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간비행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66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 지음, 용경식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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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미쳤지, 바로 앞전에 프랑스 문학을 그렇게 깠으면서 연달아 읽었다니. 그나마 분량이 짧아서 다행이었지, 프랑스 문학을 자주 읽었다간 독서 슬럼프가 찾아올 것만 같다. 생텍쥐페리의 대표작인 <야간비행>은 자전소설까진 아니지만 비행 조종사였던 시절을 바탕으로 만든 것이니 얼추 맞지 않을까나. 그래서 당연히 파일럿의 이야기라고 생각했거늘, 그보다는 항공사의 관리소장이 주인공인 작품이어서 갸우뚱했다. 작품 얘기를 하기 전에, 생텍쥐페리는 나님이 칠색 팔색 하는 배경 묘사로 분량 잡아먹는 짓거리를 하지 않아서 맘에 든다. 사실 이이의 작품들은 전쟁 통에 썼다 보니 자연스레 ‘용건만 간단히‘ 스타일이 된 게 아닐까 한다.


항공우편회사의 관리소장인 리비에르는 전형적인 보스 기질의 상사이다. 현대에 와서는 이 같은 ‘보스‘가 아닌 ‘리더‘가 필요하다고들 하지만, 항공사처럼 위험천만한 분야와 직군에서는 엄격한 규율로 다스리는 게 맞다고 생각된다. 겉보기엔 냉정하고 융통성 없게 보여도 소장은 부하들과 일터의 모든 것을 아끼고 사랑했다. 단지 그런 애정을 드러내어 흐트러진 모습을 보일 순 없었기에 반강제적으로 냉혈한이 되었을 뿐이다.


죄는 미워해도 사람은 미워 말라는 격언처럼, 소장은 오직 부하들의 잘못과 실수만을 견책하였다. 결단코 사람 자체를 깎아내린다거나 무능함을 걸고넘어지지 않았다. 문제는 이런 소장의 속내를 알 길이 없는 직원들이, 상사가 어떻게 잘잘못들을 책임지고 있는지를 모른다는 거였다. 계속 그런 식이라면 모든 사건사고의 총책임을 진다 한들 지지는커녕 납득조차 받지 못할 것이었다. 자신만의 경영철학도 물론 중요하지만 그것이 ‘전부‘여서는 안될 텐데, 왜 그렇게까지 악역을 자처하려는 건지 모르겠더라.


국제 우편기를 조종하는 야간 비행사들은 언제나 대 자연의 공포를 느낀다. 태풍과 눈보라, 소용돌이, 뇌우 등등 비행사의 순간적인 판단과 대응으로 모든 상황을 헤쳐나갈 따름이다. 하지만 소장은 FM대로 하지 않는 비행사들을 다그치기 바쁘다. 그도 속으로는 무사 귀환에 기뻐하지만, 자신의 사명은 부하들을 두려움으로부터 구해내는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그래 뭐 믿고 기대하는 만큼 호통친다는 것도 알겠는데, 그렇게 털끝 하나 인정해 주지 않으면 직원들이 제 성장과 실력 향상을 체감이나 할까 싶다.


