 청년으로 자라납니다. 청년이 되면 넘치는 힘을 주체하지 못합니다. 그 힘을 발산하기 위해 무언가를 찾습니다. 그러다 마귀의 유혹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요한은 2장 13절 하반 절을 통해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 라고 말하고 14절 하반 절을 통해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안에 거하시며 너희가 흉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 라고 부연 설명합니다. 권력이 있는 곳에 청탁이 있듯이 영적인 청년 단계에는 힘이 있기 때문에 악한 자의 유혹도 있습니다. 여기서 ‘악한 자’와 ‘흉악한 자’는 사탄을 가리킵니다. 사탄은 굶주린 사자가 먹잇감을 찾자 어슬렁거리듯이 영적인 청년을 쓰러뜨리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공격합니다. 사탄의 공격을 물리치려면 하나님의 말씀이 청년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청년은 신체적인 힘으로 사탄을 물리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영적인 힘으로 물리칩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6장 17절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의 검이라고 비유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탄의 공격을 방어할 수도 있을 뿐만 아니라 사탄을 공격할 수도 있는 무기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하려면 성경 구절을 암송하십시오. 성경 구절을 암송하면 소가 배고플 때 삼킨 음식을 게워 내 되새김질하듯이 사탄이 우리를 공격할 때 머릿속에 있는 말씀을 입으로 끄집어 낼 수 있습니다. 예수님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탄을 물리쳤듯이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탄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성경을 암송하는 것은 핵무장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으면 이웃 나라가 쉽게 공격하지 못하듯이 우리가 성경을 암송하고 있으면 사탄이 쉽게 공격하지 못합니다. 저는 개척교회를 하다 보니 경제적으로 어려울 때는 빌립보서 4장 19절을 암송합니다.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이렇게 성경을 암송하다 보면 하나님이 만나를 내려주시듯이 쓸 만큼을 채워주십니다./  

이렇게 큐티를 하고 성경 구절을 암송하다 보면 영적인 아비로 성숙해 갑니다. 영적인 아비 단계에는 부모가 자녀를 돌보듯이 영적인 아이를 돌봐야 합니다. 아이를 낳아놓고 방치한다면 부모라고 존중받을 수 없듯이 영적인 아이를 돌보지 않는다면 영적인 아비라고 인정받을 수 없습니다. 영적인 아비 단계에는 책임감이 지워집니다. 그렇다 보니 영적인 청년 단계까지는 그럭저럭 자라나는데 아비 단계까지는 자라지 못하고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제자리에서 맴도는 경우가 있습니다. 흐르는 물은 살아 있지만 고여 있는 물은 썩기 마련입니다. 신앙이 자라지 않으면 퇴화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4장 13절을 통해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우리가 성숙한 신앙인으로 자라기를 바랐습니다. 우리가 성숙한 신앙인이 되려면 요한은 2장 13절 전반 절과 14절 중반 절을 통해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음이요” 라고 반복해서 말합니다. 여기서 ‘태초부터 계신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알면 알수록 그리고 예수님을 믿으면 믿을수록 신앙이 성숙해 갑니다. 신앙이 성숙해지면 부모가 본능적으로 자녀를 돌보듯이 자연스럽게 미숙한 교인을 돌보게 됩니다. 미숙한 교인을 돌보지 않는다면 아직은 성숙하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베드로는 베드로 후서 3장 18절을 통해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고 권면합니다. 우리는 아기가 키가 자라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이 자라가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이 자랄수록 우리는 어느새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아가게 됩니다. 영성의 핵심은 예수님을 닮는데 있습니다. 예수님을 닮으면 나는 작아지고 예수님은 커지게 됩니다. 내 원대로 마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소서 라고 기도하게 됩니다. 저와 여러분은 예수님을 앎으로 영적 아비처럼 예수님을 닮아가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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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법 열공 2학기 기말 기출문제집 중2 - 2009
천재교육 편집부 지음 / 천재교육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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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열공이 나왔네요. 

우리 아이는 중간고사 끝나기 무섭게 

또 기말고사 준비라고 싫어하지만 

막상 시험이 시작되면  

친구들이 죽기 살기로 공부한다며 

자신도 새벽을 밝히며 열공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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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신자반 (반양장) 믿음의 글들 129
이재철 지음 / 홍성사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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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괜찮은 훈련 교재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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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22:34-40 관상과 행동

우리나라 목사님들에게 ‘어떤 사람이 신앙생활을 잘 하는 사람일까요?’ 하고 묻는다면, 여러 가지 대답이 나오겠습니다만 아마 주일을 거룩하고 지키고 십일조를 구별하여 드리는 교인이라는 답변이 많을 겁니다. 한국교회에서 주일성수와 십일조는 신앙생활을 잘 하고 못 하고를 가르는 척도가 되었습니다. 주일성수하고 십일조를 잘 한다고 해서 세상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잘 한다고 칭찬할까요? 꼭 그렇지마는 않습니다. 미국의 석유 왕 록펠러는 주일성수와 십일조를 잘 했다고 교회에서는 찬사를 받았지만, 세상에서는 경쟁자를 잔혹하게 쓰러뜨리는 비정한 사업가였다고 비난을 받았습니다. 주일성수와 십일조는 신앙의 형식입니다. 겉모습이죠. 사람은 외모를 보지만 하나님은 중심을 보십니다. 하나님은 속을 중요시 하십니다. 신앙의 내용을 중요시 하시죠. 그렇다면 신앙의 내용은 무엇일까요? 오늘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일곱 가지 길 중에서 여섯 번째 시간으로 관상 그리고 행동으로서의 영성을 다루려고 합니다. 개신교에서는 관상을 조용한 기도로 묵상과 비슷한 의미로 사용합니다. 하지만 가톨릭에서는 내면의 침묵으로 묵상보다 높은 경지의 기도를 의미합니다.

