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텔 뒤락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69
애니타 브루크너 지음, 김정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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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구매했었는지 기억도 없는 <호텔 뒤락>을 읽었다. 솔직히 그저 그랬는데 빼어난 해설 때문에 별 넷을 주었다. 정녕 이보다 잘 쓰진 못하리라 생각될 만큼 훌륭한 분석이었다. 하여 자신 없어진 나님은 최대한 해설과 겹치지 않는 선에서 평을 적어보겠다. 소설가 이디스는 어떤 불명예를 안고서 호텔 뒤락에 피신해있는 중이다. 이곳에서 만난 사람들과 고통을 달래고 글쓰기로 멘탈을 회복할 예정이며, 여성들이 사회와 관계 맺는 방식을 통해서 자신의 정체성을 살펴보게 된다는 작품이라나.


호텔에 있는 동안 글이나 쓰겠다던 다짐이 무색할 만큼 집필은 진전이 없었다. 단조로운 삶의 권태로 무기력해진 이디스 앞에 나타난 사업가 네빌. 그녀의 선입견과 페르소나를 들여다본 그는 많은 조언을 건넨다. 그녀는 자신이 이성적인 사고와 합리적인 판단을 하고 있다고, 남들처럼 사회적 제도와 규율에 억지로 자신을 밀어 넣을 만큼 어리석지 않다고 믿는 듯했다. 이디스의 억눌린 무언가를 본 네빌은 그녀의 관점을 바꿔보도록 권한다. 그저 믿고 싶은 대로 끌려다니지 말고, 감정의 과잉에 속지 말고, 좀 더 유연한 자기중심적인 삶을 습득하라면서. 사회와 관계를 정하는 잣대가 강하다 보면 자꾸 선을 긋게 된다는 거였다. 과연 그 말대로 이디스는 남들을 자기 입맛대로 속단하는 경솔함이 없지 않았다. 그것은 소설가라는 직업병이 한몫했을 테지만 세상을 이분법으로 바라보는 몹쓸 버릇임에 틀림없었다.


나님은 불순함의 감지센서가 고도로 발달한 탓에 남들과 허물없이 지내기가 참 쉽지 않다. 특히 예상대로의 모습들을 볼 때마다 그 선입견들은 더욱 확신을 갖게 된다. 그렇게 이것저것 재고 따지다가 내려놓지를 못해 매번 고립돼버리는 것이다. 또 나처럼 고립된 사람들만 눈에 들어오기 시작해 세상은 온통 병자, 환자들로만 차고 넘치는 지옥처럼 느껴지게 된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부정적인 속내와 태도를 고수하게 된다는 말이다. 내가 볼 때 이디스는 나와 다르지 않다. 지난날의 잘못과 더불어 유배지나 다름없는 호텔 생활, 상대하기 피곤한 타입의 호텔객들. 여러 요소들이 그녀를 무대 밖으로 밀어내었고, 거기에 이디스도 저항 없이 끌려다녔다. 네빌은 바로 그 점을 지적해 준 것이다.


이어서 대답한 이디스의 발언이 충격적이다. 자신은 사랑 없이는 살아갈 수가 없다면서. 주변과 딱 필요한 만큼만 관계를 유지하고 절대 거리를 좁히는 법이 없는 그녀의 속 사정은 누구보다도 사랑을 갈망하는 것이었다. 물론 이때 한 말은 에로스적인 사랑을 뜻했으나 더 넖게는 아가페와 플라토닉까지 포함한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이디스의 과제는 도덕적 기준의 벽을 허무는 법을 익히는 것일 테다. 하나 네빌은 그것보다는 사랑 자체에서 벗어난 모습이 되는 게 먼저라고 하였다. 사랑을 제대로 배우지 못했던 이디스는 제 사랑이 커지는 대로 놔뒀다가 그 부피에 못 이겨 무대 밖으로 밀려났다. 따라서 사랑의 부피를 줄여야만 원래 자리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으로 해석된다. 그러면 이다음엔 뭐 어떡하라는 걸까? 결혼을 해서 사회적 지위를 갖춰야 한단다. 그 말은 결혼 자체가 아니라 지금보다 더 넓은 세계로 뛰어들라는 의미였다.