또 다른 주인공인 조종사 파비앵은 운항 사고로 끝내 실종되고 만다. 그처럼 생텍쥐페리 역시 똑같은 결말을 맞았다고 전해진다. 마치 자신이 어떻게 죽을 것을 알고 미리 써둔 유언장 같은 작품이 아닌가. 비행기에 대한 저자의 애정이 남다른 건 알겠는데, 한밤중에 국경을 넘어서까지 위험한 비행을 꼭 해야만 했을까. 운행하는 동안 무서운 날씨에 벌벌 떨거나, 그렇지 않으면 외로움에 삼켜지거나 둘 중 하나뿐인 그 일의 어디가 그렇게 좋았을까. 듣자 하니 기차나 배와의 속도 경쟁을 위해 야간에도 비행을 했다는데, 기름 한 방울 값도 안되는 우편들을 매일 그렇게 목숨 걸면서까지 갖다주고 올 일인가. 여하간 기대했던 것과는 많이 달라서 실망스러운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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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인생 새움 세계문학
기 드 모파상 지음, 백선희 옮김 / 새움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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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을 다루는 소설은 언제 읽어도 질리지 않고 재미가 있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 사는 게 다 거기서 거기인지라, 나와 전혀 다른 남들의 인생을 들여다봤자 새로울 것도 없고 얻어 갈 것도 없긴 하다. 그럼에도 그 어떤 이야기보다 가장 인간적인 성장 서사에서 배울 점이 가장 크다고 하겠다. 현존하는 성장 소설은 하나같이 딱하고 우울하고 어렵고 짠한 생애를 담아낸다. 다만 주인공들이 똑 부러지느냐 어리숙하느냐, 독립적이냐 관계 의존적이냐에 따라 책 내용은 교훈이 되기도 하고 경고가 되기도 한다. <어느 인생>은 철저하게 경고에 관한 내용인데, 정말 몇 번이나 화딱지가 났는지 셀 수 없을 만큼 갑갑했다. ‘초라한 진실‘이라는 부제도 그냥 그랬는데, 인생의 어느 지점이 초라하단 건지 잘 모르겠더라고.


한 중반까지는 거의 내용이랄 게 없고, 온통 배경 묘사와 상황 설명으로 가득하여 이번에도 똥 밟았구나 싶었다. 하여간 프랑스 작가들은 죄다 겉멋만 들어가지고 소설도 시처럼 써버릇하는 게 정말 꼴불견이다. 그 나라는 현대작가들도 다 똑같다. 적당히라는 게 없이 늘 과해서 몰입감도 흡인력도 영 맥을 못 춘다. 그렇다 보니 ‘에밀 졸라‘같은 작가는 너무 희귀해서 그 자체로 유니콘 취급을 받는 것이다. 굳이 따지면 모파상의 스타일도 양반은 못된다. 분명 날것의 감성인데 자꾸 엉뚱한 데서 우아함 한 숟갈, 고상함 한 숟갈 넣는 게 아주 꼴 뵈기 싫드라. 내가 또 그런 불순한 의도는 기가 막히게 잘 캐치하거든. 첫 작품이라니까 곱게 넘어가겠다만.


불필요한 묘사가 많아서 그렇지, 스토리 자체로는 낫 배드였다. 남작 부부의 딸, 잔느는 수녀원 생활을 끝마치고 집으로 돌아온다. 도시보다 시골생활이 더 좋았던 소녀는 그렇게 마음껏 해방감을 누렸다. 어느 날 사제가 소개해 준 자작과 떠밀리듯 결혼하게 된 잔느. 본인의 의사도 없이 유부녀가 된 것도 좀 그랬지만, 남편이 성격파탄자로 돌변하여 결혼생활에 대한 환상이 와장창 깨졌더랬다. 내게는 딱 여기까지가 ‘운‘이 없었다고 생각되고, 이후로는 잔느가 제 팔자를 꼬아놨다고 밖에 설명이 안되었다. 수녀원을 나온 걸로 보아 그녀의 교육수준이 낮지는 않을 텐데 어째 하는 생각들마다 이다지도 감상적인지 원. 그래서 남편한테 이리저리 휘둘리고, 아무 하는 일도 없이 ‘존재‘하기만 하는 삶을 살아갔다. 진짜 콩 심은 데 콩 난다고, 잔느의 부모도 순박하고 물러터진 성격이라, 폭군 같은 사위한테 깨갱하고 있었다. 잘못 돌아가는 걸 느끼는데도 왜 다들 가만히만 있는 걸까. 좋게 좋게 넘어가는 것도 정도가 있지, 수치스러워했다가 히죽거리길 반복하는 게 나로선 도무지 이해가 안 되던데.


