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와 설교 핸드북 - 2009년도 교회력에 따른
정장복 외 지음 / 예배와설교아카데미 / 2008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책장에 꽂혀있는 예배와 설교 핸드북(이하 핸드북)이 14권인 것을 보니 제가 담임 목회를 한지 어언 14년째가 된 모양입니다. 저는 핸드북을 손이 가장 편안하게 닿는 위치에 꽂아놓고 주일 예배를 준비할 때마다 참고합니다. 핸드북은 한두 해를 풍미하는 베스트셀러가 아니라 오랫동안 사랑받는 스테디셀러가 되었습니다. 올해 핸드북은 제4부 주일 낮 예배 설교지침에서 설교를 위한 조명 부분이 강화되었네요. 설교 요약이 아니라 아예 설교 문이네요. 하지만 설교학자가 쓴 설교다 보니 저의 예배 현장과는 거리가 느껴지네요. 설교는 본문은 똑같더라도 상황은 달라야 하니 당연한 거겠죠. 제3부 예배의 실제에서 세례 언약 재확인 예식이 눈에 띄네요. 로버트 웨버 박사의 글을 읽으면서 한 번 시도해 봤으면 좋겠다 고 생각했는데 핸드북에 예식 순서가 수록되어 있어 지난 주 주님의 수세 주일을 맞아 설교를 마치고 재확인하는 예식을 진행해 보았습니다. 성찬식만큼 친근하면서도 감동적이지는 않았지만 기억도 흐릿한 세례를 회상하고 재확인하는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귀로 들리는 설교도 발전시켜야 하지만 눈으로 보는 설교도 계발됐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목회를 처음 시작하는 후배에게 핸드북을 추천합니다. 여러분도 핸드북을 참고하여 예배를 집례해 보세요. 성경적이고 신학적인 예배를 드릴 수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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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 1:4-11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오늘은 주님의 수세주일입니다. 예수님이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 받은 것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예수님께 세례를 베푼 요한은 자신과 예수님과를 비교하였습니다. 요한은 7절 상반 절을 통해 “그가 전파하여 이르되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시나니”라고 말했습니다. 요한은 전파했습니다. 요한은 자신은 전령이고 그리스도는 왕이시라고 주장했습니다. 고대 근동에서는 왕이 행차하기 전에 사자(messenger)가 앞서 가서 왕이 오신다고 알리고 왕이 오실 구불구불한 길을 평평한 길로 닦았다고 합니다. 그렇듯이 요한은 오실 그리스도를 맞이하기 위해서 영적이고 도덕적인 타락상을 회개시키려고 광야에서 외쳤습니다. 그 당시 요한의 인기는 60년대 록 그룹인 비틀즈를 능가할 정도로 대단했습니다. 요한이 그리스도라고 주장한다면 유대 백성들이 신으로 떠받들 것이고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부인한다면 거짓 선지자라고 의심받을 수도 있었지만 요한은 유혹에 흔들리지 않고 자신은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전령이라고 말했습니다. 요한의 정직이 돋보입니다./ 7절 하반 절을 통해 “나는 굽혀 그의 신발 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고 말했습니다. 요한은 자신은 종이고 그리스도는 주인이시라고 고백했습니다. 그 당시 천한 종은 귀한 손님이 집에 오면 대야에 물을 담아 땀과 먼지로 얼룩진 더러운 발을 깨끗하게 닦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요한은 자신은 오실 그리스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 없다고 겸손해 하였습니다. 요한은 고귀한 제사장의 아들이었고, 예수님은 하찮은 목수의 아들이었지만 요한은 육체적인 신분에 좌우되지 않고 영적인 질서에 따라 자신은 지극히 낮추고 그리스도는 철저히 높여드렸습니다. 요한의 겸손이 감동적입니다./ 8절을 통해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베풀었거니와 그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리라.”고 말했습니다. 요한은 자신은 물세례를 베풀고 그리스도는 성령세례를 베푸신다고 구분했습니다. 그 당시 이방인이 유대인이 되려면 죄를 회개하고 물로 세례를 받았듯이 요한은 오실 그리스도를 맞이하기 위해서 죄를 회개하고 세례를 받으라고 촉구했습니다. 온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사람들은 요한에게 나아가 자기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요한이 베푼 물세례는 죄에서 떠나 하나님께로 돌아오겠다는 회개의 세례였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침례였습니다. 세례 받을 사람이 물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옛 생활은 죽어서 없어지고 물 밖으로 나오는 것은 새 생활을 시작하겠다는 상징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베푸실 성령세례는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났다는 구원의 세례였습니다. 물세례는 사람이 물속으로 들어가는 것이지만 성령세례는 성령님이 우리 속으로 들어와 우리 몸이 성전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물세례는 내가 하나님을 믿겠다는 서약이지만 성령세례는 하나님이 자녀로 인정하신다는 선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물로도 세례를 받고 성령님으로도 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물세례도 한번만 받으면 되고 성령세례도 한번만 받으면 됩니다. 성령세례는 여러 사람이 알아 볼 수 있도록 열광적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자신만이 느낄 수 있도록 잠잠하게 임하기도 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자신과 예수님을 비교하며 자신은 조연이고 예수님은 주연이라고 증언했습니다. 그리스도라고 증언했습니다.




