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9월 27일(주일)에 권량헌 어린이가 교회학교 예배에 처음으로 출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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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후 12:1-4 하나님을 체험함

우리 감리교회에는 웨슬리 신학의 4대 원리가 있습니다. 성경, 전통, 이성, 체험. 우리 감리교회의 교리적 선언 제5항은 ‘우리는 구약과 신약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신앙과 실행의 충분한 표준이 됨을 믿으며’ 라고 말합니다. 감리교회는 성경이 신앙과 생활의 일차적인 원천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신앙과 생활의 모든 영역을 다 다루지는 않습니다. 성경의 절대적인 가치를 부연 설명할 이차적인 원천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초대교회로부터 전해져 내려온 전통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이성과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는 신앙의 체험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구원을 확신하고 신앙을 체험하면서 구원을 확증합니다. 오늘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일곱 가지 길 중에서 다섯 번째 시간으로 하나님을 체험하는 영성을 다루려고 합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을 체험한 이야기들이 수두룩합니다.

우리 신앙의 선배들은 하나님을 체험하고 나서 인생관이 달라졌습니다. 신앙의 선배 중에서 사무엘은 어린 시절에 하나님을 체험했습니다. 사무엘은 우리가 잘 알다시피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어머니 한나가 아들을 주시면 여호와께 드리겠다고 서원기도를 하고 얻은 아들입니다.(삼상1:11) 한나는 사무엘이 젖을 떼자 아마도 세 살 전후에 엘리 제사장에게 맡겼습니다.(삼상1:24) 한나는 하나님이 사무엘을 주셨다고 믿었기 때문에 아낌없이 드렸습니다. 사무엘은 엘리 제사장의 시중을 들며 여호와를 섬겼습니다.(삼상3:1) 그 당시는 하나님이 사람에게 말씀하시는 일도 드물었고, 환상을 보여주시는 일도 흔하지 않았습니다. 사무엘이 잠자리에 들었는데 그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사무엘은 얼른 엘리 제사장에게 달려갔습니다. 엘리 제사장은 사무엘을 부르지 않았다고 돌려보냈습니다. 이렇게 사무엘을 부르는 소리가 3 번 들렸고, 그 때마다 사무엘은 엘리 제사장에게 달려갔고, 엘리 제사장은 부르지 않았다고 돌려보냈습니다. 엘리 제사장은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부르신다고 직감하고 어떻게 대답할지를 알려주었습니다.(삼상3:8-9) 하나님께서 4 번째 사무엘을 부르셨습니다. “사무엘아, 사무엘아,” 사무엘이 대답했습니다.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삼상3:10) 사무엘은 하나님이 부르실 때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사무엘은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여호와의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가 되었습니다.(삼상3:19-21)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부르셨듯이 우리를 부르시고 계십니다. 우리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요? '하나님, 지금은 바쁘니까 나중에 말씀하세요.' 라고 귀를 막아야 할까요? 아니면 ‘하나님,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라고 대답해야 할까요?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다면 우리는 이사야처럼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사6:8)’ 라고 응답해야 하겠습니다.

신앙의 선배 중에서 교인을 박해하던 사울도 하나님을 체험했습니다.(행9:1-25) 사울은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교 종교지도자들에게 권한을 위임 받고 다메섹에 있는 교인들을 체포하러 가다가 다메섹 가까이에 이르렀을 때 하늘로부터 강렬한 빛이 비추자 그만 땅에 엎드러졌고 이상한 소리를 들었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사울이 물었습니다. “주여, 누구시니이까?” 목소리의 주인공이 대답했습니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너는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라. 네가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예수님은 사울이 행할 일을 알려 줄 사람을 보내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울은 땅에서 일어났는데 앞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사울은 눈이 보이지 않는 가운데 사흘 동안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으며 기도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다메섹에 있는 아나니아를 사울에게 보내 안수하게 하셨고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사울은 세례를 받고 음식을 먹고 강건해졌습니다. 사울은 다메섹 각 회당을 돌아다니며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였습니다. 사울은 교인을 체포하러 다메섹에 왔다가 오히려 예수님을 전파하는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사울을 죽이려고 모의했고 교인들은 광주리에 태워 사울을 성벽에서 달아 내렸습니다. 하나님은 사울을 선택하셨듯이 우리를 선택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전에는 마귀의 종이었는데 ㄹ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로 변했습니다. 우리의 신분이 달라졌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자녀로 삼아 주셨는데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여전히 세상일에 얽매여 아침부터 저녁까지 뛰어다녀야 할까요? 아니면 하든 일을 멈추고 주님께 달려가야 할까요?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다면 우리는 베드로와 안드레처럼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라가야 하겠습니다.(막1:18) 우리의 신분에 걸맞게 우리의 수준을 끌어올려야 하겠습니다.