이 작품의 테마는 ‘간통‘이다. 주인공 외에 모든 인물이 간통에 빠져있다. 그런 사실이 하나둘씩 드러날 때마다 잔느는 멘붕과 현타를 받고, 나중 가서는 인간의 추악함에 굴복하고 타협해버린다. 마음 둘 곳 없었던 그녀는 오직 아들에게만 관심과 정성을 쏟았는데, 아니나 다를까, 애지중지 금지옥엽인 아들은 둘도 없는 등골 브레이커로 자라난다. 주변인들이 잔느에게 정신 좀 차리라고 그리 일러도, 아들바보였던 잔느는 당장 파산하더라도 아들에게 헌신하겠단다. 자식에게 광적인 집착을 보이는 것도 이해가 된다. 수많은 실망, 배신감, 상처, 억압으로 눈물이 마를 날 없었던 그녀에게 낙이라고는 아들 하나뿐이었다. 하지만 아들의 성장과 미래는 생각지 못하고, 평생 어미 곁에서 재롱잔치나 하길 바라는 건 결코 제정신이 아니었다. 남편의 바람에도 화 한번 못 내고, 가톨릭 사제의 으름장에도 꼼짝 못 하고, 불효막심한 자식한테 쓴소리도 못하는 그녀. 내가 갑갑해한 포인트는, 원래부터 잔느가 고분고분한 성격이 아니라는 데에 있었다. 그렇다고 그녀가 가정의 평화를 위해, 가문의 평판을 위해, 내조의 여왕 소리가 듣고 싶어서 참고 견딘 것도 아니었다. 잔느의 진짜 문제점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작품의 원제는 <어느 인생>이지만, 국내에는 <여자의 일생>으로 출간되어왔다. 아마 주인공이 여자라서 그랬을 텐데, 인생이 그토록 초라한 것이라면 성별이고 계급이고 다 무슨 소용이랴. 누구에게나 닥쳐오는 고난과 역경 앞에서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생겼냐며 통탄하기만 해서는 안 될 일이다. 단 한 번도 아픔에 맞선 적이 없었던 잔느를 보면서 연민은커녕 인생을 날로 먹는다는 생각뿐이었다. 이처럼 모파상이 주는 경고의 메시지는 명확하다. 내 방식대로 말하자면, 바른 삶을 추구하라는 것이다. 성경 구절 중에는 이런 말이 있다. ‘너희가 선한 데 지혜롭고 악한 데 미련하기를 원하노라(롬 16:19).‘ 그러니까 선하기만 한 것은 본이 안된다는 뜻이다. 정의는 반드시 승리한다던 만화영화 속 대사가 현실에서 얼마나 들어맞았던가. 따라서 흘러가는 세월에 나를 맡기기만 한다면 영락없는 초라한 인생이 될 테니, 괜한 데에 정신 팔려서 주위를 못 살피는 일이 없도록 해야겠다. 것보다 모파상 당신, 지금 투아웃이요. 쓰리아웃 되면 진짜 얄짤없습니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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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열린책들 세계문학 152
오스카 와일드 지음, 윤희기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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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쁜 일들이 지나가서 다시 본격적인 독서 모드로 돌아가고자 집어 든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은 좀처럼 속도가 나질 않는 작품이었다. 짧은 분량에 비해 화두가 너무 많아서 여간 골치 아픈 게 아닌 이 작품을, 기존의 수많은 평들과 차별화를 갖기란 도저히 불가할 듯하여 그냥 가볍게 쓰고 말란다.


주인공 도리언 그레이는, 요즘 표현으로 하면 세기의 얼굴 천재라 하겠다. 그를 숭배하는 어느 화가가 도리언의 초상화를 정말 기가 막히게 그려서 그에게 선물까지 했는데, 정작 도리언은 그 작품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이유인즉슨 화가의 친구이자 극 냉소주의자인 해리 경의 각종 훈수질 때문이었다. 순수함 그 자체였던 도리언은 해리 경으로 인해 세상 때가 잔뜩 묻게 되는데, 아무튼 화가에 그림 속에 있는 자신은 현재의 자신보다도 더 순수한 예술미가 담겨 있어 비교 아닌 비교가 되는 것에 기분이 상했다. 하여 그림 속에 아름다움이 현실에 박제되고, 저 그림이 대신 늙어갔으면 하고 소원을 빈다. 그 바람은 놀랍게도 현실이 된다.


