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그말리온 범우희곡선 24
조지 버나드 쇼 지음, 신정옥 옮김 / 종합출판범우 / 2009년 8월
평점 :
품절


처음 읽는 버나드 쇼의 희곡인데 정말 술술 잘 읽힌다. 셰익스피어보다도 많은 작품을 냈다던 극작가라는데 나는 전혀 몰랐다. 제목의 ‘피그말리온‘은 그리스 신화의 키프로스 왕의 이름이라는데 이것도 지금 알았고, 그가 사랑했던 여인의 조각상이 아프로디테에 의해 생명체가 되었다는 내용에서 따온 작품이란다. 하여 열렬한 사랑 이야기겠거니 했는데 각도를 확 틀어서 어딘가 닮은 듯 닮지 않은 이야기로 창조해냈다. 참신하기는 해도 지금 와서 보기엔 그냥저냥이라 좋았다 나빴다 말하기가 어렵다. 낫배드와 쏘쏘의 중간쯤.


음성학 교수 히긴스는 빈민가 출신의 소녀를 공작부인으로 탈바꿈하는 실험을 강행한다. 걸걸한 언행과 까칠한 성품의 소녀는 교수의 친구인 대령의 전폭 지원하에 6개월간 숙녀 수업을 받게 된다. 그렇게 대성공한 귀부인 프로젝트의 종료로 이별을 앞둔 소녀는, 교수에게 배운 음성학을 남들에게 써먹겠노라고 선언한다. 이에 히긴스는 자신의 무기를 가지고 협박해오는 소녀에게 쩔쩔맨다는 뭐 그런 얘기.


거리의 부랑아가 귀부인이 된다는, 이것도 전형적인 신데렐라 내용이다. 사회적 신분이 전혀 다른 교수와 소녀는 각자의 이익 때문에 동맹 관계가 된다. 비혼 주의에다 인간미가 요만큼도 없는 히긴스 교수는 소녀를 한낱 실험체로만 대했고, 그래서 더욱 강성 민원 고객처럼 나오는 소녀와의 케미가 참 볼만하다. 이런 쌈닭 같은 성질을 죽여서 숙녀로 거듭났다는 것도 대단한데, 그녀에게 죽어도 마음 주지 않는 히긴스도 대단하긴 했다. 소녀의 본판이 꽤 괜찮았다는 설명과, 6개월 동안 그의 업무들을 봐줄 만큼 가깝던 걸로 봐서는 히긴스가 나름대로 선을 그었다고 생각된다. 여자 보기를 돌같이 하는 공감 제로의 로봇으로 묘사되긴 했지만 내 생각은 그렇다.


귀부인 수업을 자처한 히긴스도 기품 있는 신사랑은 거리가 멀었다. 상스러운 말도 자주 내뱉고, 불쾌한 감정을 여과 없이 드러내기도 다반사였으니. 하녀와 모친에게 지적받는 게 일상이라 그런지 소녀의 생떼와 사자후도 잘만 받아주는 괴짜 그 자체였다. 그렇게 으르렁대던 소녀도 막상 헤어진다고 하니 서운함이 북받쳐올라 울분을 토한다. 어째서 당신은 나에게 다정히 대해주지 않느냐면서. 원래대로라면 여기서 얼레리꼴레리 하고 해피엔딩이라야 하건만 저자는 히긴스의 캐릭터를 끝까지 밀고 나갔다. 여튼 거듭난 그녀가 상류사회로 진출할지, 벽에 부딪혀 다시 예전 삶으로 돌아갈지는 알 수 없다. 허나 돌아간다면 그의 실험은 실패로 끝난 것일 테다. 남들이 소녀를 귀부인으로 착각하는 선에서 끝이 아니라, 앞으로의 삶을 대하는 관점과 태도의 변화까지가 실험 성공의 척도라고 생각된다.


이 외에도 소녀의 부친, 소녀에게 구혼하는 남자 등의 이야기가 있는데 하나같이 히긴스의 병맛을 조명하는 느낌이라서 생략했다. 워낙 유명한 작품이라 설명 안 해도 뭐 다들 아실 거고. 오히려 평을 남기는 게 민망한 수준. 가볍게 읽기는 좋았다만 희곡을 썩 즐기질 않아서 저자의 작품을 더 읽게 될지는 모르겠다. 이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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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5-02-25 17:05   좋아요 0 | URL
영화 ‘마이 페어 레이디‘ 원작으로 알고 있어요.^^

물감 2025-02-25 18:30   좋아요 1 | URL
검색해보니까 평점이 높네요. 잘 만들었나봐요. 근데 170분짜리... 윽ㅎㅎ
영화에서는 둘이 맺어지는 결말이라는군요! 역시 그 편이 좀더 좋다요ㅎㅎㅎ
 
블러드맨 모중석 스릴러 클럽 45
로버트 포비 지음, 문희경 옮김 / 비채 / 2018년 10월
평점 :
절판


책장을 비우기 위해 처분해야 할 도서 위주로 읽고 있는데 이거 이거 아주 고역이다. 처분할 대상이라는 말부터가 이미 재미없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렇다고 계속 자리만 차지하게 놔두긴 뭐하고, 읽지도 않은 책을 내다 팔기도 아까우니 꾸역꾸역 읽을 계획인데, 읽다 보니까 진짜 아까운 건 내 시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나마 내가 좋아하는 스릴러소설은 좀 낫겠지 싶었는데 웬걸, 실망과 분노가 그라데이션으로 일어나는 작품을 읽었지 뭐여. 초반에는 대작 스멜이었다가 중반부터는 너무 늘어진다 싶더니 후반 가서는 정신 산만함과 개연성 없음에 아주 혼쭐이 났다. 그러고 보니 제목에 ‘맨‘이 붙은 것치고 흡족했던 적이 없었단 말이지. 2012년도에 출간된 <블러드맨>은 과거 7080 선배들의 케케묵은 스타일을 흉내 낸다는 인상이 강했다. 정확한 나이는 알 수 없으나 스티븐 킹 세대보다는 한참 밑인 듯한데, 젊은 사람이 어쭙잖게 아날로그 감성을 쫓다 보니까 어색한 구멍이 생기는 거여. 이건 뭐 빈티지도 아니고 레트로도 아닌 어중간함 그 잡채.