이제 시간을 거슬러 이디스의 과거로 넘어간다. 그녀는 어느 유부남과의 금지된 사랑을 즐기고 있었지만 현실을 직시한 뒤 홧김에 다른 남자와 약혼을 한다. 그리고 문제의 결혼식 날, 모든 준비를 다 마친 상태에서 그녀는 결혼식에 불참한다. 이디스의 평판은 그야말로 곤두박질을 쳤고, 본인 스스로도 용납이 안되어 죽을 맛이었다. 그 사건은 유부남을 못 잊어서라기보다 자신이 누군가의 아내가 되고, 어딘가에 종속된다는 것과는 맞지 않다는 데서 비롯된 확신이었다. 아무튼 그렇게 살던 곳을 떠나와 이 구석진 장소의 호텔까지 오게 됐던 것. 그래 뭐, 도망친 건 그렇다 치고 다시 복귀할 수나 있는 지가 더 궁금하던데.


솔직히 이 정도 가지고는 좀 약하다 싶었는데 웬걸, 페미니스트를 호되게 질책하는 내용으로 이어진다. 이 책이 84년도에 나왔으니까 지금과는 다른 유형을 말하는 것일 테지. 호텔에는 남자들의 시중을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요구하고 즐기는 콧대 높은 여성 객들이 있었다. 그녀들은 손님으로서가 아닌 여성으로서 그 특권을 누리는 중이었고, 이것이 남자들에게 쉬운 표적이 된다며 불명예스럽다던 이디스의 한탄이 쏟아진다(170p). 그러는 한편 네빌과 붙어지냈단 이유로 이디스도 쓸만한 남편감을 노리는 속물처럼 보이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작중에서 그녀가 닮았다고 하는 버지니아 울프처럼, 현대 여성의 홀로서기에는 남성의 그늘을 벗어날만한 조건이 필요하다. 그렇듯 이디스도 고유의 것으로 자립하고자 해왔으나 그녀 또한 여성으로서 기대고 싶어 하는 이중성을 떨쳐내진 못하였다. 아마도 이 점을 시사하기 위해, 또 앞으로의 행보를 위해 쓴 작품이었다고 생각된다.


자, 그러면 이디스를 비롯한 현대 여성들은 이대로 남자 보기를 돌같이 해야 되느냐면 그런 게 아니다. 안팎으로 자신의 사회적 체면을 지키는 선에서의 관계를 만들면 되는 것이다. 하여 저자는 주인공을 네빌과 맺어주어 그 관계를 성립시키고자 했다. 아직도 그녀는 유부남에 대한 미련이 남아있는 상태이고, 네빌도 이디스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서로가 서로에게 필요한 이유를 납득했기에 결합이 가능했다. 이렇듯 남녀의 다른 조건과 형편을 존중하는 것이 올바른 공정이지만, 오늘날에는 생리적 차이를 배제한 동등함을 공정이라고 보고 있다. 과거 작가들이 강조한 페미니즘의 진보는 결코 이런 게 아니었을 거란 생각이 든다.