말빨로는 절대 이길 수 없는 해리 경의 박식함은 상당히 재수 없지만, 틀린 말은 하나도 없음을 인정하는 도리언. 그래서 한동안 그와 어울리며 인생의 양면성을 실컷 터득하게 된다. 그럴수록 많은 실망과 함께 말할 수 없는 쾌감도 생겨남으로써 갈수록 순수를 잃어버린 제 모습에 취해간다. 그는 한 여배우와 사랑에 빠졌다가 그녀의 발연기를 보고 이별을 고했는데, 얼마 뒤에 일어난 그녀의 쇼크사로부터 본격적으로 영혼이 타락하기 시작했다. 다만 겉으로는 여전히 신사다운 품행과 차림새를 유지한 바, 이 겉과 속이 딴판인 스스로에게 꽤나 오랫동안 시달리는 모습을 보여주어 그래도 연민을 느끼게 해주었다. 허나 이 상태도 얼마 가지는 못했다.


도리언의 영혼이 타락해갈수록 초상화의 모습은 흉측하게 변해갔다. 창고에 그림을 처박아 두고 들락날락하는 그는, 매번 달라져있는 그림의 상태가 곧 자신의 영혼을 나타내준다는 걸 알게 된다. 그림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고자 도리언은 온갖 예술 분야에 손대기 시작한다. 진기한 악기들을 수집하여 연주도 해보고, 각종 보석들을 모으기도 하는 등 다양한 데에 시선을 뺏기고 마음을 줘보려고 애를 쓴다. 하지만 타락한 영혼과 예술은 좀처럼 결합되지 않거나 오래가지 못하였고, 그렇게 애꿎은 해리 경만 탓할 뿐이었다.


시간이 지나 어느덧 마흔 살 가까이 된 도리언. 여전히 풋풋한 스무 살의 모습이었지만 그는 과거의 해리 경보다 더한 회의주의자가 돼버렸다. 그와 어울리는 자마다 불행해진다는 말이 떠돌 만큼 평판이 안 좋았는데, 마침 초상화를 그려준 화가가 도리언을 찾아와서 화를 당한다. 기어코 도리언의 영혼은 세탁이 불가한 상태가 되었는데, 여기서 나는 파괴적인 감정에 브레이크가 고장 난 기분이 어떤지를 계속 공감하며 읽었다. 잃어버린 순수가 자신에게 얼마나 소중했는지를 절감할수록 조그마한 타락도 걷잡을 수 없는 죄악으로 와닿기 마련이다. 그래서 이 주인공처럼 감정 조절 실패로 계속 엇나가는, 그러면서도 적당히 멀쩡한 척하며 자신을 감추는 스스로가 이중인격자처럼 느껴져 환멸이 나기도 한다. 나의 위선들과 더럽혀진 영혼은 남들에게 비난받고 욕먹어도 싸건만, 미움받을 용기가 없어 깨끗한 척 살아가는 나 자신이 참으로 역하다고 느껴진다.


계속되는 불안과 공포로 인해 맛탱이가 가려 할 때쯤, 자신의 불안요소가 전부 사라지자 다시 착하게 살아보겠다고 다짐하는 도리언. 그러나 마음먹은 것과는 달리 초상화는 여전히 못생겼고, 그 자신은 여전히 풋풋한 와꾸를 하고 있었다. 과연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는 말이 맞는 걸까. 그저 인간은 겉으로만 정직한 척할 뿐이고, 영혼들은 그렇게 비춰지고 싶은 욕망에 굴복할 뿐인 걸까. 나는 이 주장에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현실과 이상의 균열을 방지하고자 우리는 교육을 받고 예술을 경험하여 굳건해지는 비결을 배워나간다. 그렇게 훌륭한 교육 과정을 밟고도 악마의 손짓 한 번에 쉽게 타락하는 것이 바로 인간이다. 자신이 그토록 잘나고 똑똑한 줄 아는 해리 경도 주인공의 속내를 절대 알아채지 못한 것처럼, 제 영혼을 정화시키지 않는 인간들은 한낱 껍데기에 불과하다.