우리 감리교 신앙부흥운동을 일으켰던 존 웨슬리도 하나님을 체험했습니다. 웨슬리는 영국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강사로 지낼 만큼 우수한 인재였습니다. 웨슬리는 1735년 미국 조지아주 선교사로 파송을 받고 가다가 풍랑을 만나자 죽을까 두려워했는데 모라비안 교도들은 평상시와 다를 바 없이 한 자리에 모여 앉자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웨슬리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있었지만 체험은 없었습니다. 그러던 웨슬리가 1738년 5월 24일 윌리암 홀랜드가 루터의 로마서 주석 서문을 읽는 것을 듣고 마음이 뜨거워지는 체험을 하였다. 웨슬리는 천국에 이르는 확실한 길은 하나님을 체험하는 것이라고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웨슬리는 1739년 브리스톨에서 야외설교를 시작하면서 위대한 부흥사가 되었습니다. 웨슬리는 성경의 진리는 성령님의 내적 증거를 통해 우리 마음속에서 확증된다고 결론지었습니다. 우리 감리교회는 성령님을 체험해야 살아있는 신앙인이 된다고 말합니다.

나도 하나님을 체험했습니다. 1990년 12월 11일 화요일 저녁이었습니다. 일주일후면 대학 학력고사가 있었습니다. 나는 신학대학을 가기로 결심하고 낮에는 독서실에서 공부하고 저녁에는 교회에서 기도를 하였습니다. 한참 기도하다 보니 강단에 흰옷을 입은 키가 큰 분이 서 계셨습니다. 그분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나는 그분이 예수님이라고 직감했습니다. 나는 마음속으로 그분에게 안수해 달라고 부탁하였고 그분의 커다란 손이 내게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나는 초등학교 때 교회를 잠깐 다니다가 청년 시절에 다시 다녔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지식도 없었고 체험도 없었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체험하고 나서 신학을 공부하고 성경을 읽으며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쌓아갔습니다. 나는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잠시 흔들리기는 했어도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하지는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확실히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을 통해 환상과 계시를 자랑합니다. 바울이 자랑하고 싶어서 자랑한 게 아니라 바울을 비방하는 자들이 하나님의 계시를 보았다고 자랑하고 다녔기 때문에 바울도 어쩔 수 없이 자랑하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셋째 하늘로 이끌려갔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늘은 세 개 내지 일곱 개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첫째 하늘은 지구의 대기권이고, 둘째 하늘은 우주이고, 셋째 하늘은 하늘들의 하늘인 천국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바울은 셋째 하늘에서 말로 형언할 수 없는 말을 들었고, 글로 옮길 수 없는 장면을 보았습니다.(고후12:1-4) 바울은 하나님을 체험했기 때문에 목숨을 걸고 복음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체험하는 것도 중요하지 하나님의 말씀은 더 중요합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구원을 확신하는 것이지 체험을 통해 확신하는 것은 아닙니다. 체험은 단지 구원받았다는 확실한 증거일 뿐입니다. CCC 성경공부 교재는 성경과 체험과의 관계를 기차로 묘사합니다. 옛날 기차에는 기관차와 연료차와 객차가 있었는데 성경은 기관차입니다. 기관차는 기차가 나아갈 방향을 결정합니다. 기차를 출발하게도 하고 정지하게도 합니다. 성경은 우리의 신앙과 생활의 표준입니다. 최고의 권위를 가집니다./ 이 기차를 움직이는 연료차는 믿음입니다. 이 기차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우리의 믿음에 의해 움직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신앙 생활할 수 없습니다. 교회에 나올 수가 없습니다. 믿음이 에너지입니다./ 객차는 우리의 신앙 체험입니다. 우리 감리교회는 체험을 강조하지만 객차가 기관차를 따라가듯이 체험은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으로 믿으면 부수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나타날 수도 있고 어떤 사람에게는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체험에 의존하다 보면 신앙이 고조될 때는 열심이지만 침체될 때는 엉망이 됩니다. 일교차가 심하면 감기에 걸리기 쉽듯이 신앙의 일교차가 심하면 시험에 걸리기가 쉽습니다. 감정은 가을 날씨처럼 변덕이 심하기 때문에 너무 감정적인 체험에 의지하지 마시고 영원히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생의 나침반을 삼으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을 사모하십시오. 하나님을 갈망하면 우리가 머리로 알았던 하나님을 가슴으로 느낄 수 있을 겁니다. 머리와 가슴이 하나가 될 때 우리의 신앙은 완전히 질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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엡 5:1-2 예수님과의 친밀한 관계

