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례전 - 하나님의 자기 주심의 선물
제임스 화이트 지음, 김운용 옮김 / 예배와설교아카데미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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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성례전은 하나님께서 과거의 사건을 기억하기 위해 주시는 은혜의 수단(means of grace)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자기 주심(God's self-giving)의 표현이라고 단언한다. 하나님의 자기 주심은 사람들이 볼 수 있는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난 사건이다. 그 분이 바로 나사렛 예수님이시다. 예수님은 가장 최초의 성례전이시다.(에드워드 쉴레벡) 하나님의 자기 주심은 두 가지 수단을 통해서 표출된다. 그것은 말과 행동이다.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 자기 주심을 들을 수 있게 하시고 성례전을 통해 자기 주심을 들을 수 있고 볼 수 있게 하신다. 우리는 언어적 차원에 의해 하나님의 이름으로 서로에게 말하고 행동적 차원에 의해 하나님의 이름으로 서로를 어루만진다. 성례전은 말씀과 행동으로 표현된다. 개신교는 세례와 성만찬을 성례전으로 간주한다.

저자는 세례는 너무 중요하기 때문에 자신이나 부모가 적절한 면담과 교육을 받은 후에 시행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초대교회는 세례준비 기간이 3년 이상이었다고 한다. 유아세례는 부모의 신실성이 요구된다. 신중을 기해야 한다. 세례는 일회적은 사건이 아니라 일생을 통하여 갱신되어야 하는 중요한 사건이다. 강단에 세례반이나 세례조를 비치하여 기억을 회상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된다. 세례는 언제나 예배 공동체 가운데서 공적인 사건으로 주어져야 한다. 세례는 특별한 절기에 주어져야 효과적이다. 초대교회는 사순절 기간 동안 세례 교육을 시켜 부활 주일에 세례를 주었다.[예배의 역사] 세례의 상징가치를 극대화하기 위해서 작은 세례기보다 직경 60cm 이상 되는 세례반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어쩌면 약식 세례보다는 침례가 상징 가치가 높다.

저자는 성만찬이 너무 간헐적으로 시행되고 있다고 안타까워한다. 성만찬이 매주 중심적인 예식으로 시행되는 것이 예배 개혁의 우선순위라고 말한다. 성만찬은 말씀 봉독과 설교와 함께 주어져야 한다. 말씀과 성만찬이 결합해야 분명한 효과가 발생한다. 성만찬은 최고의 상징가치를 갖도록 집례 해야 한다. 성만찬 기도는 정해진 사람에 의해 드려져야 한다. 성만찬은 세례 받은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베풀어져야 한다. 세례를 받지 않고 성만찬에 참여하는 것은 결혼을 하지 않고 성관계를 갖는 것보다 부적절하다고 말한다. 성만찬 상은 회중들이 바라볼 수 있는 위치에 놓여야 한다. 떡과 포도주는 위조품이 아니라 실제 성물이어야 한다. 성만찬은 공동의 잔과 한 덩어리의 빵을 사용해야 의미가 있다. 공동의 잔을 돌려고 마시고 그 부분을 씻고 한 덩어리 빵을 떼는 의식이 회복되길 소망한다. 성만찬은 회중들이 성만찬 상으로 나오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한다.