미국의 어느 시골지역을 방문한 FBI 요원 제이크. 천재 화가인 부친의 정신병이 도져서, 유일한 보호자로 어쩔 수 없이 고향 땅을 밟았다. 30년도 넘게 남남인 부친이었지만, 화가의 인생이 끝났음을 생각하면 못 도와줄 것도 없었다. 악랄한 부친과의 기억은 죄다 끔찍했고, 어릴 적 모친의 살해 사건도 있고 해서 고향엔 두 번 다시 오고 싶지가 않았다. 할 수 없이 부친의 집에 머물던 중, 그 지역에서 살인 사건이 접수되었다는 FBI의 지령을 받는다. 현장에는 살가죽이 벗겨져있는 엄마와 어린 아들의 시신이 있었고, 이것은 제이크의 모친을 살해한 수법과 일치했다. 하여 반드시 범인을 잡아 지긋지긋한 FBI 생활도 때려칠 생각이었다. 한편 전례 없는 규모의 허리케인이 3일 뒤에 도착한다는 뉴스가, 안 그래도 타이트한 수사를 더욱 정신없게 만든다.


나쁘지 않은 설정이지만 솔직히 올드함의 범벅이었다. 고립된 장소, 발목을 붙잡는 재해, 주인공의 트라우마와 핸디캡, 가족 간의 과거와 비밀 등등 올드스쿨의 공식을 철저히 따르는 게 보여서 많이 식상했다. 초반에는 탄탄한 설정과 찝찝한 기분의 연출에 감탄하기도 했다. 데뷔작인 만큼 준비를 많이 한 게 느껴졌는데 그게 독이 되었는지, 빌드업이 너무도 촘촘해서 진도가 정말 느렸다. 아버지의 정신병, 제이크의 과거와 트라우마, 살인사건 수사 중 어느 것도 납득이 될 만큼 풀어내질 못했다. 그 많은 분량과 느긋한 전개를 하고서도 말이다. 먼저 주인공은 FBI가 되기 전의 생활을 잘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망가졌다고 했다. 또 어느 날은 눈 떠보니 저도 모르는 문신이 몸 전체에 새겨져 있었단다. 거기다 이렇다 할 설명도 없이, 심장에 달린 장치가 그를 제어하는 중이란다. 이렇게나 캐릭터에 몰빵했지만 정작 스토리에는 별 영향도 없었다는 사실. 빌드업에 기여하지 못하는 설정들을 보노라면 그저 있어 보이려고 힘줬구나 싶어 한숨만 나온다.


살인사건에 대해서는 딱히 해줄 말도 별로 없다. 범인은 작품이 다 끝나갈 때까지 등장하지 않고, 어떠한 단서나 실마리도 제공해 주는 법이 없다. 하여 부친이 남긴 수백 장의 그림들이 단서라 생각해 이리저리 큰 그림을 그려보지만 영 맥을 못 춘다. 연달아 발생한 살인사건의 현장으로 이동하는 데에 시간을 다 버려, 수사 다운 수사의 장면도 없다시피 하다. 또한 허리케인의 접근으로 사방은 쑥대밭이 되어가고, 그래서 일행들은 사건보다도 피해민들을 챙기는 게 더 급선무가 된다. 멘탈도 겨우 붙잡고 있고, 쉬지 못한 육체는 죽을 맛이고, 저 바깥세상은 재난으로 난리 법석인 그야말로 정신 산만의 대 환장 콜라보였다. 좋아, 그것까지도 어떻게든 참아줄 수 있어. 다 끝나가는데도 범인을 꽁꽁 숨겨두는 건 너무 심했고, 개연성이 1도 없는 범인의 정체는 진짜 독자 기만이라는 생각 밖에 안 드네. 그렇게나 촘촘했던 빌드업의 결과가 이거라고? 야야 이건 용두사미도 아니고 아예 꼬리가 없잖어.


저자는 이 작품으로 ‘차세대 스티븐 킹‘이라는 타이틀을 얻었단다. 진짜 날로 먹는 데도 정도가 있지, 나님은 반댈세. <블러드맨> 말고는 국내에 출간된 작품이 없다는 걸로 보아 ‘버블 킹‘이라는 별명이 더 맞지 않을까. 총을 쏘지 않을 거면 등장시키지 말아야 한다는 체호프의 말처럼, 괜한 설정과 불필요한 묘사로 분량만 늘리지 좀 말자. 알맹이보다 포장지에 진심인 작가들은 진짜 관자놀이에 하이킥 좀 맞아봐야 정신 차리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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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목련 2025-02-24 10:21   좋아요 0 | URL
처분할 도서는 읽을 생각도 하지 않는 저는 반성합니다.

물감 2025-02-24 14:55   좋아요 0 | URL
언젠가 읽겠거니 하고 방치한 게 어언 n년이더라고요. 마음 안내키면 그냥 파는게 맞는 듯 합니다...
 
황금 물고기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5
J.M.G. 르 클레지오 지음, 최수철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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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노벨 문학상 수상작인 <황금 물고기>는 블로그 새내기 시절, 이웃분들이 꼭 읽어보라며 추천해 주었던 작품이다. 그때의 나는 고전을 읽을만한 수준도 못되었거니와 내 성격상 인기도서에는 영 손이 가지 않은 탓에 이제야 읽게 되었다. 그리고 내 예상대로 그렇게 호들갑 떨 정도의 작품도 아니었다. 노벨 문학상의 기준을 모르겠으니 그건 그렇다 쳐도 스토리, 주제, 메시지 중 어느 하나 뚜렷한 것이 없었다. 기존 평들을 보면 스토리보다는 문장력이 돋보이는 작품으로 치켜세우던데 그것도 딱히…….


<황금 물고기>는 납치당한 아프리카 소녀의 생존기이다. 솔직히 나는 프랑스 출신의 백인 남성이 흑인의 생애를 논하는 것 자체가 좀 거시기하다. 아프리카에 20년도 넘게 살았었다고 하니 흑인들에 대한 애정이 남다를 순 있겠다. 그렇지만 그들의 민족성이나 정체성에 대해서 뭐 얼마나 잘 알기에 대변을 하느냔 말이다(심지어 이이는 서울 배경에 한국인을 주인공으로 한 작품도 써냈다는). 작중에서 흑인들의 사회적 시선과 대우가 적나라하게 묘사되고 있지만 냉정히 바라보면 전부 겉핥기 식의 중계방송일 뿐이다. 그럴거면 차라리 에밀 졸라의 자연소설처럼 써서 풍부한 해석을 갖도록 하는 편이 어떨는지.