호텔에서의 생활이 유배생활이나 다름없다는 표현이 자주 나온다. 그것은 속해있던 사회와의 단절을 뜻했지만, 돌아갈 곳을 잃었다는 말이기도 했다. 나를 받아줄 이가 없다면 그곳이야말로 유배생활이 아니고 뭐겠는가. 아무튼 시대가 많이 바뀌었으니 자립의 조건 또한 변했다고 볼 수 있다. 버지니아 울프는 현대 여성의 자립에는 돈과 방의 필요성을 말했었다. 바글바글한 인간들 사이에서 개인 공간이 필요했던 그때와 달리 지금은 공간이 넘쳐나고 오히려 북적이는 데를 직접 찾아가야만 하는 세상이 되었다. 그렇다면 현대의 자립 조건에는 타인과 연대하는 인간관계의 능력과 기술이 포함되어야 하지 않나 싶다. 저자의 인터뷰 중에, 성공을 거머쥔 고아로 살기보다 여러 자식을 낳은 엄마로 살고 싶다는 얘기가 있다. ‘자율성의 필요‘와 ‘관계의 필요‘가 갈등관계가 된다는 점을 말하고 있는데, 두 가지가 있어야만 하는 사람이 하나에만 집중했으니 결여된 것에 공허를 느끼는 건 당연하다.


실로 이디스는 자신의 커리어를 택했지만 사회로 뛰어드는 데에는 꽤나 소극적이었다. 게다가 혼인을 막 결사반대하는 쪽도 아니었다. 이래도 그만 저래도 그만이 아닌 어중간한 위치에서 환상을 쫓고 있는 주인공. 이런 이디스가 글쓰기로 도피했다고 하는데, 정작 소설 집필은 손도 안 대고 가끔씩 편지 작성이나 하는 정도를 도피였다고 볼 수나 있나 싶다. 암튼 피곤해서 여기까지만 쓰겠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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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그말리온 범우희곡선 24
조지 버나드 쇼 지음, 신정옥 옮김 / 종합출판범우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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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읽는 버나드 쇼의 희곡인데 정말 술술 잘 읽힌다. 셰익스피어보다도 많은 작품을 냈다던 극작가라는데 나는 전혀 몰랐다. 제목의 ‘피그말리온‘은 그리스 신화의 키프로스 왕의 이름이라는데 이것도 지금 알았고, 그가 사랑했던 여인의 조각상이 아프로디테에 의해 생명체가 되었다는 내용에서 따온 작품이란다. 하여 열렬한 사랑 이야기겠거니 했는데 각도를 확 틀어서 어딘가 닮은 듯 닮지 않은 이야기로 창조해냈다. 참신하기는 해도 지금 와서 보기엔 그냥저냥이라 좋았다 나빴다 말하기가 어렵다. 낫배드와 쏘쏘의 중간쯤.


음성학 교수 히긴스는 빈민가 출신의 소녀를 공작부인으로 탈바꿈하는 실험을 강행한다. 걸걸한 언행과 까칠한 성품의 소녀는 교수의 친구인 대령의 전폭 지원하에 6개월간 숙녀 수업을 받게 된다. 그렇게 대성공한 귀부인 프로젝트의 종료로 이별을 앞둔 소녀는, 교수에게 배운 음성학을 남들에게 써먹겠노라고 선언한다. 이에 히긴스는 자신의 무기를 가지고 협박해오는 소녀에게 쩔쩔맨다는 뭐 그런 얘기.


거리의 부랑아가 귀부인이 된다는, 이것도 전형적인 신데렐라 내용이다. 사회적 신분이 전혀 다른 교수와 소녀는 각자의 이익 때문에 동맹 관계가 된다. 비혼 주의에다 인간미가 요만큼도 없는 히긴스 교수는 소녀를 한낱 실험체로만 대했고, 그래서 더욱 강성 민원 고객처럼 나오는 소녀와의 케미가 참 볼만하다. 이런 쌈닭 같은 성질을 죽여서 숙녀로 거듭났다는 것도 대단한데, 그녀에게 죽어도 마음 주지 않는 히긴스도 대단하긴 했다. 소녀의 본판이 꽤 괜찮았다는 설명과, 6개월 동안 그의 업무들을 봐줄 만큼 가깝던 걸로 봐서는 히긴스가 나름대로 선을 그었다고 생각된다. 여자 보기를 돌같이 하는 공감 제로의 로봇으로 묘사되긴 했지만 내 생각은 그렇다.


