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 2:1-13(4)  성령님이 임하시니

오늘은 성령강림주일입니다. 성령님의 강림을 기념하는 주일이죠. 예수님은 승천하시면서 사도들에게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1:8)”고 당부하셨습니다. 사도들은 성령님이 임하셔야 권능을 받고, 권능을 받아야 예수님의 증인이 될 수 있었습니다. 사도들은 성령님을 기다렸습니다. 드디어 성령님이 임하셨습니다.

1) 성령님은 언제 임하셨을까요? 오순절에 임하셨습니다.(1절) 우리나라는 민족의 명절이 설날과 추석입니다. 이스라엘은 3 대 절기인 무교절과 칠칠절(맥추절, 오순절)과 수장절(장막절, 초막절)이 있었습니다. 오순절은 무교절의 전날인 유월절로부터 50일째 되는 날이었습니다. 절기가 되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지방에 사는 시골 사람들도, 외국에 사는 해외 동포들도 예루살렘으로 몰려들었습니다. 예루살렘은 포화상태가 되었죠.

2) 성령님은 어디에 임하셨을까요? 1절과 2절을 보면 장소를 가리키는 단어가 두 개 나옵니다. 1절을 보면 ‘한 곳’이, 2절을 보면 ‘온 집’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한 곳과 온 집은 같은 장소였습니다. 거기가 어디일까요? 1장 13절을 보면 사도들이 유하는 다락방이었습니다. 이층 방이었습니다. 우리 교회도 이층에 있죠. 이 집의 주인은 사도행전 12장 12절을 보면 마리아였습니다. 마리아의 아들은 마가였죠. 사람들은 마가의 다락방에 성령님이 임하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3) 성령님은 누구에게 임하셨을까요? 그들에게 임하셨습니다.(1,2절) 그들은 사도행전 1장 13-15절을 보면 11 사도들과 여자들과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님의 아우들을 포함하여 120 명의 교인들에게 임하셨습니다. 3절을 보면 성령님은 각 사람에게 임하셨습니다. 구약에서는 성령님이 특별한 사람들에게 임하셨는데(민11:26-29,삼상10:6-12), 신약에서는 모든 사람들에게 임하셨습니다. 성령님은 우리에게도 임하십니다.

4) 그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요? 사도행전 1장 14절을 보면 마음을 같이 하여 오로지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승천하신 날부터 기도회를 시작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유월절에 돌아가셨고 사흘 만에 부활하셔서 40일 동안 이 땅에 계셨습니다. 성령님은 예수님이 돌아가신지 50일 만에 임하셨기 때문에 그들은 40일 속에 사흘을 빼면 일주일이 되고 사흘을 포함하면 열흘이 됩니다. 그들은 일주일 또는 열흘 동안 마음을 모아 기도하였습니다. 7과 10은 거룩, 완전, 완성을 상징하는 숫자입니다. 우리도 마음을 모아 기도하면 성령님이 임하십니다.

5) 성령님은 어떻게 임하셨을까요? (1) 2절을 보면 성령님이 임하시는 소리가 귀로도 들렸습니다.(청각) 갑자기 하늘에서 세찬 바람이 부는 듯 한 소리가 들려와 집(방)을 가득 채웠습니다. (그리스어로 성령님(프뉴마)과 바람(프노에)은 발음과 철자가 비슷했습니다. 바람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했습니다.) (2) 3절을 보면 성령님이 임하시는 모습이 눈으로도 보였습니다.(시각) 혀 같은 것들이 나타나 불길처럼 갈라지며 그들에게 임하였습니다. 불도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했습니다.   

6) 성령님은 왜 임하셨을까요? 예수님을 증언하라고 임하셨습니다. 우리에게도 성령님이 임하셔야 권능을 받고 권능을 받아야 예수님의 증인이 될 수 있습니다.

7) 성령님이 임하시자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요? 4절을 보면 그들은 성령님의 충만함을 받았습니다. 성령 충만과 성령 세례는 다릅니다. 성령 세례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받아들이는 겁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태어나는 순간이죠. 성령 충만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가득 차는 겁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교제하는 거죠. 우리는 성령 세례는 딱 한번 받으면 되지만(일회적) 성령 충만은 날마다 받아야 합니다.(지속적) 그들은 성령 세례와 성령 충만을 동시에 받았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성령님이 시키는 대로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들은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12장에서 14장까지 말씀했던 무아지경에 말하는 방언이 아니라 외국인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외국어로 말하였습니다.) 