어느 흑인 노파에게 팔린 꼬마 라일라는 감금생활 속에 하녀로 살아간다. 노파의 아들 부부와 이웃에게 학대 및 성추행을 당한 라일라는 탈출 후 어느 여인숙으로 피난한다. 고삐 풀린 소녀는 마침내 자유의 몸이 되어 여기저기 쏘다니며 도둑질에 맛 들인다. 또한 여인숙의 문란함을 날마다 직관하여 성에 대한 감흥마저 없어진다. 이처럼 현실의 온갖 어두운 면을 봐버린 라일라는 오히려 삶에 의혹을 가지는 법이 없었다. 심지어 자신을 잡으러 다니는 노파의 아들 부부와, 갑자기 다가오는 낯선 남자들에게 도망치기도 다반사인데 말이다. 보통 이런 입장이면 현실 부정, 신세 한탄, 적개심, 망연자실 중에 하나였을 텐데, 라일라는 어떤 일그러짐도 없이 타고난 생존 본능으로 잘만 헤쳐나간다. 이 말 같지도 않은 설정 붕괴 때문에 어떤 아픈 장면에서도 몰입하지 않을 수가 있었다. 이걸 노린 거라면 노벨상 인정한다.


훔친 돈이 좀 모였는지, 어느 임신한 언니와 배 타고 프랑스로 넘어간 그녀. 그 악몽 같았던 아프리카를 떠나와 인생 2라운드를 시작해 볼 랬더니, 프랑스는 더 끔찍한 지옥이었다. 불법 이민자들의 단속도 심했고, 부랑자와 깡패와 마약범 등등 위험해 보이는 인간들로 넘쳐나는 백인들의 무대였다. 어찌어찌해서 인맥을 만들고 거처도 구하고 일자리도 얻어냈지만, 주변에서 혹은 관계자가 그녀를 배신하고 성폭행하는 일이 반복되었다. 동네를 옮겨 다니다가 미국으로 건너가서도 사정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정녕 보고 있으면 나까지 남성 혐오에 걸릴 지경이다.


라일라는 삶의 목표 따위가 없었기 때문에 남들의 권유대로 제 몸을 맡겼다. 누가 오라 하면 오고, 가라 하면 가는, 철저하게 남들이 정해준 기준에 휘둘리며 살았다. 백인들의 세상에서 흑인은 자유롭지 못했고, 그래서 아프리카에 있을 때만도 못한 처지라고 할 수 있었다. 언젠가 죽으면 고향에 묻어달라는 친구의 할아버지 유언에, 자기만 모르는 고향과 정체성을 고민해 보게 된다. 그리고 ‘왜 언젠가는 도망치지 않을 수 없는가?(212p)‘라는 책 속의 문장을 보면서, 자신이 표류하는 한 마리의 물고기라고 생각한다. 다만 작중에서 ‘황금 물고기‘라는 표현은 없었는데, 그렇다면 황금의 뜻이 뭔지 해석해 보자. 어딜 가나 꼬이는 남녀들로 보건대 라일라의 비주얼은 제법 나이스한 편일 게다. 한 번도 좋은 결말은 없었지만 그녀가 분에 넘치는 관심과 사랑을 받은 것도 사실이다. 따라서 라일라는 남들을 자신에게로 끌어당기는 빛이 있었다고 하겠다. 문제는 물고기가 주목받고 눈에 띄어봤자 하나도 좋을 게 없다는 것. 빛나면 빛날수록 포식자들의 밥이 될 테니 말이다.


정리하려고 보니 꿈보다 해몽이 아닌가 싶다. 그냥저냥 읽었지만 클레지오를 다신 볼 것 같진 않다. 솔직히 노벨상은 나랑 잘 맞지가 않음. 부커 상도 좀 그렇고. 그나마 공쿠르 상이 읽을만했던. 아무튼 요번에도 꽝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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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브리맨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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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벽돌책을 읽었다면 무슨 무슨 규칙에 따라서 얇은 책을 읽어주는 게 인지상정이다. 현재 내 서재에 꽂힌 책들 중 가장 얇아 보이는 로스 옹의 <에브리맨>을 집어 들었다. 그의 폭발적인 필력과 에너지를 기대하면서. 그러나 이 작품은 듣던 것만큼 마구마구 좋다는 느낌은 아니었다. 뭐랄까, 메시지는 훌륭한데 전달하는 방식에서 시큰둥했거든. 한 줄로 요약하자면, 후회막심한 노인의 데드라인 이야기이다. 사실 죽음을 앞에 두고 후회하지 않을 인간이 몇이나 되겠냐고 생각들 할 것이다. 그래서 제목처럼 모두의 이야기라 하고 싶었나 본데, 오히려 공감해 주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여러 번 들었다. 솔직히 이게 좋은 작품인지도 잘 모르겠다.


이름마저 주어지지 않은 이번 주인공은 보석 상인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남들처럼 평범하게 직장을 잡고, 결혼을 하고, 자식을 낳고, 바람을 피우고, 이혼을 하는, 아주 전형적인의 미국 남자이다. 재혼을 세 번이나 했을 만큼 대단한 매력 지수에 비해 건강지수는 전혀 비례하지 않았다. 이런저런 큰 병들로 수차례 입원하고 수술하고 회복하길 반복해야 했던 이 남자. 늘 정력을 쏟는 데에만 정신이 팔려서 가족들은 뒷전이었고, 그래서 나이가 차갈수록 가까운 사람들이 하나둘씩 그를 떠나가게 된다. 그렇게 고립돼가는 제 처지를 돌아보며 외로움을 맞는다는 노인의 뻔한 전개인데, 지금 내가 쓴 것만 읽더라도 막 안됐다는 생각이 안 들지 않나? 뿌린 대로 거둔다 했으므로, 스스로 망친 삶의 대가를 치르는 것은 당연하다. 헌데 그 당연한 것을 위해서 이 작품을 써내진 않았을 테지.