귀부인 수업을 자처한 히긴스도 기품 있는 신사랑은 거리가 멀었다. 상스러운 말도 자주 내뱉고, 불쾌한 감정을 여과 없이 드러내기도 다반사였으니. 하녀와 모친에게 지적받는 게 일상이라 그런지 소녀의 생떼와 사자후도 잘만 받아주는 괴짜 그 자체였다. 그렇게 으르렁대던 소녀도 막상 헤어진다고 하니 서운함이 북받쳐올라 울분을 토한다. 어째서 당신은 나에게 다정히 대해주지 않느냐면서. 원래대로라면 여기서 얼레리꼴레리 하고 해피엔딩이라야 하건만 저자는 히긴스의 캐릭터를 끝까지 밀고 나갔다. 여튼 거듭난 그녀가 상류사회로 진출할지, 벽에 부딪혀 다시 예전 삶으로 돌아갈지는 알 수 없다. 허나 돌아간다면 그의 실험은 실패로 끝난 것일 테다. 남들이 소녀를 귀부인으로 착각하는 선에서 끝이 아니라, 앞으로의 삶을 대하는 관점과 태도의 변화까지가 실험 성공의 척도라고 생각된다.


이 외에도 소녀의 부친, 소녀에게 구혼하는 남자 등의 이야기가 있는데 하나같이 히긴스의 병맛을 조명하는 느낌이라서 생략했다. 워낙 유명한 작품이라 설명 안 해도 뭐 다들 아실 거고. 오히려 평을 남기는 게 민망한 수준. 가볍게 읽기는 좋았다만 희곡을 썩 즐기질 않아서 저자의 작품을 더 읽게 될지는 모르겠다. 이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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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5-02-25 17: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 ‘마이 페어 레이디‘ 원작으로 알고 있어요.^^

물감 2025-02-25 18:30   좋아요 1 | URL
검색해보니까 평점이 높네요. 잘 만들었나봐요. 근데 170분짜리... 윽ㅎㅎ
영화에서는 둘이 맺어지는 결말이라는군요! 역시 그 편이 좀더 좋다요ㅎㅎㅎ
 
블러드맨 모중석 스릴러 클럽 45
로버트 포비 지음, 문희경 옮김 / 비채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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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책장을 비우기 위해 처분해야 할 도서 위주로 읽고 있는데 이거 이거 아주 고역이다. 처분할 대상이라는 말부터가 이미 재미없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렇다고 계속 자리만 차지하게 놔두긴 뭐하고, 읽지도 않은 책을 내다 팔기도 아까우니 꾸역꾸역 읽을 계획인데, 읽다 보니까 진짜 아까운 건 내 시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나마 내가 좋아하는 스릴러소설은 좀 낫겠지 싶었는데 웬걸, 실망과 분노가 그라데이션으로 일어나는 작품을 읽었지 뭐여. 초반에는 대작 스멜이었다가 중반부터는 너무 늘어진다 싶더니 후반 가서는 정신 산만함과 개연성 없음에 아주 혼쭐이 났다. 그러고 보니 제목에 ‘맨‘이 붙은 것치고 흡족했던 적이 없었단 말이지. 2012년도에 출간된 <블러드맨>은 과거 7080 선배들의 케케묵은 스타일을 흉내 낸다는 인상이 강했다. 정확한 나이는 알 수 없으나 스티븐 킹 세대보다는 한참 밑인 듯한데, 젊은 사람이 어쭙잖게 아날로그 감성을 쫓다 보니까 어색한 구멍이 생기는 거여. 이건 뭐 빈티지도 아니고 레트로도 아닌 어중간함 그 잡채.


