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 - 요한복음 속 7가지 기적의 진리
애드리언 로저스 지음, 조진선 옮김 / 일용할양식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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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얼마 전에 요한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자기 계시를 가지고 시리즈 설교를 한 적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나는 ~ 이다’ 는 정형어구로 자신의 정체성을 밝히셨습니다. 예수님의 자기 계시는 기적과 관련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시고 나는 생명의 떡(요6:35)이라고 말씀하셨고,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고 나는 부활이요 생명(11:25)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예수님의 자기 계시에 관한 참고 도서(예를 들어 이동원 목사님의 [나를 소개합니다-예수])가 적어 아쉬웠는데 마침 요한복음에 나오는 기적을 다룬 설교집이 출간되어 반가웠습니다. 나는 큰 기대를 가지고 읽다가 그만 인상을 찌푸렸습니다. 저자는 나보다 성경을 보는 안목은 탁월했지만 일부분은 지나친 해석이었습니다. 물이 포도주로 변한 기적을 가지고 저자는 성경을 인용해 가며 포도주는 기쁨을, 6개의 돌 항아리는 인간을, 돌 항아리는 전통적 종교를 상징하고, 가득 채우라는 예수님은 율법의 일점일획까지 다 이루셨다고 해석했습니다. 끝없이 샘솟는 우물은 예수님이 새로 주시는 법을 의미한다고 말했습니다. 요한복음은 정말 상징과 아이러니가 가득합니다. 하지만 저자의 해석은 알레고리 컬합니다. 굿뉴스 스터디 바이블은 돌 항아리가 아니라 물이 유대교이고 포도주가 기독교 신앙이라더군요.(196쪽) 관원의 아들을 고친 기적을 가지고 저자는 왕의 신하가 예수님이 아들이 살았다고 하신 말씀을 듣고 즉시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가나에서 가버나움까지 7~8시간 걸리는데 관원은 다른 교통수단을 이용해 더 빨리 갈 수 있었지만 하루를 머물며 평안을 누렸다고 말하며 관원의 믿음은 가장 놀라운 믿음이라고 극찬했습니다. 그러나 본문을 보면 시간을 나타내는 단어는 어제 일곱 시(오후 1시)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오늘이 몇 시 인지 알 수 없습니다. 크레이그 키너는 성경배경주석을 통해 가나에서 가버나움까지는 하루 걸이라고 말하더군요.(316쪽) 저자처럼 관원이 다른 교통수단을 이용했다 하더라도 유대인은 저녁을 하루의 시작으로 보았기 때문에 아들이 나았다는 말씀을 듣고 24시간을 기다렸다고 단정할 수 없습니다. 나는 우리나라 목사님들만 영적인 해석을 하는 줄 알았는데 남 침례교 총회장을 3번이나 하신 분도 영해를 하고 계셨습니다. 저자의 무리한 해석은 기적의 의미를 반감시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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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있는 예배 - 개정판
로버트 웨버 지음, 황인걸 옮김 / 예본출판사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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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제임스 화이트 박사와 더불어 예배학의 거두다. 저자는 피동적으로 예배에 참석하는 교인들을 보며 어떻게 하면 능동적으로 예배에 참여시킬까를 연구해 왔다. 이 책은 저자가 수년 동안 매달린 결과 얻어진 산물이다. 저자는 예배를 보는 것으로 머물지 않고 드리는 데 역점을 두고 있다. 저자는 예배의 성경적 기초부터 밝힌다. 저자는 예배의 부흥을 위해 8가지 원리들을 제시한다. 저자는 예배는 악의 세력을 물리치신 그리스도의 승리를 축하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예배는 축제적인 분위기에서 드려져야 한다./ 저자는 역사적인 예배순서를 말한다. 예배는 말씀의 선포와 성찬을 통해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과 부활과 재림을 말하고 행하는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리스도의 이야기는 말씀과 성찬을 통해 전달되어야 한다. 저자는 말씀과 성찬의 균형을 강조한다./ 저자는 예배에서 하나님의 행위를 다룬다. 하나님은 예배 중에 상징과 말씀과 성찬을 통해 말씀하시고 역사하신다. 예배에는 사람의 영역도 있고 하나님의 영역도 있다./ 저자는 하나님의 임재방식을 다룬다. 예배는 언어적 방법과 상징적 방법을 통한 의사전달의 행위다. 하나님은 언어와 상징으로 사람에게 전달하셨고 사람은 언어와 상징으로 하나님께 응답한다. 저자는 말씀과 성찬은 일차적인 상징이고 예배에로의 ‘들어감’과 세상으로의 ‘흩어짐’은 이차적인 상징이라고 말한다./ 저자는 인간의 응답을 다룬다. 