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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러드맨 ㅣ 모중석 스릴러 클럽 45
로버트 포비 지음, 문희경 옮김 / 비채 / 2018년 10월
평점 :
절판
책장을 비우기 위해 처분해야 할 도서 위주로 읽고 있는데 이거 이거 아주 고역이다. 처분할 대상이라는 말부터가 이미 재미없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렇다고 계속 자리만 차지하게 놔두긴 뭐하고, 읽지도 않은 책을 내다 팔기도 아까우니 꾸역꾸역 읽을 계획인데, 읽다 보니까 진짜 아까운 건 내 시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나마 내가 좋아하는 스릴러소설은 좀 낫겠지 싶었는데 웬걸, 실망과 분노가 그라데이션으로 일어나는 작품을 읽었지 뭐여. 초반에는 대작 스멜이었다가 중반부터는 너무 늘어진다 싶더니 후반 가서는 정신 산만함과 개연성 없음에 아주 혼쭐이 났다. 그러고 보니 제목에 ‘맨‘이 붙은 것치고 흡족했던 적이 없었단 말이지. 2012년도에 출간된 <블러드맨>은 과거 7080 선배들의 케케묵은 스타일을 흉내 낸다는 인상이 강했다. 정확한 나이는 알 수 없으나 스티븐 킹 세대보다는 한참 밑인 듯한데, 젊은 사람이 어쭙잖게 아날로그 감성을 쫓다 보니까 어색한 구멍이 생기는 거여. 이건 뭐 빈티지도 아니고 레트로도 아닌 어중간함 그 잡채.
미국의 어느 시골지역을 방문한 FBI 요원 제이크. 천재 화가인 부친의 정신병이 도져서, 유일한 보호자로 어쩔 수 없이 고향 땅을 밟았다. 30년도 넘게 남남인 부친이었지만, 화가의 인생이 끝났음을 생각하면 못 도와줄 것도 없었다. 악랄한 부친과의 기억은 죄다 끔찍했고, 어릴 적 모친의 살해 사건도 있고 해서 고향엔 두 번 다시 오고 싶지가 않았다. 할 수 없이 부친의 집에 머물던 중, 그 지역에서 살인 사건이 접수되었다는 FBI의 지령을 받는다. 현장에는 살가죽이 벗겨져있는 엄마와 어린 아들의 시신이 있었고, 이것은 제이크의 모친을 살해한 수법과 일치했다. 하여 반드시 범인을 잡아 지긋지긋한 FBI 생활도 때려칠 생각이었다. 한편 전례 없는 규모의 허리케인이 3일 뒤에 도착한다는 뉴스가, 안 그래도 타이트한 수사를 더욱 정신없게 만든다.
나쁘지 않은 설정이지만 솔직히 올드함의 범벅이었다. 고립된 장소, 발목을 붙잡는 재해, 주인공의 트라우마와 핸디캡, 가족 간의 과거와 비밀 등등 올드스쿨의 공식을 철저히 따르는 게 보여서 많이 식상했다. 초반에는 탄탄한 설정과 찝찝한 기분의 연출에 감탄하기도 했다. 데뷔작인 만큼 준비를 많이 한 게 느껴졌는데 그게 독이 되었는지, 빌드업이 너무도 촘촘해서 진도가 정말 느렸다. 아버지의 정신병, 제이크의 과거와 트라우마, 살인사건 수사 중 어느 것도 납득이 될 만큼 풀어내질 못했다. 그 많은 분량과 느긋한 전개를 하고서도 말이다. 먼저 주인공은 FBI가 되기 전의 생활을 잘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망가졌다고 했다. 또 어느 날은 눈 떠보니 저도 모르는 문신이 몸 전체에 새겨져 있었단다. 거기다 이렇다 할 설명도 없이, 심장에 달린 장치가 그를 제어하는 중이란다. 이렇게나 캐릭터에 몰빵했지만 정작 스토리에는 별 영향도 없었다는 사실. 빌드업에 기여하지 못하는 설정들을 보노라면 그저 있어 보이려고 힘줬구나 싶어 한숨만 나온다.
살인사건에 대해서는 딱히 해줄 말도 별로 없다. 범인은 작품이 다 끝나갈 때까지 등장하지 않고, 어떠한 단서나 실마리도 제공해 주는 법이 없다. 하여 부친이 남긴 수백 장의 그림들이 단서라 생각해 이리저리 큰 그림을 그려보지만 영 맥을 못 춘다. 연달아 발생한 살인사건의 현장으로 이동하는 데에 시간을 다 버려, 수사 다운 수사의 장면도 없다시피 하다. 또한 허리케인의 접근으로 사방은 쑥대밭이 되어가고, 그래서 일행들은 사건보다도 피해민들을 챙기는 게 더 급선무가 된다. 멘탈도 겨우 붙잡고 있고, 쉬지 못한 육체는 죽을 맛이고, 저 바깥세상은 재난으로 난리 법석인 그야말로 정신 산만의 대 환장 콜라보였다. 좋아, 그것까지도 어떻게든 참아줄 수 있어. 다 끝나가는데도 범인을 꽁꽁 숨겨두는 건 너무 심했고, 개연성이 1도 없는 범인의 정체는 진짜 독자 기만이라는 생각 밖에 안 드네. 그렇게나 촘촘했던 빌드업의 결과가 이거라고? 야야 이건 용두사미도 아니고 아예 꼬리가 없잖어.
저자는 이 작품으로 ‘차세대 스티븐 킹‘이라는 타이틀을 얻었단다. 진짜 날로 먹는 데도 정도가 있지, 나님은 반댈세. <블러드맨> 말고는 국내에 출간된 작품이 없다는 걸로 보아 ‘버블 킹‘이라는 별명이 더 맞지 않을까. 총을 쏘지 않을 거면 등장시키지 말아야 한다는 체호프의 말처럼, 괜한 설정과 불필요한 묘사로 분량만 늘리지 좀 말자. 알맹이보다 포장지에 진심인 작가들은 진짜 관자놀이에 하이킥 좀 맞아봐야 정신 차리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