미국의 어느 시골지역을 방문한 FBI 요원 제이크. 천재 화가인 부친의 정신병이 도져서, 유일한 보호자로 어쩔 수 없이 고향 땅을 밟았다. 30년도 넘게 남남인 부친이었지만, 화가의 인생이 끝났음을 생각하면 못 도와줄 것도 없었다. 악랄한 부친과의 기억은 죄다 끔찍했고, 어릴 적 모친의 살해 사건도 있고 해서 고향엔 두 번 다시 오고 싶지가 않았다. 할 수 없이 부친의 집에 머물던 중, 그 지역에서 살인 사건이 접수되었다는 FBI의 지령을 받는다. 현장에는 살가죽이 벗겨져있는 엄마와 어린 아들의 시신이 있었고, 이것은 제이크의 모친을 살해한 수법과 일치했다. 하여 반드시 범인을 잡아 지긋지긋한 FBI 생활도 때려칠 생각이었다. 한편 전례 없는 규모의 허리케인이 3일 뒤에 도착한다는 뉴스가, 안 그래도 타이트한 수사를 더욱 정신없게 만든다.


나쁘지 않은 설정이지만 솔직히 올드함의 범벅이었다. 고립된 장소, 발목을 붙잡는 재해, 주인공의 트라우마와 핸디캡, 가족 간의 과거와 비밀 등등 올드스쿨의 공식을 철저히 따르는 게 보여서 많이 식상했다. 초반에는 탄탄한 설정과 찝찝한 기분의 연출에 감탄하기도 했다. 데뷔작인 만큼 준비를 많이 한 게 느껴졌는데 그게 독이 되었는지, 빌드업이 너무도 촘촘해서 진도가 정말 느렸다. 아버지의 정신병, 제이크의 과거와 트라우마, 살인사건 수사 중 어느 것도 납득이 될 만큼 풀어내질 못했다. 그 많은 분량과 느긋한 전개를 하고서도 말이다. 먼저 주인공은 FBI가 되기 전의 생활을 잘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망가졌다고 했다. 또 어느 날은 눈 떠보니 저도 모르는 문신이 몸 전체에 새겨져 있었단다. 거기다 이렇다 할 설명도 없이, 심장에 달린 장치가 그를 제어하는 중이란다. 이렇게나 캐릭터에 몰빵했지만 정작 스토리에는 별 영향도 없었다는 사실. 빌드업에 기여하지 못하는 설정들을 보노라면 그저 있어 보이려고 힘줬구나 싶어 한숨만 나온다.


살인사건에 대해서는 딱히 해줄 말도 별로 없다. 범인은 작품이 다 끝나갈 때까지 등장하지 않고, 어떠한 단서나 실마리도 제공해 주는 법이 없다. 하여 부친이 남긴 수백 장의 그림들이 단서라 생각해 이리저리 큰 그림을 그려보지만 영 맥을 못 춘다. 연달아 발생한 살인사건의 현장으로 이동하는 데에 시간을 다 버려, 수사 다운 수사의 장면도 없다시피 하다. 또한 허리케인의 접근으로 사방은 쑥대밭이 되어가고, 그래서 일행들은 사건보다도 피해민들을 챙기는 게 더 급선무가 된다. 멘탈도 겨우 붙잡고 있고, 쉬지 못한 육체는 죽을 맛이고, 저 바깥세상은 재난으로 난리 법석인 그야말로 정신 산만의 대 환장 콜라보였다. 좋아, 그것까지도 어떻게든 참아줄 수 있어. 다 끝나가는데도 범인을 꽁꽁 숨겨두는 건 너무 심했고, 개연성이 1도 없는 범인의 정체는 진짜 독자 기만이라는 생각 밖에 안 드네. 그렇게나 촘촘했던 빌드업의 결과가 이거라고? 야야 이건 용두사미도 아니고 아예 꼬리가 없잖어.