자식들과 아내들이 자기를 비난하는 것이 어딘가 부당하다는 뉘앙스를 풍긴다. 가족 윤리관이 박살 나있는 이 상남자에게 내려진 형벌은 병마보다도 ‘늙음‘이 훨씬 가혹한 것이었다. 그래서 병수발 들어줄 가족도, 병문안을 올 이웃도 없다는 현실에 애꿎은 세상을 탓하곤 했다. 내가 궁금한 건 이거였다. 화목한 집안에서 태어난 그가 어째서 가정파탄의 장인이 되었는가 하는. 부모도 부모의 역할을 잘 해내었고, 그를 끔찍이 생각하는 친형도 사업과 가정을 완벽히 일궈냈다. 그래서 주인공의 돌연변이가 좀처럼 이해되지 않았다. 이건 그렇다 치고, 나중에는 타고난 건강 체질의 형까지 시기하는 못난 놈의 전형을 보여주기까지 한다. 당연히 지긋지긋한 수술을 자주 받다 보면 멘탈이 약해질 수도 있다. 그런데 꼭 하나뿐인 혈육에다 유일한 보호자인 형에게 몹쓸 심보를 가져야겠냐는 말이다. 에잇 퉤.


미술 전공의 주인공은 언젠가 아카데미를 열어 이웃들을 초대한다. 그중 한 노부인이 병으로 쓰러져, 곁에서 간호하던 주인공은 그 이웃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된다. 병의 고통으로 몸부림치는 모습과, 그녀를 보살펴줄 남편이 없다는 사실을. 이내 들려온 노부인의 자살 소식은, 오히려 그 결정과 행동을 존중하게 만들어주었다. 여태껏 세상에 불평불만이던 자신에게 드디어 관대해질 차례가 온 것이다. 하여 전처와 아들들의 지난 호소와 아픔들을 헤아리고, 가까운 사람들을 싹 다 밀어냈던 본인의 잘못을 반성한다. 이것은 주인공만의 특별한 심경 변화가 아니다. 단지 인간이라면 누구나 들법한 후회와 자기 연민이다. 그는 병원을 수년 동안 들락날락하면서 여러 환자들의 죽음을 목격했기에 자신의 죽음 또한 그려봤을 것이었다. 하여 남은 시간의 가치도, 가족의 소중함도, 삶을 공유하는 기쁨도 어서 움켜쥐기를 바랐다. 하지만 세월은 상남자를 겁쟁이로 바꿔놓았다.


정녕 이 작품이 노년의 고군분투를 노래하는 중일까. 글쎄올시다. 주인공은 아들과 동생, 남편과 아버지의 역할 중 어느 것 하나도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 생명이 그 자체로 위대한 것처럼 아무개의 죽음도 그렇다는 법은 없다. 흥청망청 살다가 죽기 직전의 회개로써 옛 죄를 청산하려는 이들을, 신께서 과연 후하게 받아주실까 하는 의문도 든다. 아무튼 <에브리맨>이 나와 당신의 이야기였다고 어디 가서 말하고 다니지는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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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굴레 동서문화사 월드북 150
서머싯 몸 지음, 조용만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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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서평을 눈팅해오던 친구가 그러는데, 내가 비평만 써서 그런지 글이 죄다 어둡단다. 그게 컨셉이라는 걸 몰라주다니 매우 섭섭하고만? 전에도 했던 얘기인데 나님은 그렇게 생각한다. 앞서 수많은 칭찬 일색의 평을 꼭 나까지 따라 쓸 필요가 있느냐고. 내 글이 아무나 쓸 수 있을 수준이라면, 또 남들이 쓴 것과 별반 차이가 없다면 평을 남기는 의미가 있을까 싶고. 하여 레드오션을 피하고자 비평을 고른 거란다, 벗이여. 물론 이런 나라도 딱히 비평할 게 없다거나 칭찬하지 않을 수 없는 작품은 얼마든지 호평을 남긴단다. 더군다나 이제는 여성호르몬이 많아져서 예전 같은 까칠함은 죽었다고 볼 수 있지. 그래도 요즘에 쓴 것들을 보면 많이 담백해졌다고 생각하는데. 아니야?


서머싯 몸의 자전소설이자 유일한 벽돌 책인 <인간의 굴레>를 읽었다. 다른 작품들에서 보여준 저자만의 위트와 풍자는 온데간데없고 시종일관 칙칙한 분위기로 흘러갔다. <인간의 굴레>는 인생의 해답을 갈구하는 어느 소년의 방황기이다. 부모를 여읜 필립은 목사관인 큰아버지 집으로 보내진다. 소년을 성직자로 키우고자 했던 큰아버지의 뜻대로 반듯하게 자란 필립은 신학대를 앞두고 탈선해버린다. 이후 독일로 건너가 하숙하면서 회계사가 되기로 한 필립. 그러나 자신이 생각했던 삶과 맞지 않아 또다시 낙담한다. 답답했던 고향만 벗어나면 잘 될 거라던 자신감은 어디 가고 벌써 회의감으로 가득 차버린다. 이어서 독일과 프랑스와는 달리 영국은 행동과 사상의 자유가 없다던 모 하숙생의 지적에 날벼락을 맞는다. 비록 탈선했다지만 자타 공인 정직한 삶이었는데 지적을 받고 보니 뭔가 헛살았다는 허탈감이 드는 거다. 그렇게 해서 필립은 저만의 돌파구를 필사적으로 찾아 떠나는 우물 밖 개구리가 되기로 한다.


필립은 신앙심을 벗어던지고 싶어 하나 막상 그러지는 못해 괴로워한다. 한편 필립이 주목하게 된 하숙생 W는 비국교파라면서 기독교인의 생활을 실천하고 있었다. 종교에 관심이 많다던 W는 어떤 종교의 이론이라도 결점을 찾아내 반박하고 입증시켰다. 그러면서 자신은 남들이 믿는 것들은 아무것도 믿지 않는단다. 정말 그런가? 인간이란 그 시대 나름으로만 믿을 수밖에 없는 건가? 과거의 믿음들이 과오였듯이 지금의 믿음도 틀릴 수가 있다는 뜻일까? 교육받아왔던 국교회의 권위와 믿음의 가치는 절대적인 게 아니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피어난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신을 왜 믿어야 하는지 모르겠다 말하는 자신에게 놀란다. 이것은 신앙심을 버린 게 아니라 본래 필립 자신이 신앙심이 없는 인간임을 깨닫게 된 거였다. 마침내 종교라는 무거운 허물을 벗고서 홀가분해진 필립의 인생 2라운드가 시작되었다.