원래 다루고자 했던 내용은 이런 게 아니었는데, 아무튼 쓰다 보니 이렇게 됐다. 그림이 늙어가고 나는 계속 젊음을 유지한다라. 어딘가 익숙하면서도 신선한 발상이었다. 어쩐지 영국판 <죄와 벌> 같기도 했는데, 인간 내면의 선악은 양자택일의 무언가가 아니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다만 어느 한쪽으로 나르시시즘에 빠지는 것은 경계해야 할 것이다. 자신의 믿음이 절대 선이라는 착각쟁이들이 너무 많은 오늘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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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의 신사
에이모 토울스 지음, 서창렬 옮김 / 현대문학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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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조금도 겹치지 않는 소설 속 인물에게도 몰입과 공감이 가능한 것은, 그 안에서 내 것과 닮은 구석을 어떻게든 발견해 내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각각 살아온 독자마다 ‘이건 마치 내 얘기‘라고 자신 있게 말들 한다. 그런 이유로 <모스크바의 신사> 또한 나님이 줄곧 느껴오던 감정들과 겹친 부분 위주로 공감하며 읽었음을 밝혀둔다.


이 블로그는 내가 중학생이던 2004년 7월 17일에 개설했으며, 2015년부터 독서 기록과 일기 쓰기를 시작으로 지금까지 활동해오고 있다. 블로그에 썼던 최초의 일기가 뭐였냐면, 사라져 가는 것들에게 애도를 표한다는 내용이었다. 언젠가 어느 리뷰에도 적었듯이, 우리 또래는 아날로그와 디지털을 거쳐 스마트 시대까지 경험한 복받은 세대지만 또 그만큼 격변하는 세상에 혼란을 겪은 세대이기도 하다. 아무튼 신문물에 대한 설렘과 즐거움도 실컷 누렸던 반면, 나의 의사와 상관없이 구닥다리로 전락해버린 문화와 시절들을 붙잡지도 못하는 현실에 참 많이도 씁쓸했었다. 사람, 물건, 시대. 그 무엇이든지 있을 때는 고마운 줄 모르다가 꼭 추억 너머로 떠나간 후에야 알아차리게 된다. 불평 가득했던 그때가 좋았었다는 사실들을.


지금의 현대인들은 유행과 트렌드에 발맞추지 못하는 스스로를 도태되었다고 느낀다. 너도나도 그러고 있으니 듣다 보면 정말 그런가, 하게 된다. 사실 뒤처졌다 한들 살아가는 데에 아무 지장도 없지만, 행여 스스로가 화석처럼 느껴지면 그만 물러나야 할 때를 찬찬히 굽어보게 된다. 집안과 민족 대대로 이어지던 고유의 문화와 정신들은 어느덧 한 세대도 버티지 못하고 흩어져 버린다. 신세대와 첨단 문화의 출몰 속에서 홀로 남겨질 때마다 나는 내가 이방인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한창 국가의 경제활동을 담당하는 30대 남성인 나는 정녕 옛사람인 걸까. 그저 구시대의 낡아빠진 잔재인 걸까. 미처 신세계에 적응하기도 전에 또 다른 세상이 열리길 반복하니, 점점 배움을 포기하며 있는 것들이나 잘 간수하자는 쪽으로 마음이 기운다. 절대 변하지 않을 가치들에만 집중하자는 생각과 함께. 그러나 야속한 세월은 가치의 영원함 따윈 없다는 사실을 자꾸만 일깨워 준다.


그래서 인간은 자기 자신만의 세상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역설적이게도 고립되지 않으려면, 삶에게 휘둘리지 않으려면 꼭 그래야만 한다. 그러니까 기왕 화석 소리 들을 거면 가치 있는 화석이 되자는 말이다. 지금껏 주절거린 말들이 <모스크바의 신사>의 주인공을 보며 느낀 나님의 감정들이다. 러시아 귀족 가문의 백작인 로스토프는 어떤 사건으로 M호텔에 가택 연금 처벌을 받는다. 외부로만 나가지 않는다면 호텔 안에서는 비교적 자유롭게 지내도 된다는 조건이다. 700쪽이 넘는 분량을 호텔 에피소드로만 채웠다 생각하니 뭔가 숨이 막혀왔지만 예상과 다르게 재미도 있고 진도마저 빠른 편이었다. 작중 배경은 1920년대부터 1950년대까지의 러시아 혁명과 함께 한다. 주인공의 거처인 최고급 M호텔에는 다양한 VIP와 유명 인사와 내빈들이 들락날락하였고, 그들 덕분에 갇혀살면서도 백작은 세간의 흐름을 놓치지 않을 수 있었다. 분량만큼이나 화두가 많았는데 이번 평에는 ‘세대교체‘에 관해서만 적어보려 한다.