저자는 이 작품으로 ‘차세대 스티븐 킹‘이라는 타이틀을 얻었단다. 진짜 날로 먹는 데도 정도가 있지, 나님은 반댈세. <블러드맨> 말고는 국내에 출간된 작품이 없다는 걸로 보아 ‘버블 킹‘이라는 별명이 더 맞지 않을까. 총을 쏘지 않을 거면 등장시키지 말아야 한다는 체호프의 말처럼, 괜한 설정과 불필요한 묘사로 분량만 늘리지 좀 말자. 알맹이보다 포장지에 진심인 작가들은 진짜 관자놀이에 하이킥 좀 맞아봐야 정신 차리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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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목련 2025-02-24 1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처분할 도서는 읽을 생각도 하지 않는 저는 반성합니다.

물감 2025-02-24 14:55   좋아요 0 | URL
언젠가 읽겠거니 하고 방치한 게 어언 n년이더라고요. 마음 안내키면 그냥 파는게 맞는 듯 합니다...
 
황금 물고기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5
J.M.G. 르 클레지오 지음, 최수철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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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노벨 문학상 수상작인 <황금 물고기>는 블로그 새내기 시절, 이웃분들이 꼭 읽어보라며 추천해 주었던 작품이다. 그때의 나는 고전을 읽을만한 수준도 못되었거니와 내 성격상 인기도서에는 영 손이 가지 않은 탓에 이제야 읽게 되었다. 그리고 내 예상대로 그렇게 호들갑 떨 정도의 작품도 아니었다. 노벨 문학상의 기준을 모르겠으니 그건 그렇다 쳐도 스토리, 주제, 메시지 중 어느 하나 뚜렷한 것이 없었다. 기존 평들을 보면 스토리보다는 문장력이 돋보이는 작품으로 치켜세우던데 그것도 딱히…….


<황금 물고기>는 납치당한 아프리카 소녀의 생존기이다. 솔직히 나는 프랑스 출신의 백인 남성이 흑인의 생애를 논하는 것 자체가 좀 거시기하다. 아프리카에 20년도 넘게 살았었다고 하니 흑인들에 대한 애정이 남다를 순 있겠다. 그렇지만 그들의 민족성이나 정체성에 대해서 뭐 얼마나 잘 알기에 대변을 하느냔 말이다(심지어 이이는 서울 배경에 한국인을 주인공으로 한 작품도 써냈다는). 작중에서 흑인들의 사회적 시선과 대우가 적나라하게 묘사되고 있지만 냉정히 바라보면 전부 겉핥기 식의 중계방송일 뿐이다. 그럴거면 차라리 에밀 졸라의 자연소설처럼 써서 풍부한 해석을 갖도록 하는 편이 어떨는지.


어느 흑인 노파에게 팔린 꼬마 라일라는 감금생활 속에 하녀로 살아간다. 노파의 아들 부부와 이웃에게 학대 및 성추행을 당한 라일라는 탈출 후 어느 여인숙으로 피난한다. 고삐 풀린 소녀는 마침내 자유의 몸이 되어 여기저기 쏘다니며 도둑질에 맛 들인다. 또한 여인숙의 문란함을 날마다 직관하여 성에 대한 감흥마저 없어진다. 이처럼 현실의 온갖 어두운 면을 봐버린 라일라는 오히려 삶에 의혹을 가지는 법이 없었다. 심지어 자신을 잡으러 다니는 노파의 아들 부부와, 갑자기 다가오는 낯선 남자들에게 도망치기도 다반사인데 말이다. 보통 이런 입장이면 현실 부정, 신세 한탄, 적개심, 망연자실 중에 하나였을 텐데, 라일라는 어떤 일그러짐도 없이 타고난 생존 본능으로 잘만 헤쳐나간다. 이 말 같지도 않은 설정 붕괴 때문에 어떤 아픈 장면에서도 몰입하지 않을 수가 있었다. 이걸 노린 거라면 노벨상 인정한다.


