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개역개정 2009.7.8 (큰글본문)
매일성경 편집부 엮음 / 성서유니온선교회(잡지)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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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어떤 분인지 내게 주시는 교훈은 무엇인지를 다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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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 4:35-41 바람을 꾸짖으시며

우리 인생은 바다에 떠 있는 배와 같다
우리는 7월 20일부터 22일까지 울릉도로 교역자 부부 수양회를 다녀옵니다. 포항 여객선터미널에서 톤수는 2,394톤이요 정원은 920명인 ‘썬플라워호’를 타고 소요시간ㄹ; 3시간이 걸리는 울릉도 도동항을 향해 출항합니다. 여객선이 하얀 포말을 일으키며 푸른 물살을 힘차게 가릅니다. 하얀 갈매기들이 날갯짓을 하며 푸른 물결 위를 넘실거립니다. 우리는 갑판에 올라가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환호성을 지릅니다. 생각만 해도 신나지 않습니까? 순풍이 불어오면 물결은 잔잔하고 우리가 탄 배는 내 집같이 편안합니다. 그러나 혹시 태풍이 불어오면 물결은 거칠어지고 배는 이리 저리 흔들리며 뱃멀미가 납니다. 우리 인생은 바다에 떠 있는 배처럼 순풍이 불어와 순조로울 때도 있고 태풍이 불어와 위태로울 때도 있습니다. 우리뿐만이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들도 순풍을 만나기도 하였고 태풍을 만나기도 하였습니다.

우리 인생은 태풍을 만나 위태로울 수 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배를 타고 갈릴리 호수를 건너가고 있었습니다. 갈릴리 호수는 하프처럼 생겼습니다. 가장 긴 길이는 21키로 미터이고 가장 넓은 너비는 13키로 미터였습니다. 예수님은 배에 타시자마자 고물(선미)에 베개를 베고 잠이 드셨습니다. 제자들은 순풍을 만나 순조롭게 항해했습니다. 그러나 갈릴리 호수는 가을 날씨처럼 변덕이 심했습니다. 낮에는 뜨거운 바람이 불었으나 해가 지면서 차가운 바람으로 바뀌면서 풍랑이 일었습니다. 풍랑은 주로 오후 4-5시에 일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저녁이었습니다. 바다가 잔잔해 어부들이 고기잡이에 나서는 시간이었습니다. 설사 풍랑이 일어난다 해도 제자들은 갈릴리 호수에서 잔뼈가 굵은 어부들이라 대처할 능력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바람이 불기 시작하더니 사나운 바람으로 돌변했습니다. 우리가 탈 배는 운동장처럼 크다보니 웬만한 바람에도 끄덕하지 않으나 제자들이 탄 배는 양호실처럼 작다보니 낙엽처럼 이리 흔들리고 저리 흔들렸습니다. 제자들은 배가 바람에 흔들리지 않도록 돛을 접었습니다. 바람이 불어오자 이번에는 파도가 일어났습니다. 집채만 한 파도가 배를 덮쳤습니다. 제자들은 파도에 휩쓸리지 않도록 닻을 내렸습니다. 제자들은 어부로서의 지식과 경험을 총 동원하여 풍랑에 대처했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돛을 접어도 배는 바람에 흔들렸고 닻을 내려도 파도에 휩쓸렸습니다. 배는 바람에 뒤집히든지 파도에 깨지든지 아니면 차오르는 물에 잠기든지 할 것 같았습니다. 제자들의 능력은 풍랑 앞에서 속수무책이었습니다.