헨리 나우웬은 성체 성사가 예수님의 삶을 예시 한다고 말한다.[헨리 나우웬, 그의 살 그의 꿈] 내가 보기에 성만찬의 4중 행동은 예수님의 삶과 일치한다. 성만찬에서 떡을 취하듯이(taking) 예수님은 하늘 보좌를 떠나 이 땅으로 오셨다. 성만찬에서 떡을 축사하듯이(blessing) 하나님은 세례를 받으시고 나오시는 예수님을 위해 축복기도를 하셨다. 성만찬에서 떡을 떼듯이(breaking)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자신의 피를 흘리셨다. 성만찬에서 떡을 나누어 주듯이(giving) 예수님은 자신의 희생을 통해 우리에게 새 생명을 선사하셨다. 벤허를 보면 예수님의 고귀한 피가 빗물에 씻겨 내려와 어머니와 여동생을 적셨을 때 나병이 낫던 것처럼 예수님의 피와 살은 우리의 신분을 마귀의 도구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바꾸었다. 저자의 바람처럼 설교와 성만찬이 매주 시행되어 하나님의 자기 주심을 귀로도 듣고 눈으로 보는 날이 속히 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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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사람들은 사람은 한번 태어나서 한번 죽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현세적인 만족을 추구합니다. 인생을 즐기다 가려고 하죠. 그러나 성경은 사람은 한번 태어나서 두 번 죽는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히브리서 9장 27절을 통해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말씀합니다. 성경은 사람이 육체적으로 한번 태어나서 육체적으로 한번 죽고 유황불이 활활 타오르는 불못에 던져져서 영적으로 또 한 번 죽게 된다고 말씀합니다.(계20:14) 불못은 죽지도 않으면서 영원토록 밤낮으로 괴로움을 당하는 곳입니다.(계20:10) 성경은 두 번째 죽음을 피하기 위해서 두 번(거듭) 태어나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요한복음 3장 5절을 통해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고 말씀합니다. 물은 육체적인 출생을 성령은 영적인 출생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면 거듭 태어나게 되는 겁니다. 거듭난 사람은 육체적으로 한 번 죽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시면 한 번 태어난 사람은 불못에 던져져서 두 번째 죽음을 맞이하지만 두 번 태어난 사람은 깨어나게 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예수님을 믿다가 죽은 사람을 잠을 잔다고 표현합니다.(마9:24,막 5:39,요11:11-14,행 7:60,고전 15:51-52,살전4:13-17,벧후 3:4) 예수님은 나사로를 자다가 깨어난 사람의 시범 케이스로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이스라엘의 성인 남자들은 절기를 지키기 위해서 매 년 세 차례씩 예루살렘을 방문했습니다.(출23:14) 예수님도 12살 때부터 예루살렘을 방문하셨습니다.(눅2:42)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가실 때마다 동쪽으로 3Km 떨어진 베다니 마을에 들르셨습니다. 베다니 마을에는 언니인 마르다, 여동생인 마리아, 그리고 나사로 이렇게 삼남매가 살고 있었습니다. 학자들은 ‘오라버니’인 나사로가 오빠도 되고 남동생도 된다고 말합니다. 정황상 남동생으로 사료됩니다만 우리말 성경에 오라버니라고 나왔으니 오빠라고 여기겠습니다. 예수님이 방문하시면 천한 종이 대야에 물을 담아 발을 닦아주었습니다. 오빠인 나사로는 예수님의 머리에 감람유를 붓고 볼에 입을 맞추고 포옹을 하고 귀한 손님으로 환영하였습니다. 언니인 마르다는 음식을 장만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빴습니다. 여동생인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정신을 빼놓고 말씀을 들었습니다. 삼남매는 예수님을 존경하였고 예수님도 삼남매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오빠인 나사로가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오빠가 병들었으니 고쳐달라고 예수님께 사람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사로의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병이라며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가지 않으셨습니다. 나사로는 그만 죽고 말았습니다. 이스라엘은 더운 나라라 시신이 빨리 부패하기 때문에 당일 장을 치렀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산 중턱에 있는 석회암 바위를 파서 동굴 무덤을 만들었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시신을 물로 깨끗이 씻기고 냄새가 나지 않도록 향유를 바르고 천으로 둘둘 감싸고 세마포 수의를 입혔습니다. 동굴 무덤은 맷돌같이 둥근 돌로 굴려서 막고 시루떡을 찔 때 김이 새지 않도록 밀가루로 붙이듯이 점토로 동굴 틈새를 봉인하였습니다. 