레노바레 운동의 설립자인 리처드 포스터 교수와 그의 제자인 게일 비비 교수는 기독교 역사를 보면 하나님과 함께 하는 일곱 가지 길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맹인들이 코끼리의 일부분을 만지고 나서 전부인양 착각하듯이 신앙의 일부분을 알면서 전부인양 오해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들이 지은 [영성을 살다(IVP)]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하나님과 함께 하는 일곱 가지 길을 알아보고 있습니다. 오늘은 네 번째 시간으로 예수 그리스도와의 친밀한 관계로서의 영성을 다루려고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친해지려면 예수님이 하나님과 친해지기 위해 어떻게 하셨는가를 알면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역할 모델입니다. 사람은 같이 밥 먹고 같이 잠자면 친해지는데 하나님과는 기도하면 친해집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친해지기 위해서 기도를 생활화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마가복음 1장 35절을 통해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사역을 시작하기 전에 조용한 장소에 가서 새벽 기도를 하셨습니다. 마가복음 6장 46절을 통해 “무리를 작별하신 후에 기도하러 산으로 가시니라.” 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사역을 마치고 나서 한적한 산에 올라가 저녁 기도를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역을 시작하기 전에도 기도하셨고 마치고 나서도 기도하셨습니다. 새벽에도 기도하셨고 저녁에도 기도하셨습니다. 기도는 아침을 여는 열쇠요 저녁을 닫는 자물쇠입니다. 우리가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듯이 기도로 하루를 시작해야하고, 우리가 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오듯이 기도로 하루를 마무리해야 합니다. 우리 가정은 큐티로 아침을 시작하고 가정 예배로 저녁을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기도로 하루를 시작하고 마무리하다 보면 예수님과 친해집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4장 1-2절을 통해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 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공적인 생애를 시작하기 전에 금식 기도를 하셨습니다. 누가복음 6장 12-13절을 통해 “이 때에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밝으매 그 제자들을 부르사 그 중에서 열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으니” 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12 제자를 선택하기 전에 철야 기도를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중요한 순간에 금식 기도도 하셨고 철야 기도도 하셨습니다. 광야에서도 기도하셨고 산에서도 기도하셨습니다. 우리가 중요한 순간에 누구를 의지해야 할까요?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사람은 잘해주면 좋아 하지만 아쉬운 소리를 하면 싫어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즐거이 찬양해도 기뻐하시고 우리가 어려워서 호소해도 들어주십니다. 기도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상의 특권입니다. 이렇게 기도로 특권을 활용하다 보면 예수님과 친해집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한가해서 기도하셨을까요? 아닙니다. 예수님은 마가복음 4장 38절을 통해 배를 타고 가시다가 고물을 베개로 베고 주무실 만큼 피곤하셨지만 기도하셨습니다. 마가복음 6장 31절을 통해 음식을 드실 겨를도 없이 바쁘셨지만 기도하셨습니다. 기도는 신앙인에게 교양 선택과목이 아니라 전공 필수과목입니다. 교양 선택과목은 들어도 되고 안 들어도 되지만 전공 필수과목은 반드시 이수해야 학위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렇듯이 교인의 전공 필수과목인 기도를 생활화해야 천국시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피곤해도 바빠도 기도하다 보면 예수님과 친해집니다./