8) 사람들의 반응은 어땠을까요? 그들이 외국어로 말하는 동안 예루살렘에는 오순절을 지키러 온 해외 동포들이 머물고 있었습니다. 해외 동포들의 귀에 자기가 사는 나라 말이 들렸습니다. 그리스어로도 들렸고 이집트어로도 들렸습니다. 해외 동포들은 무슨 일이 벌어졌나 싶어 말소리가 들리는 장소로 몰려갔습니다. 그들이 외국어로 하나님의 큰일을 말하고 있었습니다. 해외 동포들은 이 광경을 보고 놀랐습니다. (1) 이 광경을 보고 마음의 문이 반쯤 열린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무식한 갈릴리 사람들이 외국어로 하나님의 큰일을 말하자 놀라면서 신기해하였습니다. (2) 이 광경을 보고 도 마음의 문이 굳게 닫힌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무식한 갈릴리 사람들이 술에 취해서 외국어를 지껄인다고 빈정거렸습니다.

9)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도 사도들처럼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해야 합니다. 사도들이 모든 걱정을 뒤로하고 기도한 것처럼 우리도 세상 걱정은 십자가 아래 내려놓고 기도에 몰입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때가 되면 성령님이 임하십니다.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한 교인들은 성령님으로 세례를 받고, 신앙이 시들어버린 교인들은 성령님으로 충만하게 됩니다. 성령님을 체험하면 교회를 향하는 발걸음이 가벼워지고, 성령님의 능력을 받으면 복음을 전하고픈 열망이 생깁니다. 사도들이 오순절에 성령님을 경험하고 교회를 시작한 것처럼 우리도 성령강림주일에 성령님을 체험하고 교회를 세워나갔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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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일 4:7-12 5가지 사랑의 언어

미국의 저명한 상담심리학자인 게리 채프먼 박사는 결혼과 가정에 관하여 30년 동안 상담하면서 5가지 사랑의 언어를 발견하였습니다. 사랑의 언어가 다양하다 보니 내가 기대하는 사랑의 언어와 상대방이 표현하는 사랑의 언어가 달랐습니다. 내가 상대방을 사랑하더라도 내가 표현하는 사랑의 언어가 상대방이 기대하는 사랑의 언어와 다르면 상대방은 나의 사랑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사랑의 엇박자가 나다보면 갈등으로 비화되기도 합니다. 저는 우리 교인들이 사랑의 언어를 이해하고 상대방에게 맞는 사랑의 언어로 표현하기를 바라며 오늘 말씀을 준비하였습니다.

첫 번째 사랑의 언어는 ‘인정하는 말’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인정하는 말을 들었을 때 사랑을 받고 있다고 느낍니다. 예를 들어 “참 잘 했어요.” “옷이 잘 어울리네요.” “음식 맛이 너무 좋아요.” “도와줘서 고마워요.” 인정하는 말은 그 사람의 행동이나 외모나 성격을 칭찬하는 겁니다. 인정하는 말을 사랑의 언어로 사용하는 사람들은 따뜻한 말 한마디를 들으면  행복해 합니다. 예수님도 인정하는 말을 사용하셨습니다. 마가복음 5장 34절을 통해 ‘혈루증-하혈병-생리불순’을 앓는 여인에게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 지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부정한 여인을 딸이라고 인정해 주었고, 옷깃을 만진 행동을 믿음이라고 칭찬해 주었고, 12년 동안 고통 받던 여인에게 건강하게 살라고 축복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인정하는 말을 듣고 여인은 육신의 질병을 고쳤고 마음의 상처도 고쳤습니다. 우리 속담에도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고 하잖습니까. 우리도 상대방에게 핀잔하는 말 보다는 인정하는 말을 해야 하겠습니다.