일 년이 지나 살이 썩으면 무덤 문을 열고 들어가 뼈를 추려서 유골함에 넣고 무덤 벽에 있는 납골당에 넣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일주일 동안 조문을 받았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문상하는 것을 마땅하게 여겼기 때문에 상가는 조문객들로 북적였고 큰소리로 우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기 때문에 일당을 받고 곡하는 사람들로 시끄러웠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째 되는 날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오셨습니다.(요11:17) 이스라엘 사람들은 사람이 죽으면 영혼이 삼일 동안 무덤 주위에 머문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나사로는 나흘이 지났기 때문에 완전히 죽었다고 생각되었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그동안 의지하며 살던 오빠가 갑자기 죽자 너무 운 나머지 눈이 퉁퉁 부어올랐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예수님이 조문을 오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언니인 마르다가 예수님을 영접하며 아쉬움을 토로했습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 이다.”(11:21) 마르다는 예수님이 오빠를 살려주시지 않아 못내 아쉬웠습니다. 예수님이 마르다를 위로하셨습니다.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11:23) 예수님은 나사로가 다시 살아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11:24) 마르다는 오빠가 나중에 살아날 것이라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지금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11:25-26) 예수님은 부활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부활이신 예수님을 믿는 자는 죽어도 살아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생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생명이신 예수님을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동생인 마리아를 부르셨습니다. 마리아도 아쉬움을 쏟아냈습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 이다.”(11:32) 마리아도 예수님이 계셨더라면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이라고 아쉬워했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로의 무덤이 어디 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로의 무덤으로 가면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예수님이 마르다와 마리아가 우는 모습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셔서 우셨는지 아니면 믿음이 있으면서도 믿음이 없이 행동하는 모습을 보시고 안타까워서 우셨는지 알 수 없지만 예수님도 감정이 북받쳐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11:35) 나사로의 무덤에 이르자 시신 썩는 냄새가 풍겼습니다. 예수님은 무덤 문을 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르다는 썩는 냄새가 난다고 정색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마르다를 보시고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11:40) 물으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르시고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그들로 믿게 하려 함이니 이다.”하고 기도하시고, 무덤을 향해 “나사로야, 나오라!”고 부르셨습니다.(11:43) 사람들은 예수님의 얼굴과 동굴 무덤을 번갈아 바라봤습니다. 죽었던 나사로가 손과 발을 베로 동인 채 걸어 나왔습니다. 나사로는 중국 귀신인 강시가 손을 앞으로 내밀고 콩콩 뛰듯이 손과 발이 묶였기 때문에 깡충깡충 뛰면서 나오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예수님은 나사로를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고 이르셨습니다.(11:44) 나사로의 흐물흐물하던 살결이 어느새 탱탱하게 회복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죽었던 나사로를 살리시면서 첫째, 예수님이 생명과 죽음을 다스리는 권세가 있다고 보여주셨습니다. 사람이 귀로 들어서 얻은 지식은 30%, 눈으로 보고 얻은 지식은 50%, 손으로 만져 보고 얻은 지식은 80%가 기억된다고 합니다.(한국학교발명협회 발명의 길잡이 365일) 예수님은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예수님이 부활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 자는 죽어도 살아나고 예수님은 생명이기 때문에 살아서 예수님을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고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로를 살리시면서 둘째, 예수님도 죽었다가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예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죽은 자 가운데 다시 살아나시어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고전15:20) 아담의 불순종으로 인해 죽음이 찾아왔지만 예수님의 순종으로 인해 생명이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로를 살리시면서 셋째, 우리도 예수님을 믿다가 죽으면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알려주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날 죽음의 잠에서 깨어나 생명의 날을 맞이하게 될 겁니다. 