예배 중에 우리는 하나님에게 그리고 서로에게 응답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존재와 그가 하신 일과 지금 하시는 일과 앞으로 하실 일에 응답한다./ 저자는 예배는 모든 일원이 참여해야 한다고 말한다. 예배는 하나님의 백성 모두가 함께 드려야 한다. 저자는 예배의 준비와 성경 봉독과 설교와 성찬식과 폐회의 순서를 통해 순서를 정하여 자유스럽게 드리라고 조언한다. 저자는 인사와 아멘과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와 할렐루야를 통해 상호작용하라고 권면한다./ 저자는 4가지 예배의 견인차들을 밝힌다. 저자는 영적인 순례 여행으로서 교회력의 사용을 권장한다.(시간) 저자는 개방적이면서도 관계적인 건축을 선호한다.(공간) 저자는 예배에서 음악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미술의 순기능도 말한다.(소리) 저자는 드라마와 춤도 예배를 돕는다고 말한다. 저자는 색채에 의미를 부여한다.(예술)/ 저자는 삶의 모든 것이 예배다고 단언한다. 예배와 삶은 상호 연관성이 있다. 진정한 예배는 예배당 안에서 드려지지 않고 세상 밖에서 드려진다. 개신교가 교인 숫자에 비해 사회적인 영향력이 미약한 것은 예배를 교회당 안으로 축소하였지 세상 밖으로 확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부터라도 삶으로 예배드린다면 한국사회를 견인하리라 믿는다. 이 책은 20세기 교회를 움직인 100권의 책 중의 하나다. 이 책을 통해 예배를 갱신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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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D] 새롭게 보는 이스라엘 절기
이성훈 지음 / 대한기독교서회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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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목회와 신학의 별책부록인 그말씀을 통해 이성훈 교수가 연재한 이스라엘의 절기를 재미있게 읽었다. 그말씀은 월간지라 한 달에 하나씩 소개하다 보니 감질이 났었는데 단행본으로 묶여 한꺼번에 읽을 수 있게 되었다. 구약의 절기는 이스라엘의 축제다. 절기에는 이스라엘의 역사와 문화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해방된 사건을 기념하는 유월절과 누룩을 넣지 않은 빵을 먹으며 조상들이 애굽에서 겪었던 고난을 기억하고 해방을 기념하는 무교절과 조상들이 광야에서 유랑하며 겪었던 고난을 기억하기 위해 초막을 짓고 생활하는 초막절과 하만의 간계로부터 유대인을 구출한 사건을 기념하는 부림절은 역사적인 사건을 반영한다. 이스라엘의 절기는 이런 역사적인 사건에다 농경문화를 결합하여 축제화 시켰다.(우리나라의 24절기는 농사를 짓기 위한 계절의 변화를 알려 준다.)  저자는 절기의 역사적인 기원을 추적하고 과거에는 절기를 어떻게 지켰으며 현재에는 또 어떻게 지키는지를 설명한다. 나아가 저자는 절기를 이스라엘의 축제로 제한시키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과 성령 강림과도 연결시킨다. 저자는 이스라엘의 절기를 기독교인의 절기로 승화시킨다. 저자의 설명을 들으면 들을수록 절기는 성경을 관통하는 맥 이라고 확신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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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상 17:8-16 하나님 제일주의

여론조사 기관인 한국갤럽이 2004년 5월 13일부터 29일까지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 만 15세 이상 남녀 1,728명을 대상으로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40가지를 조사했습니다. 저는 그것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가장 좋아하시는 것은 무엇일까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좋아하시는 것은 십계명 중에서 제1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출20:3) 하나님은 우리가 다른 신들을 섬기지 않는 것을 가장 좋아하십니다. 하나님은 다른 신들을 섬기지 않은 사람에게는 수천 대까지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출20:6)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것은 무엇일까요? 십계명 중에서 제1계명을 어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다른 신들을 섬기는 것을 가장 싫어하십니다. 하나님은 다른 신을 섬긴 사람에게는 삼사 대까지 벌을 주시겠다고 경고하셨습니다.(출20:5)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것을 행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북 왕국 이스라엘의 제7대 왕 아합이었습니다. 