두 번째 사랑의 언어는 ‘친밀한 시간’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친밀한 시간을 가질 때 사랑을 받고 있다고 느낍니다. 예를 들어 어떤 아이는 아빠가 치킨을 사줄 때 보다 함께 놀 때에 사랑을 받고 있다고 느낍니다. 이런 아이에게는 용돈을 주기보다는 축구공을 가지고 운동장으로 가는 것이 낫습니다. 어떤 아내는 남편이 빨래를 해줄 때 보다는 차를 마시면서 이야기를 나눌 때에 사랑을 받고 있다고 느낍니다. 이런 아내에게는 설거지를 거들어주기 보다는 클래식을 켜놓고 카푸치노를 마시는 것이 효과적입니다. 친밀한 시간은 다른 데 신경 쓰지 않고 상대방에게 집중하는 겁니다. 친밀한 시간을 사랑의 언어로 사용하는 사람들은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으로 행복해 합니다. 예수님도 친밀한 시간을 중요시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0장 41-42절을 통해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이 갑자기 방문하시자 주방에서 음식을 준비하였습니다. 봉사에 우선순위를 두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말씀을 들었습니다. 친밀한 시간에 우선순위를 두었습니다. 예수님은 음식 준비에 바쁜 마르다를 이해하셨지만 말씀을 들으려는 마리아를 두둔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기쁘게 하는 봉사도 중요하지만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친밀한 시간은 더 중요하다고 알려주셨습니다.

세 번째 사랑의 언어는 ‘선물’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는 마음을 선물로 담아줍니다. 선물을 사랑의 언어로 사용하는 사람들은 선물의 값어치가 아니라 선물 자체에 의미를 둡니다. 선물을 사랑의 언어로 사용하는 사람들이 값싼 선물을 주더라도 기쁘게 받으십시오. 그 사람은 선물을 주면서 사랑도 주기 때문입니다. 만약 값싼 선물이라고 인상을 찌푸린다면 그 사람은 상처를 받게 됩니다. 우리 여호수아는 지금 부모님이 나를 사랑한다면 휴대폰을 사주 세요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도 선물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1장 11-13절을 통해 “너희 중에 아버지 된 자로서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알을 달라 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아무리 악한 아버지라도 아들이 생선을 달라고 하면 생선이 없다고 물뱀을 주지 않고, 아들이 계란을 달라고 하면 계란이 없다고 독침이 있는 전갈을 주지 않듯이 하나님께서도 우리가 달라고 구하면 좋은 선물을 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가장 큰 선물은 성령님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현세적인 선물보다는 성령님을 선물로 달라고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의 마음에 들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령님도 주시고 물질적인 선물도 주십니다.

네 번째 사랑의 언어는 ‘봉사’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는 마음을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표현합니다. 어떤 아내들은 남편들이 사랑한다고 말하거나 롯데 백화점 상품권을 선물하기보다 설거지를 해주거나 방 청소를 해주기를 기대합니다. 어떤 남편들은 아내들이 연봉을 많이 받는다고 자랑하기보다 정성이 담긴 아침식사를 차려주기를 기대합니다. 서양속담에 “말보다 행동이 훨씬 더 웅변적이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마음을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표현해 보십시오. 예수님도 봉사의 중요성을 언급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0장 36-37절을 통해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사람이 강도를 만나 짐을 뺏기고 죽을 정도로 맞았을 때 제사장과 레위인은 그 사람을 피해갔지만, 사마리아인은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그의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천으로 상처를 싸매고 짐승에 태워서 주막으로 데려가 돌보아 주고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주고 그 사람을 돌봐 달라고 부탁하고 비용이 더 들면 돌아올 때에 갚아주겠다고 약속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이 존경하던 종교지도자들은 강도만난 사람을 외면했지만 유대인들이 멸시하던 사마리아인은 강도만난 사람을 도와주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인이 강도 만난 사람에게 헌신했듯이 우리도 어려운 사람들에게 사랑을 베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섯 번째 사랑의 언어는 ‘신체적 접촉’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스킨십을 좋아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값비싼 물건을 주었을 때보다 상대방의 체온을 느꼈을 때 사랑을 받고 있다고 느낍니다. 어린이들은 부모님의 따뜻한 품안에서 반듯하게 자랍니다. 청소년들은 부모님의 손길을 피하면서도 그리워합니다. 청년들은 몸을 부대끼면서 우정을 쌓아갑니다. 부부들은 성관계를 통하여 ‘남’에서 ‘님’으로 발전합니다. 예수님도 신체적인 접촉을 가지셨습니다. 마태복음 8장 3절을 통해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즉시 그의 나병이 깨끗하여진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나병에 걸려 옷을 찢고 머리를 풀고 다른 사람들과 접촉을 피하기 위해서 윗입술을 가리고 부정하다, 부정하다고 외치는 나병환자에게 손을 대시고 병이 낫기를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으로도 병을 고치셨고 안수하셔서도 병을 고치셨습니다. 신체적인 접촉은 사랑을 표현하는 중요한 통로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떤 사랑의 언어를 사용하고 계시고 어떤 사랑의 언어를 기대하고 계십니까? 내가 느끼지 못해도 상대방은 사랑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왕이면 상대방이 느끼는 사랑의 언어를 사용해 보십시오.