예수님은 나사로를 살리시면서 넷째, 영적으로 자고 있는 우리에게 깨어나라고 말씀합니다. 우리 교회는 지금 자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어서 깨어나 도약의 날개를 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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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나우웬 : 그의 삶, 그의 꿈 - 세계영성의 거장 시리즈 01
마이클 오로린 지음, 마영례 옮김 / 가치창조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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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사람이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인생이 달라지듯이 독자는 누구의 책을 읽느냐에 따라 세계관이 달라진다. 헨리 나우웬은 노인목회에 전념하던 나를 영성목회로 이끌어준 장본인이다. 나는 나우웬의 [예수님의 이름으로]를 읽으면서 예수님의 설교가 서기관들과는 달리 권위가 있었던 것처럼 그의 글은 다른 작가들과는 달리 영혼을 움직이는 힘이 있다고 느꼈다. 나는 온라인을 검색하며 그의 책을 탐독하였다. 그의 책은 대부분 짧지만 긴 여운이 남는다. 그의 글은 머리에서 나온 이상이 아니라 삶의 현장에서 나온 묵상이기 때문이다. 그는 심리학자가 아니라 영성 가였다. 그의 책은 대부분 개인적이지만 꾸밈없는 고백이 돋보인다. 그의 글은 자신을 미화하는데 치중하지 않고 내면의 갈등을 털어놓기 때문이다. 그는 지킬박사가 아니라 하이드씨였다. 나는 드아드르 라누에의 [헨리 나우웬과 영성]을 읽으면서 나우웬의 일생과 영적세계를 알게 되었다. 라누에는 나우웬의 저서들에 나타난 그의 영적세계인 하나님과의 관계와 자신과의 관계와 타인과의 관계를 조명하였다. 나우웬에 대해 심층 분석한 책이다. 나는 나우웬에 관한 책을 읽으면서 그가 영성분야에 남긴 업적이 아니라 그의 인간적인 삶이 궁금해졌다. 그의 책은 그의 삶을 통해 나타났기 때문이다. 나는 가뭄 끝에 단비가 내리듯이 나의 궁금증을 속 시원히 풀어줄 책을 오랜만에 발견하였다. 나우웬의 멘티인 마이클 오로린이 멘토의 삶과 꿈을 다룬 책이었다. 오로린은 사진을 곁들여 나우웬의 일생을 연대기적으로 추적하였다. 오로린은 나우웬이 짧은 글을 썼듯이 많지 않은 분량으로 그의 인생역정을 그려냈다. 나우웬은 네이메겐 대학교에서 박사 논문이 거절되는 아픔을 겪었다. 나우웬은 예수님이 고향인 나사렛에서 배척을 받으셨듯이 조국인 네덜란드보다 미국에서 가치를 인정받았다. 오로린은 나우웬이 자신을 미화하지 않았듯이 그의 허물을 감추지 않았다. 나우웬은 어린 시절부터 심리적으로 불안하였고 자신을 탓하는 수치심이 있었다. 저자는 그 원인을 밝혀내지 못했지만 내 생각엔 업무 리더인 아버지와의 갈등에서 기인하지 않았나 추론된다. 나우웬이 동성연애자였다는 사실은 충격적이었다. 솔직담백한 그도 이 사실을 공개하지 않았다. 그의 메시지를 색안경을 끼고 들을까 우려했기 때문이다. 어쩌면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하다고 그가 완벽하지 않고 허물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를 크게 들어 쓰시지 않았나 생각된다. 하나님은 완벽한 사람이 아니라 부족한 사람을 통하여 죄로 얼룩진 세상에 희망의 밝은 빛을 비춰주신다. 아무튼 헨리 나우웬은 개신교와 가톨릭을 통틀어 사랑받는 저자다. 그래서 그런지 그의 책은 가톨릭에서 출판한 것을 개신교에서 다시 출판하고 개신교에서 출판한 것을 다시 가톨릭에서 출판하는 악순환이 벌어진다. 그가 가톨릭 신부였지만 개신교 대학교에서 가르쳤듯이 그의 책이 인기가 있더라도 중복해서 출판하는 것은 교회 일치운동을 역행하는 처사다. 이 책인지 아닌지 확인해 보지 않았지만 <인터넷 가톨릭서점 바오르딸>에 가면 마이클 오래플린의 [하느님의 연인 헨리 나웬]이란 책이 번역되었다. 목차가 다른 것을 보니 아닌지도 모른다. 책을 읽다보니 아쉬운 점이 눈에 띄었다. 번역자는 신학전공자가 아니라 그런지 전문용어 번역에 서툴렀다. 38쪽의 '학교의 교구 목사'는 ‘교목 신부’로 번역하는 것이 나았고, 53쪽부터 나오는 '바티칸 Ⅱ'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로 번역했어야 했다. 사실 이 정도는 전문용어도 아닌 일반용어가 아닌가? 이외에도 여러 군데서 아쉬움이 남았다. 출판사는 헨리 나우웬의 전기인만큼 부록으로 그의 연표와 작품을 수록하고 가능하면 번역 현황까지 소개했으면 좋을 뻔 했다. 출판사가 작은 수고를 하면 그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고 그의 책이 더 많이 팔릴 것이기 때문이다. 헨리 나우웬에 대해 알고 싶으면 이 책부터 읽고 나서 그의 작품을 읽으면 좋을 듯싶다. 당신도 나우웬같이 작은 예수가 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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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9:1-41 세상의 빛이로다.