예수님은 아무 죄가 없으셨지만 목수로서의 개인적인 일을 떠나 하나님의 구원의 메시지를 전하시기 공적인 사역을 시작하기 위해서 요한에게 회개의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이 물속으로 들어갔다 물 밖으로 나오시자 하늘이 갈라졌습니다. 이것은 예수님만 보셨을 겁니다./ 성령님이 비둘기 같은 모양으로 내려오셨습니다. 이것은 모든 사람이 보았을 겁니다./ 그리고 하늘의 갈라진 틈에서 하나님의 소리가 들렸습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예수님의 세례식에 삼위 하나님이 등장하셨습니다. 성자 하나님은 세례를 받으셨고 성령 하나님은 비둘기 모양으로 임하셨고 성부 하나님은 하늘에서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내 외아들이다.’ 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세례를 받으셔서 아들이 된 것이 아니라 영원 전부터 하나님의 아들이었다고 하나님께서 확증하셨습니다. 우리는 물세례를 통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겠다고 다짐하고, 성령세례를 통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확신하게 됩니다./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는 하나님은 예수님으로 인하여 기쁨과 즐거움을 누리셨습니다. 우리는 물세례를 통해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겠다고 다짐하고, 성령세례를 통해 하나님의 기쁨과 즐거움이 되겠다고 결심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세례자 요한의 증언을 통해 그리고 하나님의 확증을 통해 세상을 구원할 그리스도이심이 드러났습니다.




오늘 주님의 수세주일을 맞아 우리가 세례 받은 것을 재확인하는 예식을 거행하려고 합니다. 우리가 세례를 받았지만 세례 받은 감격이 흐리해졌고, 세상에서 살다 보니 알게 모르게 죄를 지어 새롭게 결단할 필요가 생겼습니다. 초대교회에서는 부활절 전야 예배 때에 세례식을 하고 회중들에게 세례수를 뿌리며 ‘여러분이 받은 세례를 기억하시오.’ 라고 선언하였다고 합니다. 최근에는 미국 감리교회에서도 세례언약 재확인 예식을 시행하고 있습니다.




예식 선언

“몸은 하나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고전12:12-13:27).




신앙 고백(모두 자리에서 일어선다.)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와 자매된 이들이여, 세례는 우리가 죄로부터 씻김을 받는 표이며, 그리스도께 접붙임 되는 표입니다. 그리스도의 탄생과 사심과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죄의 권세는 꺾이고, 하나님 나라가 우리 세상에 들어왔습니다. 우리는 세례를 받음으로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 되었고, 죄의 멍에로부터 구원함을 얻었습니다. 우리가 세례 받을 때에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을 새롭게 함으로 그 자유와 그 구속을 기념합시다. 여러분들에게 권하노니 다시 한 번 죄를 버리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신앙을 고백하며, 우리에게 세례를 베푼 이 교회의 신앙을 고백하십시오.