로스토프 백작은 귀족답게 교양, 문화, 사교, 여행 등 여러 가지를 누리고 경험하였다. 허나 호텔에 갇힌 후로는 경험 습득 및 지식 탐구가 제한되다 보니, 여태까지 배웠던 것들에만 의존할 수밖에 없는 형편이 된다. 곧이어 바깥세상의 변화는 호텔 내부에도 많은 변화를 가져왔고, 백작과 호텔 직원들은 억압과 제재 앞에 굴종해야 했다. 볼셰비키부터 레닌과 스탈린까지, 혼돈의 시간을 거쳐 온 러시아는 더 이상 백작이 기억하는 아름답고 우아한 조국이 아니었다. 남들이야 변화의 바람에 미리 대비하고 적응할 테지만, 우물 안 개구리는 조짐을 감지하는 것조차 느렸더랬다. 한때는 각종 유행의 선두주자였던 그가, 이제는 비주류의 맨 끝자락으로 밀려나게 된 것이다. 물론 백작은 상황과 여건에 굴하지 않고 프로귀족꾼의 노련미를 보여주었다. 뼛속까지 신사였던 그에게서 한치의 흐트러짐도 볼 수 없었지만, 내 눈에는 백작의 웃고 떠드는 장면들마저도 슬퍼 보였다. 바깥세상은 날로 새로와지건만 자신은 이대로 성장을 멈춘 채 살아가려니, 이 얼마나 비참한가. 똑같은 시간과 공간을 살아가는데도 홀로 남겨진듯한 그 묘한 기분. 바로 내 얘기였다.


백작은 꼬마 숙녀 니나를 통해서 차세대의 발전 가능성을 관찰한다. 이 신인류는 뭐든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법이 없었고, 직접 보고 겪고 검증해야만 속이 풀리는 별종이었다. 총명했던 꼬마는 점점 시니컬한 어른이 되었고, 혁명의 뜻을 받들어 호텔 밖으로 떠나간다. 그리고 수년 뒤, 백작을 찾아와 자기 딸을 좀 맡아달라 하고 사라진다. 졸지에 애 아빠가 된 백작의 인생 2막은 의외로 행복 그 자체였다. 소피야는 엄마를 닮아 똑소리 나는 아이였고, 엄마보다 온화하여 잔뜩 사랑받고 자라난다. 그렇게 백작은 자신과 전혀 다른 니나, 그리고 니나와 딴판인 소피야를 보면서 신선함과 동시에 불편함을 느낀다. 하나부터 열까지 남달랐던 차세대들의 사고방식을 마냥 환영할 수가 없어서였다. 그러다 문득 닫힌 마음을 하고 있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지금 너는 네 방식의 삶에 굳어져 버린 건 아니냐고(381p). 각종 지식과 경험이 풍부했던 백작은 감금생활 중에도 나름대로 삶의 질문을 잘 해결해왔다. 하지만 그 모두가 저만 신뢰하는 옛 방식들을 고집하고 있었음을 깨닫게 된다. 과거 백작은 언제나 마음을 열고 무엇이든지 배우려 했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떠한가. 배움은커녕 내 가진 것이 최고인 양 자부하며 살고 있지는 않은가. 이 같은 백작의 현타를 볼 때마다 발전을 포기해버린 내 지난날들이 떠올라 얼굴이 붉어지곤 했다. 아무것도 안 하면 당장은 편하겠지만, 멀리 놓고 본다면 그 반대이다. 시곗바늘이 잘 돌아가려면 귀찮더라도 태엽을 자꾸 감아주어야 했거늘.