포항 선린병원에 가면 현관에 ‘하나님은 고치시고 우리는 봉사한다.’는 액자가 걸려 있습니다. 선린병원측은 병을 고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고 병원 관계자들은 그저 봉사할 따름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출애굽기 15장 26절을 통해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로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여호와 라파’십니다. 우리를 치료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치료자이신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태어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만나셨습니다. -선천적인 시각장애인을 만나셨습니다. 요즘 우리나라의 시각장애인들은 안마로 생계를 꾸려갑니다만 예수님 당시의 시각장애인들은 성전이나 시장 근처에서 구걸을 하여 먹고 살았습니다. 예수님은 시각장애인을 불쌍히 보시고 종기가 났을 때 침을 뱉어 밀가루를 고약을 붙여듯이 땅에 침을 뱉어 흙을 개어서 시각장애인의 눈에 바르시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시각장애인이 실로암 연못에 가서 씻었더니 눈이 띄어졌습니다. ‘실로암’은 히브리어 ‘실로아’를 헬라어로 옮긴 말입니다. 보냄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실로암 연못은 히스기야 왕 당시에 예루살렘성 밖 기드론 골짜기에 있는 기혼 샘에서부터 지하 터널을 뚫어서 물을 끓어왔습니다. 예루살렘 백성들은 실로암 연못에서 기혼 샘의 신선한 물을 마시게 되었습니다. 실로암 연못이 백성들의 목을 시원하게 축여주었듯이 하나님께 보냄을 받은 예수님은 시각장애인의 눈을 시원하게 띄어주셨습니다.

시각장애인이었던 사람의 이웃들은 시각장애인이었던 사람이 눈을 뜬 것을 보고 그 사람이다 아니다 논란을 벌였습니다. 사람의 얼굴에 점을 빼느냐 그리느냐에 따라 이미지가 달라지는데 하물며 감겨진 눈이 떠졌으니 얼마나 달라졌겠습니까? 헷갈리겠죠. 시각장애인이었던 사람이 내가 그 사람이라고 말하자 이웃들이 “네 눈이 어떻게 떠졌느냐”고 물었습니다.(8-10절) 시각장애인이었던 사람이 “예수라 하는 그 사람이 진흙을 이겨 내 눈에 바르고 나더러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하기에 가서 씻었더니 보게 되었노라.”고 대답하였습니다.(11절) 시각장애인이었던 사람은 예수님을 ‘예수라 하는 그 사람’이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예수님을 그저 평범한 한 사람으로 알았습니다. 시각장애인이었던 사람은 예수님에 대해 듣기는 하였지만 누구신지 몰랐습니다.