큰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미술을 하겠다며 무작정 파리로 떠난 주인공. 미대를 가서 친구도 사귀고 그림도 배워가며 보란 듯이 낭만을 즐긴다. 재능이 없음을 느끼지만 예술이 가진 자유가 좋다니까 그거면 됐지 싶었다. 그러다 파리의 유명 시인인 크론쇼와 인생 가치관에 대한 논박을 주고받는데, 시인은 필립의 윤리관이나 도덕률이 기독교 바탕의 정의라고 지적했다. 이에 신앙인이 아니라고 대꾸하지만, 선을 행하는 방식과 태도가 세속적이지 않다면 결국 시인의 말이 맞는 셈이었다. 따라서 같은 행동에도 누군가에겐 죄책감이 들고, 누군가는 자유의지라는 말인데, 그것이 선이라고 해서 공을 세울 수도 없거니와 악이라고 해서 비난받을 이유도 없다는 뜻이었다(272p). 필립은 갈수록 혼란스럽다. 종교를 떠나 선악이 무의미하단 것도, 사회의 무질서는 개인의 선입관일 뿐이란 것도, 삶은 자신의 이기적인 욕망으로 움직인단 것도 전부 회의주의자의 헛소리로 들렸다. 시인의 말마따나 자신이 실천한 일들에는 기분 좋은 쾌감이 깔려있고, 결국 쾌락을 추구하는 게 곧 행복을 찾는 것과도 같다면 세상의 온갖 것들은 무엇 때문에 존재하는 걸까. 정녕 인생의 의미는 자기실현에 있는 게 아니었나. 필립이 필사적으로 반박하는 것은 그 자신도 태어나 살아가는 데에 어떤 의심이 들었을 테고, 시인의 전혀 다른 관점과 해석을 영 터무니없다고 생각되지 않아서였다.


이리하여 2년간 미술을 전공하던 필립은, 과거 공부했던 예술과 인생관, 문학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모조리 경멸하게 되었다. 때마침 옛 하숙집 동료 H와 재회하여 응어리 좀 풀었더니 아 글쎄, 옛날에 들려준 사상과 철학을 그대로 고수하고 있어 실망이 대단했다. 한때 필립이 존경했던 친구였고, 그의 정신세계에 작게나마 구원받기까지 했었단 말이다. 그랬던 필립은 H의 전혀 진보하지 않은 사상에도 경멸을 느꼈다. 지가 경험해 보지 않았으면 부정해대는 게 아주 습관인데, 솔직히 이런 애들은 무시하는 게 정답이다. 이어서 필립은 자신이 인정한 화가의 작품을 H에게 소개하며 예술적 가치를 설명해 준다. 그러나 문외한이었던 동료는 필립의 설명만큼 대단하다고 느끼질 못한다. 이런 장면들은 삶의 가치나 의미가 다 달라서, 내가 옳다 믿고 인정한 것들이 누구나에게 들어맞을 수 없다는 점을 시사한다. 필립이 옛 신앙과 각종 사상들을 의심했던 것처럼, 그의 절대 확신이 누군가에게 거부당하기도 하는 역지사지를 보여주었다.


한편 방학 동안 외국 곳곳을 다녀온 미술학과 동기가 현재 잘나가는 인상파 미술을 비난하여 분위기가 싸해진다. 이 논란을 잠자코 지켜보던 필립도 그 주장에 매료되고 만다. 이런 식으로 세상은 기존의 믿음과 관념들이 무너지고 신문물의 기초가 생겨나기를 반복해왔다. 그런즉 시대별 가치관은 계속 바뀌는 법이어서, 필립은 고향 집을 찾아가 미술을 접겠다는 의사를 밝힌다. 성직자도 관두고 회계사도 관두고 이젠 화가까지 그만둔다는 필립의 대책 없는 태도에 큰아버지는 억장이 무너진다. 더욱이 총명하고 사리분별 잘 하는 애가 성인이 되고서도 진로 하나 못 찾는 게 이해가 안 되는 것이다. 제멋대로 해서 다 실패했으니 이제는 큰아버지 조언대로 해야 할 처지였지만, 꼴에 사회 물 좀 먹었다던 필립은 도전과 실패로 운명을 경험하는 쪽을 택하겠단다. 이 장면에서 헤세의 <나르치스와 골드문트>가 절로 연상되었는데, 큰아버지는 나르치스처럼 직관과 통찰로 생을 다스려야 한다 말하고, 필립은 골드문트처럼 경험과 창조로 한계를 깨고 싶어 했다. 그런 성향을 탓하려는 게 아니라, 필립이 세상 물정 모르는 헛똑똑이에다 등골 브레이커라는 게 문제였다. 현실에서도 참 피곤하다 싶으면 다 이런 타입이었지, 아마?


이때부터 필립은 여러 위인들의 철학을 파헤치기 시작한다. 온갖 사상을 종합해 봤더니 모두가 개인의 주장일 뿐이고 개개인이 철학자여야 한다는 결론이었다. 그러니까 어떤 완벽한 패러다임이라도 그 시대의 전유물에 불과하다는 것. 이것은 필립이 타국에 가서, 이해 안 되는 문화와 체계를 고수하는 현지인들을 제 삼자의 입장에서 보고 듣고 깨달은 값진 탐험과 통찰이었다. 즉 각자만의 진리가 어디에나 있으며 어디에도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필립 자신이 배웠던 선과 미덕과 지혜들도 지금 속해있는 세계와 시대의 전유물과 선입관이라는 말이렸다. 이쯤에서 필립이 어떻게 헛똑똑이냐고 따질 법도 한데, 여기에는 필립의 콤플렉스인 절름발이를 원인으로 들 수 있다. 신학교를 다니는 내내 놀림거리였는데다 친구 하나 사귀지 못해 늘 고립된 생활을 지내온 주인공. 그렇다 보니 뭐든지 혼자 생각하고 판단해 버릇 하여 사회성이 심하게 무너진 것이다. 또 그로 인한 열등감, 자의식 과잉, 피해 망상은 덤으로 따라오는 종합선물세트였다. 하여 이렇게 배배 꼬인 성격을 이해한다 쳐도 연민의 마음까진 들지 않았다. 그의 밑바닥은 오만과 경멸로 가득했기 때문에.