훔친 돈이 좀 모였는지, 어느 임신한 언니와 배 타고 프랑스로 넘어간 그녀. 그 악몽 같았던 아프리카를 떠나와 인생 2라운드를 시작해 볼 랬더니, 프랑스는 더 끔찍한 지옥이었다. 불법 이민자들의 단속도 심했고, 부랑자와 깡패와 마약범 등등 위험해 보이는 인간들로 넘쳐나는 백인들의 무대였다. 어찌어찌해서 인맥을 만들고 거처도 구하고 일자리도 얻어냈지만, 주변에서 혹은 관계자가 그녀를 배신하고 성폭행하는 일이 반복되었다. 동네를 옮겨 다니다가 미국으로 건너가서도 사정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정녕 보고 있으면 나까지 남성 혐오에 걸릴 지경이다.


라일라는 삶의 목표 따위가 없었기 때문에 남들의 권유대로 제 몸을 맡겼다. 누가 오라 하면 오고, 가라 하면 가는, 철저하게 남들이 정해준 기준에 휘둘리며 살았다. 백인들의 세상에서 흑인은 자유롭지 못했고, 그래서 아프리카에 있을 때만도 못한 처지라고 할 수 있었다. 언젠가 죽으면 고향에 묻어달라는 친구의 할아버지 유언에, 자기만 모르는 고향과 정체성을 고민해 보게 된다. 그리고 ‘왜 언젠가는 도망치지 않을 수 없는가?(212p)‘라는 책 속의 문장을 보면서, 자신이 표류하는 한 마리의 물고기라고 생각한다. 다만 작중에서 ‘황금 물고기‘라는 표현은 없었는데, 그렇다면 황금의 뜻이 뭔지 해석해 보자. 어딜 가나 꼬이는 남녀들로 보건대 라일라의 비주얼은 제법 나이스한 편일 게다. 한 번도 좋은 결말은 없었지만 그녀가 분에 넘치는 관심과 사랑을 받은 것도 사실이다. 따라서 라일라는 남들을 자신에게로 끌어당기는 빛이 있었다고 하겠다. 문제는 물고기가 주목받고 눈에 띄어봤자 하나도 좋을 게 없다는 것. 빛나면 빛날수록 포식자들의 밥이 될 테니 말이다.


정리하려고 보니 꿈보다 해몽이 아닌가 싶다. 그냥저냥 읽었지만 클레지오를 다신 볼 것 같진 않다. 솔직히 노벨상은 나랑 잘 맞지가 않음. 부커 상도 좀 그렇고. 그나마 공쿠르 상이 읽을만했던. 아무튼 요번에도 꽝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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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브리맨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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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벽돌책을 읽었다면 무슨 무슨 규칙에 따라서 얇은 책을 읽어주는 게 인지상정이다. 현재 내 서재에 꽂힌 책들 중 가장 얇아 보이는 로스 옹의 <에브리맨>을 집어 들었다. 그의 폭발적인 필력과 에너지를 기대하면서. 그러나 이 작품은 듣던 것만큼 마구마구 좋다는 느낌은 아니었다. 뭐랄까, 메시지는 훌륭한데 전달하는 방식에서 시큰둥했거든. 한 줄로 요약하자면, 후회막심한 노인의 데드라인 이야기이다. 사실 죽음을 앞에 두고 후회하지 않을 인간이 몇이나 되겠냐고 생각들 할 것이다. 그래서 제목처럼 모두의 이야기라 하고 싶었나 본데, 오히려 공감해 주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여러 번 들었다. 솔직히 이게 좋은 작품인지도 잘 모르겠다.