아합 왕은 총각 때는 하나님을 섬겼으나 결혼하면서부터 우상을 섬겼습니다. (아합 왕은 이스라엘의 북쪽에 있는 시돈 왕국과 동맹을 맺고 동맹을 공고히 하기 위하여 시돈 왕국의 공주 이세벨을 왕비로 맞이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은 시돈 왕국과 동맹을 맺었기 때문에 정치적으로는 전쟁이 없이 평화를 누리게 되었고 경제적으로는 교역을 통하여 번영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신앙적으로는 문제가 생겼습니다. 아합 왕은 이세벨과 결혼하자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을 섬겼습니다. 아합 왕은 이세벨을 위하여 바알 신전을 짓고 신전 안에 바알 제단을 쌓고 바알의 아내인 아세라 목상도 만들었습니다. 아합 왕은 이전의 이스라엘 왕들보다 더 심하게 하나님을 진노하시게 만들었습니다.) 이명박 장로가 “경제를 살리겠습니다.”라는 캐치프레이즈로 대통령에 당선됐습니다. 이명박 당선인이 아무리 경제를 살려도 신앙을 죽이면 하나님은 실패한 대통령으로 만드십니다. 경제도 살려야 하고 신앙의 모범을 보여 기독교의 이미지를 쇄신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엘리야 선지자를 아합 왕에게 보내셨습니다. “내가 섬기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 말이 없으면 수 년 동안 비도 이슬도 있지 아니하리라.”(왕상17:1) 엘리야 선지자는 아합 왕이 다른 신들을 섬겼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가뭄을 주셨다고 선언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야고보서 5장 17절을 통해 3년 6개월 동안 비가 오지 않았다고 말씀합니다. 저는 어린 시절에 가뭄을 경험해 보았습니다. 몇 달 동안 비가 오지 않자 논이 거북이 등처럼 쩍쩍 갈라졌고 밭작물이 누렇게 타들어 갔습니다. 먹을 물이 없어 소방차에서 물을 실어 오면 물지게를 지고 날랐습니다. 우리나라에 비가 오지 않는다면 농사를 지을 수 없지만 사막인 이스라엘에 비가 오지 않는다면 사람과 짐승이 굶어 죽게 됩니다. 비가 오지 않더라도 이슬이라도 내린다면 농작물이 살아남을 수 있으나 비도 이슬도 내리지 않았습니다. 몇 달 동안 내리지 않았다면 견뎌볼 수 있으나 몇 년이라 살아남기가 힘들었습니다. 이스라엘은 황폐화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아합 왕이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겼기 때문이었습니다. 아합 왕이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는 것을 행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합 왕 시절에 바알과 아세라는 풍요를 가져다주는 신이었습니다. 그래서 아합 왕이 바알과 아세라를 섬겼습니다. 오늘날은 시간과 물질이 풍요를 가져다주는 신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시간에 쫓기고 물질에 얽매입니다. 하나님은 아합 왕이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자 가뭄을 주셨듯이 우리들이 시간과 물질을 섬긴다면 인생을 실패하게 만드십니다. 하나님이 가뭄을 내려서 아합 왕을 굴복시키셨듯이 우리들에게 사랑의 매를 때려서 회개시키십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좋아하시는 것을 행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시돈 왕국의 사르밧 과부였습니다. 하나님은 엘리야 선지자를 그릿 시냇가로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유랑할 때 아침에는 만나를 저녁에는 메추라기를 내려주셨듯이 엘리야 선지자에게 아침과 저녁으로 까마귀들을 보내셔서 떡과 고기를 날라다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릿 시냇가가 마르자 엘리야 선지자를 시돈 왕국에 있는 사르밧으로 보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야 선지자를 시돈 왕국으로 보내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시돈 왕국은 북 이스라엘을 우상 숭배로 물들게 한 이세벨 왕비의 고향이었습니다.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속에 들어가야 한다.’는 속담처럼 하나님은 우상을 없애기 위해서 엘리야 선지자를 우상 숭배의 본고장으로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르밧에 사는 과부가 엘리야 선지자에게 음식을 제공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야 선지자를 과부에게 보내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는 가장 가난한 계층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가난한 과부에게 복을 주시려고 엘리야 선지자를 보내셨습니다. 과부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복을 받을 수도 있었고 받지 않을 수도 있었습니다.