1. 포기의 서약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비로우신 은혜를 의지하여 죄의 길에서 돌이키고, 세상의 악과 그 권세를 버리겠습니까? 예, 버리겠습니다.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께로 돌아와 그를 주님과 구주로 모시고, 그의 은혜와 사랑을 의지하겠습니까? 예, 의지하겠습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신실한 제자가 되어 그의 말씀에 순종하며 그의 사랑을 나타내겠습니까? 예, 나타내겠습니다.




2. 신앙 고백




세례에 대한 감사기도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하시길 원합니다.

목사님과도 함께하시길 원합니다.

우리 주 하나님께 감사드립시다.




오! 하나님, 세례 받았음을 인하여 감사합니다. 우리가 그 물에 잠김으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묻혔고, 그 물로부터 일으키심을 받아 그의 부활에 동참했으며, 그 물로 말미암아 성령의 능력으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자 예수님께 기쁨으로 순종하여 믿음 안에서 그와 사귐을 기념합니다. 기도하오니 세례를 받은 모든 성도들이 영원토록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삶을 살게 하소서. 삼위일체 되신 성부, 성자, 성령께 모든 존귀와 영광을 드립니다.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양손을 펼치며)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여러분의 세례를 기억하고 감사하십시오. 아멘.




안수기도(앞으로 나와 무릎을 꿇는다.)

오! 주님, 000를 성령으로 이끌어 주십시오. 매일매일 그(그녀)에게 주님의 은혜와 은사를 더해 주십시오. 지혜와 명철의 영, 분별과 능력의 영, 지식과 주님을 경외하는 영, 주님 앞에서 기뻐하는 영을 이제부터 영원까지 내려 주십시오. 아멘.




평화의 인사

그리스도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하시길...

목사님과도 함께하시길...

(옆에 있는 성도들과 인사를 나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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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창대교회 표어


성령님으로 세례를 받으라.(행1:5)

교회색깔:보라(영광)

사명선언문 우리교회는 교육하고 선교하고 치유하는 교회입니다.(마4:23,9:35)


 

2009년 창대교회 목표


인원 : 3속 12가정 30교인

재정 : 결산 5천만 원

실천 : 153 운동 

        매일 1시간씩 기도하고 5장씩 성경읽고 매년 3명씩 전도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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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1:1-18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요한복음의 서언(Prologue)입니다. 서언에는 요한복음의 전체 주제가 압축되어 나옵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가 나옵니다. 첫째, 예수님은 말씀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알려면 말씀을 알아야 합니다. 1절 상반 절을 통해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고 말씀합니다. 말씀은 헬라어로 ‘로고스’입니다. 로고스는 사람의 이성이나 사람이 사용하는 말을 가리키는데 헬라인들은 우주를 지배하는 이성적인 원리이면서 우주를 생성한 창조적인 에너지를 가리켰습니다. 유대인들은 지혜를 의인화했는데(잠8장) 지혜와 말씀과 율법을 동일시하였습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을 로고스라고 말씀합니다. 로고스는 말씀이고 말씀은 예수님입니다. 14절을 통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되어 우리와 함께 사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동행하십니다.

둘째, 예수님은 하나님입니다. 예수님을 보는 것이 하나님을 보는 것입니다. 1절 하반 절을 통해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예수님이 곧 하나님입니다. 2절과 3절을 통해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함께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18절을 통해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나셨느니라.”고 말씀하셨고, 14장 9절 중반 절을 통해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이라고 말씀하셨고, 20장 28절을 통해 “나의 주님이시오 나의 하나님이시니 이다.”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입니다. 예수님을 보는 것이 하나님을 보는 겁니다.(주후 325년 니케아 공의회에서 아버지와 아들이 동일한 본질이라는 교리를 채택했습니다.)