러시아의 전통과 문화양식들이 하나둘씩 훼손될 때마다 백작은 제 살점이 뜯겨나간 것처럼 한탄하였다. 뿐만 아니라 삶에 빠져서는 아니 될 가치와 정신의 변질에도 그러했다. 나와 백작처럼 옛것을 버리지 못하고 새것을 반기지 못하는 유형의 공통점은, 본질의 무너짐을 견디지 못한다는 데에 있다. 사람마다 다를 텐데 내가 생각하는 본질이란, 편법이나 꼼수를 부리지 않는 무엇이어야 한다. 또 그렇다 해서 정직과 충의를 말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뭐, 이 정도 말했으면 알아듣는 사람이 있겠지. 다시 나의 첫 일기 내용으로 돌아오자면, 떠나간 것들을 추모한답시고 새로움을 거부하는 태도는 틀려먹었단 사실을 배웠다. 아니, 알고는 있었지만 차마 놓지 못했던 것을 이제야 놓아 주게 되었달까. 막상 이렇게 리뷰를 쓰고 보니 만인의 즐거운 세상을 또 나만 쓸쓸히 보고 있었구나 싶어진다. 이런 나 자신이 제정신은 아니라고 생각한 지도 참 오래됐다. 그러나 이제는 배움을 추구하고, 세상의 변화를 열린 마음으로 수용하는 중이다. 백작이 니나와 소피야의 가능성을 끝내 인정해 주었듯이.


이 밖에도 하고 싶은 말이 가득한 작품인데, 일일이 다뤘다가는 끝이 없을 듯하다. 헌데 미국인 작가가 어째서 러시아 배경의 이야기를 다룬 걸까나. 나의 짧은 지식으로 온전히 음미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충분히 즐거웠던 작품으로써 당신도 꼭 읽어보길 바란다. 그나저나 백작이 몽테뉴를 자주 언급해서 아무래도 <수상록>을 읽어보긴 해야겠더라. 거참, 산 넘어 산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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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진 신세계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2
올더스 헉슬리 지음, 이덕형 옮김 / 문예출판사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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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진 신세계>는 <1984>와 함께 디스토피아 문학의 쌍두마차로 유명하다. 하여 독서가들 사이에서는 필독서나 다름없는 이 작품을 나님은 정말이지 읽고 싶지가 않았다. 이유인즉슨 내가 SF 장르, 일명 이과소설을 극도로 싫어해서 그렇다. 아니, 취향이 아니면 아닌 거지, 싫어할 이유는 또 무엇인가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본 결과, 나님은 드라마가 빠진 이야기에 흥미를 갖지 못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따라서 아무리 작품성이 높다 한들 드라마적인 요소가 없다면 영 매력을 못 느낀단 말이다. 그럼에도 억지로라도 읽은 것은, 요즘 공부하고 있는 책들마다 이 작품을 인용하여 도저히 안 볼 수가 없어서였다. 정신분석학, 사회심리학 등 여러 분야에서 다루는 이 책의 영향력을 알고자 했지만 워낙 안 내켜서 질질 끌었다 보니 퍽 남는 것도 없다. 아무튼 <멋진 신세계>를 끝으로 SF와는 아주 절연을 해야 쓰겄다.


점수를 짜게 준 것은 순수하게 글이 재미가 없어서였다. 작품성이야 대단하지만 말하고자 하는 것 외의 장면들을 참 지루하게도 풀어간다는 인상만 받았다. 여하튼 워낙 유명하니까 요약은 생략하겠다. 과학기술이 극도로 발달한 문명사회를 살아가는 존재들의 이야기이다. 소설 속 세계관 정도는 아니지만 나름 과학의 혜택을 누리고 사는 오늘날에 와서는, 헉슬리가 염려한 과학기술 진보의 폐해를 모두가 느끼며 공감하고 있다. 사실 과학 자체로는 문제랄 게 없으나 그것이 어떤 식으로든 악용되어 병폐를 낳고 있으니 말이다. 진보라는 이름 아래 생겨난 제도와 기술들은 의도한 대로 굴러가는 법이 없는데도 인간은 끊임없이 결과물을 만들어내고 그것들에 잠식당한 노예가 된다. 이 악순환의 최종 버전이 <멋진 신세계>의 세계관이라고 보면 되겠다.