우리가 탄 배에 예수님도 타고 있다.
제자들은 그제서 예수님을 생각했습니다. 제자들이 자신의 지식과 경험으로 풍랑을 극복하려고 할 때는 예수님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능력이 한계에 도달했을 때에야 예수님이 보였습니다. 예수님은 얼마나 피곤하셨던지 파도가 얼굴을 때려도 세상모르고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흔들어서 깨웠습니다.(막4:38)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제자들은 예수님을 원망했습니다. 자신들이 죽게 되었는데도 모른 체 하실 수 있냐며 따졌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울부짖는 소리를 들으시고 어떻게 대처하셨을까요? 배 안으로 들어오는 물부터 퍼내셨을까요? 아닙니다. 예수님은 사나운 바람을 꾸짖으셨습니다.(막4:39) “잠잠하라, 고요하라.” 예수님은 귀신을 쫓아내듯이 바람을 꾸짖으셨습니다(막1:25,3:12). 그러자 바람이 잦아들었습니다. 바람이 가라앉자 물결도 잔잔해 졌습니다. 제자들은 눈이 휘둥그레졌습니다. 류모세 선교사에 의하면 이스라엘은 서쪽의 농경지에서 농사를 짓고 동쪽의 광야에서 목축을 하는 광야 민족이라 바다를 막연히 두려워하였다고 합니다. 에스키모 인들은 눈이 많이 오다 보니 눈이라는 단어가 15개가 있었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사막이 많다 보니 광야라는 단어가 7개가 있었는데, 바다가 없다보니 ‘얌’이란 단어 하나로 바다와 호수와 대양을 모두 사용했다고 합니다. 그 만큼 바다에 무지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돌아보시며 나무라셨습니다.(막4:30)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제자들은 예수님이 병든 자도 고치고 죽은 자도 살리는 광경을 목격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이 그 무서운 바다까지도 다스릴 수 있는 분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제자들은 자연을 다스리시는 예수님을 보며 놀라워하였으나 예수님은 아직까지도 믿음이 자라지 않은 제자들이 안타까우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연도 다스리시는데 하물며 인생의 문제는 얼마나 쉽게 해결하시겠습니까?

초대교회 교인들은 배를 교회로 생각했고 사나운 바람과 거센 물결을 교회에 닥친 시험과 환란으로 이해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배에 탔지만 풍랑이 일어나 위기에 빠졌듯이 교인들이 예수님을 구세주로 모시고 살지만 시험과 환란이 닥쳐와 위기에 빠지기도 합니다. 예수님을 가장으로 모신 가정에도 풍랑이 불어와 가정이 해체될 위기에 놓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을 사장으로 모신 직장에도 풍랑이 불어와 파산할 위기에 놓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을 담임목사로 모신 교회에도 풍랑이 불어와 분열될 위기에 놓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을 모셨어도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모신 사람과 모시지 않는 사람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모신 사람들은 제자들이 배가 흔들리지 않도록 돛을 접었고 배가 뒤집히지 않도록 닻을 내렸듯이 사람의 방법을 동원해 해결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소용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모시지 않은 사람들은 이 단계에 도달하면 실망하고 낙심하고 극단적인 선택까지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모신 사람들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바라봤듯이 그제서 예수님을 찾아갑니다. 예수님은 배 안에서 주무셨듯이 우리가 어떻게 대처하는지 지켜보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위기를 만났을 때 하나님께 나아와 호소하길 바라십니다. 우리가 사람에게 찾아가 애원하는 것은 굳게 잠긴 문을 다른 키로 열려는 것과 같습니다. 문이 안 열립니다. 제키라야 열립니다. 예수님을 찾아가야 깜깜한 터널에서 빠져나올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오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십니다.(시46:1) 예수님께 나아가십시오. 예수님은 위기에 빠진 제자들을 구원해 주셨듯이 우리의 가정과 직장과 교회를 위기에서 극복해 주십니다. 반드시 극복해 주십니다. 우리들이 탄 배에는 예수님도 타고 계십니다. 멀리가지 마십시오. 예수님께로 가십시오. 반드시 해결해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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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S TV 중학 여름방학특강 2학년 - 2009년 07월 06일 - 08월 02일
한국교육방송공사 엮음 / EBS(한국교육방송공사)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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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큰 아이는 

EBS TV 여름방학 특강을 보며 

2학기를 준비하려 합니다. 