당시 영국의 4대 직업은 종교, 의료, 법학, 예술, 이렇게 네 가지였다. 어쩔 수 없이 의학생으로 지원한 필립은 또 얼마 못 가서 흥미를 잃고 만다. 사회에서 알아주는 직업을 다 겪어봤지만 어느 것도 필립의 심장을 뛰게 하지 못했다. 게다가 배운 건 많아서 동기들의 수준은 한참 낮아 보였고, 그놈의 절름발이 때문에 우정을 쌓는 일도 없었다. 철학마저 소용없는 그에게 내려오는 빛줄기, 그것은 엘.오.뷔.일.럽!(feat.에이핑크). 그는 자신을 무시하는 카페 직원에게 굴욕을 갚아주려다가 역으로 사랑에 빠진다. 보통내기가 아니었던 그녀에게 갖은 모욕과 수치심을 받아 가면서도 기어코 연인이 된다. 과연 위대하신 사랑은 필립의 기나긴 번민을 말끔히 지워주었다. 그러나 인간관계를 글로도 배우지 않았던 필립이 호구가 되는 건 당연지사. 대개 남자들의 첫사랑은 자신과 반대되는 타입일 때가 많은데, 그것은 나에겐 없는 매력의 이성을 신격화하기 때문이다. 어쩌다 운 좋게 사귀었다 해도 나와 전혀 다른 성향의 이성을 대할 줄 모르기 때문에 첫사랑은 실패하도록 되어있다. 그래서 보통은 각성하거나 트라우마에 걸리거나 하는데 필립은 엄연히 후자였다. 그는 돈으로밖에 애인을 잡아두지 못했고, 그래서 통장이 줄어드는데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하, 쓰면서도 참 답답하다.


감정의 교류도 없는 이 관계가 부적절하다면서, 또 이 사랑은 고문이나 다름없다면서 왜 그토록 맞지도 않는 사람과의 인연을 고집했을까. 돈으로 누군가의 기쁨과 행복을 살 수 있다면 차라리 나았겠다. 속물 그 자체인 자유로운 영혼의 애인은 전혀 고맙지 않다면서 매번 튕겨냈으니까. 필립의 병적으로 뒤틀린 애착은 부모에게 받지 못한 사랑의 부재와, 불구로 인한 사회적 고립이 낳은 결과물이다. 그런 것치곤 잘 자라주었다 하겠으나 인간을 썩 좋아하지 않는 그에게 친화력을 갖기란 나님이 우사인 볼트를 이기는 것만큼이나 불가한 일이다. 어쩌면 필립은 굴레에서 해방되기에 지친 나머지 그냥 주어진 대로 살고 싶어진지도 모른다. 하여 그토록 갈망했던 주체성을 버리고 예전 같은 굴종의 삶을 택한 것으로 보인다. 이건 뭐 개그콘서트가 따로 없군.


결국 애인은 딴 남자한테 가고, 솔로가 된 주인공은 별거 중인 한 유부녀에게 푹 빠져버린다. 누구와는 다르게 상냥하고 속 깊은 그녀는 필립의 지난 상처를 하나하나 치유해 주었다. 자신을 전적으로 지지해 주는 사람을 만나 안심했더니 곧바로 전 애인이 돌싱이 되어 필립을 찾아온다. 그것도 임신까지 한 상태로. 남편에게 버림받아 갈 곳이 없어진 그녀를 보자, 옛 감정이 돋아나 또다시 호구 짓을 반복하는 필립이 이해가 되면서도 제발 정신 좀 차렸으면 싶었다. 애인의 여전한 속물근성과 박쥐같은 태도에도 마냥 좋아서 직진하는 이유가 뭘까? 나 같은 불구자도 누군가를 사랑해 줄 자격이 생겼다는 기쁨 때문이라고 생각되었다. 여하간 이 친구는 고통에 적응해서 그런지 더 좋은 선택권이 주어져도 거부반응을 보였다. 그 때문에 항상 지는 게임을 좋아했고, 무언가 결여된 듯한 관계를 선호했다. 아직 세상 때가 묻지 않은 풋내기라면 모를까, 이렇게 알 거 다 아는 사람이 연애 초보자라면 좀 많이 위험하지.


필립의 호구 짓은 계속된다. 정녕 내가 본 것들 중에서 베스트 아닐까 싶을 정도. 그는 애인에게 필요한 모든 비용을 아낌없이 대준다. 애인이 고마워하긴커녕 상처되는 말들을 쏘는데도 그저 좋단다. 심지어 콤플렉스가 있는데도 애인이 돌아와 줬으니, 별 노력 없이도 열등감을 극복했다고 믿는 눈치였다. 그러다 필립의 친구와 그녀 사이의 야릇한 기류를 감지하는데, 여기서 필립의 삐딱한 악마적 반항심이 작용하여 두 남녀를 여행까지 보내준다. 돈도 없다면서 경비까지 보태주는 건 뭐냐고 진짜. 여행을 마치면 애인이 자기한테 돌아올 거라는 그 근본 없는 믿음을 보면서, 이 찐따시끼는 아주 호되게 당해서 하루빨리 각성하지 않는 한 답이 없을 성싶었다. 결국 애인은 종적을 감추었고, 드디어 망상에서 탈출하나 했더니 이번에는 걷어찼던 유부녀한테 찾아가 잘해보자며 애걸복걸하는 게 아닌가. 필립은 자길 버리고 딴 남자에게 갔다가 후회하고 돌아온 애인의 행동을 고대로 되풀이하고 있었다. 야 이건 뭐 작가가 아주 엿맥이려고 작정했네. 비록 미숙하긴 했어도 언제나 이성적이었던 필립이 언제 이렇게 감정적으로 변해버렸는지 모르겠다.