저는 관상을 하나님을 사랑하는 행동으로 이해합니다. 유대교에는 여러 가지 파가 있었는데 그 중 율법을 엄격하게 지키는 바리새인 그 중에서도 율법을 해석하는 율법사 오늘날로 하면 신학박사가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물었습니다.(35절) 공동번역에는 예수님의 속을 떠보려고 물었다고 합니다. “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율법서에는 613가지의 조항이 있었습니다. 이 중에서 248개는 ‘하라’는 조항이었고, 365개는 ‘하지 말라’는 조항이었습니다. 율법사들은 율법 중에서 ‘더 중요한 조항’과 ‘덜 중요한 조항’을 나누는 작업을 하느라 고생하였습니다. 율법사는 예수님을 골탕 먹이려고 율법 중에서 가중 중요한 조항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만족한 대답을 하지 못하면 율법사는 망신을 주려고 별렀습니다. 그러나 유대와 헬라 세계에서 유명한 스승은 재치 있는 대답으로 자신을 공격하는 상대를 궁지에 몰아넣는 기술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37-40절)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예수님은 613가지 율법을 2가지로 요약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신명기 6장 5절을 인용하여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마음은 감정적 차원이고, 목숨은 의지적 차원이고, 뜻은 지식적 차원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지식과 감정과 의지 다시 말해 전인적으로(전 존재로)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오늘 교회를 나올 때도 전인적으로 행동했습니다. 머리로 오늘이 ‘주일이구나.’ 라고 인식했고, 마음으로 ‘교회 가야 되겠네.’ 라고 결심했고, 손발로 차를 운전해서 예배에 참석했습니다. 우리가 교회 나올 때도 전인적으로 행동하듯이 하나님을 사랑할 때도 말로만이 아니라 행동을 겸비해서 사랑해야 합니다./ 저는 이웃을 행동으로 사랑해야 한다고 이해합니다. 예수님은 레위기 19장 18절을 인용하여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이웃은 모든 사람을 가리킵니다. 나도 포함되고 남도 포함됩니다. 나를 사랑하는 만큼 남도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전인적으로(전 존재로) 나도 사랑하고 남도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율법의 골자라고(핵심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답변 속에는 신앙의 내용이 고스란히 담겨있습니다. 신앙의 내용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겁니다.    

그럼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 인간과의 수직적인 사랑입니다. 십자가의 세로에 해당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죄를 저질러 하나님과 사람 사이가 갈라졌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인 예수님을 속죄양으로 보내셔서 인간의 죄를 대신해 피를 흘리고 돌아가시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사랑하셨으면 아들을 죽여서까지 인간의 죄를 용서하셨을까요? 솔직히 저라면 제 아들을 죽여서까지 남을 사랑하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부모님이 자녀를 사랑하는 것보다 우리를 더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이사야 49장 15절을 통해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엄마는 젖먹이 아이에게 눈을 떼지 못하는데 혹시 엄마가 젖먹이를 잊을지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결코 잊지 않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자녀가 철이 들면 부모님의 사랑을 헤아리고 효도하듯이 우리도 신앙이 깊어지려면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려면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친한 사람은 자주 만나고 마음도 잘 통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친해지려면 하나님과의 영혼의 대화인 기도를 자주해야 합니다. 기도는 일방통행이 아니라 쌍방통행입니다. 나도 말하고 하나님의 말씀도 들어야 합니다. 우리나라는 일방통행식의 얕은 기도를 하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면 깊은 기도를 해야 합니다. 이런 깊은 기도가 관상이고, 관상을 해야 하나님의 뜻을 헤아릴 수 있습니다. 관상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입니다./ 우리는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인간과 인간과의 수평적 사랑입니다. 십자가의 가로에 해당합니다. 사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더 어렵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잘못해도 무한대로 용서해주시지만 이웃은 조금만 잘못하면 금방 서운해 합니다.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려면 원만한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원만한 사람은 상대방의 마음을 헤아려 주고 배려해 줍니다. 우리가 이웃과 원만해지려면 내가 바라는 만큼 이웃에게 베풀어야 합니다. 대가를 바라지 말고 베풀어야 합니다. 옥한흠 목사님은 이웃을 본능적으로 사랑하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이웃도 사랑할 수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요한일서 4장 20절에서 21절을 통해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눈에 보는 형제와 자매를 사랑하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다고 말씀합니다. 명절은 형제와 자매를 사랑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눈에 거슬리는 동서를 핀잔하기보다 따뜻한 말로 위로해 보십시오. 시누이가 얄밉다고 삐죽거리기보다 작더라도 정성이 담긴 선물을 건네 보십시오. 사랑은 악을 선으로 갚는 겁니다. 가까이에 있는 사람부터 사랑하는 겁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신앙생활을 잘 하려면 신앙의 형식인 주일성수하고 십일조를 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일성수하고 십일조 하더라도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속 빈 강정’과 같습니다. 맛있는 강정이 속이 비었다면 맛을 내지 못합니다. 신앙의 형식은 지키지만 내용이 없으면 겉만 화려하고 속은 빈 것과 같습니다./ 신앙생활을 잘 하려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더라도 주일성수하고 십일조하지 않는다면 ‘그림의 떡’과 같습니다. 아무리 맛있는 떡이라도 먹을 수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신앙의 내용은 있지만 형식이 없으면 좋은 물건을 포장하지 않은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일성수하고 십일조 하는 교인이 돼야 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교인이 돼야 합니다. 그러면 신앙의 형식과 내용이 씨줄과 날줄이 되어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견고하게 엮어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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