셋째, 예수님은 생명입니다. 예수님을 믿어야 생명을 얻습니다. 4절 상반 절을 통해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 안에는 생명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을 통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하셨고, 5장 26절을 통해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라고 말씀하셨고, 10장 28절을 통해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셨고, 14장 6절을 통해 “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셨고, 20장 31절을 통해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영생은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 인류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넷째, 예수님은 빛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빛을 비춰주십니다. 4절 하반 절에서 5절을 통해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고 말씀하였고, 8장 12절을 통해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였고, 9장 5절을 통해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 세상의 빛이로다.”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생명을 가져다 주시는 빛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빛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세례자 요한을 보내셔서 그 빛을 증언하게 하셨습니다. 요한은 빛을 증언하는 사람이고 예수님은 참 빛입니다.(요1:9) 그러나 사람들은 사탄의 지배아래 있다 보니 그 빛을 이해하지 못하고 거부했습니다.(요1:10) 사람들은 눈이 멀어서 육체적인 맹인이 아니라 예수님을 몰라서 영적인 맹인이 되었습니다.

다섯째, 예수님은 영접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십니다. 12절을 통해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말씀합니다. 영접하는 것은 환영하는 것이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영접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데 사람의 행동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로 주어집니다. 인종적인 혈통을 통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거듭남을 통해 주어집니다. 3장 3절과 5-6절을 통해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고 말씀하셨고,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사람은 물로 한 번 태어납니다. 육체적인 탄생을 가리킵니다. 그리스도인은 성령으로 한 번 더 태어납니다. 영적인 탄생을 가리킵니다. 한 번 태어나면 두 번 죽습니다. 하나님은 히브리서 9장 27절을 통해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라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말씀합니다. 육체적으로 한번 태어나면 육체적으로 한번 죽고 영적으로 또 한 번 죽습니다. 불못에 던져집니다.(계20:14) 거기는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는 장소입니다.(계20:10) 그러나 두 번 태어나면 한번 죽습니다. 육체적으로 한번 죽습니다.

여섯째, 예수님은 사람이 되셨습니다. 성육신하셨습니다. 18절을 통해 “아버지 품속에 잇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품속에 계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식사 자리에서 주인과 가장 가까운 자리에 앉는 것을 명예롭게 여겼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가장 가까이 계셨습니다. 그러나 14절을 통해 “말씀이 육신이 되어”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떠나 사람으로 나셨습니다. 하나님은 광야에서 성막 안에 계시며 백성들과 함께 하셨듯이 예수님은 사람이 되시어 우리와 함께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자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이시기 때문에 우리의 처지를 이해하시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 주실 수 있습니다.(주후 451년 칼케돈 공의회에서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의 완전한 결합체라는 교리가 채택되었습니다.)  


일곱째, 예수님은 은혜와 진리가 충만합니다. 부족함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출애굽기 34장 6절을 통해 “여호와라, 여호와라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 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고 말씀합니다. 인자와 진실은 은혜와 진리로 번역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율법과 공의를 강조하셨고 예수님을 통해 사랑과 자비를 강조하셨습니다. 모세는 율법의 수여자였지만 예수님은 율법의 완성자이셨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율법을 계시하셨지만 이제 예수님을 통해 은혜를 전파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본성이 차가운 돌 판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을 통해 전해졌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본성을 더 잘 알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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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상 17:8-16 하나님 제일주의

여론조사 기관인 한국갤럽이 2004년 5월 13일부터 29일까지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 만 15세 이상 남녀 1,728명을 대상으로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40가지를 조사한 적이 있었습니다.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가수는 이미자, 탤런트는 최불암, 영화배우는 안성기 등등 ... 저는 그것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가장 좋아하시는 것은 무엇일까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좋아하시는 것은 십계명 중에서 제1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출20:3) 하나님은 우리가 다른 신들을 섬기지 않는 것을 가장 좋아하십니다. 하나님은 다른 신들을 섬기지 않은 사람에게는 후손 수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출20:6)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것은 무엇일까요? 십계명 중에서 제1계명을 어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다른 신들을 섬기는 것을 가장 싫어하십니다. 하나님은 다른 신들을 섬긴 사람에게는 후손 삼사 대까지 죄를 갚겠다고 경고하셨습니다.(출20:5)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것을 행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북 왕국 이스라엘의 제7대 왕 아합이었습니다. 아합 왕은 이스라엘의 북쪽에 있는 시돈 왕국과 동맹을 맺고 동맹을 공고히 하기 위하여 시돈 왕국의 공주 이세벨을 왕비로 맞이하였습니다. 정략결혼을 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은 시돈 왕국과 동맹을 맺었기 때문에 정치적으로는 전쟁이 없이 평화를 누리게 되었고 경제적으로는 교역을 통하여 번영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신앙적으로는 문제가 생겼습니다. 아합 왕은 이세벨과 결혼하자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을 섬겼습니다. 아합 왕은 이세벨을 위하여 바알 신전을 짓고 신전 안에 바알 제단을 쌓고 바알의 아내인 아세라 목상도 만들었습니다. 아합 왕은 이전의 이스라엘 왕들보다 더 심하게 다른 신들을 섬겼고 하나님을 더 진노하시게 만들었습니다.(왕상16:30-33) 