엘리야 선지자가 사르밧에 도착해 보니 한 과부가 나뭇가지를 줍고 있었습니다. 과부는 가난에 쪄들어 몰골이 형편없었습니다. 얼굴은 새까맣게 탔고 의복은 갈기갈기 헤어졌습니다. 엘리야 선지가 과부를 불렀습니다. “청하건대 그릇에 물을 조금 가져다가 내가 마시게 하라.”(왕상17:10b) 엘리야 선지자는 물을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과부는 아무 말 없이 물을 뜨러갔습니다. 가뭄이 심하게 들어 물도 귀했으나 과부는 형편은 어려워도 인심은 후했습니다. 엘리야 선지자가 한 술 더 떴습니다. “네 손의 떡 한 조각을 내게로 가져오라.”(왕상17:11b) 엘리야 선지자는 밥을 가져오라고 요구하였습니다. 과부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한숨을 쉬었습니다.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가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떡이 없고 다만 통에 가루 한 움큼과 병에 기름 조금 뿐이라. 내가 나뭇가지 둘을 주워 다가 나와 내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들어 먹고 그 후에는 죽으리라.”(왕상17:12) 과부는 마지막 음식을 만들어 먹으려 한다고 대답하였습니다. 엘리야 선지자가 대담하게 요구하였습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가서 네 말대로 하려니와 먼저 그것으로 나를 위하여 작은 떡 한 개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오고 그 후에 너와 네 아들을 위하여 만들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나 여호와가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리라.”(왕상17:13-14) 엘리야 선지자는 마지막 식사를 자신에게 먼저 가져오고 과부와 아들은 나중에 먹으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 가뭄이 끝날 때가지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않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않는다고 약속하였습니다. 엘리야 선지자는 ‘벼룩의 간을 먹는다.’ 는 속담처럼 가난한 과부의 마지막 식사를 달라고 요구하였습니다. 과부는 마지막 식사를 자신과 아들이 먹을 것이냐? 하나님의 선지자를 줄 것이냐? 를 놓고 망설였습니다. 과부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마지막 식사를 엘리야 선지자에게 주었습니다. 과부는 밀가루를 반죽하여 프라이팬에 기름을 붓고 나뭇가지를 지펴서 부침개같이 얇고 둥근 빵을 만들어 엘리야를 대접하였습니다. 엘리야는 ‘여호와는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과부는 마지막 식사를 하나님께 대접하였습니다. 그러자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처럼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않았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가난한 과부에게 있어 가루와 기름은 가장 귀중했습니다. 과부는 가장 귀중한 것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하나님을 제일로 섬겼습니다. 우리에게 있어 시간과 물질이 가장 귀중합니다. 우리가 시간이 가장 귀중할 때 너무 바빠서 주일을 지킬 수 없는 상황에서도 주일을 거룩하게 지킨다면 하나님께서 주일에 복을 주시고 거룩하게 만드십니다. 우리가 물질이 가장 귀중할 때 너무 쪼들려서 십일조를 드릴 수 없는 상황에서도 십일조를 구별하여 드린다면 하나님께서 하늘 문을 열고서 쌓을 곳이 없도록 복을 부어 주십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연초가 되면 덕담을 나눕니다. 요즘 가장 흔하게 사용하는 인사가 ‘부자 되세요.’입니다. 우리나라는 황금만능주의에 빠졌습니다. 그러나 교인들은 하나님 제일주의에 빠져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제일로 여겨주십니다. 하나님을 나중으로 밀쳐놓은 아합 왕은 가뭄을 만났지만 하나님을 제일로 여긴 사르밧 과부는 기적을 체험하였습니다. 우리 교인들도 새해에는 그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제일로 섬겨 과부처럼 기적을 체험하였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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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1:29-42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저는 성경에 나오는 인물 중에서 세례자 요한을 가장 좋아합니다. 요한이 메시야의 오실 길을 준비했듯이 저도 다시 오실 예수님을 준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어떻게 메시야의 오실 길을 준비했을까요?