예수님이 기도를 얼마나 중요시하셨는지 누가복음 5장 12-16절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나병 환자를 고쳐주자 수많은 무리가 자기 병도 고쳐달라고 몰려들었습니다. 무리들은 복음을 들으러 온 것이 아니라 병을 고쳐달라고 왔습니다. 복음을 듣지 않고 병을 고치는 것은 고기를 잡는 방법을 모르면서 고기를 얻는 것과 같습니다. 당장은 도움이 되지만 나중에는 막막해집니다. 예수님은 병을 고쳐주고 사람에게 칭찬을 듣기 보다는 조용한 장소로 가서 하나님께 기도하셨습니다. 여기서 병을 고쳐주는 일은 시급한 일이고, 기도를 하는 일은 중요한 일입니다. 예수님은 시급한 일보다는 중요한 일을 먼저 하셨습니다.

자,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중요한 일은 뒤로 하고 시급한 일에 매달리고 있습니다. 매일 바쁘게 살아가다 보니까 정작 기도할 시간은 없어지는 겁니다. 휴대폰도 사용하면 배터리를 충전해야 하고, 자동차도 운행하면 가스를 충전해야 하듯이, 교인도 세상에 살다보면 은혜가 소멸되기 때문에 기도로 재충전해야 합니다. 태아가 탯줄을 통해 엄마로부터 영양분을 공급받듯이 우리는 기도라는 영적인 파이프를 통해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공급받습니다. 기도하지 않는 것은 파이프가 막히는 겁니다. 막히면 뚫어야 하듯이 기도를 쉬었다면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왜 기도해야 할까요? 우리가 몸이 피곤하면 바이러스를 이기지 못해 감기에 걸리듯이 영혼이 피곤하면 마귀를 이기지 못해 시험을 당하게 됩니다. 감기에 걸리면 만사가 귀찮아지듯이 시험을 당하면 교회가기가 싫어집니다. 우리 속담에 바쁠수록 돌아가라고 했듯이 우리도 바쁠수록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기도에 성공해야 인생에도 성공하게 됩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에게 한 가지 기도 방법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저는 요즘 토니 존스 목사가 지은 [되찾은 영성]을 읽고 있습니다. 이 책을 보면 어떤 청년이 오두막집을 구하고 노수도사를 찾아가 영적 스승이 되어달라고 간청합니다. 노수도사는 하루에 3천 번씩 예수기도를 하라고 알려주었습니다. 그리고 기도 횟수를 셀 수 있도록 매듭이 100개가 달려있는 기도 끈을 주었습니다. 청년은 처음에는 고생스러웠지만 차츰 익숙해졌습니다. 노수도사는 하루에 6천 번씩 예수기도를 하라고 일러주었습니다. 청년은 기도가 익숙해져서 기도를 하지 않으면 이가 빠진 것처럼 허전해졌습니다. 노수도사는 하루에 1만 2천 번씩 기도하라고 일렀습니다. 청년의 혀는 감각을 잃었고 턱은 빠질 듯이 아팠습니다. 청년의 엄지손가락은 기도 끈을 만지느라 쓰라렸고 팔은 부어올랐습니다. 청년은 며칠이 지나자 예수기도가 호흡처럼 편해졌습니다. 청년은 예수기도로 눈을 떴고, 낮에는 예수기도로 감격했고, 밤에는 예수기도를 하는 꿈을 꾸었습니다. 청년은 기도를 반복할 때마다 몸과 마음이 빛으로 충만했습니다. 청년은 만나는 모든 사람을 사랑했고 자신의 형제와 자매로 여겼습니다. 노수도사는 숨을 거두었습니다. 청년은 러시아의 대초원을 떠돌며 만나는 사람에게 예수기도를 가르쳤고. 걷든지 쉬든지, 먹든지 자든지, 성찰하든지 노동하든지 예수기도를 암송했습니다. 청년은 자신의 여행과 깨달음을 담은 [순례자의 길]을 남겼습니다. 영성의 핵심을 예수님을 닮는데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자신을 희생 제물로 내주셨습니다.(엡5:2) 하나님은 이런 예수님의 사랑을 본받으라고 말씀합니다.(엡5:1) 청년이 예수기도를 통해 예수님처럼 모든 사람을 사랑하게 되었듯이 우리도 예수기도를 하다보면 예수님을 닮을 수 있습니다. 토니 존스 목사는 예수 기도하는 방법을 알려줍니다. 맹인 바디매오가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막10:47) 라고 기도했듯이, 숨을 들이쉬면서 “하나님의 아들 주 예수님” 숨을 내쉬면서 “이 죄인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소서.” 라고 기도하라고 조언합니다. 예수기도는 정신을 집중하고 단어의 의미를 깊이 생각하면서 기도를 반복하는 겁니다. 그러면 휴대폰의 배터리가 충전되듯이, LPG차의 가스가 충전되듯이,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의 은혜로 충만해져서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듯이, 우리도 세상을 사랑할 수 있을 겁니다. 우리는 그동안 문제를 놓고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머리털까지도 세신 분입니다. 우리의 형편과 처지를 속속들이 알고 계십니다. 이제는 해결됐다고 믿고 예수기도를 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문제도 해결될 뿐만 아니라 예수님과도 친해지고 우리의 몸과 영혼도 예수님의 사랑으로 충만해질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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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통 : 따뜻한 희망의 에너지
김경수.이우제 지음 / 서로사랑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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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담심리학자와 설교학자가 상담설교는 무엇이며 어떻게 작성하는지 알려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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벧후 3:18 하나님에 대한 지식의 회복