그러면 우리가 왜 다른 사람들을 사랑해야 할까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착해서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악해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죄를 저질러 하나님과 우리 사이가 갈라졌을 때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셔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회복하는 화목제물이 되게 하셨습니다.(요일4:10,2:2) 하나님이 예수님을 죽여서까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합니다.(요일4:11)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집니다.(요일4:12) 우리 서로 사랑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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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을 살리는 설교
유진 피터슨.마르바 던 외 지음, 이승진 옮김 / 좋은씨앗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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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문학상 수상작을 즐겨 읽는다. 심사평을 읽다보면 ‘이전 작품에 비해 그다지 수준이 높지 못하다.’는 평도 실린다. 이런 작품이 수상작으로 선정되지 못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나는 이승진 교수가 번역한 책은 대부분 읽었다. 이번 책은 이전에 번역한 작품에 비해 개성이 없다. 다른 책에서 빌려온 글이 많아 아쉽고, 영혼을 살리기에는 힘과 기술이 약하다. 이 정도의 책을 이승진 교수가 번역했다니 조금 의아하다.

이 책은, 예수님이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는 찍어 내버리라.(마5:29-30)’고 과장법을 사용하신 것처럼, 부제는 ‘본질과 현장을 모두 만족시키는 설교준비를 위하여’ 이고, 뒤표지에는 ‘이 책은 설교학 서적 12권 이상의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과장 광고를 한다. 내가 보기에 다른 설교학 서적 한 권보다 넓이가 좁고(다양하게 다루지 못하고), 깊이다 얕다(심오하지 못하다).

그나마, 빌리 그래함이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열린 순회전도자들을 위한 세계대회(1983년)에서 강연한 “복음전도자와 설교”에서 복음전파에 관한 8가지 원칙은 따분한 나를 깨우는 천둥소리였고, 맥시 더남이 [목회에서의 위기 극복(2002)]이란 책에 “당신의 목숨을 잃지 않고 위기를 극복하기”라고 기고한 글에서 목회 사역에 활력을 유지하고 성공적으로 마감할 수 있는 비결은 자주 들으면서도 잊고 지낸 내용을 상기시켜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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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14:15-21 너희와 함께 하리니