무더운 여름을 

방송강의를 보며 이겨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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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 4:26-34 씨를 뿌림과 같으니


이현주 목사님이 지은 [밥을 먹는 자식에게]라는 시(詩)가 있습니다. 천천히 씹어서 공손히 삼켜라/ 봄에서 여름 지나 가을까지 그 여러 날들을 비바람 땡볕으로 익어온 쌀인데/ 그렇게 허겁지겁 삼켜버리면 어느 틈에 고마운 마음이 들겠느냐/ 사람이 고마운 줄 모르면 그게 사람이 아닌 거여./ 이현주 목사님의 시처럼 쌀이 밥상에 오르기까지 기나긴 시간과 수많은 수고를 거쳐야 합니다. 옛 사람들은 쌀 미(米)자를 가르칠 때 八十八 (팔십팔/88)자가 합쳐져서 쌀 미자가 되었다고 설명했습니다. 쌀이 우리 밥상에 오르기까지 88번의 손길을 거쳤으니 소중하고 감사하게 먹으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막4:26) 씨 중에서도 겨자씨 하나(막4:31)를 뿌림과 같다고 비유하셨습니다.(실제로는 난초씨가 가장 작다.)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 당시에 가장 작은 씨로 알려진 겨자씨처럼 아주 작게 시작한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하려면 씨가 작더라도 땅에 뿌려야 합니다. 이스라엘에서 밭에 씨를 뿌리는 것은 우리나라에서 논에 모내기를 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스라엘은 밭에 씨를 뿌릴 때 땅 속에 돌이 많다 보니 가래질을 하지 않고 나귀의 등 위에 씨앗 자루를 실고 구멍을 내어 씨를 뿌렸습니다. 우리나라는 모내기를 할 때 씨앗(종자)을 소금물에 담가 소독하고 불린 다음 요즘에는 고운 흙을 넣은 모판에 뿌리고 논 한쪽에 물을 대주어 그 위에 올려놓고 비닐하우스로 덮어줍니다. 모가 싹이 트면 찬 공기에 적응하는 기간을 갖기 위해 점차적으로 비닐하우스를 걷어 주고 어느 정도 자라면 이양기로 모내기를 합니다. 모내기를 할 때는 줄을 맞추는데 통풍이 잘돼야 병충해를 줄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농부는 모내기를 하기 전에 논에 밑거름을 주고 모내기를 하고 나서 적당하게 물을 대주고 모가 논에 뿌리를 내리면 웃거름을 주고 병충해를 예방하기 위해 가끔씩 농약을 쳐줍니다. 그러면 모가 잘 자랍니다.

예수님은 씨를 뿌리면 농부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는데 어떻게 그렇게 되었는지 알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막4:27) 씨가 자라는 과정이 신비롭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막4:28)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는다는 말씀은 하나님의 도움으로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는다는 말씀입니다. 농부가 모를 심고 물을 대주고 거름을 주면 모가 자라서 벼가 되고 벼 속에서 목이 올라오면서 꽃이 피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만약 이때 태풍이 불어오면 벼가 수정이 안 돼 쭉정이가 됩니다. 사람이 지하수를 끌어와 물을 대주고 농약을 뿌려 병충해를 예방해줄 수는 있지만 하나님이 태풍을 막아 주시지 않으면 벼가 수정을 할 수 없고 햇빛을 적당하게 비춰주시지 않으면 벼가 토실토실하게 여물 수 없습니다. 농사도 사람이 짓는 것 같지만 결국은 하나님이 지으시는 겁니다. 사도 바울은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고전3:6) 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사람은 씨를 뿌리고 물을 주지만 하나님은 자라게 하십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씨는 무엇을 상징할까요? 복음을 가리킵니다. 농부는 씨가 작더라도 뿌려야 하듯이 우리는 믿지 않는 사람들이 듣기 싫어하더라도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씨를 뿌리지 않으면 싹이 나지 않듯이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천국 시민이 생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땅은 무엇을 상징할까요? 사람의 마음을 가리킵니다. 농부가 씨를 땅에 뿌리면 싹이 트듯이 우리가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면 언젠가는 신앙의 싹이 트게 됩니다. 땅에 뿌려진 씨가 싹이 트는 과정을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듯이 믿지 않는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이는 과정도 신비롭기만 합니다. 어떤 사람은 아이가 너무 속을 썩이다 보니 마음을 잡으라고 교회로 보내는 경우도 있고 어떤 사람은 목을 매려다가 전도하러 온 교인이 벨을 누르는 소리를 듣고 예수님을 영접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복음을 전하느냐 안 전하느냐 이지 복음을 영접하고 거부하고는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보내심을 받아야 전파하고 전파해야 듣고 들어야 믿고 믿어야 구원받는다고 말씀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 아름답다고 말씀하였습니다.(롬10:13-15) 사람이 결혼을 해서 자녀를 낳아야 가문이 계승되듯이 전도자가 복음을 전해야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됩니다.