성경은 하나님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오시는 이야기이죠. 성경은 창조, 타락, 구속, 완성이라는 4 장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야기의 거룩한 주역이고, 사탄은 악역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주인공으로 나오죠. 주인공들은 서로 갈등하고 해소하면서 이야기가 진행됩니다. 성경을 물에 비유하면 하나님은 물이 콸콸 솟아나는 샘을 만드셨습니다. 샘물이 샛강으로 졸졸졸 흐르는데 바위가 튀어나옵니다. 물이 잠깐 멈췄다 더 많은 물이 고이면 바위를 피해서도 흐르고 넘어서도 흐르며 큰 강으로 흘러갑니다. 큰 강물은 최종적으로 바다로 모입니다. 여기서 물이 발원하는 샘은 창조이고, 물을 가로막는 바위는 타락이고, 바위를 넘어서 큰 강물로 흐르는 물은 구속이고, 큰 강물이 합해지는 바다는 완성입니다. 자, 그렇다면 하나님 이야기를 시작할까요? 오늘은 하나님과 함께하는 7가지 길 중에서 세 번째 시간으로 타락으로 잃어버린 하나님에 대한 지식의 회복으로서의 영성을 다루려고 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회복하길 바라십니다.(호4:6)

창조/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창1:1) 하나님은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셨기 때문에 모든 만물보다 앞서 존재하시는 분이고, 모든 만물이 생겨난 원인이신 분이고, 모든 만물보다 위에 계신 분이고, 모든 만물이 존재하는 목적이신 분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만물 중에서 최고의 걸작품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드셨습니다.(창1:26)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은 하나님의 대리인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복을 주시며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절대적인 주권을 가지셨는데 사람에게 제한적인 주권을 위임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만드시고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먹을거리로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습니다.(창1:28-30) 하나님은 에덴에 동산을 만드시고 아담과 하와와 함께 사셨습니다. 에덴은 기쁨이란 뜻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살면 기쁨이 넘칩니다. 사람은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과 교제하며 살도록 창조되었습니다. 에덴동산에는 하나님이 계시기에 보고 싶을 때는 언제든지 찾아뵐 수 있었고, 먹을거리도 널려있어 배고플 때는 얼마든지 먹을 수 있었습니다. 에덴동산은 사람에게는 아무런 부족함이 없는 완벽한 장소였습니다.(창세기 1-2장) 그런데 사람이 복에 겨워 발로 걷어찼습니다.