하나님은 엘리야 선지자를 아합 왕에게 보내셨습니다. “내가 섬기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 말이 없으면 수 년 동안 비도 이슬도 있지 아니하리라.”(왕상17:1) 엘리야 선지자는 아합 왕이 다른 신들을 섬겼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가뭄을 주셨다고 선언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야고보서 5장 17절을 통해 3년 6개월 동안 비가 오지 않았다고 말씀합니다. 저는 어린 시절에 가뭄을 경험해 보았습니다. 몇 달 동안 비가 오지 않자 논이 거북이 등처럼 쩍쩍 갈라졌고 밭작물이 누렇게 타들어 갔습니다. 먹을 물이 없어 소방차에서 물을 실어 오면 물지게를 지고 날랐습니다. 우리나라에 비가 오지 않는다면 농사를 지을 수 없지만 사막인 이스라엘에 비가 오지 않는다면 농사를 지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사람과 짐승이 굶어 죽게 됩니다. 이스라엘은 10월부터 3월까지는 우기라 비가 내렸고 나머지 건기에는 바다에서 올라온 습기가 이슬을 만들어냈습니다. 비가 오지 않더라도 이슬이라도 내린다면 농작물이 살아남을 수 있으나 비도 이슬도 내리지 않았습니다. 몇 달 동안 내리지 않았다면 견뎌볼 수 있으나 몇 년이라 살아남기가 힘들었습니다. 이스라엘은 황폐화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아합 왕이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겼기 때문이었습니다. 아합 왕이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는 것을 행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합 왕 시절에 바알과 아세라는 풍요를 가져다주는 신이었습니다. 그래서 아합 왕이 바알과 아세라를 섬겼습니다. 오늘날은 시간과 물질이 풍요를 가져다주는 신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시간에 쫓기고 물질에 얽매입니다. 하나님은 아합 왕이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자 가뭄을 주셨듯이 우리들이 시간과 물질을 섬긴다면 인생을 실패하게 만드십니다. 하나님이 가뭄을 내려서 아합 왕을 굴복시키셨듯이 우리들에게 사랑의 매를 드셔서 회개시키십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좋아하시는 것을 행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시돈 왕국의 사르밧 과부였습니다. 하나님은 엘리야 선지자를 그릿 시냇가로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유랑할 때 아침에는 만나를 저녁에는 메추라기를 내려주셨듯이 엘리야 선지자에게 아침과 저녁으로 까마귀들을 보내셔서 떡과 고기를 날라다 주셨습니다. 가뭄이 얼마나 극심한 지 그릿 시냇가가 마르자 하나님은 엘리야 선지자를 시돈 왕국에 있는 사르밧으로 보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야 선지자를 시돈 왕국으로 보내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시돈 왕국은 북 이스라엘을 우상 숭배로 물들게 한 이세벨 왕비의 고향이었습니다.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속에 들어가야 한다는 속담처럼 하나님은 우상을 없애기 위해서 엘리야 선지자를 우상 숭배의 본고장으로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르밧에 사는 과부가 엘리야 선지자에게 음식을 제공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야 선지자를 과부에게 보내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당시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는 가장 가난한 계층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가난한 과부에게 복을 주시려고 엘리야 선지자를 보내셨습니다. 과부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복을 받을 수도 있었고 받지 않을 수도 있었습니다.