첫째, 요한은 메시야를 높이고 자신을 낮췄습니다. 하나님은 마태복음 3장 11절을 통해 요한의 설교를 들려주십니다. 요한은 “나는 너희로 회개하게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라고 설교했습니다. 요한은 죄를 회개하고 용서하는 물세례를 주지만 메시야는 죄인을 심판하고 구원하는 성령과 불세례를 주신다고 말했습니다./ 요한은 종은 주인의 신발을 들고 다니지만 자신은 메시야의 신을 들고 다닐 자격조차 없다고 고백했습니다.(요한복음 1장 27절을 통해 메시야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 없다고 고백했습니다.)/ 요한복음 1장 30절을 통해 요한은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사람이 있는데 나보다 앞선 것은 그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요한은 메시야보다 먼저 사역을 시작했지만 메시야는 요한이 태어나기 전부터 계셨다고 말했습니다. 자신을 뒤로하고 메시야를 앞세웠습니다./ 요한복음 3장 28절을 통해 요한은 제자들에게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증언하라고 당부했습니다. 요한은 인기가 높은 설교자였지만 자신은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전령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자신은 조연이고 메시야가 조연이라고 말했습니다./ 요한복음 1장 30절을 통해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고 소망했습니다. 요한은 자신은 작아지고 메시야는 커져야 한다고 바랬습니다./ 요한이 이렇게 자신을 낮추자 예수님이 높이셨습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11장 11절 전반 절을 통해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여자의 몸에서 태어난 사람 중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없었다고 세워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높아지려고 하지 낮아지려고 하지 않습니다. 내세우려고 하지 감추려고 하지 않습니다. 대접받으려고 하지 대접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생색내는 일을 하려고 하지 궂은일을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존귀 영광 모든 권세를 받으려하지 멸시 천대 십자가를 지려하지 않습니다. 미국의 토니 에반스 목사님은 달라스 신학교에서 아프리카계 미국인 최초로 신학박사 학위를 받은 분입니다. 에반스 목사님은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책을 통해 영적 성장은 삶 속에서 나는 점점 덜 드러나고 그리스도가 점점 더 많이 드러나게 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신앙은 기도를 오래 한다고 성경을 많이 읽는다고 좋은 것이 아니라 나는 작아지고 그리스도가 커지는 생활을 해야 좋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둘째, 요한은 메시야에게 자신의 제자를 내어드렸습니다. 요한복음 1장 29절을 통해 요한은 예수님을 보고 제자들에게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라고 말했고, 35절을 통해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라고 말했습니다. 요한은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대신지고 돌아가실 희생양이라고 말했습니다. 요한은 33절과 34절을 통해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베풀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는 이인 줄 알라 하셨기에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언하였노라.”고 말했습니다. 요한이 예수님에게 세례를 베풀자 성령님이 예수님 위에 머무는 모습을 보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요한은 안드레와 다른 제자(혹시 요한?)를 예수님에게 내어드렸습니다. 그 당시 선생은 제자를 훈련시키고 제자는 다른 사람들에게 선생님의 가르침을 가르쳤습니다. 제자는 더 많은 제자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자신의 제자들을 늘리기보다는 자신보다 위대한 선생인 예수님에게 제자들을 내어드렸습니다. 하나님은 열왕기상 17장 8절 이하를 통해 사르밧 과부가 마지막 남은 가루와 기름을 자신과 아들이 먹지 않고 엘리야 선지자를 대접했더니 가뭄이 끝나는 날까지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않았다고 말씀합니다. 요한복음 6장 이하를 통해 아이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먹지 않고 예수님에게 드렸을 때 성인 남자 오천 명이 먹고 남은 조각을 열두 바구니나 거두었다고 말씀합니다. 요한이 제자들을 내어드리지 않았다면 제자들은 요한의 물세례를 전파했을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 내어드렸을 때 제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이 더 크게 쓰임을 받았습니다./ 사르밧 과부가 마지막 남은 음식을 자신과 아들이 먹었다면 가뭄이 3년 6개월간 계속됐기 때문에(약5:17) 아마 굶어죽었을 겁니다. 그러나 엘리야에게 주었을 때 가루와 기름이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아이가 도시락을 혼자 먹었다면 다른 사람들이 굶주렸을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 내어드렸을 때 수천 명이 먹고도 남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떻습니까? 내가 가지려 하지 주님께 드리려고 하지 않습니다. 주님께는 조금 드리면서 나에게는 많이 달라고 합니다. 누가복음 12장 13절 이하를 통해 부자는 풍년이 들어 곡식을 쌓아둘 창고가 부족하자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였으나 하나님은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부자는 자신을 위해 쓰려고 했지 하나님과 이웃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위해서 땅에 재물을 쌓아 두면서 하늘에 쌓지 않는 사람을 어리석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헌신을 거름으로 삼아 열매를 맺으십니다. 밭에 거름을 주지 않으면 쭉정이가 달리지만 거름을 주면 알곡을 맺습니다. 수동식 펌프는 물을 한 바가지 붓고 펌프질을 해야 물이 쏟아집니다. 우리가 한 바가지도 붓지 않는데 어떻게 많은 물이 쏟아지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헌신할 때 복을 주십니다. 우리가 헌신의 거름을 주어여 복의 열매를 맺게 해주십니다. 우리는 요한이 자신을 낮추고 예수님을 높이며, 자신이 가진 것을 예수님에게 내어드리며 메시야의 오실 길을 준비했듯이 우리도 자신을 낮추고 예수님을 높이며, 우리의 것을 하나님이 귀하게 사용하시도록 내어드리면서 다시 오실 예수님을 준비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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