시각장애인이었던 사람의 이웃들은 그 말이 미심쩍었는지 시각장애인이었던 사람이 어떻게 해서 눈을 뜨게 됐는지 조사해 달라고 바리새인들(유대교 종교지도자들)에게 데려갔습니다. 바리새인들이 눈을 뜨게 된 경위를 질문하자 시각장애인이었던 사람은 그 사람이 진흙을 눈에 발라 씻었더니 보게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그 날은 안식일이었습니다. 어떤 바리새인은 “이 사람이 안식일을 지키지 아니하였으니 하나님께로부터 온 자가 아니라.”고 정죄하였고  또 다른 바리새인은 “죄인으로서 어떻게 이러한 표적을 행하겠느냐?” 고 변호하였습니다.(13-16절) 정죄한 측은 예수님이 진흙을 이겼고 눈에 발랐고 눈을 뜨게 했으니-일을 했으니 안식일을 어긴 것이라고 단정 지었습니다. 변호한 측은 죄인이 어떻게 표적을 일으키겠느냐-죄인이 아니라고 두둔하였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의견이 엇갈리자 시각장애인이었던 사람에게 “너는 그를 어떠한 사람이라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시각장애인이었던 사람은 “선지자니이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17절) 시각장애인이었던 사람은 예수님을 ‘선지자’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지자라고 생각했습니다. 시각장애인이었던 사람은 예수님을 그저 한 사람에서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라고 생각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시각장애인이었던 사람을 다시 불러서 조사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너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우리는 이 사람이 죄인인 줄 아노라.”라고 압력을 넣었습니다.(24절) 바리새인들은 시각장애인이었던 사람에게 예수님이 선지자가 아니라 죄인이라고 진술하도록 압력을 넣었습니다. 시각장애인이었던 사람은 이에 굴복하지 않고 “창세 이후로 맹인으로 난 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 함을 듣지 못하였으니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라.”고 증언했습니다.(32-33절) 시각장애인이었던 사람은 예수님을 ‘하나님께로부터 온 이’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예수님을 하나님께로부터 온 사람이라고 확신했습니다. 하나님은 이사야서 29장 18절(35장 5절과 42장 7절)을 통해 메시야가 맹인의 눈을 뜨게 하실 것이라고 예언하셨습니다. 율법을 아는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몰랐으나 율법을 모르는 시각장애인이었던 사람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았습니다. 시각장애인이었던 사람은 예수님을 그저 한 사람에서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에서 하나님께로부터 온 이라고 이해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시각장애인이었던 사람이 위협에 굴복하지 않자 유대교에서 출교시켰습니다. 시각장애인이었던 사람은 예수님께서 육신의 장애를 고쳐주셨으나 바리새인들이 유대교에서 출교하여 마음의 상처를 입었습니다. 우리 주변에도 육신의 질병과 마음의 아픔을 갖고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치료자이신 예수님이 시각장애인이었던 사람을 만나서 “네가 인자를 믿느냐?”고 물으셨습니다.(35절) 인자는 에스겔서에서는 선지자를 인자라 불렀고(겔2:1), 다니엘서에서는 최후의 심판 후에 하늘로부터 와서 권능으로 세상을 다스릴 분이라고 묘사했습니다.(단7:13-14) 인자는 메시야라는 암시이었습니다. 시각장애인이었던 사람은 “주여, 그가 누구 시오니이까?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36절) 주여는 당신은 주님이요 나는 종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네가 그를 보았거니와 지금 너와 말하는 자가 그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각장애인이었던 사람은 “주여, 내가 믿나이다.”하고 절하였습니다.(37-38절) 시각장애인이었던 사람은 예수님을 ‘주여’라고 불렀습니다. 예수님을 구세주라고 고백했습니다. 시각장애인이었던 사람은 예수님을 그저 한 사람에서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에서 하나님께로부터 온 이에서 구세주라고 고백했습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8장 12절을 통해 “나는 세상의 빛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을 비추는 빛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육체적으로 볼 수 있었지만 예수님을 거부했기 때문에 영적으로 시각장애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시각장애인이었던 사람은 육체적으로 볼 수 없었지만 예수님을 영접했기 때문에 영적으로 비장애인이 되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거부했듯이 지금도 세상은 빛이신 예수님을 거부하며 어둠에 머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요한복음 3장 19절을 통해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둠은 죄와 죽음을 가져옵니다. 그러나 빛은 용서와 생명을 가져옵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8장 12절을 통해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도 빛이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이사야서 42장 6절을 통해 “너를 세워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하리니”라고 말씀하셨고, 이사야서 49장 6절을 통해 “내가 또 너(여호와의 종)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나의 구원을 베풀어서 땅 끝까지 이르게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천하 만민을 구원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도 영적인 눈을 떠서 주님의 바램을 충족시켜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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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4:5-42 친히 듣고 앎이라.

