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전쟁과 주변국의 경제 성장


미국의 개발도상국 동맹국 중 베트남 주변의 타이와 필리핀이 파병에 동참했고, 한국은 동맹국 중 가장 큰 규모의 전투부대를 파병해준 상태였다. 미국의 가장 중요한 동맹국이던 영국이나 프랑스가 파병을 외면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파병 요청을 수용한 이들 아시아 개발도상국의 수출 확대와 군수품 조달 요구를 외면할 수 없었던 것이 존슨 행정부의 사정이었다.

필리핀은 1965년부터 1970년 사이 매년 5퍼센트 넘는 경제 성장률을 기록했고, 타이의 경우 1965년부터 1969년 사이 실질 경제 성장률이 12퍼센트에 달했다. 파병을 하지 않았던 타이완도 1964년부터 1973년 사이 11.1퍼센트의 높은 성장률을 기록했고, 1967년부터 1971년 사이 한국의 성장률은 9.6퍼센트였다. 한국의 경우 1969년부터 부실기업 문제에 부딪혔던 점을 고려한다면, 닉슨 행정부의 긴축 정책이 시작되기 이전인 1967년과 1968년 집중적으로 경제 성장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 <베트남 전쟁>, 박태균 지음 - 밀리의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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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스토우!!

북베트남 폭격을 통해 베트남전쟁 확전을 주장한 사람은 존슨 대통령의 안보담당 고문이었던 월트 로스토Walt Rostow였다. 그는 도약 이론을 통해서 부패하고 전근대적인 정부의 개혁만이 제3세계에서 공산주의로부터 자유세계를 지킬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라고 주장했다.

한국은 그 대표적인 케이스였지만, 로스토가 가장 정성을 쏟았던 베트남에서의 전략은 실패했다. 로스토가 했어야 할 일은 북폭이 아니라 남베트남 정부와 사회를 개혁함으로써 남베트남 사람들의 마음을 돌리는 것이었다. 그의 책 《제안A Proposal》에서 스스로 주장한 것과 같이 미국은 개발도상국에서 개혁을 통해 민심을 돌릴 수 있도록 원조해야 하지만, 불가능할 경우 포기해야 했다. 로스토는 스스로 군사적 개입이 미국의 ‘소프트 파워’를 깎아먹고 있다고 주장했음에도 불구하고, 베트남에서는 스스로의 경고를 망각했다. - <베트남 전쟁>, 박태균 지음 - 밀리의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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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시현상


착시현상이 나타났다. 중국 국민당의 부패로 인해 중국을 포기했던 미국이었지만, 부패와 독재 속에서도 공산주의로부터 한국을 지켜냈던 이승만 정부와 박정희 정부를 보면서 베트남에서도 동일한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했다. 박정희 정부의 변신을 무난하게 이끌었던 새뮤얼 버거 주한 미국대사를 베트남으로 배치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버거 대사는 5·16 쿠데타로부터 민정 이양, 그리고 경제개발 계획의 실행으로 이어졌던 한국의 경험을 베트남에 이식하려고 했다. 물론 부패의 상징이었던 타이완의 장제스 정부의 건재 역시 미국의 오판에 중요한 근거가 됐을 가능성이 있다. - <베트남 전쟁>, 박태균 지음 - 밀리의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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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과 일본은 왜 베트남 전쟁에 개입했나


동남아시아 시장의 축소는 미국에도 중요한 문제였지만, 아시아에서 미국의 가장 믿음직한 파트너였던 일본에게는 더욱 민감한 문제였다.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중국 시장에 접근할 수 없었던 일본에게는 새로운 시장이 필요했고, 동남아시아는 일본 경제의 부흥을 위한 가장 중요한 배후지였다. 일본이 35년간 지배했던 한반도에 대해서는 배상하지 않으면서 5년 남짓 점령했던 동남아시아 지역에 배상금을 준 것은 이러한 정책 때문이었다. - <베트남 전쟁>, 박태균 지음 - 밀리의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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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의 높아진 남북 긴장

1965년과 1966년 한 해 30~40건에 불과했던 비무장지대에서 일어난 남북한 사이의 교전은 1967년에는 400건을 넘어섰고, 1968년에는 500건에 달하도록 급증했다. 거의 전쟁에 가까운 상황이 전개된 것이다. 베트남에서뿐만 아니라 한반도에서도 또 하나의 전선이 형성되고 있었다 - <베트남 전쟁>, 박태균 지음 - 밀리의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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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정부는 1968년 1월 6일 비상치안회의를 제1군 사령부가 있는 원주에서 소집했다. 북한이 어떠한 도발을 할지 모르니 이에 철저히 대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군뿐만 아니라 경찰 관계자들도 참석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주재한 회의였다. 보름이 지난 1968년 1월 21일에는 청와대 습격 사건이 발생했다. 그 이틀 뒤에는 동해에서 미국의 정보함 푸에블로호가 북한에 의해 나포됐다.

사실 이러한 사건들은 모두 예견된 일이었다. 1965년 전투부대 파병을 반대했던 야당은 한국 전투부대의 베트남 파병이 한국의 국제적 고립을 자초할 뿐만 아니라 휴전선에서 한국군의 방위력을 약화시킬 것이라고 경고했다 - <베트남 전쟁>, 박태균 지음 - 밀리의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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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베트남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던 북한은 북베트남과 베트콩을 돕는 방법으로 한반도에서 안보 위기를 일으키는 방안을 선택했다. 한반도의 안보 상황이 불안해진다면 더 많은 한국의 전투부대를 베트남에 보낼 수 없기 때문이었다. 전투 요원의 일부를 북베트남에 보내 직접 돕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었지만, 한반도에 안보 위기를 조성하는 것 역시 측면 지원의 방법이 될 수 있었다. 호찌민과 가까운 관계였던 김일성이 보여줄 수 있는 최대한의 호의였다. - <베트남 전쟁>, 박태균 지음 - 밀리의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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