근심과 고통, 불행이 사라지고 오직 쾌락만이 지배하는 세상이라. 아직 겪어보지 못한 우리들한테는 어쩐지 거부감이 든다...라고 했다가 솔직히 잘 모르겠다는 쪽으로 생각이 기울었다. 당장 나만 하더라도 연민이나 우울에 취약해서 지구 따위 멸망해버렸으면 하는데 말이다. 이렇듯 평생을 고통에 짓눌려온 나 같은 사람들은 번민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기꺼이 가짜 행복 속에 살아갈 거라고 생각한다. 가끔 주변인들과 그런 얘기들도 나눈다. 온갖 병치레를 하면서 100세까지 사느니, 건강하게 살다가 한 60세쯤에 죽는 것이 차라리 낫겠다는. 의료기술이 발달한 만큼 고통의 기간도 연장되었다는 뜻이므로, 나 또한 그렇게 골골대면서 오래 살고 싶지는 않다. 그런데 이 얘기가 작품 속에서도 그대로 등장한다. 문명인들은 죽기 전까지 젊음과 건강을 유지하다가 세상을 떠난다. 그래서 생명의 유한성도 알지 못하고, 온통 자극적인 문화에만 가치를 두고 살아간다. 이제껏 우리가 중요시했던 가치들은 휴지 조각이 되고, 오로지 자기만의 기쁨과 쾌락과 행복에만 집중하게 된다. 이 작품을 한 10년 전에 읽었다면 모를까, 지금에서는 오히려 나도 그런 세계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마저 든다. 그만큼 현실의 괴로움이 압도적이라는 말을 하고 싶다.


결국 사람 사는 게 거기서 거기이므로, 나는 모든 현대인의 고통이 다 같다고 본다. 또한 그 고통의 뿌리이자 종착점은 인간관계라고 생각한다. 문명의 발달로 더 이상 나와 맞지 않는 이들과 잘 지낼 필요가 없어졌고, 의학의 발달로 건강해진 가족과 이웃들을 챙기지 않아도 되었고, 정보의 발달로 과거에 죽어라 했던 노력의 의미는 퇴색돼버렸다. 과학기술의 진보는 정녕 우리 사회를 더 발전시켰다고 말할 수 있을까. 핵개인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현실보다 더한 작중의 문명 세계는, 시험관으로만 새 생명이 탄생되고 각종 세뇌 학습을 통해 제법 건강한 자아가 형성되고 있다. 그들은 가족, 친구, 동료, 이성 등 인간관계로 고민할 이유가 전혀 없다. 그들이 하는 것이라고는 오직 도파민 탐색뿐이다. 어떤가, 오늘날의 현대인들과 다른 점이 하나 없지 않은가. 이미 현실은 헉슬리가 그려낸 신세계가 되어가고 있다. 아직은 멋지다고 할 단계가 아니지만 이미 예견돼있는 미래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예로부터 미래를 걱정한 학자들의 주장을 수차례 듣고도 위기를 막아내지 못했다. 그렇게 인간은 자기밖에 모르는 멍청이가 되었고, 그로 인해 생겨난 환경문제들로 지구는 다 죽어간다. 이 모든 게 예정된 결과이다.


현대인에게는 업그레이드만 있고 다운그레이드는 없다고 한다. 최신형을 써본 사람은 다시 구형 제품을 찾지 않는다는 말이다. 따라서 무기력한 삶을 날려버린 신문물의 맛을 본 인간들은, 그것들로 인해 인간다움을 잃어버렸다 해도 전혀 개의치 않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과반수가 그래버리면 손쓸 방법이 없다는 게 문제이다. 우리는 지구 반대편에 있는 원주민들을 보고 미개하다 말할 자격이 없다. 오히려 우리보다 행복지수가 월등히 높은 그들의 삶이 훨씬 낫다. 아무튼 나님은 지금 세상에 리셋이 좀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언젠가 3차 대전으로 온 세상이 불바다가 되어 멸망하게 되면 그것이 내게는 멋진 신세계가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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