어제(2008년 2월 23일) 인터넷을 검색하다보니 세 여자가 대중의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다는 기사가 눈에 띠었습니다. 방송인 허수경 씨는 두 번 이혼을 했지만 엄마가 되고 싶어서 남편 없이 시험관 아기를 임신하고 출산했다고 합니다.(남편 없이 아이를 가진 사람을 비혼모라고 하네요.) 허수경 씨는 결혼을 하지 않거나 했더라도 사별하거니 이혼으로 인해 여자 혼자서 아이를 기르는 싱글맘이 되었습니다./ 연기자 최진실 씨는 아들과 딸의 성을 조씨에서 최씨로 변경해줄 것을 법원에 청구했다고 합니다. 가족관계법이 개정되어 최진실 씨처럼 엄마의 성으로 바꾸거나 재혼한 경우 새 아버지의 성으로 변경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크리스천 연기자 신애라 씨는 몇 년 전 예은이를 입양한데 이어 지난 1월에 생후 100일 된 예진이를 입양했다고 합니다. 신애라 씨는 고아수출국이라는 오명을 씻지 못하는 우리나라에 귀감이 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가 세 여자의 선택에 관심을 가졌다면 오늘 본문은 사마리아 여자의 선택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사마리아 여자는 여섯 시쯤 물을 길러 나왔습니다.(6절) 요한복음의 여섯 시는 우리나라 시간으로 정오입니다. 이글거리는 태양이 사람을 찜통에 넣고 삶아버리는 시간이죠. 여자들은 찜통더위를 피해 아침과 저녁에 물을 길러 나왔습니다. 여자들은 우물가에 모여서 이 얘기 저 얘기를 나누었습니다. 우물가는 오늘날의 인터넷처럼 여론을 수집하고 확대 재생산하고 배포했습니다. 우물가에서 찍히면 동네에서 매장됐습니다. 여자가 우물을 길러 나온 동네는 사마리아 지방의 수가 마을이었습니다.(5절) 학자들은 가까이에도 우물이 있었으나 여자가 멀리까지 물을 길러왔다고 주장합니다.(LABC, 151쪽) 아는 사람들을 만나지 않기 위해서이었죠. 여자는 다른 여자들의 시선을 피하고 싶어서 아무도 나오지 않는 정오 시간에, 그것도 다른 사람들이 알아보지 않기를 기대하며 멀리 떨어진 우물로 물을 길러 나왔습니다. 여자는 대인기피증이 있었습니다. 여자가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피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여자는 남성 편력이 심했습니다. 여자는 다섯 번 결혼해서 다섯 번 이혼했고 지금도 다른 남자와 동거하고 있었습니다.(18절) 고대 세계에서는 이례적인 일이었습니다. 이관직 교수는 여자가 여러 번 이혼했으나 또 다시 결혼한 것으로 보아 미모가 뛰어나지 않았나 추측했습니다.(이관직, 226쪽) 아무튼 여자는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아 헐떡이듯이 굶주린 사랑을 채우기 위해 여자는 이 남자 저 남자를 전전했습니다. 그러나 목마르다고 바닷물을 마시면 오히려 갈증이 일어나듯이 사랑을 채우기 위해서 남자들을 바꿔봤으나 여전히 만족은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고 말씀하셨을 때 여자는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고 대답했고 예수님이 “네가 남편이 없다하는 말이 옳도다. 너에게 남편이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고 말씀한 걸로 보아 여자는 여섯 명의 남자들을 전전했지만 만족을 누리지 못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자가 남자를 통해 만족을 얻으려던 첫 번째 선택은 실패했습니다. 여자가 실패했듯이 우리도 전철을 밟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제가 보기에 사람들은 연령대에 따라 주요한 관심사가 있는 것 같아요. 10대에서 20대는 이성에 관심이 많습니다. 이 시기는 이성에게 잘 보이려고 노력하는 것 같아요. 30대에서 40대는 물질에 관심이 많습니다. 이 시기는 어떻게 하면 대박을 터트릴까를 고민하는 것 같아요. 50대에서 60대는 명예에 관심이 많습니다. 이 시기는 감투를 준다면 사족을 못 쓰는 것 같아요. 여자가 남자를 전전했듯이 우리도 이성과 물질과 명예를 좇아 헤매고 있지는 않는지요? 여자가 여섯 명의 남자를 전전했으나 만족을 누리지 못했듯이 우리도 이성과 물질과 명예를 얻더라도 안식을 누리지 못 할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에게 또 다른 선택이 있음을 알려주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여자와 우물가에서 생수에 관하여 이야기를 나누시다가 여자가 메시야 곧 그리스도가 오실 줄을 안다고 말하자 예수님은 “네게 말하는 내가 그라.”고 말씀하셨습니다.(26절) 너에게 말하는 내가 메시야 곧 그리스도다. 예수님은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이 기다리던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고 고백하셨습니다. 