저는 지난해 유럽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로마교황청 안에 있는 시스티나 성당에 들어가 보니 천장과 벽면에 그림이 빽빽하게 그려져 있었습니다. 천장에는 미켈란젤로가 교황 율리우스 2세의 부탁을 받아 4년 동안 창세기에 나오는 천지 창조부터 노아의 방주까지 9가지 장면을 그린 그림이 그려져 있었습니다. 그 중 가장 유명한 그림이 4번째 그림인 [아담의 창조]입니다. 벌거벗은 아담이 비스듬히 기대고 왼손을 구부정하게 뻗칩니다. 흰 수염을 흩날리는 하나님이 천사들과 함께 나타나 오른손을 힘차게 뻗칩니다. 하나님의 손가락이 아담의 손가락에 닿기도 전에 깊은 잠에서 깨어난 아담이 하나님의 자애로운 얼굴을 쳐다봅니다. 미켈란젤로는 하나님이 손끝으로 아담에게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는 순간을 포착했습니다. 그 생명의 기운이 성령님입니다.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아담을 만들어 생명의 기운인 성령님을 불어 넣으시자 사람이 생명체가 된 것처럼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님을 믿은 우리에게 생명의 기운인 성령님이 임하셔야 생명력 있는 교인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은 성령님에 대해 살펴보려고 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기 전날 밤에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드시면서 성령님에 대하여 4가지를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4장 16절을 통해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성령님을 ‘보혜사’라고 표현하셨습니다. 보혜사는 헬라어로는 ‘파라클레토스’입니다. 영어성경 NASB는 Helper 조력자로, NIV는 Counselor 상담자로, KJV는 Comforter 위로자로, NRSV Advocate 대변자로 번역했습니다. 한글성경 새번역은 변호해주시는 분 또는 도와주시는 분으로, 공동번역은 협조자로 번역했습니다. 성령님은 우리를 도와주시고, 우리와 상담해 주시고, 우리를 위로해 주시고, 우리를 대변해 주십니다. 성령님은 우리를 변호해 주시고 도와주십니다. 예수님은 세상을 떠나시지만 제자들에게 성령님을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성령님은 예수님의 대리자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대리자인 것처럼 성령님은 예수님을 대신해서 제자들과 함께 하실 겁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말씀은 마태복음의 핵심주제입니다. 하나님은 마태복음 1장 23절을 통해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려고 예수님을 보내주셨습니다. 마태복음 28장 20절 하반 절을 통해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승천하신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려고 성령님을 보내주셨습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동반자이십니다. 제자들과 함께한 성령님은 우리와도 함께 하실 겁니다./

14장 26절을 통해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을 떠나시지만 성령님이 제자들을 가르칠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성령님은 제자들을 가르치시고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나게 해 주실 겁니다. 제자들은 성령님의 도움으로 성경을 기록하였습니다. 신학자들은 교인들이 성경을 이해할 수 있도록 성령님이 도와주신다고 주장합니다. 성령님이 도와주시는 작용을 조명이라고 합니다. 불을 켜야 방안이 환해지듯이 성령님이 조명해 주셔야 우리가 성경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성령님은 교사이십니다. 제자들을 가르친 성령님은 우리도 가르치실 겁니다./

15장 26절을 통해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을 떠나시지만 성령님이 예수님을 메시야라고 증언하실 거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강에 돌을 던지면 물의 파장이 점점 퍼져나가듯이 제자들은 지금 있는 자리부터 시작해서 지구촌 전체까지 예수님은 그리스도라고 전파했습니다. 성령님은 사람들의 생각과 마음을 준비시키시고, 복음을 이해시키시고, 복음을 받아들이도록 증언하십니다. 사람이 복음의 씨를 뿌리지만 복음의 싹이 트게 하시는 분은 성령님이십니다. 성령님은 증인이십니다. 제자들에게 증언해주신 성령님은 우리에게도 증언해 주실 겁니다./

16장 8절-11절을 통해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을 책망하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을 책망하시리라는 새번역은 ‘세상의 잘못을 깨우치실 것이다’고, 공동번역은 ‘세상의 그릇된 생각을 꾸짖어 바로잡아 주실 것이다’고 번역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을 떠나시지만 성령님은 믿지 않는 세상을 심판하실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성령님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 죄(요3:18)라는 것을 깨우치실 겁니다. 성령님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맺기 위하여 예수님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우치실 겁니다. 성령님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하여 사탄이 이미 심판과 정죄를 받았다는 것을 깨우치실 겁니다. 성령님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 죄라는 것과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맺기 위해 예수님이 필요하다는 것과 사탄이 이미 심판과 정죄를 받았다는 것을 깨우치실 겁니다. 성령님은 우리가 회개할 수 있도록 깨우치실 겁니다. 성령님은 검사이십니다. 성령님이 사람들을 깨우치시듯이 우리들도 깨우치실 겁니다.