타락/ 하나님은 아담에게 동산에 있는 각종 나무의 열매는 임의로 먹어도 되지만 동산 가운데에 있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고 신신당부하셨습니다. 그 열매를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는다고 경고도 하셨습니다.(창2:17) 그러나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한 뱀이 하와에게 물었습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여자가 대답했습니다.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뱀이 단언했습니다.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라.” 하나님은 죽는다고 경고하셨지만 뱀은 죽지 않는다고 부인하였습니다. 여자는 흔들렸습니다. 여자가 그 나무를 보니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자에게도 주어 아담도 먹었습니다.(창3:1-6) 사람은 원래 하나님에게 의존하며 살게 창조되었는데 사탄이 부추기자 사람은 하나님처럼 되고 싶었습니다. 아니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하고 싶었습니다. 하나님은 타락을 조장한 뱀에게 저주를 내려 배로 기어 다니고 흙을 먹고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셨습니다. 뱀의 유혹에 넘어간 하와에게 징계를 내려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셨고 남편에게 다스림을 받도록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아내의 말을 따른 아담에게 평생에 수고하여야 소산물을 먹을 수 있고 흙에서 취했으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심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옷을 지어서 입히시고 생명나무의 열매도 따먹고 영생할까 염려되어 에덴동산에서 내어 쫓으셨습니다.(창3:14-24) 사람은 타락의 결과로 하나님과의 교제가 단절되었습니다. 예전에는 언제든지 만날 수 있었는데 이제부터 어쩌다가 만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람은 고집 센 양과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고(사53:6) 반항하는 아들처럼 집을 떠나 타국으로 떠나갔습니다.(눅15:11-32) 사람은 반역의 결과로 하나님의 형상을 상실했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본성을 잃고 사탄의 모습을 닮아가고 있습니다. 형인 가인이 동생인 아벨을 죽였습니다. 죄는 더 큰 죄를 낳았습니다. 하나님은 죄악이 세상에 가득하고 그들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계획이 항상 악한 것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을 지으셨음을 한탄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인 노아의 가족들과 정결한 짐승들은 암수 일곱 쌍씩, 부정한 짐승들은 암수 두 쌍씩 남겨두고 대홍수를 일으켜 모든 생물을 쓸어버리셨습니다.(창세기 4-11장) 그러나 하나님은 자비로우신 분입니다. 어쩌다가 때리기도 하시지만 언제나 싸매려 하시는 분입니다.

구속/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선택하셔서 큰 민족을 이루고, 땅의 모든 족속이 그로 말미암아 복을 얻는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선택하셔서 애굽에서 노예 생활하는 백성들을 구출하시고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율법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에 정착하면서 하나님은 유목민의 신이라고 생각하고 농사의 신인 바알과 아스다롯에게 마음을 빼앗겼습니다. 하나님은 사무엘을 세워 다윗에게 기름을 부으시고 그의 후손 중에서 그의 백성들을 영원히 다스릴 왕이 나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백성들은 율법을 순종하기도 하였고 불순종하기도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영을 부어 그들이 살고 그들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변화되리라고 새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돌아오도록 선지자들도 보내셨고, 시인들도 보내셨고, 지혜자들도 보내셨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은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최후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인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이 사람의 죄를 대신 지고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고 돌아가셨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심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길이 열렸습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시고 성령님이 임하심으로 하나님과 사람이 교제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죄인이었지만 예수님을 대신 죽이셔서 죄를 용서하시고 의인이 되도록 만드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으므로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구원은 사람의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로 주어졌습니다. 우리는 지옥으로 떨어져야 마땅하지만 천국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완성/ 예수님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11:25-26) 예수님은 부활입니다. 부활이신 예수님을 믿는 자는 죽어도 살아납니다. 예수님은 생명입니다. 생명이신 예수님을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고 말씀하셨습니다.(요14:6) 예수님은 하나님께 이르는 유일한 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야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할 수 있고, 예수님을 영접해야 하나님과의 교제를 회복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의 주님이시며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과 그의 은혜 안에서 자라라고 권면합니다. 우리는 어린아이가 키가 자라듯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이 자라가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알면 알수록 하나님의 거룩한 형상을 닮아갈 수 있고, 예수님을 알면 알수록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계속할 수 있습니다. 이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습니다. 언제 예수님이 다시 오실지 모릅니다. 예수님을 끝까지 거부하는 사람들은 사탄과 함께 최후의 심판을 받게 되지만 예수님을 즐거이 영접하는 사람들은 새 하늘과 새 땅과 새 예루살렘과 새 에덴인 천국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성도들과 영원토록 교제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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