여자는 과거를 알아맞힌 사람이 누군가 궁금했는데 예수님이 메시야라고 밝히시자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고 말하고 돌아다녔습니다.(28-29절) 여자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물동이를 버려두었습니다. 물동이는 귀중하고 유용한 물건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여자의 관심은 물을 긷는데 있었습니다. 현실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는 예수님을 알리는데 있었습니다. 전도에 있었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세상 부귀영화에 관심이 있었더라도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는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까를 궁리해야 합니다./ 여자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동네로 들어갔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여자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입방아를 찧었습니다. 여자는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고 돌아다녔습니다. 대인기피증 환자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는 다른 사람들을 찾아 돌아다니는 대인접촉증 전도사가 되었습니다. 치유가 되었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상한 감정과 억압된 기억에 짓눌려 살았더라도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는 상처가 말끔히 녹아내려야 합니다./ 동네 사람들은 여자의 말을 듣고 호기심으로 구경나왔다가(30절)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믿게 되었고(39절) 말씀을 들으면 들을수록 더 많은 사람들이 믿게 되었습니다.(41절) 여자가 예수님과 동네 사람들과의 다리를 놓았습니다. 그렇다면 여자가 예수님을 통해 만족을 얻으려던 두 번째 선택은 어땠을까요? 대 성공이었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여자에게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로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 신 줄 앎이라.”고 말했습니다(42절). 동네 사람들은 여자를 통해서 예수님을 믿었다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스스로 믿게 되었습니다. 여자가 남자들을 선택했을 때는 본인도 만족함이 없었으나 예수님을 선택했을 때는 동네 사람들까지도 만족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로마서 10장 13절을 통해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자가 여섯 명의 남자를 전전했다는 도덕적 비난을 받았지만 예수님을 믿었기 때문에 구원받았을 것입니다. 사마리아인들이 유대인과 이방인의 혼혈인이라고 사회적인 차별을 받았지만 예수님을 믿었기 때문에 구원받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로마서 14절과 15절을 통해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주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을 받는데 구원을 받으려면 믿어야 하고 믿으려면 들어야 하고 들으려면 전파해야하고 전파하려면 보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말해 보내야 전파하고 전파해야 듣고 들어야 믿고 믿어야 구원받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유대인들이 외면하는 사마리아 수가 마을에 들어가신 것도, 대인기피증에 걸린 여자를 만나신 것도, 여자에게 메시야라고 알리신 것도 죽어가는 영혼들을 구원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세상에서 소외된 사람들에게 관심이 많으십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복음을 전하여 처음에는 우리를 통하여 예수님을 믿었더라도 나중에는 스스로 믿을 수 있도록 도와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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