인간은 삶에 권태가 오면 사랑을 찾고, 사랑에 패배하면 본업에 매진한다. 지친 마음을 씻어내릴 출구가 있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인가. 하여 필립은 다시 의대 시험을 치르고 모 병원의 조수로 들어간 데에 썩 만족해했다. 또 천차만별의 환자를 대하면서 인생의 공평함을 서서히 알아갔다. 드디어 작가의 장난질이 끝났는지, 원래의 이성적이던 모습으로 돌아온 필립은 조금씩 성숙한 내면을 갖추게 된다. 이윽고 주어진 시련은, 정신적 지주였던 시인 크론쇼의 죽음이었다. 간경화로 사망한 시인의 죽음은, 의사인 자신의 무력함과 위대하다던 생명의 덧없음을 실감케 했다. 사랑에 배반당했을 때와는 다른 종류의 좌절과 절망이 삶의 목적을 무로 돌려놓았다. 성경에도 이 같은 기록이 있다.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으니라(마 6:29).』 정녕 인생의 허무를 설명하기에 이만한 것도 없다는 생각이다.


과연 필립이 추구하는 이상적인 세계란 없다고 봐야 할까. 어떻게 살아본들 맥없이 굴러가는 쳇바퀴나 마찬가지일까. 그러다 어느 기자와의 대화로 평생 질문에 조금씩 접근하자 흥분하기 시작한 닥터 필립. 그 기자는 제 외모부터 집안 사정까지 딱 봐도 하자가 많았는데, 열등감은커녕 발랄하고 긍정적인 데다 조건과 환경 탓을 일절 하지 않아 필립의 호기심을 샀더랬다. 특히 처자식을 교회에 보내면서 정작 본인은 무신론자라는 말에, 자신이 얼마나 뻣뻣하고 폐쇄적인 사람인지를 깨닫는다. 철저한 질서의 세계에서 자라난 탓에 모 아니면 도라는 이분법적 사고방식을 고집했고, 거기에 부합하지 않으면 이해가 불가하여 무의미한 대상으로 치부했던 것이다. 하여 결함 따위는 무시하고 자신의 쾌감과 만족에만 집중하는 그 기자의 열린 사고가 일종의 힌트가 된 셈이다. 작품을 통틀어서 이 구간이 가장 중요하다고 느꼈다. 종교라는 꽉 막힌 질서의 세계를 탈출하여 자유로운 예술의 세계로 갔더니 오히려 혼돈을 마주하지 않았던가. 그래서 필립은 이 혼돈이 뼛속 깊이 박힌 신앙 때문이라 여겼고 그것을 떼어내는 게 정답이라고 믿었었다. 그러나 기자의 사고를 통해 꼭 분리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유연하게 살아갈 수 있음을 어렴풋이 알게 된다. 이것을 정신분석학에서는 인간 사회가 종교를 분리하여 사는 것이 불가하다고 얘기한다. ‘절대성‘은 오직 신에게만 있는 속성이므로, 그 밖에 불완전한 혼돈 속에서 어떤 불변의 진리를 찾는다는 게 불가하기 때문이다. 이점을 이해한다면 존재와 세상의 부조화를 그럭저럭 이겨낼 수가 있을 것이다.


필립은 길거리에서 발견한 애인을 기어이 찾아가 아는 체를 하고서 집으로 데려온다. 나는 진심으로 저자의 멱살을 잡아뜯고 싶어졌다. 이것은 주인공의 성장을 위한 게 아니라 소재 고갈로 인한 재탕처럼만 느껴졌다. 이제 그녀를 봐도 심장이 뛰지 않는다 말하지만, 또 지난날의 자신이 어리석었다 시인하지만, 대체 어떤 의무로 그녀와 아이를 챙겨주려는 건지 내 머리로는 영 납득이 안된다. 애인은 구직할 생각도 없었고, 툭하면 필립의 재산을 낭비해댔다. 사실 이렇게 될 줄 몰랐다 할 필립도 아니었으나 꼭 애인 앞에 서면 어딘가 낙천적인 성미가 튀어나와서 문제였다. 오직 기도로써 불구가 고쳐질 거라던 옛 자신의 순진함을 비웃더니, 지금도 그 하찮은 순진함에 고생하고 있지 않나. 그래도 본투비 똥멍청이는 아니었는지, 애인의 같잖은 플러팅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었고, 열뻗친 그녀가 수치와 모욕을 퍼붓는데도 웃어넘길 만큼 성숙해진 주인공. 그의 성장은 실패한 연애의 학습 덕분이 아니라 온갖 환자를 상대하며 터득한 눈썰미와 인간 심리와 이타심에 있었다. 그러니까 요지경 세상을 이해하는 길은 개개인의 특별함보다도 전 인류의 보편성을 파악하는 데에 있지 않았을까. 부자도 현자도 알파메일도, 불구로 태어나 고통받는 필립 그 자신과 다를 바 없다는 말이다. 이러한 인정이 실존의 이분법적 모순을 해결하고 삶에 의미를 부여하며 자연과의 균형을 회복하는 유일한 방법임을 알기까지, 인간은 얼마나 깨어지고 부서져야만 했는가.


드디어, 드디어 애인이 떠나갔다. 집안을 왈칵 뒤집어놓은 덕에 하숙집을 옮겨야 했지만 어쨌거나 필립은 여러 의미로 해방되었다. 자 이제 좀 풀리려나 했더니, 아 그놈의 주식 때문에 파산 직전까지 가고야 말았다. 여기서 또 한 번 필립의 순진무구함을 야단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일전의 경험들로 경각심을 얻기는커녕 뭐든 계획대로 되리라는 그 확신은 대체 어디서 나오는 거지? 생판 남남인 애인과 아이에게 재산을 갖다 바치는 이유는 또 뭐지? 예술이나 성공 같은 이상주의를 경멸한다면서, 그렇다고 막 현실주의자도 아닌 필립의 방관자식 태도는 어쩐지 불행을 긁어모으는 소악마에 가까웠다. 결국 의사 조수도 관두고 쫄쫄 굶어가며 일거리를 찾아다니는 필립은 자신의 길을 반대한 큰아버지에게 대들던 것과, 친구들 앞에서 박식함을 자랑하곤 했던 게 떠올라 비참해서 죽을 맛이었다. 이처럼 본인은 아니라는데, 꼭 잘되면 내 탓 안되면 남 탓을 하는 콧대 높은 인간들이 있다. 그래서 작가는 이 오만한 줄 모르는 청년을 가차 없이 굴리는 것인가 싶더랬다.