엘리야 선지자가 사르밧에 도착해 보니 한 과부가 나뭇가지를 줍고 있었습니다. 과부는 가난에 쪄들어 몰골이 형편없었습니다. 얼굴은 새까맣게 탔고 의복은 갈기갈기 헤어졌습니다. 엘리야 선지자가 과부를 불렀습니다. “그릇에 물을 조금 가져다가 내가 마시게 하라.”(왕상17:10) 엘리야 선지자는 물을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과부는 아무 말 없이 물을 뜨러갔습니다. 가뭄이 심하게 들어 물도 귀했으나 과부는 형편은 어려워도 인심은 후했습니다. 엘리야 선지자가 한 술 더 떴습니다. “네 손의 떡 한 조각을 내게로 가져오라.”(왕상17:11) 엘리야 선지자는 밥을 가져오라고 요구하였습니다. 과부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한숨을 쉬었습니다.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가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떡이 없고 다만 통에 가루 한 움큼과 병에 기름 조금 뿐이라. 내가 나뭇가지 둘을 주워 다가 나와 내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들어 먹고 그 후에는 죽으리라.”(왕상17:12) 과부는 마지막 음식을 만들어 먹으려 한다고 대답하였습니다. 엘리야 선지자가 대담하게 요구하였습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가서 네 말대로 하려니와 먼저 그것으로 나를 위하여 작은 떡 한 개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오고 그 후에 너와 네 아들을 위하여 만들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나 여호와가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리라.”(왕상17:14) 엘리야 선지자는 마지막 식사를 자신에게 먼저 가져오고 과부와 아들은 나중에 먹으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 가뭄이 끝날 때가지 밀가루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않고 올리브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않는다고 약속하였습니다. 엘리야 선지자는 벼룩의 간을 먹는다 는 속담처럼 가난한 과부의 마지막 식사를 요구하였습니다. 과부는 마지막 식사를 자신과 아들이 먹을 것이냐 하나님의 선지자를 줄 것이냐 망설였습니다. 과부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마지막 식사를 엘리야 선지자에게 주었습니다. 과부는 밀가루를 반죽하여 프라이팬에 기름을 붓고 나뭇가지를 지펴서 부침개같이 얇고 둥근 빵을 만들어 엘리야를 대접하였습니다. 엘리야는 ‘여호와는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과부는 마지막 식사를 하나님께 대접하였습니다. 그러자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처럼 밀가루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않았고 올리브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가난한 과부에게 있어 마지막 음식인 가루와 기름은 가장 귀중했습니다. 과부는 가장 귀중한 것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하나님을 제일로 여겼습니다. 우리에게 있어 시간과 물질이 가장 귀중합니다. 우리가 시간이 가장 귀중할 때 너무 바빠서 주일을 지킬 수 없는 상황에서도 주일을 거룩하게 지킨다면 하나님께서 주일에 복을 주시고 거룩하게 만드십니다. 우리가 물질이 가장 귀중할 때 너무 쪼들려서 십일조를 드릴 수 없는 상황에서도 십일조를 구별하여 드린다면 하나님께서 하늘 문을 열고서 쌓을 곳이 없도록 복을 부어 주십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연초가 되면 덕담을 나눕니다. 가장 흔하게 사용하는 인사가 ‘부자 되세요.’이고 새해 소원도 돈을 많이 버는 겁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황금만능주의에 빠졌습니다. 그러나 교인들은 하나님 제일주의에 빠져야 합니다. 하나님을 인생의 최우선 순위로 둬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제일로 여겨주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내가 내 인생을 살아보려면 고단하기 짝이 없지만 하나님께서 내 인생을 살아주시면 모든 일이 수월해 집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하나님께 맡겨보십시오. 자유 해 질 겁니다. 아합 왕을 보십시오. 하나님을 나중으로 밀쳐놓았더니 가뭄을 만나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사르밧 과부를 보십시오. 하나님께 우선순위를 뒀더니 기척을 체험하지 않았습니까? 새해에는 우리 교인들도 하나님을 제일로 여겨 하나님의 놀라운 복을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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