이름마저 주어지지 않은 이번 주인공은 보석 상인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남들처럼 평범하게 직장을 잡고, 결혼을 하고, 자식을 낳고, 바람을 피우고, 이혼을 하는, 아주 전형적인의 미국 남자이다. 재혼을 세 번이나 했을 만큼 대단한 매력 지수에 비해 건강지수는 전혀 비례하지 않았다. 이런저런 큰 병들로 수차례 입원하고 수술하고 회복하길 반복해야 했던 이 남자. 늘 정력을 쏟는 데에만 정신이 팔려서 가족들은 뒷전이었고, 그래서 나이가 차갈수록 가까운 사람들이 하나둘씩 그를 떠나가게 된다. 그렇게 고립돼가는 제 처지를 돌아보며 외로움을 맞는다는 노인의 뻔한 전개인데, 지금 내가 쓴 것만 읽더라도 막 안됐다는 생각이 안 들지 않나? 뿌린 대로 거둔다 했으므로, 스스로 망친 삶의 대가를 치르는 것은 당연하다. 헌데 그 당연한 것을 위해서 이 작품을 써내진 않았을 테지.


자식들과 아내들이 자기를 비난하는 것이 어딘가 부당하다는 뉘앙스를 풍긴다. 가족 윤리관이 박살 나있는 이 상남자에게 내려진 형벌은 병마보다도 ‘늙음‘이 훨씬 가혹한 것이었다. 그래서 병수발 들어줄 가족도, 병문안을 올 이웃도 없다는 현실에 애꿎은 세상을 탓하곤 했다. 내가 궁금한 건 이거였다. 화목한 집안에서 태어난 그가 어째서 가정파탄의 장인이 되었는가 하는. 부모도 부모의 역할을 잘 해내었고, 그를 끔찍이 생각하는 친형도 사업과 가정을 완벽히 일궈냈다. 그래서 주인공의 돌연변이가 좀처럼 이해되지 않았다. 이건 그렇다 치고, 나중에는 타고난 건강 체질의 형까지 시기하는 못난 놈의 전형을 보여주기까지 한다. 당연히 지긋지긋한 수술을 자주 받다 보면 멘탈이 약해질 수도 있다. 그런데 꼭 하나뿐인 혈육에다 유일한 보호자인 형에게 몹쓸 심보를 가져야겠냐는 말이다. 에잇 퉤.


미술 전공의 주인공은 언젠가 아카데미를 열어 이웃들을 초대한다. 그중 한 노부인이 병으로 쓰러져, 곁에서 간호하던 주인공은 그 이웃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된다. 병의 고통으로 몸부림치는 모습과, 그녀를 보살펴줄 남편이 없다는 사실을. 이내 들려온 노부인의 자살 소식은, 오히려 그 결정과 행동을 존중하게 만들어주었다. 여태껏 세상에 불평불만이던 자신에게 드디어 관대해질 차례가 온 것이다. 하여 전처와 아들들의 지난 호소와 아픔들을 헤아리고, 가까운 사람들을 싹 다 밀어냈던 본인의 잘못을 반성한다. 이것은 주인공만의 특별한 심경 변화가 아니다. 단지 인간이라면 누구나 들법한 후회와 자기 연민이다. 그는 병원을 수년 동안 들락날락하면서 여러 환자들의 죽음을 목격했기에 자신의 죽음 또한 그려봤을 것이었다. 하여 남은 시간의 가치도, 가족의 소중함도, 삶을 공유하는 기쁨도 어서 움켜쥐기를 바랐다. 하지만 세월은 상남자를 겁쟁이로 바꿔놓았다.


정녕 이 작품이 노년의 고군분투를 노래하는 중일까. 글쎄올시다. 주인공은 아들과 동생, 남편과 아버지의 역할 중 어느 것 하나도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 생명이 그 자체로 위대한 것처럼 아무개의 죽음도 그렇다는 법은 없다. 흥청망청 살다가 죽기 직전의 회개로써 옛 죄를 청산하려는 이들을, 신께서 과연 후하게 받아주실까 하는 의문도 든다. 아무튼 <에브리맨>이 나와 당신의 이야기였다고 어디 가서 말하고 다니지는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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