어느 상회의 판매 직원이 된 그는 간신히 의식주를 해결하지만, 스스로가 싸구려 상품이 된 것만 같아서 또 죽을 맛이다. 돈도 없거니와 제 모습이 창피해서 모든 인맥을 끊어버렸고, 날마다 상대하는 고객들과 숨 막히는 기숙사 생활로 인간 혐오증에 걸릴 지경이다. 환자들을 대할 때의 이타심은 다 어디 가고 이 같은 증오의 감정만이 남았는가. 이 기나긴 여정 끝에 도달한 해답은 곧 인생의 무의미함이었다. 그렇게 믿고 나니 차라리 가슴이 뛸 정도였다. 이어서 큰아버지가 죽고 유산을 물려받아 다시 의학생으로 복귀한 필립은, 애정과 인류애가 다분했던 예전과는 달리 좀 더 초연한 태도로 환자들과 마주하게 된다. 앞전에 실직과 가난을 겪어본 터라 환자들의 기분을 헤아리는 일에도 그만이었다. 특히 죽음에 관해서 더 그러했다. 시인도 죽고, 절친도 죽고, 애인의 아이도 죽고, 큰아버지도 죽었다. 친애하는 이들의 죽음은, 인생의 무의미를 쫓아 청춘을 탕진했었던 자신을 반성하게 해주었다. 역시 거울 치료와 충격요법이 최고라니깐.


그래도 작가가 양심에 찔렸던지 해피엔딩으로 잘 마무리해 주었다. 기왕 괴롭히기로 한 거, 끝까지 고통의 굴레였어도 나쁘지 않았겠다만. 어찌어찌해서 필립은 증오와 공허의 비극을 극복해낸다. 필립처럼 영혼의 갈증에 시달려본 사람이라면 방황이 끝나는 지점이 어딘지를 알고 있을 것이다. 아직 모른다면 알게 될 때가 분명히 올 것이다. 신앙의 족쇄, 가난한 집안, 신체적 결함, 사랑의 배반 등 여러 가지로 필립과 닮아있는 나님은 더더욱 그의 감정 선과 심리적 상태변화에 공감되었고, 움켜쥘수록 달아나는 행복의 모순과 법칙도 충분히 이해되었다. 작품 해설에 따르면, 인간 존재의 불가지성이 서머싯 몸의 전 작품을 관통하는 인간성의 비밀이라고 했다. 하여 의미를 지닌 인생은 없으며 단지 각자가 의미를 부여하기 나름이라고 생각한다. 달리 말하자면, 무의미한 인생에도 나름의 작품성을 가질 수 있다는 얘기다.


역시 벽돌책이라 그런지 서평마저도 딥다 길어진다. 진짜 역대급인듯 한데 도저히 짧게 쓸만한 작품이 아니어서 말이죠. 어차피 읽는 사람도 없는데 괜한 걱정이로군. 수고한 나 자신에게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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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5-02-06 12:43   좋아요 0 | URL
서머싯 몸의 광팬으로서 제가 엄청 좋아하는 소설입니다.
미술에 재능이 있나 알아보고 실패를 맛보며 자기 길을 찾아가는 이야기도 흥미롭고,
삼각관계에 빠져 쓴 맛을 보는 부분도 흥미로웠어요. 무엇보다 좋았던 것은 다음과 같은 사색적인 글입니다.
“사상 자체는 실상 그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그에게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는 사상을 마치 경매장에 나온 도자기들처럼 다루었다. 손에 들고 형태와 빛깔을 즐기면서 마음속으로 값을 매겼다. 그런 다음 다시 상자 속에 넣어두고는 더 이상 생각하지 않았다.”- <인간의 굴레에서 2>, 25쪽. - 제 서재의 페이퍼에서 복사해 왔어요. 저는 민음사의 두 권짜리로 읽었어용.

물감 2025-02-06 15:33   좋아요 1 | URL
저자의 다른 작품들과 성격이 달라서 좀 이질적이었어요. 읽는 내내 어찌나 <데이비드 코퍼필드> 같았던지요. 그보다는 매운 맛이라서 좋았습니다만.

인용하신 문구처럼, 주인공 필립이 세상에서 으뜸이라 하는 것들을 제 식대로 타파해가는 게 신선하더라고요. 저는 평에 적은 것처럼, ˝인간이란 그 시대 나름으로만 믿을 수밖에 없는가˝라는 사색이 참 와닿았습니다. 누구나 자신의 생각이 맞다고만 생각하니까요~~

저는 민음사 세계문학은 판형이 좁고 길어서 읽기가 불편하더라고요. 그래서 벽돌책은 동서문화사를 선호합니다요 ㅋ

stella.K 2025-03-07 20:32   좋아요 1 | URL
첫 달락 웃겨요! ㅋㅋㅋ
잘 지내죠? 이 책에 대한 리뷰 물감님이 첨이네요.
저도 함 읽어봐야 할 텐데....ㅠ
아무래도 올해도 전 뒤죽박죽 되는대로 책을 읽을 것 같아요.
저도 이상하게 민음사는 별로 손이 안가요. 그 책이 꼭 민음사에만 있다면
사겠지만 다른 출판사에도 있다면 그걸 살 확률이 높죠.
당선 축하합니다. 축하금도 받으셨겠다 이번 주말은 왠지 기분 좋으시겠어요.
좋은 주말 보내십시오!^^

물감 2025-03-07 23:38   좋아요 1 | URL
전 잘지냅니다 스텔라님 ㅋㅋㅋ오랜만이에요~
저번에 얘기한대로 알라딘에는 글만 올리고, 활동은 네이버 블로그만 하고 있어요. 근황은 블로그에서 확인하십시오 ㅋㅋㅋㅋ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에만 있는 작품들이 꽤나 많은데, 차라리 빌려 읽지, 절대 사지는 않습니다. 일단 디자인부터가 구려요..........
건강하시고 주말 잘 보내세요! 봄바람이 제법 상쾌하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