예수님은 씨를 뿌리면 가장 작은 겨자씨가 자라서 세상의 모든 풀보다 커진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막4:32) 겨자씨는 보통 1,2미터까지 자라는데 갈릴리 호수 주변에는 3미터까지도 자라고 어떤 것은 4,5미터까지도 자란다고 합니다. 어린 시절 강가에 가보니 가느다란 갈대에 참새가 머물었는데 공중의 새들이 가느다란 겨자초 가지의 그늘에 깃들인다는 말씀입니다. 씨는 작지만 뿌리고 뿌리면 하나님이 자라게 하시고 자라면 엄청나게 커진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욥기 8장 7절을 통해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처음에는 보잘 것 없지만 나중에는 대단해 질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기독교도 처음에는 미약했지만 지금은 창대해졌습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12제자를 남기셨는데 예수님이 승천하시고 12제자들이 세계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복음을 전하여 개신교인만 8억 명이 넘었습니다. 우리나라도 전체인구의 20%가 조금 안 돼는 9백만 명 정도가 개신교입니다. 겨자씨처럼 작았는데 겨자초처럼 엄청나게 커졌습니다.

예수님은 크게 자라 열매가 익으면 낫을 댄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막4:29) 하나님은 요엘서 3장 13절을  통해 “너희는 낫을 쓰라. 곡식이 익었도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전에는 낫으로 벼를 벴지만 요즘은 콤바인으로 벼를 벱니다. 농부는 벼가 누렇게 익어 고개를 숙여가면 논에 물을 빼고 콤바인이 들어갈 수 있도록 논바닥을 말립니다. 성경에서 추수 때는 하나님이 세상을 심판하시는 날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은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다 고 말씀합니다. 농부가 도끼질을 하여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를 베어버립니다. 예수님은 손에 키를 들고 있다고 말씀합니다. 농부의 아내가 키질을 하여 알곡은 모아 곳간(천국)에 들이시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웁니다.(지옥, 마3:10-13) 지금은 영적으로 추수 때입니다. 예수님은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고 탄식하셨습니다. 심판 날은 가까웠는데 전도자는 적다고 안타까워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일꾼을 보내달라고 요청하셨습니다.(마9:37-38) 우리는 추수할 일꾼으로 부름 받았습니다. 우리는 농부처럼 씨가 작더라도 복음의 씨를 뿌려야 합니다. 전도의 씨를 뿌려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싹이 트게 하십니다. 복음이 마음의 밭에서 자라게 하십니다. 그것도 놀랍게 자라게 하십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또 전도해서 또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게 됩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나라는 고구마 한 뿌리를 캐면 여러 뿌리가 나오듯이 연쇄적으로 확장돼 갑니다. 우리교회는 지금 겨자씨처럼 작은 교회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씨를 뿌린다면 가장 작은 겨자씨가 가장 큰 겨자초로 자라듯이 개척교회인 우리교회가 포항에서 제일가는 감리교회로 성장할 겁니다. 그날까지 저와 여러분은 땅에 씨를 뿌리는 농부가 돼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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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오경 성경이해 3
고든 웬함 지음, 박대영 옮김 / 성서유니온선교회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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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생과 평신도 리더들이 개론서로 사용하기 좋은 책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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