이처럼 성령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를 가르치시고, 우리에게 증언하시고, 우리를 깨우치실 겁니다. 제자 신학대학을 다닐 때 신약 교수님이 성령님에 대해 간단하면서도 명료하게 설명한 기억이 납니다. 성경은 성령님을 보혜사(保惠師)라고 합니다. 보혜사는 지킬 보에, 은혜 혜에, 스승 사입니다. 보, 성령님은 우리를 지키시는 분입니다. 성령님은 우리와 영원토록 함께 하면서 지켜주십니다. 혜, 성령님은 은혜를 베푸시는 분입니다. 성령님은 우리가 부족해도 나무라지 않으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사, 성령님은 우리를 가르치시는 분입니다. 성령님은 우리를 가르치시고 잊어 버려도 기억나게 하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시지만 지금 성령님을 통해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이 자리에도 성령님이 함께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돌보라고 어머니를 허락하셨듯이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하라고 성령님을 보내주셨습니다. 오늘도 성령님과 동행하는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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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처럼 설교하라
제임스 W. 톰슨 지음, 이우제 옮김 / 크리스챤출판사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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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의 관광도시 바르셀로나에는 프랑스의 건축가 쟝 누벨이 설계한 지상 34층, 지하 4층, 높이 144.4미터의 타워가 있다. 이 건물은 4만 개의 붉은 색과 푸른색과 오렌지 색  유리로 만들어져 보는 각도와 거리에 따라 색깔이 달라진다고 한다. 이 건물이 카멜레온처럼 색깔이 달라지듯이 사도 바울도 보는 각도에 따라 정체성이 달라진다. 어떤 사람은 그가 3차례나 세계를 여행하면서 복음을 전했다고 하여 선교사라고 부른다. 또 어떤 사람은 그가 로마서와 같은 신학적인 주제를 담은 책을 저술했다고 하여 신학자라고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그러나 저자는 그의 이름으로 기록된 편지는 그의 입으로 선포됐던 설교였다고 주장한다.

저자는 바울의 설교는 개종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한 복음전도 설교였으며, 새로운 개종자들에게 파라클레시스(권면)를 통하여 공동체를 형성하기 위한 목회 설교였다고 주장한다. 바울의 설교에는 케리그마(Kerygma)와 디다케(didache)가 포함되어 있었다. 저자는 사도 바울은 이교 문화에 점령당했던 전 기독교 사회(pre-Christian society)에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전하여 개종을 촉구했듯이, 다원주의에 물들어 버린 후 기독교 사회(post-Christian society)에 사는 설교자들도 예수님의 구원 사건을 다시 전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저자는 전통적인 설교학의 대안으로 등장한 신 설교학은 공동체를 형성하는데 무능하고 목회적인 돌봄을 제공하는데 미약하지만 바울은 전도와 양육을 효과적으로 수행했다고 평가한다.

저자는 신약신학 교수답게 본문을 세밀히 연구하여, 바울 설교의 3가지 특징을 논한다. 그의 설교는 고대 수사학에 영향을 받았지만 재판관의 모임이나 자유시민의 모임이 아닌 기독교 공동체에서 선포되었기 때문에 교회 수사학(church rhetoric)이라고 인용한다. 그의 설교는 이성적인 방법으로 설득하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권위에 사로잡혀 선포하기 때문에 구약시대 예언자와 유사하다고 설명한다. 프레드 크레독은 설교자는 권위가 없어야 한다고 말했지만 바울은 하나님의 대사(ambassador)였고 설교자는 하나님이 주신 권위를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그의 설교는 순간적으로 감흥을 일으키기도 하지만 지속적으로 공동체에게 행동의 변화를 호소한다. 그는 믿음의 응답으로서 복음에 합당한 생활을 요구한다.

저자는 바울의 설교가 언제나 교회론 적이었다고 논증한다. 그의 복음전도 설교가 기독교 공동체를 건설하고 그의 목회 설교가 교회의 변화를 추구했듯이 설교의 목적은 개인의 변화와 아울러 공동체의 변화에 있다고 역설한다. 그러나 우리시대는 어떤가? 기독교의 침체와 맞물려 복음전도를 하는 야전사령관은 감소하고 신앙성장을 가르치는 교육사령관은 증가하는 추세다. 저자는 복음전도 설교는 목회 설교로 귀결돼야 하듯이 한국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비교인들에게 전하여 회심하게 하고 또한 교인들에게도 십자가와 부활을 상기시켜 신앙을 성장시켜야 한다고 조언한다. 그런 면에서 바울은 아버지였고(살전2:11-12) 어머니였으며(갈4:19), 농부였고(고전3:5-9a) 건축가였다(고전3:9b-15). 바울을 통해 당신도 두 날개로 힘차게 날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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